4. 코카인에서 리도카인까지

실패와 신념이 만든 국소마취제의 역사

by 로리킴

"코카인과 리도카인, 그 사이의 이야기"


우리가 치과에서 맞는 마취 주사나, 오십견(프로즌 숄터) 치료를 위해 통증의학과에서 맞는 주사, 또는 진통 효과가 있는 파스 등에는 공통적으로 리도카인이라는 성분이 들어있습니다. 리도카인은 피부나 신경 부위의 통증을 줄여주는 국소 마취제인데, 그 출발점은 놀랍게도 마약으로 알려진 코카인입니다.


지난번에 아편으로 대표되는 마약성 진통제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니, 오늘은 그 이어지는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려고 합니다.


마약류는 크게 두 가지 성질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촉진제(stimulant), 다른 하나는 억제제(depressant)입니다. 촉진제는 심장 박동, 체온, 호흡 등을 빠르게 만들어 에너지를 북돋우는 역할을 하고, 억제제는 몸의 기능을 느리게 하며 긴장을 풀어주고, 졸림이나 이완감을 유도합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마약성 진통제인 모르핀은 억제제에 속합니다. ‘꿈의 신’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지닌 만큼, 고통을 잠재우고 평온을 선사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촉진제에 속하는 물질들도 있습니다. 마약으로 분류되진 않지만, 우리가 자주 접하는 카페인과 니코틴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졸음을 날리고, 상쾌한 기분을 주는 효과가 있죠. 그런데 이들과는 달리, 마약류로 분류되면서도 촉진 작용을 하는 것이 바로 코카인입니다.


코카인은 모르핀과는 정반대의 작용을 합니다. 이 약물은 남아메리카에서 자생하는 코카라는 나무에서 추출됩니다. 코카나무는 키가 약 2.5미터 정도 되며, 그 잎에는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성분이 함유돼 있습니다. 남미 잉카 제국의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코카잎의 효과를 알고 있었고, 이 잎을 신성하게 여겼습니다. 코카잎을 씹기 전에는 두 손으로 세 장을 잡고, 자연의 신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로 입김을 불어넣는 의식을 치른 뒤에야 입에 넣었습니다. 쌉쌀한 맛이 특징이고, 비타민과 무기질도 다양하게, 풍부하게 들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남미 지역에서는 차 형태로 코카잎을 즐기는 문화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 차는 다양한 성분이 섞여 있어 중독 위험은 거의 없습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코카잎을 씹었을 때 입안이나 목, 혀 등에 마취 효과가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잉카인들은 두통이나 치통을 완화하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코카인의 발견과 활용"


하지만 코카잎 속에 들어 있는 알칼로이드 성분 ‘코카인(cocaine)’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이 성분을 추출해 과량으로 투여하거나 흡입하게 되면, 중독 증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1859년, 독일의 화학자 알버트 니만(Albert Niemann, 1834-1861)은 코카인 성분을 무색의 결정 형태로 분리해 내는 데 성공합니다. 그는 “혀에 발랐을 때 특이한 마비감을 일으킨다”는 기록을 남기며, 코카인의 마취 효과를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언급합니다. 그리고 3년 뒤인 1862년, 그의 동료 로센(Lossen, 1838-1906)이 코카인의 화학구조와 분자식을 규명하게 됩니다.


분리된 코카인이 의학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건 1880년대 이후입니다. 처음엔 국소마취제로 활용되었고, 이후 각성 효과가 알려지면서 다양한 용도로 확장되어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무렵, 코카인을 연구 주제로 삼은 인물이 바로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입니다. 프로이트가 머크(Merck) 제약사의 지원을 받은 연구주제로 코카인이 있었는데, 프로이트는 우울증 치료, 모르핀 중독, 천식 등에 코카인을 제안합니다. 실제로 프로이트는 금연을 위해 스스로 코카인을 사용하기도 했고, 모르핀 중독에 빠진 친구에게 코카인을 권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 모두 결국 억제성, 흥분성 마약성 물질에 중독되는 결과를 피하지 못했죠. 당시에는 이렇게 억제제와 흥분제를 구분하지 않고 병용하는 사례가 흔하게 나타나곤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마리아니(Win Mariani)라는 이름의 와인입니다. 이 와인에는 알코올(억제제)과 함께 코카인(흥분제)이 함께 들어 있어,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여겨졌습니다. 건강 회복과 체력 증진, 활력 보충의 효과가 있다고 알려졌고, 실제로 예술가들, 운동선수들, 심지어 교황 레오 13세까지 이 와인을 추천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유명한 코카인 함유 음료가 있습니다. 바로 코카콜라(Coca-Cola)입니다. 1886년, 미국의 약사 존 펨버턴(John Pemberton, 1831-1888)은 자신의 약국에서 코카잎(코카인 함유)과 콜라 열매(Kola nuts, 카페인 함유)를 혼합한 알코올 농축액에, 탄산수와 시럽을 더해 음료로 만든 것이 코카콜라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기력 회복용 ‘약용 음료’로 여겨졌던 셈이죠.

ㅋ,ㅋ가 연속으로 등장하는 발음이 재밌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코카인, 강장제에서 마취제로"


코카콜라를 만든 존 펨버턴은 이 음료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코카콜라를 “뇌에 좋은 강장제(brain tonic)”라 소개하며, 건강과 기력을 회복시켜 주는 혁신적인 약으로 홍보했습니다. 펨버턴은 자신의 발명품이 전 세계적인 히트작이 될 것이라 예상했지만, 안타깝게도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이후 코카콜라의 사업권을 넘겨받은 또 다른 약사 아사 캔들러(Asa Cabdker, 1851-1929)는 이 음료를 약이 아닌 탄산음료로 재정의하여 대중적인 브랜드로 성장시켰고, 곧 대성공으로 이어지게 되죠. 한편, 시간이 지나며 코카인의 중독성과 남용 문제가 사회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했고, 결국 현재의 코카콜라에서는 코카잎 성분은 제거되고 향만 남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코카인은 종종 ‘크랙(Crack)’이라는 형태로 불법 유통됩니다. 이는 코카인을 끓여 다시 굳혀 만든 형태로, 불에 태워 흡입할 수 있도록 가공된 것입니다. 이때 끓이는 과정에서 ‘크랙’ 하는 소리가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죠. 흡수가 빠르고 강한 작용을 나타내지만, 그만큼 위험성도 큽니다.


하지만 오늘 이야기의 초점은 이렇게 극단적으로 사용된 코카인이 아닌, 그 성분이 처음 ‘국소마취제’로 가능성을 드러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19세기 후반, 오스트리아의 칼 콜러(Karl Koller, 1857-1944)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친구이자, 유대계 안과의사였습니다. 그는 코카인을 마취제로 사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주목한 인물입니다. 반유대주의에 맞서 결투까지 했던 그는 오스트리아를 떠나 네덜란드를 거쳐 미국으로 이민을 갑니다. 콜러는 개구리, 토끼, 쥐 등 동물들의 눈에 코카인을 적용해 실험을 이어갔고, 동공이 확장되며 감각이 무뎌지는 현상을 관찰했습니다. 급기야 그는 자신의 눈에 직접 실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콜러가 과학자로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남긴 글이 남아있는데,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 주머니 속에 있던 코카인이 바로 그토록 찾아 헤매던 국소마취제란 걸 깨달았을 때, 나는 즉시 달려가 기니피그의 눈에 점적했다.”


콜러의 이 발견은 의학사에 큰 획을 그었습니다. 코카인의 가능성은 입증되었고, 그로 인해 코카인을 생산하던 머크(Merck)사는 불과 몇 년 만에 생산량을 10,000배 이상 확대하게 됩니다. (흥미롭게도 머크는 코카인 연구를 위해 프로이트에게 연구비를 지원했지만, 정작 임상적 돌파구는 콜러가 만들어낸 셈이죠.)


프로이트는 그의 친구에게 “코카콜러(Coca-Koller)”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으며, 오늘날 우리는 칼 콜러를 ‘국소마취제의 아버지’로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코카인의 탁월한 마취 효과에도 불구하고, 곧 중독성과 탐닉성이라는 심각한 부작용이 드러나게 되면서, 의학계는 ‘코카인을 대체할 새로운 마취제’를 찾기 위한 여정에 나서게 됩니다.



"코카인에서 진정한 국소마취제로"


그 여정의 결실은 1905년, 독일의 화학자 알프레드 아인혼(Alfred Einhorn, 1856-1917)에 의해 맺어집니다. 그는 코카인의 분자 골격을 유지한 채, 수많은 시도 끝에 중독성이 없는 국소마취제 화합물 ‘프로카인(Procaine)’을 합성해 냅니다.


이 신약은 ‘새로운 코카인’이라는 의미로 ‘노보카인(Novocaine)’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고, 프랑크푸르트의 휘호스트(Frabweke-Hoechst)사를 통해 상용화됩니다. 이 제약회사는 훗날 프랑스의 다국적 기업 사노피(Sanofi)에 인수되어, 지금은 사노피의 자회사로 남아 있습니다.


프로카인(Procaine)은 비록 코카인보다 마취 효과는 약했지만, 중독성과 탐닉성이 거의 없어, 당시로선 안전하고 획기적인 국소마취제였습니다. 유럽 전역은 물론 미국으로도 활발히 수출되었고, 사용이 간편해 많은 의사들에게 각광을 받았죠. 그러나 이 약물도 완벽하지는 않았습니다. 에스테르 구조로 인해 체내에서 쉽게 분해되며, 작용시간이 짧고 알레르기 반응을 유발할 가능성도 있었죠.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새롭게 등장한 약물이 바로, 오늘날 국소마취제의 표준이라 불리는 리도카인(Lidocaine)입니다.


"스웨덴의 보리밭에서 시작된 국소마취제, 리도카인"


리도카인은 1940년대에 개발되었고, 빠르게 프로카인을 대체하게 됩니다. 이 약물은 아마이드(amide) 구조를 가지고 있어 대사 안정성이 높고, 작용 시간도 길며, 알레르기 유발 가능성도 낮은 장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건, 리도카인이 이론적으로 구조를 디자인해서 탄생한 약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시도와 실험 끝에, 우연한 발견과 경험적 개발의 산물로 완성된 약물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이 개발 이야기에는 흥미로운 과학사 한 장면이 숨어 있습니다. 당시 스웨덴에는 한스 폰 오일러 캘핀(Hans von Euler-Chelpin, 1873-1964)이라는 노벨 화학상 수상자이자 생화학 연구의 거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해충을 퇴치할 수 있는 물질을 찾기 위해, 보리에 대한 실험을 진행하던 중 특이한 현상을 발견합니다.

어떤 보리는 해충에 강한 반면, 어떤 보리는 쉽게 피해를 입는다는 것이었죠.


캘핀은 해충에 강한 보리에서 생성되는 '그래민(gramine)'이라는 알칼로이드 성분에 주목합니다. 이것이 해충 방어의 핵심이라 판단한 그는, 그래민을 인공적으로 합성해 농약으로 개발하고자 합니다.

이 임무를 맡게 된 인물이 바로, 젊은 유기화학자이자 캘핀의 포닥(박사 후 연구원), 홀거 에르트만(Holger Erdtman, 1902-1989)이었습니다.



홀거 에르트만은 결국 그래민(gramine)의 합성에 거의 성공하게 됩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한 끗에서 빗나갔습니다. 그가 만든 화합물은 분자식은 동일했지만, 작용기가 서로 다른 탄소에 붙어 있는 ‘아이소그래민(isogramine)’, 즉 위치 이성질체였습니다. 생물학적 활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이 작용기의 차이로 인해, 결과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래민의 합성을 기대했던 한스 폰 오일러 캘핀은 실망했고, 결정적으로 그래민 자체에도 기대했던 살충 효과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아예 프로젝트 전체를 중단해 버립니다.


하지만 에르트만은 달랐습니다.

그는 자식처럼 애정을 쏟아부었던 이 실험 결과를 접을 수 없었습니다. 아이소그래민의 구조를 통해서 국소마취제로의 가능성을 직감합니다. 해충약으로는 실패했지만, 전혀 다른 가능성이 열린 셈이었죠. 이 무렵,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에르트만에게 연구비를 대줄 곳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때 혜성처럼 등장한 회사가 바로 아스트라(ASTRA)입니다. 아스트라는 “국소마취제로 개발해 달라”며 에르트만에게 연구 자금을 제공했고, 에르트만은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연구를 이어가기 위해 학부생이던 닐스 뢰프그렌(Nils Löfgren, 1913-1967)을 동료로 맞이합니다.


그들은 아스트라의 지원을 받아 그래민 유도체 16종을 합성하고 모두 특허 등록까지 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어떤 화합물도 기존의 프로카인을 뛰어넘는 효과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결국 에르트만은 이 실험들을 접고 연구에서 손을 떼게 되고, 아스트라도 그 뒤를 따릅니다.



"실패와 신념으로 태어난 마취제"


이제 남은 것은 막 연구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 뢰프그렌과 16개의 화합물입니다.

뢰프그렌은 낮에는 실험실에서 연구를 하고, 밤에는 강의를 하며 생계를 유지합니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소규모 제약사인 파마시아(Pharmacia)로부터 새로운 연구비를 유치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번엔 뢰프그렌의 제자였던 벵트 룬드비스트(Bengt Lundqvist, 1922-1943)와 함께 팀을 꾸려, 16개의 후보 물질들을 하나하나 다시 검토하며 연구를 이어갔습니다. 이미 캘핀도 떠났고, 에르트만도 포기한 뒤였습니다. 그저 젊은 두 과학자만이 남아, 희망 없이 보이던 실험을 묵묵히 계속한 것이었죠.


그리고 마침내 1942년, 그들의 손끝에서 ‘리도카인(Lidocaine)’이라는 물질이 탄생합니다.

효과는 빠르고, 작용 시간은 길며, 중독성과 탐닉성이 없고, 알레르기 위험도 낮은 — 프로카인과 코카인의 단점을 모두 보완한 국소마취제였던 것이죠.


젊은 두 과학자의 손끝에서 탄생한 국소마취제, 리도카인(Lidocaine)은 처음엔 ‘LL30’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이름 속 ‘LL’은 개발자들의 이름인 뢰프그렌(Löfgren)과 룬드비스트(Lundqvist)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죠.


원래 출시를 담당할 예정이었던 제약사는 파마시아(Pharmacia)였지만, 발 빠른 움직임을 보인 아스트라(ASTRA)가 먼저 ‘자일로카인(Xylocaine)’이라는 이름으로 제품을 출시합니다. 아스트라는 두 개발자에게 판매액의 4%를 제공하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며, 협력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선택은 곧 엄청난 성공으로 이어집니다.


리도카인은 안정적이고 효과가 뛰어난 국소마취제로서, 출시되자마자 세계 의료계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게 되고, 이로 인해 뢰프그렌과 룬드비스트는 일약 부자가 됩니다. 반면, 오일러 캘핀과 에르트만은 이 성공에서 한 발짝도 이익을 얻지 못한 채, 조용히 기억에서 사라지게 되었죠. 하지만 보리에 대한 연구와 에르트만의 집념이 없었다면 리도카인의 여정은 시작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천재 청년의 짧은 여정"


리도카인의 출시년도와 룬드비스트의 나이가 보이시나요? 1948년 룬드비스트는 겨우 20대의 청년이었습니다.

학부생이던 그는 잘생긴 외모에 운동 실력도 뛰어났고, 연구 능력은 물론이거니와 이제는 막대한 재력까지 갖추게 된 인물이었죠. 펜싱 선수로서 스웨덴 팀 챔피언에 여러번 오르기도 했습니다.


다재다능한 이 젊은 과학자에게 성공은 ‘자유’가 아니라 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룬드비스트는 성공 후에도 연구를 놓지 않았고, 1952년 스톡홀름 대학교 화학관에서 계단 사고로 인한 뇌출혈로 이듬해 갑작스럽게 사망합니다.


이 비극적인 결말은 리도카인 개발 이야기의 마지막에 늘 따라붙는 문장이 되었습니다.

“Great process with a tragic ending.”

뢰프그렌은 룬드비스트의 죽음을 크게 슬퍼했고, 긴 시간 동안 우울증에 시달리며 그를 그리워했다고 전해집니다.


"신념을 믿는 사람들"


돌이켜보면, 이 두 사람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권위 있는 과학자들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신념과 연구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약물의 개발 역사는 결국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몇몇의 성공담이 아니라, 이름 없이 쌓인 수많은 시도와 실패가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그 속에 담긴 사람들의 사람들의 선택과 태도가 얼마나 멋진지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내가 믿는 무언가가 있다면, 누가 뭐라 해도 한 번쯤은 끝까지 나를 믿어보는 것. 그 여정의 끝이 반드시 대단한 성공이 아니더라도, 자신을 배신하지 않았다는 기억만큼은 결국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줄 겁니다.


keyword
이전 03화3. 양귀비, 아편, 모르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