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일방향성에 대해 이야기하기
엄마가 아프다. 원인불명의 고열에 시달리고 있고, 신장이 안 좋아서 혈뇨가 심하다고 했다.
나는 그 사실을 3일이 지난 월요일에야 엄마와 통화하며 알게 되었다. 내 집, 내 식구, 내 가족이 생겼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나의 원가족에게서 그만큼 멀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최근 우리 집, 그러니까 나의 원가족은 말 그대로 무너지고 있다. 아빠의 사업 실패로 파산이니 경매니, 평생 생각해 본 적 없는 단어들이 집안을 떠나니고, 매일 등기로 독촉장을 들고 찾아오는 우체부의 벨소리에 심장이 벌렁거린다. 실낱같은 희망을 두고 완전한 포기도, 그렇다고 나아가지도 못한 채 가족의 시간이 고여있다. 거대한 저수지 같은 그 집에서, 나는 한 발짝 비켜 나와 손님처럼 지내고 있다. 자꾸 어디선가 나오는 지푸라기를 잡으려는 아빠와 그 안에서 허우적대는 엄마, 그리고 그런 엄마의 유일한 지지대 역할을 하는 남동생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나까지 깊은 물속으로 침잠하는 느낌이다.
자주 보고, 자주 듣지 않으면 자주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집안의 풍비박산보다는 내 아이의 예쁨에, 내 일에, 내 가족의 행복에 더 많은 시간을 쏟고 더 많은 생각을 한다. 이미 우리(여기서 우리는 나와 남편이다)가 경제적으로 도울 수 있는 부분은 도왔고, 나까지 가세해서 물에 들어간다 한들 가족 중 누구를 구해서 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다가도 한 번씩 이래도 되나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집이 경매에 넘어가면 어디에서 살아야 할지, 냉장고와 세탁기가 압류되면 당장 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부모님과 동생을 두고 나는 외식을 하고, 여행을 간다. 내 가족이 있기에, 나는 가까운 손님으로 지낼 수 있다.
저수지 가장자리에 서 있는 나를 볼 때마다, 언젠가 윤이도 저수지 밖에서 나를 바라볼 것이라는 강한 예감이 든다. 나는 윤이를 구하기 위해 저수지로 뛰어들 수 있지만, 윤이는 나를 위해 저수지로 뛰어들지 않을 것이다. 부모의 사랑은 그렇게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그래서, 슬프다.
부모는 온 마음을 다해 아이를 키운다. 한동안 아이들은 이 마음을 온전히 돌려준다. 아이는 엄마, 아빠를 제일 사랑해 주고, 부모가 만들어 준 포근한 세상에서 웃고, 뒹군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면서, 부모와 아이 사이 기억의 간극이 생긴다. 부모는 사랑을 쏟았던 기억의 장면이 생생한데, 아이는 사랑을 받았던 느낌만 남을 뿐 기억은 희미해진다. 그보다는 지신이 삶을 직접 꾸려가는 기억이 더 또렷해진다. 나만의 세계, 더 나아가 자신의 가족이 생기는 순간, 아이는 부모의 세상에 살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나 부모만은 그 자리에 남아 있다.
나의 부모가 나에게 그랬듯, 나의 사랑도 윤이에게 흘러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엄마에게도 잘해야 하겠다고 생각은 들지만, 나의 마음은 내가 아이에게 쏟는 만큼 부모에게는 가지 못한다.
온 마음을 다했지만 돌려받지 못하는 마음.
그러나, 돌려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깝지 않은 마음.
어느 날,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나 이제 엄마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엄마는 조금 웃으며 답했다.
“아니야, 넌 아마 평생 모를 거야.”
엄마란 존재는 내가 따라잡을 수 없는 발걸음으로 항상 앞서있다. 엄마는 내가 겪고 있는 시간을 모두 지나 지금에 이르렀고, 내가 그 자리에 닿을 무렵 엄마는 더 앞선 시간을 걷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는 존재.
부모의 사랑이 끝내 이해받을 수 없는 일방적인 사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란 나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이 험한 세상에 내놓는 일임을 알면서도,
사랑은 아래로 흐르고, 쉬이 멈추지 않는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윤이에게만 쏟아지는 사랑이 언젠가 짐이 되지 않도록,
내가 받은 사랑이 이 작은 아이에게서 멈추지 않도록,
그 사랑이 흘러갈 또 하나의 길이 있다면 좋겠다고.
내게서 나온 사랑이 한 사람을 키워냈다면, 그 사랑이 되돌아오지 않아도 괜찮다.
어쩌면 그것이, 부모라는 존재가 품고 있는 마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