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했던 나를 향해, 조용히 걸어 들어간 시간
나는 다이어리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내내 묘한 감정이 가슴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신기함과 두려움,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끌림.
내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마치 누군가 내 마음속 깊은 곳까지 들어와,내가 가장 숨기고 싶었던 모습을
조용히 훔쳐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날 밤, 불을 끄고 침대에 몸을 뉘던 순간 문득 그 문구점이 떠올랐다.
빛이 환하게 퍼지던 골목, 간판도 없던 그곳. 마치 꿈속 장면처럼 잔상만이 선명했다.
그런데 그 다이어리는 지금, 분명 내 방 안에 있었다.
내 손끝에 닿을 만큼 가까운 현실로 와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이어리의 표지를 열었다.
첫 장엔 흐릿하지만 분명하게, 단 한 줄의 문장이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너는 지금까지 너로 살아본 적이 있니?”
나는 당황했다. 나는 지금도 분명 나로 살고 있는데…
그런데 왜, 이 문장이 나를 멈춰 세우는 걸까.
나는 한참 동안 그 질문 앞에서 망설였다.
무슨 뜻일까?
나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 걸까?
그저, 뭐라도 쓰고 싶었다.
생각보다 더 솔직하게. 펜을 들고, 조심스레 하얀 종이를 넘겼다.
손끝이 떨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펜촉이 종이에 닿자 내 마음이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생각했다. 나는 늘 밝은 사람인 척, 잘 지내는 사람인 척하며 살아왔다.
실은 무기력했고, 불안했고, 무언가를 잃어버린 채로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었다.
그 다이어리는 마치 내가 외면해 온 내면 어딘가를 알고 있었다.
숨기고 있던 두려움,
애써 무시했던 공허,
스스로도 인정하지 않던 욕망까지.
나는 처음으로 두려웠고, 처음으로… 나 자신과 대화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조용한 밤, 나는 스스로에게 조심스럽게 묻고 싶어졌다.
“나는 정말 나로 살아가고 있는 걸까?
아니면, 누군가가 기대한 나를 연기하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건 아닐까.”
겉으론 분명 나였지만, 속은 타인의 시선과 기준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 다이어리가 던진 질문은, 내가 평생 피하려 했던 질문이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도, 여전히 나는 무기력했고 존재감 없이 살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나 자신을 외면하지 않기로 다짐했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나를 마주한다’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고 아픈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처음 알게 되었다. 내 안에도 분명,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아름다움과 함께, 추함도 있다는 것을.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문구점이 그리웠다.
다이어리는 여전히 내 곁에 있었지만..
그 공간.
그 따뜻한 빛.
그 누구도 없었지만
나를 가득 채웠던 그 장소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그 골목을 찾아 나섰다.
부모님께는 친구를 만난다고 둘러대고, 가슴 뛰는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마치, 누군가를 몰래 만나러 가는 사람처럼.
붉은 벽돌 건물,
낡은 가로등,
벽에 붙어 있던 오래된 전단지까지. 모든 것이 기억 속 그날과 똑같았다.
하지만 문구점은 없었다.
빛도, 간판도, 그 신비한 문도. 나는 골목을 다시 걷고 또 걸었다.
여기였나?
아니면 저쪽이었나?
계속해서 길을 잃었다.
그러다 문득,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의 질문이 떠올랐다.
혹시, 그 문구점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빛. 다이어리. 하늘에 둥둥 떠다니던 펜들. 그리고 나만 있었던 그 공간.
그 모든 것은, 정말로 존재했던 걸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아마도 ‘내 안에 처음 열린 방’이었던 것 같다.
가장 조용하고, 가장 신성한 순간. 내가 나 자신을 향해 처음으로 문을 연 그 작은 방.
그 문은 밖에 있지 않았다.
언제나, 내 안에 있었다.
그녀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그저 잊고 살던 자신과 마주하게 된 한 사람일 뿐이다.
그 문구점은, 누군가만 들어갈 수 있는 마법 같은 장소가 아니다.
오직 자신의 내면을 바라볼 용기를 낸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곳이다.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보았던 것처럼,
양치기 소년 산티아고가 연금술사를 만난 것처럼.
그녀는, 또 다른 당신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을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