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에 대해 이야기하기
아이를 키우는 방식은 그 집안의 먹고사는 문제와 맞닿아 있다.
언제 일어나고, 뭘 먹고, 부모가 얼마나 바쁜지에 따라 집안의 규칙도, 훈육의 방식도 달라진다. 윤이가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 사실을 구체적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영상 노출을 조심해서 하고 있어요”
겉으로 보기엔 같은 기준을 말하지만, 그 말속에는 저마다 다른 하루가 숨어 있었다. 누구에겐 이 기준이 30분이고, 누구에겐 하루 종일이다.
주말 아침, 나는 침대에서 좀처럼 몸을 일으키지 못한다.
윤이는 말해주지 않아도 주말을 귀신같이 알아서, 눈 뜨자마자 “엄마, TV 틀어줘!” 하고 외친다. 주말 오전 우리 집만의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윤이가 TV를 보는 시간은 침대가 나고 내가 침대인 시간이다. 한 주간 바닥난 내 에너지를 다시 그러모으는 동안 윤이를 TV에게 맡긴다. 어떤 집은 TV를 아예 없앴다고 하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그 체력과 에너지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면서 나는, 식당에서 아이에게 영상을 보여주는 부모를 보면서 묘한 우쭐함을 느낀다. 식탁 위의 두 세계. 어른들의 대화와 화면을 응시하고 있는 아이. 가족의 세계에서 아이가 배제된 듯 보이는 광경을 마주하면 “아이고…” 하는 탄식이 새어 나온다. 그 뒤에는 ‘나는 저렇게는 안 해’라는 마음이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주말 아침 내내 아이를 화면에 맡긴 사람이 할 말은 아니다. 밥 먹는 시간은 그래봤자 30분일 테고, 윤이가 그날 아침 TV를 본 시간에 비하면 잠깐이다. 각자의 기준이 다를 뿐인데 나도 모르는 사이 내 기준으로 끊임없이 비교하고 재단하고 만다.
나는 좋은 엄마가 되는 방법이 ‘지켜보는 것’이라고 믿는다. 한 발짝 물러나 아이가 넘어지고 혼자 다시 일어나는 모습을 지켜보려고 한다. 물론 이 기준은 집마다 다를 것이다. 어쩌면 그 집은 영상 대신 아이에게 말을 건네고, 저녁마다 무릎에 앉혀 책을 읽어주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정답은 없다는 것을 안다. 각자 선택한 방식에는 나름의 이유와 진심이 있으리라.
문제는 그걸 안다도 해서, 그 다름을 바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아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 사이엔 여전히 깊은 틈이 있다. 나는 그 틈 앞에서 자주 멈칫거린다. 그래서 나에겐 입 다물기 훈련이 필요하다. ‘나라면 저렇게 하진 않을 텐데’ 하고 불쑥 튀어나오는 생각을 누르기 위해, 입을 더 다물고 고개를 더 많이 끄덕인다.
“나는 나라서 고유하다.”
그 말은 스스로를 다독일 때 유용하지만, 방향을 잘못 틀면 곧 ‘내 방식이 옳다’는 착각으로 이어진다. 훈육의 원칙도, 식사의 방식도, 영상 노출의 기준도모두 다르다는 걸 안다.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내 기준만을 중심에 세워 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훈련한다. 입을 다무는 법. 판단을 미루는 법. 그리고,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법.
우리는 얼마나 자주,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타인을 판단하며 살아갈까. 우리 사이에 이런 다름과 판단이 존재할 진데, 과연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가능할까? 그걸 아는 사람이 되려면, 얼마나 더 많은 침묵을 연습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