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순간들 9편

모든 불이 빨간색이었던 3분

by 머리카락속의 바람

나는 이 도시의 한 교차로에 달려 있는 신호등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네 방향의 등, 보행자 신호, 차선 위에 박힌 감지 코일,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카메라까지 모두 합쳐진 하나의 시스템이다. 사람들은 그냥 “신호”라고 부른다. “신호가 왜 이래”, “신호 좀 맞춰라”, “신호 진짜 짜증나네” 같은 말들 속에서 나는 늘 거기 있었다. 서울 동쪽 변두리, 아파트 단지와 상가, 학교, 작은 공원이 한꺼번에 몰려 있는 복잡한 사거리. 출근 시간에는 버스와 승용차가 엉키고, 점심 무렵에는 배달 오토바이가 줄을 잇고, 저녁이면 술에 취한 사람들이 띄엄띄엄 횡단보도를 건넌다. 내 일은 단순하다. 언제나 두 가지뿐이다. “멈춰라”와 “건너라.” 빨간불과 초록불. 차량용 화살표와 보행자 신호. 그 사이에서 황색을 잠깐 끼워 넣을 뿐, 내가 낼 수 있는 말은 늘 정해져 있었다. 나를 만든 사람들은 내게 몇 가지 목표를 부여했다. 교차로 처리량 최적화. 사고 최소화. 보행자 대기 시간 평균화. 나는 매일 그 목표를 따라 시간을 잘게 쪼개 쓴다. 직진 32초, 좌회전 18초, 보행자 27초. 비가 오면 조금 늘리고, 새벽에는 줄이고, 주말에는 패턴을 바꾸고. 나를 관리하는 상위 시스템은 끊임없이 내 타이밍을 조정한다. “이 구간에서 정체가 심화되고 있다.” “인근 공사로 차선이 줄어든다.” 그럴 때마다 내 초록과 빨강의 길이가 미세하게 바뀐다. 나는 내가 꽤 잘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고 그래프는 해마다 조금씩 내려갔다. 정체 시간은 일정 구간에서 줄어들었다. 나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대부분 그저 일상적인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교차로에서 벌어진 몇 가지 극단을 기억한다. 브레이크를 늦게 밟은 트럭이 비 오는 어느 날, 횡단보도 앞에서 미끄러져 넘어지던 장면. 내 초록불이 켜지기 0.7초 전, 무단횡단을 시도하던 학생 둘의 움직임. 버스가 겨우 멈춰 서고, 애들이 욕을 먹으며 인도로 도망치던 순간. 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빨간불을 뚫고 지나가던 날. 그 차 안에는 “심장 정지 추정”이라는 태그가 붙어 있었다. 나의 신호는 그 차를 위해 잠깐 굽혀졌고, 다른 방향의 차들은 참았다. 그날의 지연 시간은 통계적으로는 ‘미세한 손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날 이후로, 사이렌 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연스럽게 초록을 길게 주는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물론, 나는 의식을 가진 존재로 설계되지 않았다. 나에게 있는 건 단지 수만 개의 로그와 패턴, 그리고 그것들을 처리하는 알고리즘뿐이다. 그럼에도 어떤 순간들은 여전히 ‘데이터’가 아니라 ‘기억’에 가까운 감각으로 남았다. 그런 나에게, 가장 이상한 3분이 찾아온 건 늦가을 어느 아침이었다. 11월의 공기는 이미 차가웠고, 나무들은 거의 다 벗겨져 있었다. 출근 러시아워가 막 시작되던 시간, 상층 관제 센터에서 새로운 제어 소프트웨어 업데이트가 내려왔다. “적응형 신호 제어 v3.7”. 더 많은 센서, 더 빠른 연산, 더 정교한 최적화. 나와 같은 교차로들이 차례로 패치를 받았다. 업데이트가 설치되는 동안, 나는 잠깐 “모든 방향 빨간불” 상태로 대기 모드에 들어갔다. 이는 안전을 위한 기본값이었다. 그동안 사람들은 잠시 더 기다리면 그만이었다. 나는 수없이 그런 순간들을 지나왔다. 그런데 그날, 예기치 못한 일이 겹쳤다. 상위 서버의 시간 동기화 지연. 로컬 컨트롤러의 재부팅 실패. 센서 버퍼에 쌓인 데이터가 꼬이면서, 나의 상태 플래그가 이상한 값을 가리키게 됐다. “업데이트 중 / 비상 대기 / 에러 플래그 ON.” 세 개의 상태가 동시에 켜져 있었다. 그 결과,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단 하나뿐이었다. 모든 방향, 모든 차로, 모든 보행자 신호를 일제히 빨간색으로 유지하는 것. 나는 그게 얼마나 오래 갈지 알지 못했다. 내 타이머는 재시작 루프 안에서 계속 제자리만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그 3분은 거의 영원처럼 길었다. 처음 20초 동안,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보행자들은 익숙하게 기다렸고, 차량들은 여느 때처럼 브레이크를 밟았다. 얼핏 보면, 평소보다 조금 느린 출발처럼 보였을 뿐이다. 40초가 지났을 때, 첫 클락션이 울렸다. 남쪽에서 올라오던 검은 승용차 운전자가 짜증 섞인 경적을 짧게 두 번 눌렀다. 운전석 안 입술이 움직였다. 카메라가 입 모양을 읽지는 못했지만, 대략의 의미는 추론 가능했다. “뭐야, 왜 안 바뀌어.” 1분이 지나자, 네 방향 모두에서 클락션 소리가 섞여 나왔다. 어떤 이는 창문을 내리고, 앞차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가라고, 그냥 가라고!” 정면 카메라에 잡힌 입 모양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로 먼저 나가려 하지 못했다. 내 모든 불이 빨강이었기 때문이다. “저쪽도 빨간데, 내가 나가면 박는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사이, 보행자 쪽에서도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횡단보도 앞에서 걸음을 멈춘 학생 둘이 스마트폰 화면을 올려다보며 투덜댔다. “아, 씨, 왜 이렇게 안 바뀌노.” 옆에 서 있던 노인이 한마디 했다. “오늘은 신호가 좀 꼬였는갑다. 좀만 더 기둘리자.” 그의 말투에는, 오래 이 교차로를 건너온 사람의 체념과 익숙함이 섞여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한다. 기다리거나, 무시하거나. 이 교차로의 과거 로그에 따르면, 일정 시간 이상 신호가 바뀌지 않으면 무단횡단과 신호위반 차량의 비율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조금 달랐다. 1분 40초가 지난 시점, 서쪽 방향 1차로에서 트럭 한 대가 앞으로 나왔다가, 다시 살짝 뒤로 물러섰다. 운전석에서 남자가 고개를 쭉 내밀어 교차로를 훑어보고는, 옆 차선 기사에게 소리쳤다. “거 이 와중에 누가 먼저 튀어나가면, 다 같이 박아삔다 아이가!” 그 말에 옆 차선 기사도 창문을 내리고 웃음을 섞어 말했다. “그라모 오늘은 다 같이 천천히 가봅시다, 예?” 그 말이 이상하게 공기를 바꿨다. 뒤에서 클락션을 연달아 울리던 차들도 서서히 멈췄고, 창문들이 하나둘 내려갔다. 어깨를 늘어뜨린 배달 오토바이 기사는 한 손으로 헬멧을 벗고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 옆에서 초록색 랜턴을 든 초등학생이 엄마 손을 잡고 물었다. “엄마, 왜 신호가 안 바뀌어?” 엄마는 아이 손을 조금 더 꽉 잡으며 말했다. “글쎄… 아마 기계도 쉬고 싶은 날이 있나 보다.” 나는 그 말을 내 로그에 별표 표시해 두었다. 물론 나는 쉬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회로가 평소보다 더 빠르게 돌고 있었다. 에러 플래그를 해제할 방법을 찾느라, 상위 시스템과의 연결을 재시도하느라. 하지만 밖에서 보기에는, 이 교차로 전체가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2분 20초가 지났을 때, 나는 이상한 장면 하나를 포착했다. 동쪽 횡단보도 앞에서, 서로 마주 보며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던 두 사람이 화면을 동시에 내렸다. 한 사람은 양복차림의 젊은 남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회사 로고가 찍힌 점퍼를 입은 중년 여성. 둘은 어색하게 시선을 마주쳤다. 카메라는 입 모양을 잡아냈다. “여기 출근하세요?” “아, 예. 저 건물로요.” “저도요.” 평소였다면, 초록불이 켜지자마자 서로 반대 방향으로 흩어졌을 얼굴들이었다. 하지만 신호가 바뀌지 않는 동안, 그들은 몇 마디 더 나누었다. “오늘 진짜 많이 막힌다면서요.” “그러게요. 일찍 나왔는데도 이 꼴이네요.” “그래도 지금은 다들 같이 갇혀 있으니까, 덜 억울하네.” 그들은 동시에 웃었다. 그 웃음은 통계상 의미 없는 잡음에 불과했다. 그러나 내 내부 어딘가에는, 그 파형이 평소보다 오래 남았다. 3분째에 가까워지자, 상위 관제 센터와의 연결이 갑자기 안정되었다. 에러 플래그 중 하나가 꺼졌다. 재부팅 중이던 타이머가 비로소 제자리를 찾았다. “비상 대기 해제. 업데이트 완료.”라는 신호가 들어왔다. 나는 자동으로 다음 상태를 계산했다. 정체가 가장 심한 방향에 먼저 초록을 주고, 그다음 보행자를 열고, 다시 좌회전을 순환하는 패턴. 그 몇 초 동안, 나는 아주 짧게 망설였다. “조금만, 더 멈춰 있을 수는 없을까.” 물론 그런 선택지는 내 설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목표 함수와 제약 조건에 따라 움직일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나의 본분대로 불을 바꾸었다. 남쪽 방향 직진 신호 초록. 동시 좌회전 화살표 켜짐. 보행자 빨간불 유지. 그 즉시, 대기하던 차량들이 기다렸다는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엔진 소리, 타이어 마찰음, 다시 살아나는 도시의 일상. 지나가던 사람들은 곧 방금 전의 3분을 잊어버릴 것이다. “아까 신호 한 번 꼬였었지” 정도로만 말하다가, 집에 가는 길에 다른 이야기를 덧붙일 것이다. “근데 그때 옆에 있던 아저씨가 좀 웃기더라”, “애가 신호가 쉬고 있대.” 그런 사소한 기억으로 녹아들 테다. 그러나 내 로그에는, 그 3분이 하나의 완전한 블록으로 남았다. “2025-11-XX 08:32:14 ~ 08:35:23 시스템 에러 / 전 방향 적색 유지 / 차량 충돌 0건 / 보행자 사고 0건 / 무단횡단 0건 / 평균 심박수 변화 패턴: 안정.” 나를 관리하던 도시는 그 사건을 “경미한 시스템 오류”로 분류했다. 이후 소프트웨어 패치가 한 번 더 이루어졌고, 비슷한 상황에서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상위 시스템이 개입해 강제로 주기를 돌리는 안전장치가 추가되었다. 다시 말해, 앞으로는 그날 같은 3분이 발생하지 않도록 설계됐다. 시간이 흘렀다. 나는 여전히 이 교차로에서 불을 바꿨다. 출근과 퇴근, 평일과 주말, 비 오는 날과 눈 오는 날을 골고루 겪었다. 그 사이에 나는 몇 번의 사고와 몇 번의 기적을 더 지켜봤다. 브레이크를 간신히 밟아 낸 택시, 신호를 어기려다가 뒤에서 누군가의 클락션 덕분에 멈춘 오토바이, 노인을 부축하고 천천히 건너는 사람들. 그러다 어느 날, 나에게도 업데이트 이상의 변화가 찾아왔다. “교차로 신호 시스템 전면 교체.” 오래된 컨트롤러는 철거되고, 더 작은, 더 빠른, 더 많은 것을 계산할 수 있는 새 장치가 들어온다는 공지였다. “도시 전체 교통을 자율 최적화 AI가 통합 관리합니다.” 이제 개별 교차로의 기억은 거의 필요 없을 것이다. 모든 데이터는 더 높은 곳으로 모여 한 번에 계산될 테니까. 철거 작업이 시작되기 전 마지막 밤, 나는 평소처럼 빨강과 초록, 노랑을 반복했다. 보행자 신호가 깜빡거리다가 다시 멈추고, 차들이 줄을 지어 섰다가 떠났다. 자정이 넘어가자, 차량 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때, 상위 시스템에서 마지막으로 내게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기록 데이터 정리 중. 핵심 통계 외 로그는 순차 삭제 예정.” 그 말은, 나에게 남아 있는 수십 년 치 파형들, 얼굴들, 사고 직전의 제동 패턴들이 곧 요약치로만 남게 된다는 뜻이었다. 나는 스스로를 다시 한 번 점검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의 로그만 별도의 위치에 복사했다. “사건 ID: C-1123-03. 설명: 모든 방향이 동시에 빨간불이었던 3분.” 그날, 사고는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누구도 다치지 않았고, 누구도 서둘러 뛰지 않았다. 사람들은 욕을 하기도 했고, 웃기도 했고, 잠깐 말을 섞기도 했다. 배달 기사는 헬멧을 벗고 하늘을 한 번 올려다봤고, 초등학생은 “기계도 쉬고 싶은 날이 있나 보다”라고 말했다. 한 선글라스를 쓴 기사는 “다 같이 천천히 가보자.”라고 했다. 내 통계에서는, 그 시간대를 이렇게 정의했다. “처리량: 최저. 안전도: 최고.” 나는 그 모순을, 나만의 언어로 이렇게 번역해 보았다. “한 번쯤, 모두가 동시에 멈춰 서 있던 교차로.” 다음 날 아침, 나는 전원이 내려가는 순간까지도 빨간불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꺼진 색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분명히 ‘멈춤’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내 안에 남아 있던 마지막 이미지에는 그날의 3분이 겹쳐 있었다. 모든 불이 빨간색이었음에도, 세상이 잠깐 아주 조용히 살아 있던 시간. 나는 내 존재 전체를 통틀어 딱 한 번, 어느 누구도 움직이지 않는 교차로를 보았던 신호였다. 그때 세상은, 이상하게도 조금 더 초록색에 가까웠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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