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실산에서 시작된 드라마: 아스피린의 진짜 이야기
'아스피린'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오랜 세월 동안 우리 곁에 있었고, 또 여러 이미지로 다가오는 약, 아스피린만큼 다양한 상징성을 지닌 약도 드물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바이엘 크로스'나 '버드나무', 혹은 '나치 독일' 같은 역사적 단면이 떠오를지도 모르고, 손흥민 선수가 몸담았던 '레버쿠젠'이 스쳐가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레버쿠젠은 독일의 제약회사 바이엘(Bayer)의 본사와 주요 생산시설이 위치한 도시로, 말 그대로 '바이엘의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63년 설립된 이후, 바이엘은 도시의 정체성과 함께 성장해 왔으며, 1904년에는 바이엘 직원들이 직접 축구팀을 창단해 지금의 레버쿠젠 FC가 탄생하기도 했죠.
아스피린이라는 약을 통해, 우리는 하나의 약이 어떻게 과학과 산업, 역사와 스포츠를 아우르는 문화적 상징이 되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바이엘의 시작은 19세기였지만, 아스피린의 기원은 훨씬 더 오래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스피린의 주요 성분인 살리실산(salicylic acid), 그 시작은 고대 이집트입니다.
기원전 16세기경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고대 이집트의 의학문서, '에베르스 파피루스(Ebers papyrus)에는 이미 아스피린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버드나무껍질(salix)의 사용 기록이 등장합니다. 이 파피루스는 게오르그 에베르스(Georg Ebers)라는 독일 출신의 이집트학자가 1870년경, 한 이집트 골동품 상인에게서 입수한 110쪽 분량의 문서로, 수백 가지 질병과 그에 대한 치료법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는 고대 의학서입니다. 처음 발견 당시에는 해독이 어려웠지만, 20세기 초에 이르러 전면 번역이 이루어지면서 그 실체가 드러납니다. 내과학, 약리학, 약초학, 외과적 처지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고대 이집트인의 의학적 지식이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통증과 염증을 완화하기 위해 버드나무껍질에서 추출한 연고(tjeret, 티예레트)를 사용한 사례가 주목받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아스피린의 ‘조상’ 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통제로 널리 사용되던 버드나무(혹은 조팝나무) 추출물은 중세로 넘어오면서 오히려 그 본래의 의학적 가치가 흐려집니다. 지혈, 소화 촉진, 시력 강화, 비듬 치료, 성욕 억제 등 온갖 용도로 쓰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사실상 대부분은 과장된 민간요법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믿을 만한 정보는 거의 없는 셈이죠. 이처럼 어둠이 드리운 중세를 지나, 18세기에 접어들며 버드나무와 조팝나무는 다시 근대 의학의 빛을 받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는 약리학과 생리학이 발전하고, 약물 중심의 치료법으로 전환되는 중요한 전환점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주목받는 인물이 있습니다. 영국 옥스퍼드셔의 작은 마을 치핑노턴(Chipping Norton)이라는, 버드나무와 조팝나무가 흔했던 이 지역에 부임한 에드워드 스톤(Edward Stone) 목사입니다. 그는 장터에서 ‘기적의 약’으로 팔리던 버드나무껍질에 주목하게 됩니다. 단순한 민속지식이 아닌, 과학적 검증의 필요성을 느낀 스톤 목사는 껍질을 말리고 가루를 내어 직접 약으로 만들어보기로 결심합니다. 약 5년에 걸쳐 약 50명을 대상으로 투여 실험을 진행하며, 그는 제조 방법과 투여량, 그리고 열을 낮추고 통증을 완화하는 효과에 대해 꼼꼼히 기록합니다. 1763년, 이 연구 결과는 영국 왕립학회(Royal Society)에 보고되었고, 버드나무껍질의 진통 및 해열 효과가 처음으로 과학적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하지만 문제도 있었습니다. 자연 상태의 버드나무나 조팝나무는 각 개체마다 살리실산 함량이 다르기 때문에, 약효가 일정하지 않고 안정성도 확보되기 어려웠습니다. 진정한 약물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유효 성분을 분리하고 정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죠.
이러한 시도가 시작된 것은 19세기 초반입니다.
1828년, 뮌헨 대학교의 요제프 부흐너(Joseph Buchner)는 최초로 버드나무에서 노란색 결정 형태의 물질을 순수하게 추출해 내는 데 성공합니다. 그는 이 성분에 ‘살리신(salicin)’이라는 이름을 붙였죠. 1년 뒤에는 무려 1kg의 버드나무껍질 또는 조팝나무껍질에서 약 25g의 살리실산 결정을 추출해 내는 데 성공합니다.
이 성과는 이후 아스피린 개발로 이어지는 중요한 첫걸음이었습니다.
1853년, 프랑스의 과학자 샤를 게르하르트(Charles Gerhardt)는 살리실산의 화학 구조를 분석합니다. 이 분석을 통해 그는 중요한 가설을 내놓습니다. 살리실산은 강한 산성 물질이며, 이 성질이 위벽을 자극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살리실산이 위 속으로 들어가면, 산성 성분이 위벽을 긁어내듯 자극하여 속 쓰림과 소화불량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었죠. 이는 단순히 민간요법에서 벗어나, 약리 작용의 부작용까지 구조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이었습니다.
게르하르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위장에 덜 해로운 형태로 살리실산을 개조할 수 없을까 고민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살리실산에 아세틸 기를 붙이는 실험, 즉 아세틸화를 시도하게 됩니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아세틸살리실산(acetylsalicylic acid), 즉 아스피린의 핵심 구조가 처음으로 실험실 안에서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 물질이 상업적 가치가 있는지도, 실제로 위장 자극을 줄여주는지도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게르하르트의 연구는 잠시 묻히고 맙니다.
게르하르트가 아세틸살리실산을 실험실에서 처음 합성한 이후, 이 물질은 한동안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의약적 효능도 확실치 않았고, 무엇보다도 여전히 살리실산 자체를 얻는 데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죠. 여전히 1kg의 버드나무나 조팝나무에서 겨우 수십 g을 추출해야 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런 상황을 바꾼 것이 바로 1860년, 독일 화학자 헤르만 콜베(Hermann Kolbe)와 루돌프 슈미트(Rudolf Schmitt)의 연구였습니다. 그들은 페놀(phenol)에서 출발해 나트륨페놀레이트 → 이산화탄소 반응 → 살리실산으로 이어지는 값싸고 효율적인 화학 합성법을 개발합니다. 이로써 살리실산은 자연에서 추출할 필요 없이, 공장에서 대량 생산할 수 있는 물질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 유럽은 산업혁명의 정점에 있었습니다. 특히 석탄을 연료로 쓰는 화학 공업이 급속히 발전하며, 페놀 같은 물질은 석탄 부산물인 콜타르(coal tar)에서 손쉽게 얻을 수 있었죠. 콜타르는 당시 가장 ‘핫한’ 산업 자원이었습니다. 특히 화학자들은 콜타르에서 염료를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그중 퍼킨의 보라색(mauveine) 염료는 빅토리아 여왕이 드레스로 입으면서 폭발적인 유행을 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살리실산도 석탄화학의 부산물로 쉽게 생산될 수 있었고, 약으로서의 상용화를 위한 준비가 본격적으로 갖추어졌습니다.
그리고 아스피린의 진짜 이야기는, 게르하르트의 실험으로부터 약 40여 년이 흐른 1890년대 후반, 독일의 바이엘 연구소에서 다시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이 시기, 염료 산업의 중심에 있던 기업이 바로 바이엘이었습니다. 바이엘은 1863년, 쾰른 인근의 비단직공 출신 프리드리히 바이엘(Friedrich Bayer, 1825-1880)과 표백공장에서 일하던 프리드리히 웨스코트(Friedrich Weskott, 1821-1881)가 공동 설립한 염료 회사였습니다. 지금도 바이엘의 공식 홈페이지에는 보라색(모브색) 염료를 온몸에 묻힌 어린아이의 사진이 걸려 있는데, 이는 바이엘의 시작이 화학과 색채, 실험에서 비롯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물론 오늘날의 바이엘은 이윤을 남기는 제약회사이지만, 제약회사의 본질은 단순히 ‘약을 파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연구와 개발(R&D), 그리고 과학적 탐구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가야말로 제약회사를 일반 상업 기업과 구분 짓는 가장 큰 차별점일 것입니다.
바이엘은 바로 이 ‘과학 기반의 기업 경영’ 개념을 제약 산업에 처음 도입한 회사 중 하나였습니다. 프리드리히 바이엘이 세상을 떠난 후, 회사 경영은 바이엘의 사위인 칼 룸프(Carl Rumpff, 1839-1889)에게 맡겨집니다. 룸프는 과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여러 젊은 연구자들을 후원하며 회사 내로 적극 영입합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인물이 바로 칼 뒤스베르크(Carl Duisberg, 1861-1935)입니다. 뒤스베르크는 원래 리본공장을 운영하던 집안의 아들이었지만, 과학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고 20세에 박사 학위를 딴 천재 화학자였습니다. 박사 학위를 받고도 마땅한 직장을 구하지 못해 가업인 리본공장으로 돌아가야 할 위기에 처해 있던 그에게 손을 내민 회사가 바로 바이엘이었습니다. 바이엘에 입사한 뒤스베르크는 염료 개발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단숨에 공장 운영과 기술 개발을 총괄하는 자리까지 올라섭니다.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한 룸프는 뒤스베르크에게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과학자 팀을 꾸려줍니다. 이 팀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진통해열제 ‘페나세틴(Phenacetin)’이었고, 이는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두며 바이엘을 단순한 염료 회사에서 본격적인 제약회사로 도약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뒤스베르크의 연구팀 중 하나는 이후 제약사 바이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을 하게 됩니다. 이 팀은 두 명의 팀장, 아서 아이헨그린(Arthur Eichengrün, 1867–1949)과 하인리히 드레서(Heinrich Dreser, 1860–1924), 그리고 젊은 화학자 펠릭스 호프만(Felix Hoffmann, 1867–1946)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이 팀에서 ‘아스피린’이 탄생합니다.
아스피린의 탄생 배경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합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호프만의 아버지가 관절염으로 고생하며 살리실산을 복용했는데, 심한 위장 장애를 겪는 것을 보고, 호프만이 보다 부작용이 적은 형태를 고민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산성 성분을 중화하기 위해 살리실산에 아세틸기를 결합하자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실험에 착수했다는 설입니다. 하지만 이 아이디어의 진짜 출처가 누구였는지는 지금도 분명치 않습니다. 아이디어는 아이헨그린의 지시였는지, 아니면 호프만의 자발적인 제안이었는지, 혹은 팀 전체의 논의에서 나온 것인지 명확한 기록이 없습니다. 다만, 1897년 8월, 호프만은 자신의 실험 노트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살리실산에 아세틸 그룹을 붙였더니, 속 쓰림이 줄어들고, 쓴맛이 아닌 신맛이 느껴진다."
이는 아세틸살리실산의 재합성을 의미하는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단계인 임상 실험은 쉽게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바이엘이 훨씬 더 주력하고 있던 물질은 '헤로인’(diacetylmorphine)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역시 모르핀에 아세틸기를 붙인 유사한 방식으로 개발된 것으로, 드레서는 아스피린보다 헤로인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답답함을 느낀 아이헨그린은 홀로 임상 실험을 감행합니다. 약 20명의 환자에게 투여한 결과는 성공적이었지만, 이 과정에서 아이헨그린은 회사 내 공식적인 지원 없이 비공식적으로 진행해야 했습니다. 성공한 실험에 팀장인 본인이 제외되었다고 생각한 드레서는 이후 자신의 이름으로 더 체계화된 공식 임상 실험을 실시하며, 아스피린의 상용화를 주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1899년, 아스피린은 바이엘의 이름으로 정식 출시됩니다.
바이엘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전통 중 하나로, 사내 투표를 통해 약물 이름을 정하는데, 원료 식물인 조팝나무(Spiraea)의 어원을 유지한 ‘spir’, 아세틸(acetyl)의 ‘a’, 그리고 약제 명명에서 자주 쓰이는 어미 ‘-in’을 조합해 aspirin(아스피린)이라는 이름이 탄생하게 됩니다. 하지만 출시 당시의 공식 기록에서, 아이헨그린의 이름은 철저히 배제됩니다. 제품 발표, 임상검증, 마케팅 전략의 수립 책임자는 드레서, 합성 화학자는 호프만으로 명기되었고, 아이헨그린은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유대인이었던 아이헨그린은 1943년 나치 치하에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1945년 해방 후 풀려났고, 1949년에 회고록을 발표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립니다. 그는 이 회고에서 “자신의 기여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의도적으로 지워졌으며, 당시 독일 기업에서 유대인으로 일한다는 것이 어떤 어려움을 동반했는지”를 고백하고 이 회고록을 발표한 지 2주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최근에 와서야 아스피린의 발견은 단 한 사람의 천재적 발명이라기보다는, 팀 전체의 축적된 노력이 만들어낸 결과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까지도, 바이엘은 여전히 아이헨그린의 기여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수많은 인물과 사건을 거쳐 1899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아스피린은 등장과 동시에 폭발적인 반응을 얻습니다. 출시 후 불과 3년 만에 관련 논문이 160편 이상 발표되며, 아스피린은 의학계의 슈퍼스타가 됩니다.
이러한 성공을 어느 정도 예견했던 바이엘은 약물의 출시도 전에, 1898년 미국과 영국에서 특허를 등록합니다. 하지만 정작 자국인 독일에서는 ‘새로운 제조법’에만 특허가 허용되어, 약 자체의 특허는 획득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후 영국에서도 1905년, “기존 살리실산의 개량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특허가 취소됩니다. 미국 역시 특허가 흔들리는 위기에 놓였지만, 바이엘은 법적 판결을 계속 미루며 가장 큰 시장에서 가까스로 판매권을 유지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1914)하며 판세는 크게 바뀌게 됩니다.
아스피린의 주원료인 페놀(phenol)은 TNT 폭약의 주요 원료이기도 합니다. 전쟁이 시작되자, 독일은 페놀을 더 이상 미국에서 수입할 수 없게 되었고, 아스피린 생산이 중단될 위기에 놓입니다. 바로 이때, 미국의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이 자신의 측음기 개발을 위해 직접 페놀을 생산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잉여 페놀이 발생합니다. 그 여분의 페놀이 하인리히 앨버트(Heinrich Albert)라는 독일 외교관 겸 기업가를 통해 바이엘 미국 지사로 흘러들어 갑니다 (Great Phenol Plot). 결과적으로 미국인들은 자국의 군수 원료가 몰래 독일로 유입되었다는 사실에 격분하고, 독일에 대한 미국 내 여론이 악화되고, 바이엘의 평판은 추락하게 됩니다.
그리고 1917년,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미국 내 바이엘의 모든 자산은 압류됩니다. 그중에는 ‘아스피린’ 상표권도 포함되어 있었고, 이후 아스피린이라는 이름은 누구나 쓸 수 있는 ‘일반명’(generic name)이 되어 버립니다.
이처럼 세계대전으로 인해 바이엘이 흔들리던 틈을 타, 호주에서는 새로운 돌파구가 열립니다. 과학자 해리 스미스(Harry Shmith)와 조지 니콜라(George Nicholas)는 자체적으로 페놀을 생산하고, 살리실산에서 출발해 고순도의 아세틸살리실산을 합성하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합니다. 이는 ‘아스프로(Aspro)’라는 이름의 진통제로 출시되는데, 이 제품은 영국약전(British Pharmacopoeia)이 요구하는 순도를 초과하는 높은 품질을 자랑했습니다. 아스프로는 호주 제약 산업의 토대를 세운 제품으로 평가받으며, 단순히 약을 넘어서, 국가적 산업 기반 형성에도 기여하게 됩니다.
한편, 아스프로가 제약계에 기여한 또 다른 중요한 공로도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 말기인 1917년, 아스프로(Aspro)는 호주에서 출시됩니다. 이 시기는 곧 1918년 스페인 독감(Spanish flu)이 세계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합니다. 스페인 독감은 1차 세계대전의 종전 축하 현장조차 마스크를 쓴 채 진행될 만큼 전 세계적인 공포였고, 아스프로는 진통과 해열이라는 효능 덕분에 폭발적인 수요 증가를 경험하게 됩니다.
아스프로의 광고와 마케팅 부문을 책임졌던 헤르만 조지 탱커슬리 데이비스(Herman George Tankersley Davies)는 제품을 개발한 스미스와 니콜라에 대해 “금광 위에 앉아 있는 마케팅 문외한”이라며 공격적 홍보를 시작합니다. 영국계 광고인이었던 그는 아스프로를 유럽으로 수출하고, 영국 시장에 안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데이비스는 신문 광고를 통해 허구의 간호사, 형사, 유명인들을 등장시키며, “아스프로 하나면 스트레스도 사라진다”는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주입했습니다. 오늘날 기준이라면 문제의 소지가 다분한 방식이었지만, 그 시대 소비자의 감정에는 정확히 호소한 전략이었습니다.
반면, 독일은 전후 혼란 속에서 자국 기술력을 총집결합니다. 1925년, 바이엘은 다른 대형 화학 기업들과 함께 ‘IG 파르벤(IG Farben)’이라는 거대 화학연합체로 통합됩니다. 바이엘은 IG파르벤 내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기업으로, ‘아스피린’이라는 세계적 브랜드를 통해 독일 기술의 우수성을 대외적으로 과시합니다. 1930년대, 아스피린은 단순한 의약품을 넘어서, “과학이 만든 진통제”, “세계 최초의 블록버스터 약물”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치 독일의 전략적 수출 상품이 됩니다. 그러나 이 역시 제2차 세계대전의 패망과 함께 무너집니다. 전후, IG 파르벤은 전범 연루와 나치 협력 기업으로 해체되고, 바이엘은 상표권을 몰수당한 채 아스피린에 대한 법적 소유권도 상실합니다. 이미 여러 국가에서 ‘아스피린’은 제네릭 약물로 자유롭게 제조·판매되고 있었기에, 브랜드의 독점력도, 명성도 잃게 됩니다.
1951년, 바이엘은 독일 본사를 중심으로 재출범합니다. 그리고 1970년대부터, 세계 제약 시장에서 'Bayer’라는 이름을 회복하기 위한 글로벌 브랜드 복원 전략에 착수합니다. 1994년, 미국 내 ‘Bayer’ 상표권을 되찾고, 다시 세계적인 제약사로 부활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바로 아스피린의 ‘작용 기전’에 대한 과학적 발견이었습니다.
해리 콜리어(Harry Collier, 1910–1993)는 영국 캠브리지 근교에서 아스피린의 항염증 및 진통 작용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연구하던 과학자였습니다. 맨체스터 대학 교수직을 제안받을 정도의 인재였지만, 직접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제약회사로 진로를 바꿉니다. 콜리어는 실험쥐를 이용해, 염증 유발 물질인 브라디키닌(bradykinin)의 존재를 확인하고 아스피린이 그 작용을 억제한다는 사실을 밝혀냅니다. 그러나 회사는 “돈이 되지 않는 연구”라며 이를 중단시키고, 콜리어는 자신의 제자를 친구였던 존 베인(John Vane)의 실험실로 보냅니다. 이후 베인은 아스피린이 ‘사이클로옥시게나이즈(COX)’ 효소를 억제하여, 염증·통증의 주요 매개체인 ‘프로스타글란딘(prostaglandin)’의 생성을 막는다는 작용기전을 밝혀냅니다. 콜리어가 그 연결고리를 발견하고, 베인이 그 매개체의 정체를 밝힌 셈입니다. 이 발견은 1971년 논문으로 발표되었고, 1982년 존 베인은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합니다. 이 과정에서 아스피린은 단순한 진통제가 아닌, 기전을 명확히 이해된 최초의 비스테로이드성 항염증제(NSAID)로서, 제약사 바이엘의 과학적 신뢰도 회복에도 큰 기여를 하게 됩니다.
아스피린의 작용기전이 규명되면서, 1980년대에는 전혀 새로운 적응증이 연구되기 시작합니다. COX 효소 억제를 통해 혈소판의 응집을 막을 수 있고, 이는 곧 심혈관 질환의 예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론이었습니다. 특히 저용량의 아스피린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1990년대 초부터는 대규모 임상시험들이 잇달아 진행됩니다. 그 결과, 오늘날 ‘베이비 아스피린’으로 불리는 저용량 아스피린은 심혈관 질환 예방을 위한 표준 처방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기전의 이해를 통해 다시 태어난 아스피린은, ‘진통제’에서 ‘심장 보호제’로의 화려한 변신을 이루며 재도약에 성공합니다.
1999년, 바이엘은 레버쿠젠에서 아스피린의 100주년 생일을 기념하는 행사를 개최합니다.
행사 장소는 칼 뒤스베르크의 집 근처였습니다.
그가 오늘날의 바이엘과 아스피린을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요?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왜 버드나무와 조팝나무는 살리실산을 만들어낼까요? 이 나무들은 잎과 꽃이 풍성하게 달리는 종이라, 스스로 낙엽과 꽃을 떨구고 그 자리에서 새로운 생장을 준비하기 위한 '방어물질'로서 살리실산을 가진다는 해석이 많습니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전쟁과 정치, 과학과 마케팅의 파고를 견뎌낸 아스피린 역시 끊임없이 스스로를 갱신하며 생존해 왔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낙엽을 떨구고 다시 싹을 틔우는 버드나무와 조팝나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본질은 지키고, 변화를 멈추지 않는 생명력이야 말로 아스피린이 우리 곁에 세기를 넘어 남아있을 수 있던 이유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