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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챌린지] 얼굴이 부어올라 글을 안 썼다는 변명

2025.06.14

by 스베틀라나
나흘간 호박즙과 호박죽만 먹었건만
내 얼굴은 여전히 호박처럼 부어있었다.

냉장고 문을 열자 서늘한 찬기가 슬며시 흘러나온다.

나는 마치 혀를 빼물고 헥헥거리는 대형견마냥 거친 숨을 내쉬며 냉장고 안에 손을 뻗는다.

점호 시간을 앞둔 군인처럼 일렬로 깔끔하게 줄을 선 순백색의 레토르트 봉지들이 공포에 질려 부들부들 떠는 게 보이지만 개의치 않는다. 내 손에 붙잡혀 깨끗이 찢기는 것이 너희의 숙명이니까.

햇빛에 그을린 손으로 제일 앞에 놓인 봉지를 낚아챘다. 손 안에서 시원한 호박즙이 찰랑거리는 게 느껴지자 붓기제거를 향한 내 거친 욕망도 폭발한다. 냉장고 문을 닫거나 컵을 꺼낼 시간도 아깝다. 1초라도 빨리 네 황금빛 자태를 감상하고 내 몸 안으로 부어 넣어야만 한다!

나는 망설임 없이 하얀 봉지의 끝을 한 번에 쭉 잡아 뜯어낸 뒤 입 안에 호박즙을 들이붓는다.

어느 공장에서 비명소리와 함께 착즙 되었을 호박의 흔적이 이름 모를 벌꿀의 노력의 산실인 꿀과 섞인 채 내 식도를 따라 위장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게 느껴진다.

그래, 열심히 소화되거라. 그리고 내 몸의 이 원인 모를 붓기를 모오두 가져가거라.


멀리 멀리 훠이 훠이


호박 같은 내 얼굴을 깐 달걀처럼 만들어다오...!




잠시 휴식을 가지고서 돌아와 위의 글을 다시 읽어보니 '도대체 몇 시간 전에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라는 의문이 절로 생긴다. 요 사나흘 간 얼굴의 붓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하긴 했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이상한 글을 쓰는데 이어 당당하게 브런치에 올릴 생각까지 했다는 게 여간 신기한 게 아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몽땅 지우고 글을 새로 쓰자니, 그래도 며칠 만에 써보는 브런치 글인데 어딘지 아쉽기도 할뿐더러, 무엇보다 슬슬 잠이 밀려오는 게 이제 와서 다른 글감으로 글을 쓰기에는 너무 늦었다 싶어 그냥 남기는 바이다.


나는 6월부터 매일 한 가지의 글감에 대해 단 세 줄이라도 글을 쓴 뒤 사람들에게 인증하는 챌린지에 참여하고 있다. 아쉽게도 나란 사람은 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굳이 P.T를 등록하지 않으면 헬스장 입구에도 안 가는, 말 그대로 강제성이 없으면 꼭 필요한 일을 안 하는 의지박약의 화신인지라 글쓰기 역시 최소한의 장치가 없으면 자연스레 멈추게 될 것이 뻔히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6월 1일부터 9일까지는 브런치나 메모장 등에 어설프게나마 글을 쓰며 꾸준히 인증하는 데 성공했지만, 10일부터는 글쓰기를 멈췄으니 좀 치사한 변명이긴 하다만 바로 얼굴이 퉁퉁 부어올랐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나는 의외로 몸은 잘 안 붓는 타입이다. 남들은 밤늦게 뭐라도 먹고 자면 그 다음날 다른 사람이 된다는데, 나는 밤 12시 넘어서 피자를 먹어도 그 다음날 속은 불편할지언정 외관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당연히 얼굴이 붓는 경험은 지금까지 기억나는 것을 다 세봐도 다섯 손가락을 다 쓸 필요가 없을 정도였으니, 갑자기 얼굴이 붓는 일은 제법 심각한 일이었다.


얼굴이 붓는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목감기라도 걸린 것처럼 목이 부어올라 편도인지 목구멍인지가 서로 맞닿고 있는 느낌이 불쾌했고, 무엇보다 누가 왼쪽 눈에 스카치테이프라도 붙인 것처럼 눈꺼풀이 내 말을 듣지 않는 게 가장 신경 쓰였다. 부어오른 왼쪽 눈두덩이의 살들이 제 멋대로 겹치고 펴지기를 반복해 쌍꺼풀이 두꺼워졌다가, 사라졌다가, 이중으로 겹치는 등 1분 1초도 쉬지 않다 보니 거울 속 내 모습은 매번 다른 사람이었다.


안 그래도 급작스럽게 살이 찐 뒤 외모에 대한 자신감이 수직으로 하락한 상태에서 붓기로 변해버린 얼굴을 보는 것은 충격 그 자체였다. 큰 눈은 아니지만 어쨌든 쌍꺼풀이 있다는 점, 그리고 나름 코가 오똑한 편이라는 게 그나마 위안이었건만 그 자랑거리들이 붓기에 파묻힌 걸 보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게다가 하필이면 화요일부터 연속으로 중요한 약속자리들이 있는 이 타이밍에!


결국 10일부터 14일까지의 나흘간 나의 모든 정신과 관심은 이 갑작스러운 붓기의 원인을 찾고 이를 해결하는 것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높은 분을 만나 사진을 찍는 중요한 약속임에도 불구하고 쌩얼에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을 꽁꽁 가리고, 하루 세끼를 호박죽으로 때우고, 호박즙 서른 포 짜리 한 박스를 3일 만에 해치울 정도로 내게 이건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니, 이런 말을 하면 좀 그렇지만, 당장 글을 쓰는 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글이야 언제든지 쓸 수 있고, 당장 안 쓴다고 죽는 것도 아니지만, 이 붓기는 용납할 수가 없었다. 가뜩이나 초라하고 특별할 것 없는 나란 사람의 가치가 붓기 때문에 더 깎이고 엉망이 될 것이라는, 초조한 두려움은 게으르기 짝이 없는 내 다리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하루 종일 온갖 병원을 다 찾아보고, 온갖 검색 엔진과 AI에 매달리면서 붓기의 원인에 대해 공부하고 관련된 연구들을 읽어보니, 이 며칠 동안 나는 잠깐이나마 류마티스 내과 - 이비인후과 - 내과 - 성형외과 - 피부과 - 알레르기내과 - 신경외과 - 대체의학 -기능의학- 한의학 전공자였다.


내과, 피부과 그리고 다시 알레르기 내과로 삼일 연속 병원을 쏘다닌 끝에 마지막 병원에서 내게 내려진 진단은 진단은 '심각한 집먼지와 집진드기 알레르기'였다. 이전 병원에서는 각각 '감기와 비염', '주사 피부염 재발'이라는 진단을 받았는데 이 또한 사실이라 약을 처방받기는 했으나, 한결 차분해진 상태에서 생각해 보니 역시 집먼지 알레르기가 붓기의 주 증상이었던 것 같다. 집에 와서 신랑과 함께 대청소를 하고 나니 붓기가 훨씬 빨리 가라앉고 있다. 물론 앞으로 며칠은 더 살펴봐야만 하겠지만.


여하튼 붓기와 가려움증이 호전된 지금 글을 쓰면서 나를 돌아보니, 이제야 붓기에 광적으로 집착하던 내 모습이 이상했음을 깨닫게 된다. 결국은 의사의 처방을 따르면 알아서 빠졌을 붓기였건만, 호박 먹는 염소도 아니면서 단순히 '붓기에 좋다'는 이유로 호박만 먹었는가 싶다. 호박이 스테로이드도 아니고 이걸 섭취한다고 바로 붓기가 쑥 빠지고 얼굴이 슬림해지지 않는 것을 잘 알면서도, 호박즙을 먹자마자 거울 앞으로 달려가서 얼굴 상태를 확인하던 건, 지금 떠올려보면 결코 정상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 괴상한 집착의 근본에는 역시 '내 몸에 대한 정성 가득한 바디 네거티브' 정신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나란 사람의 몸은 외적으로도, 기능적으로도 점점 시들어간다는 두려움에 더해 이 모든 원인이 전부 나의 게으름과 무기력 때문이라는 끊임없는 자기 자책의 정서가 영혼 깊숙이 숨어있다가 '붓기'를 계기로 다시 튀어나온 게 아닐까. (보이는 것을 그렇게 신경 쓰면서 왜 다이어트는 안 하냐는 또 다른 나의 목소리는 무시하겠다) 이왕 이렇게 피하고 싶은 어둠(?)을 다시 찾은 이상, 글쓰기도 시작했겠다 이걸 글로 풀어나가는 작업을 해봐야겠다. 물론 나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에세이를 쓰는 사람이 되기로 한 어쩔 수 없는 일인 데다가, 며칠간 글쓰기를 놓았으니 그에 대한 응당한 책임(?)을 져야겠지.


그나저나 내일은 정말 붓지 말아야 할 텐데...... 혹시 모르니 일단 호박즙은 재구매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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