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겨웠던 하논, 체르니, 바흐인벤션, 정말 필요 없나?
오래전, 대한민국에서는 전국의 피아노 학원 어린이들이 다 똑같은 교재로 피아노를 배웠었다. 이름하여 바이엘, 체르니, 하논, 바흐 인벤션. (그때는 '바하' 인벤션.)
내 체르니 40번 책 겉장에는 파란 바탕에 새 세 마리가 즐겁게 노래하는 그림이 있었다. 이 책을 끝낼 즈음이면 아이들은 나이도 들고, 실력도 제법 늘어난다. 그때부터는 동물 그림이 있는 책과는 작별하고 고급스런 광나는 하얀책, 일본 전음사의 악보를 자랑스레 들고 다니곤 했다. (요즘 헨레 (Henle)사 파란책만큼의, 아니 그 이상의 간지가 좔좔 흘렀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많은 어린이들은 애석하게도 그 고비를 넘지 못하고 이 새그림 책의 어딘가 쯤에서 피아노를 그만두곤 했다. 너도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보니 체르니는 한국 피아노 교육 실패의 주범처럼 취급받기도 한다.
난 특히 체르니는 정말 쳐다보기도 싫었다. 어쩌면 재능이 꽃필 수도 있었을 나를 피아노에서 멀어지게 만든 원흉. 그 책을 쳐다보기만 해도 음악성이 저절로 줄어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새겨있지만 파란색 체르니 책은 이사를 하면서 아낌없이 버렸다.
어른 아마추어인 나, 대체 어떻게 해야 실력이 늘지?
그전엔 마음에 드는 곡이 있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대충 쳤다. 자꾸 틀리거나 절뚝거리는 부분이 있어도 아마추어니까 스스로 용서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이렇게 살다 죽을 순 없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피아노 실력 향상 5개년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막막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실력이 늘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하논, 체르니, 바흐 인벤션을 하나씩 꺼내 보았다. 그리고 정말 신기한 경험을 했다. 조금도 지겹지 않았다. 배울 것이 넘쳐났다.
그렇다. 그들은 죄가 없다. 단지, 잘못 사용되었을 뿐이다. 실력을 키우고 싶은 어른 학생이라면, 오히려 더 들여다볼 가치가 있다. 그래서 내 경험을 공유해 보려 한다.
애들이나 치는 하논?
하논은 다채로운 손가락 움직임을 배우는 교재이다. 총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부는 흰건반(다장조, C장조)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어 악보를 읽는 데 신경 쓸 필요 없이 기계적인 반복 연습에 집중할 수 있다. 제2부는 음계와 아르페지오, 옥타브, 반음계 등의 연습이 포함되어 있다. 이 부분은 모든 피아노 학습자에게 필수적인 기본기다. 하지만 하논에서는 간결하고 반복적으로 구성되어 있어 쉽게 읽고 손에 익히기 좋다. 끝으로 3부에서는 트레몰로, 연타 등 고급 테크닉이 등장한다. 빠르게 연습하면 매우 고난도지만, 느린 속도로 연습하면 중급자도 충분히 접근할 수 있다.
내가 하논에서 아쉬운 것은 많은 부분이 흰건반 위주라는 것이다. 이론상으로는 학생이 직접 조를 바꾸어가면서 알아서 연습하면 되지만, 중하급자가 자유자재로 하긴 힘들다. 설사 할 줄 안다고 해도 지겨워서 안 하게 된다. 해결책은 아래 피슈나 섹션을 읽어보라.
장점은 피곤하고 머릿속이 복잡할 때 손가락만 잠깐 풀고 싶을 때 빠르게 연습할 수 있다는 것. 특히 야근하고 머리 아플 때 머리 식히는 데 정말 좋다. 하논 자체가 너무 단조로우면 스스로 목표를 세워서 응용 연습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부드럽게 치는 레가토, 음량 조절, 음색 변화 연습 등 시도해 볼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대한민국 어린이들의 공적, 체르니
어렸을 때 생각 없이 목적 없이 치다 보니 정말이지 지루했고, 싫었다.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훌륭한 점이 많다. 한국에서는 음악성을 말살시키는 ‘피아노인의 적’으로 불리지만, 체르니가 널리 쓰이지 않는 미국에서는 숨겨진 명연습곡집으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 아마존 체르니 40번(School of Velocity) 책 평을 보라.
실제로 내가 체르니 40번을 다시 꺼내든 것도 피아니스트 머리 페라이아(Murray Perahia)의 마스터클래스를 보면서다. 쇼팽 발라드 클래스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학생의 손가락이 완전히 고르지 않은 부분이 있자, 페라이아는 체르니 40번을 강력 추천했다. 학생은 매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름으로 추측컨대 유럽인인 그 학생은 체르니 40번은 열 살도 되기 전에 떼었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체르니는 순수히 손가락 연습용이다. 나이와 수준에 상관없이 적재적소에 이용하면 된다. 자존심 세울 필요 없다.
우린 바쁘다. 체르니에 마냥 시간 보낼 순 없다. 빠른 효과를 보기 위해서 나는 치기 전에 무엇을 연습하는 곡인지 먼저 파악한다. 대개 음계, 아르페지오, 꾸밈음, 반음, 트레몰로 등, 연습의 목적이 매우 명확히 보인다. 내가 잘 못하는 기술이면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는지 찾아보고 공부한다. 유튜브에도 자료가 많다. 꽤 잘할 수 있는 것이면 건너 뛰기도 한다.
메트로놈대로 치면 상당히 빠르다. 특히 뒷부분으로 갈수록 속도가 매우 빨라진다. 하지만 그 속도가 안 나온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내가 과거에 그랬듯) 무리해서 온몸에 힘을 주고 땀 뻘뻘 흘리며 부정확한 터치로 빠르게 두들기기보다, 아름다운 음, 고른 터치, 편안한 자세에 집중하는 것이 우리 성인 학습자가 배워야 할 부분이다.
내가 생각하는 체르니의 장점은 이렇다. 첫째, 악보 읽기가 매우 쉽다. 빠르게 파악할 수 있어서 곡 분석에 시간을 뺏기지 않고, 바로 연습에 집중할 수 있다. 둘째, 고전적인 화성 진행으로 되어 있어, 나도 모르게 화성감각이 자연스럽게 몸에 밴다. 화음 읽는 법을 조금만 익혀두면, 이 장점을 훨씬 더 살릴 수 있다. 셋째, 하논과 달리 작지만 분명한 음악적 아름다움이 있고, 이를 살릴 수 있도록 강약표와 프레이징이 악보에 친절하게 표시돼 있다. 이 표시들을 따라 연주하는 습관을 들이면, 진짜 ‘내가 치고 싶은 곡’을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물론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는 못하지만 연습할 때마다 좋다는 걸 피부로 느낀다. 그렇다고 해서 주객이 전도되어선 안 된다. 체르니에 매달리느라 정작 내가 정말 치고 싶은 곡을 칠 시간이 없어지면 안 된다. 연습곡은 어디까지나 ‘수단’이다. 그러니까, 시간 안배를 잘해서 적당히, 효율적으로 활용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지겨움의 대명사 (?!) 바흐 인벤션 -- 정확히는 15개의 인벤션과 15개의 신포니아
이 곡들에 대해선 정말 할 말이 많다. 하논이나 체르니처럼 테크닉 중심의 연습곡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런 것들과 함께 묻혀서 갈 수 없는 걸작들이다. (나중에 따로 글을 쓰겠다.)
이 30곡은 바흐가 장남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Wilhelm Friedemann Bach)의 음악 교육을 위해 작곡한 연습곡들이다. 사실 바흐는 골드베르크 변주곡 (Goldberg Variations)처럼 위대한 작품조차 ‘연습곡(Clavier Übung)’이라는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연습곡’이라는 말만으로 이 곡들을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
물론 인벤션은 어린 아들을 위한 교육 목적이 뚜렷했던 만큼, 구성이 단순하고 테크닉적으로는 상당히 쉽다. 그러나 그 단순함 속에 숨겨진 음악적 깊이와 정교함은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바흐는 이 곡들의 목적을 직접 서문에 써 두었다. 음악적 아이디어를 아름답게 표현하고 발전시키는 기술, 음악적으로 생각하는 습관, 손가락의 독립성과 깔끔한 연주법을 기르도록 하기 위한 곡이라고.
이런 분명한 목표를 가진 각각의 곡은 단순하지만 놀랍도록 아름다운 주제와 모티브들로 정교한 짜임을 가지고 발전해 간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치 두 사람, 또는 세 사람의 대화가 정교하게 만나고 헤어짐을 거듭하면서 노래하는 듯하다. 그래서 귀길울여 듣는 사람에게 선율의 직조감이 주는 쾌감과 지적인 즐거움을 선사해 준다.
그런데 도대체 왜 학원에서는 이 훌륭한 바흐 인벤션이 ‘지겨움의 대명사’가 되었을까?
나 역시 어릴 때를 떠올리면 생생히 기억난다. 인벤션: 단순하게 시작했으나 점점 복잡해지다가, 두 번째 페이지 중간쯤에서 고통이 폭발하는 곡. 눈도 바쁘고 손도 바쁘고, 한참을 애써야 겨우겨우 끝나는 지루한 곡. 그 이유는 단순하다.
초보자가 대위법적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냥 건반만 누르게 되면 멜로디 선율이 분리되지 못하고 뭉쳐버린다. 그래서 아름다운 주제와 모티브들이 서로 구분되지 않고, 특유의 노래하는 선율과 서로를 울려주는 화음도 떡덩어리 속에 묻힌다. 그 상태에서 반복만 계속하면, 곡은 점점 더 지루해진다.
그래서 나는 주장한다. 바흐 인벤션은 반드시 훌륭한 선생님과 함께 배워야 한다. 직접 선생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하다못해 온라인 강의나 문서 자료라도 참고해서 구조를 이해한 뒤 연습해야 한다.
제대로만 공부하면 바흐 인벤션의 장점은 셀 수 없이 많다. 아름답고, 감동적이고, 손가락 독립 훈련이 되고, (티나게 페달 쓰면 안되니) 안 밟은 듯 밟는 페달 훈련이 되고, 각 성부를 노래하는 프레이징 훈련이 되고, 고전 화성 진행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고, 바로크 건반 음악의 꾸밈음에 대해 배우게 되고, 대위법의 구조를 배우고 익히게 된다
너무 많다. 흥분된다. 이걸 도저히 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건 나중에 따로 글을 지어 올리겠다.
그 밖에 내가 시도했던 연습곡들 – 단순히 체르니를 피하려는 목적으로.
피슈나 (Pischna)
피슈나도 손가락 테크닉 훈련을 위한 교재다. 하논과 가장 큰 차이는, 반음 단위로 상승 또는 하강하기 때문에 다양한 조성을 자연스럽게 연습하게 된다는 점이다. 또, 피슈나는 지속음을 누른 채 나머지 손가락을 움직이는 방식이 많아 손가락 독립에 탁월하다.
하지만 단점도 있다. 지속음을 누른 채 다른 손가락을 움직이다 보면 쓸데없는 힘이 들어가기 쉽고, 그 상태로 억지로 연습하면 손에 부담이 커진다. 경험상, 조심하지 않으면 손가락이나 손바닥, 팔목에 무리가 가기 쉬웠다. 그래서 선생님 없이 혼자 연습하기엔 중하급자에겐 부담이 클 수 있다.
중반부로 넘어가면 음계 연습이 등장한다. 하논과는 달리 동일 진행·역진행·3도·6도 병진행이 교재 구조에 포함되어 있어서 따로 응용할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연습된다는 점이 하논보다 탁월하다. 하지만 그만큼 복잡해서, 하논의 음계가 숙달된 후 피슈나 음계 연습을 시작해야 심하게 좌절하지 않고 연습할 수 있었다.
코르토 연습곡 (Alfred Cortot – Principes rationnels de la technique pianistique)
이 연습곡들은 쇼팽에뛰드를 배울 때, 복잡한 테크닉을 작은 단위로 쪼개어 집중적으로 반복 훈련할 수 있게 구성되어 있다. 즉, 특정 테크닉(트릴, 도약, 아르페지오 등)을, 딱 막히는 구간만 골라서 연습할 수 있도록 돕는 교재다.
나는 욕심과 허영에 샀지만, 거의 손도 안 댔다. 솔직히 내 수준이 아직 아닌 것 같다. 앞으로 쇼팽을 본격적으로 연습하게 될 어느 시점에는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나에게도 언젠가 이 연습곡들이 좋았다고 말할 날이 오길 바란다.
난 시간이 없다. 그냥 좋아하는 곡을 치다보면 거기서 나오는 테크닉까지 함께 늘지 않을까?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그러나 기본기가 없이 곡을 듣기 좋게 연주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곡을 많이 쳤는데도 다 별로인 상태’가 계속된다. 정말 평생 그렇게 치고 싶나?
피아노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손가락 훈련은 절대 게을리해선 안 된다. 왜냐하면 피아노 연주란 손가락으로 건반을 눌러 ‘원하는 소리’를 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 손가락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않는다면 어떻게 원하는 소리가 나겠는가?
하논이든, 체르니든, 피슈나든 —무엇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테크닉 연습을 꾸준히, 반복적으로 하는 것이다. 완벽할 필요는 없다. 내가 꾸준히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매일 조금씩이라도 계속하는 것.
그게 결국, 내가 좋아하는 곡을 더 잘 치게 만들어주는 가장 빠른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