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5년 차면 아직도 한창 배울 때지
직장인으로서 일을 잘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과거의 저는 그 답을 ‘비용 절감’과 ‘신속한 처리’라고 확신했습니다. 정해진 예산 안에서 가장 저렴한 업체를 찾아내고, 규정에 맞춰 비품을 지급하고, 문제없이 행사를 치러내는 것. 그것이 업무 능력이라고 믿었습니다. 모든 것을 숫자로 환산하고, 효율성이라는 잣대로만 평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회사로 옮긴 뒤, 저는 제가 얼마나 좁은 세상에 갇혀 있었는지를 매일같이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의 과정에는 저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든 몇 명의 스승이 있었습니다.
첫째, 모든 일에 ‘철학’을 세우는 법을 배웠습니다.
제게 ‘철학’을 가르쳐 준 스승은 팀장님이었습니다. 한 번은 제가 사내 카페의 원두를 교체하겠다며, g당 단가를 기준으로 가장 저렴한 제품부터 정리한 리스트를 보고한 적이 있습니다. 팀장님은 리스트를 잠시 보더니, 제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 커피를 마시는 우리 직원들의 아침이 어떤 기분이길 바라요? 우리는 그냥 커피를 제공하는 게 아니에요. 하루를 시작할 ‘에너지’와 ‘영감’을 선물하는 거죠. 그 관점에서 이 리스트를 다시 한번 볼까요?”
머리가 띵했습니다. 저는 ‘원두’라는 비품의 단가를 보고 있었지만, 팀장님은 ‘직원들의 아침’이라는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어떤 일을 시작하든 스스로에게 먼저 질문을 던지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이 일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걸 왜 하는가?”
둘째, ‘데이터’로 설득하고 증명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제게 ‘데이터’라는 무기를 쥐여준 스승은 팀 동료였습니다. 회의실이 부족하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을 때, 저는 당연하게 더 넓은 공간을 임차해 회의실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가장 직관적이고 간단한 해결책처럼 보였습니다. 그때 팀 동료가 제게 회의실 예약 시스템의 데이터를 시각화한 그래프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래프는 놀라운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정작 비어 있는 시간은 거대한 10인실이었고, 항상 예약 전쟁이 벌어지는 곳은 작은 4인실이었습니다. 문제는 회의실의 절대적인 ‘수’가 아니라, 비효율적인 ‘크기’의 배분에 있었던 겁니다. 만약 제 주장대로 더 넓은 공간을 임차했다면, 우리는 돈은 돈대로 쓰고 문제는 전혀 해결하지 못했을 겁니다. 데이터는 저의 섣부른 직관과 경험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었습니다.
셋째, 정답은 결국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과거의 저는 직원들을 ‘관리’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직장에서는 직원들을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이자,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파트너’로 대했습니다.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곧 일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모든 가르침을 종합적으로 증명해야 하는 거대한 시험대가 제 앞에 놓였습니다.
바로 ‘본사 이전 프로젝트’였습니다.
과거의 저였다면, 평당 임대료가 가장 저렴한 곳을 찾아 가장 많은 책상을 배치하는 것으로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 저는 달랐습니다.
1. 철학부터 세웠습니다.
전 직원을 대상으로 서베이를 통해 모든 의견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새로운 사무실은 어떤 공간이 되어야 할까요?” ‘햇빛’, ‘식물’, ‘집중’, ‘소통’, ‘자부심’… 직원들의 입에서 나온 키워드들이 우리 프로젝트가 나아갈 ‘기준’이 되었습니다.
2. 데이터로 증명했습니다.
가장 저렴한 A 후보지 대신, 전 직원의 출퇴근 시간을 분석해 ‘총 이동 시간’을 가장 단축시키는 B 후보지를 선택했습니다. 임대료라는 ‘비용’보다 전 직원의 ‘시간’이라는 더 큰 자산을 아끼는 것이 합리적임을 데이터로 설득했습니다.
3. 소수가 아닌 다수를 위한 환경을 고민했습니다.
일부 임원만이 이용하는 집무실을 창가 쪽으로 배치하지 않고, 많은 직원들이 이용하는 일반 업무 공간을 창가 쪽으로 설계했습니다. 또 누구나 햇빛을 즐길 수 있는 라운지를, 회사의 정체성을 담은 캔틴 공간을, 직원들의 회의 빈도를 고려한 다양한 사이즈의 회의실을 곳곳에 만들었습니다. 제 머리에서 나온 디자인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은 직원들의 목소리를 번역한 결과물이었습니다.
이사 하루 전, 텅 빈 사무실을 혼자 둘러보았습니다. 직원들의 바람이 현실이 된 공간, 데이터가 증명한 최적의 동선, 우리의 철학이 담긴 가구들을 보며 문득 깨달았습니다.
세상은 넓었고, 제 주변에는 기꺼이 저의 스승이 되어준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 덕분에, 저는 오늘 또 한 뼘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17화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