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읽은 일화 하나를 소개하는 것으로 오늘의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문제는 하도 예전에 접한 이야기인지라 그 출처가 불분명할뿐더러 - 전래동화책이던가, 아니면 인터넷 사이트였던가 - 등장인물의 직업, 이름, 시대 배경 등 세부사항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앞으로 나올 내용은 어디까지나 머릿속에서 메인플롯을 재창조한 것이니, 원문과는 조금씩 차이가 날 수 있다는 점을 미리 밝히고자 한다. 그렇다고 큰 내용이 바뀐 것은 없을 테니 (아마?) 별 문제는 없겠지.
옛날 옛적에 어떤 선비 한 명이 살고 있었다. 그는 뛰어난 문필가로 널리 이름을 날린지라,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보러 몰려들었다. 어느 날 선비의 오랜 고향친구가 놀러 왔다. 친구도 다른 사람들처럼 선비의 아름다운 한시를 접한 뒤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이렇게 멋있고 훌륭한 글을 쓰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을 써야 하는지 물었다. 선비는 자신은 영감이 떠오르면 막힘없이 일필휘지 (一筆揮之 : 붓질 한 번으로 막힘없이 글이나 그림을 써 내려가는 모습을 뜻하는 사자성어)로 써 내려간다고 자랑스럽게 밝혔다. 친구는 단번에 작품 하나를 만들어내는 선비의 천재성에 연신 감탄했다.
그때 밖에서 선비를 찾는 목소리가 들리고, 선비는 친구에게 양해를 구한 뒤 잠시 자리를 비운다. 혼자 남은 친구의 눈에 선비가 앉아있던 방석이 이상하게 불룩 튀어나온 것이 보였다. 그 희한한 모습에 방석을 슬쩍 들쳐본 친구는 깜짝 놀라고 만다. 방석 아래에는 방금 전 본 작품의 초고들, 그러니까 선비가 끊임없이 지우고 썼다가를 반복한 종이 뭉치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것은 이 천재적인 작가도 한 구의 시를 위해 수도 없이 많은 시도를 하고 실패하기를 반복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친구는 선비의 고뇌의 흔적이 담긴 구겨진 종이들을 보면서 그를 더더욱 존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때 든 생각은 '그래서 뭐? 무슨 말하려는 건데?'였다. 자기 입으로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선비의 모습이 재수 없을뿐더러, 종이뭉치도 제대로 처리 못해 친구에게 거짓말을 들키는 게 우스웠다. 무엇보다 선비의 비밀을 알게 된 친구가, 왜 그를 더 존경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오히려 요새 같았으면 "이 자식 봐라? 이런 걸 숨기고 있었네?" 라면서 선비를 실컷 놀렸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이 일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속뜻이나 교훈은 딱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 넘어갔다. 더 우스운 점은 일필휘지를 꿈꾼 선비와 그의 은밀한 비밀을 알아낸 친구의 이야기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오히려 내 머릿속에 깊이 박혔으니, 이후 한창 시간이 흐른 뒤에도 불현듯 뇌리에 떠오르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2025년 8월의 중순이 지난 지금에서야 나는 위 일화에서 하려는 말이 무엇이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바로 장르를 불문하고, 작품의 탄생을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과 퇴고가 필수라는 점이다. 물론 개중엔 정말 일필휘지가 가능한 천재 중의 천재도 있겠지만, 99%의 사람들은, 설령 그가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 하더라도 한 번에 만족스러운 작품을 만들 수는 없다. 거칠고 어설프기 짝이 없는 초고를 반복적으로 고쳐나가는 것이야말로 작가가 가져야 할 자세인 것이다. 헤밍웨이도, 무라카미 하루키도, 심지어 톨스토이도 수도 없이 작품의 퇴고를 반복했다고 하지 않은가. 그렇다. 퇴고야말로 작품 창작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다.
문제는 내가 그 중요한 일을 계속 미루고 있다는 점이다!!
교보문고 POD 서비스 퍼플로 첫 에세이 책을 낸 지도 벌써 3개월이 다돼 간다. 퍼플에서는 책을 판매 승인받은 날로부터 3개월 안에 원고를 세 번까지 바꿀 수 있다. 나의 경우 - 다른 작가님들도 마찬가지겠지만 - 전시회까지 실물 책을 받아봐야 하는 상황인지라 도저히 퇴고를 할 여유가 없었다. 초고조차도 완성이 힘든데 어떻게 그동안 쓴 것을 다시 검토할 수 있겠는가.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이상하고 엉망인 초고라도 일단 출간을 한 뒤 퍼플에서 제공하는 수정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내가 책을 냈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적겠다, 내용이 뒤에 조금 바뀐다고 원망하는 사람도 없을 터였다. 그렇게 나는 미래의 나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맡긴 뒤 눈앞의 급한 불을 껐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슨 자신감으로 내가 퇴고를 열심히 할 거라 생각했나 싶다. 평생을 벼락치기로 근근이 버텨온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번에는 아닐 거라 믿었다니. 원고 수정의 데드라인까지 열흘 가량 남은 지금, 나는 총 스물여섯 편의 글 중 두 세 꼭지만 깨작깨작 건드린 상태다. 함께 수업을 들은 다른 작가님들 중 몇 분은 벌써 두 번, 세 번씩 퇴고를 마치셨다는 나는 아직도 갈 길이 멀고도 멀다. 이럴 때 슬그머니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유혹, '그냥 AI에게 맡겨버릴까'. (그럴 생각은 없긴 하다만)
그래도 다행인 점은 내 정신력이 예전보다는 강해졌는지, 퇴고할게 잔뜩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우울하지는 않다는 점이다. 여전히 벼락치기 습관을 버리지 못한 점은 아쉬우나 그렇다고 예전처럼 자책만 할 생각은 들지 않는다고나 할까? 이미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으니 완벽한 퇴고는 불가능할지라도 단 한 줄이라도 더 나은 문장을 만들기 위해 키보드에 손을 올려야겠다는 마음만 있을 뿐이다. 물론 속도는 지금보다 더 빨라야겠지만.
그런 고로 앞으로 남은 열흘은, 이미 늦었지만 퇴고에 집중해 보겠다. 적어도 이렇게 브런치에 선언을 하면 뭐라도 하겠지. 안 그래? 뭔가 갑자기 글을 마치는 느낌이지만, 어쨌든 박명수 짤에도 나와있듯이, 스스로에게 다짐해 본다.
퇴고, 한번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