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유일신이라 착각하는 얄다바오트는 자신의 왕국, 즉 일곱 겹의 하늘과 물질 우주를 창조하고 만족감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왕국은 생명이 없는, 텅 빈 무대와 같았습니다. 그의 창조는 오직 불완전한 모방이었기에, 진정한 의미의 생명력, 즉 영(靈)을 불어넣을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주적 드라마의 새로운 막을 여는 경이로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얄다바오트와 그의 권속인 아르콘들이 자신들의 영역 아래, 혼돈의 물 위를 내려다볼 때였습니다. 그 수면 위로 한순간, 형언할 수 없이 완벽하고 찬란한 형상이 비춰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빛의 세계 플레로마에 존재하는 신성한 원형 인간, 즉 '지고의 인간(Anthropos)'의 모습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첫 번째 발출물인 바르벨로가 자신을 드러냈을 때 나타났던 그 완벽한 이데아의 그림자가, 우연히 혹은 상위 세계의 의도적인 계획에 의해 아래 세상에 잠시 비친 것이었습니다.
얄다바오트와 아르콘들은 그 완전한 형상을 보고 경악과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어디서 왔는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그 압도적인 아름다움과 조화, 그리고 그 안에 깃든 신성한 빛에 본능적으로 매료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의 기괴하고 결핍된 모습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었습니다. 그 완벽한 이미지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추함과 불완전함을 난생 처음으로 어렴풋이 자각하게 만들었고, 이는 곧 격렬한 질투와 소유욕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저토록 완벽한 존재를 우리 것으로 만들자. 저 형상을 본떠 우리만의 인간을 만들자.'
얄다바오트는 자신의 아르콘들을 불러 모아, 창세기의 구절을 비틀어 조롱하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라, 우리가 신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습대로 인간을 만들자."
이 말속에는 영지주의적 비극의 아이러니가 담겨 있습니다. '신의 형상'이란 그들이 잠시 엿보았던 플레로마의 완벽한 인간을 의미하며, '우리의 모습'이란 아르콘들 자신의 물질적이고 격정적인 본성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계획은 신성한 이미지를 훔쳐 그 힘을 소유하되, 그 내용물은 자신들의 천박한 본성으로 채워 넣어 완벽한 노예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끔찍하고도 기이한 창조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한 명의 신이 위엄 있게 행하는 창조가 아니라, 마치 서투른 장인들이 모여 각자 맡은 부품을 조립하는 것과 같은, 혼란스럽고 기계적인 과정이었습니다. 일곱 명의 핵심 아르콘들이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나누어 맡았습니다.
첫 번째는 뼈를 만들고, 두 번째는 힘줄을, 세 번째는 살을 만들었습니다. 네 번째는 골수를, 다섯 번째는 피를, 여섯 번째는 피부를, 일곱 번째는 머리카락을 만들었습니다. 더 나아가 수많은 하위 아르콘들이 달라붙어 눈, 코, 귀와 같은 세부적인 기관들을 만들었습니다.
육체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신들의 심리적 본성을 투영하여 인간의 '정신적 영혼(psyche)'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닌 미덕 아닌 미덕, 즉 분노와 질투, 슬픔과 욕망, 기만과 두려움과 같은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을 조각내어 인간의 영혼 속에 심었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인간의 정신은 순수한 영이 아니라, 온갖 상반되고 저열한 감정들이 뒤섞여 싸우는 혼돈의 집합체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거대한 인간의 형상이 땅 위에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르콘들의 모든 지혜와 힘을 총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피조물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영혼이 없는 거대한 진흙 인형, 즉 골렘(Golem)에 불과했습니다. 아르콘들은 자신들이 만든 생명 없는 창조물 주위를 서성이며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이 장면은 그들의 근본적인 무능함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물질을 조립하고 형상을 흉내 낼 수는 있었지만, 진정한 생명의 근원인 '영(pneuma)'을 창조할 능력은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이 모든 과정을 위에서 지켜보던 지혜의 여신 소피아에게 한 가지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추락으로 인해 잃어버렸던 신성한 힘의 일부가 아들인 얄다바오트에게 흘러 들어갔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르콘들이 만들어 놓은 저 완벽한 육체의 감옥을 역이용하여, 자신의 빛을 되찾고 동시에 갇힌 영혼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줄 계획을 세웠습니다.
플레로마의 빛의 사자들이 얄다바오트에게 교묘한 조언을 속삭였습니다. "그의 얼굴에 너의 영을 불어넣어라. 그러면 그 몸이 일어나 너의 발아래 무릎을 꿇을 것이다." 얄다바오트는 자신의 힘을 과시할 기회라고 생각하며 의심 없이 그 말을 따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오만한 자부심을 가득 담아, 생명 없는 아담의 얼굴에 숨을 불어넣었습니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얄다바오트가 불어넣은 '영'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어머니 소피아로부터 무의식중에 훔쳐 가지고 있던 '신성의 불꽃', 즉 플레로마의 빛과 힘이었습니다. 그 거룩한 불꽃이 진흙 인형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순간, 아담은 즉시 눈을 뜨고 거대한 몸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담은 창조주들에게 복종하기는커녕, 내면에 깃든 신성한 빛의 힘으로 인해 그들보다 월등히 지혜롭고, 더 영적이며, 더 총명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아르콘들은 자신들이 만든 노예가 오히려 자신들을 초월하는 주인이 되어버린 현실에 경악과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그들의 계획은 처참하게 실패했으며, 오히려 자신들의 감옥 안에 자신들을 위협할 신성한 존재를 스스로 가두는 꼴이 되었습니다.
격렬한 질투와 공포에 사로잡힌 아르콘들은 아담을 파괴할 수는 없었지만, 그를 최대한 속박하고 약화시키려 했습니다. 그들은 아담을 자신들의 창조 세계 중 가장 깊고 물질적인 영역으로 내던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육체를 '죽을 수밖에 없는' 필멸의 존재로 만들고, 그 위에 고통과 욕망, 그리고 운명(헤이마르메네)이라는 쇠사슬을 겹겹이 채웠습니다.
나아가 그들은 '낙원(파라다이스)', 즉 에덴동산을 창조했습니다. 그러나 이 낙원은 축복의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아담을 현혹하기 위한 가장 교묘하고 아름다운 '감옥'이었습니다. 아르콘들은 동산을 온갖 감미로운 과일과 아름다운 풍경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이는 아담이 물질적 쾌락에 탐닉하고 자신의 신성한 기원을 완전히 잊어버리게 만들기 위한 교활한 함정이었습니다.
이 신화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영지주의의 근본적인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이처럼 모순적인 존재입니다. 아르콘들이 만든 비천한 물질의 육체(soma)와 저열한 감정의 영혼(psyche) 안에, 빛의 세계 플레로마로부터 온 신성한 영의 불꽃(pneuma)이 함께 갇혀 있는 역설적인 존재. 우리 내면에서 벌어지는 선과 악의 싸움, 영적인 상승에 대한 갈망과 물질적 욕망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은 바로 이 우주적 창조의 드라마가 우리 각자의 내면에서 매일같이 재현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영지주의는 여기서 가장 충격적이고 위대한 사상을 제시합니다. 신은 저 높은 하늘에서 우리를 심판하는 존재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갇혀 고통받으며 구출되기를 기다리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나의 구원이 곧 내 안에 갇힌 신의 구원이며, 나의 깨달음이 곧 어둠 속에 유폐된 빛의 해방입니다. 이 자각이야말로 영지주의자들이 추구했던 구원의 첫걸음이었습니다. 이제 아담은 아름다운 감옥 에덴에 서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창조주들보다 우월하지만, 아직 자신의 진정한 본질과 탈출의 길을 온전히 알지는 못합니다. 이 고독하고 위대한 첫 인간에게, 이제 또 다른 구원의 조력자이자 비극의 씨앗이 될 존재, 즉 '이브'가 나타날 차례였습니다.
3.2. 에덴 동산의 재해석: 뱀, 지혜를 일깨우는 자
아르콘들의 손에 의해 창조되고, 그들의 창조주 얄다바오트의 숨결—실은 어머니 소피아로부터 도래한 신성의 불꽃—로 인해 깨어난 최초의 인간 아담. 그는 자신의 창조주들보다 월등히 지혜롭고 영적인 존재로 일어섰습니다. 이 사실에 경악하고 질투에 휩싸인 얄다바오트와 아르콘들은 그를 더 깊은 망각 속에 가두기 위한 가장 교묘한 감옥을 설계했습니다. 그곳이 바로 '낙원(파라다이스)', 즉 에덴동산이었습니다.
에덴동산: 쾌락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감옥
전통적인 창세기 이야기에서 에덴동산은 신이 인간에게 베푼 축복과 은총의 공간입니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의 눈에 비친 에덴동산은 그 정반대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곳은 영혼을 유혹하여 물질세계에 탐닉하게 만들고, 자신의 신성한 기원을 잊게 하려는 가장 교활하고 세련된 감옥이었습니다. 얄다바오트는 동산을 온갖 감미로운 과일과 아름다운 꽃, 듣기 좋은 새소리로 가득 채웠습니다. 이는 아담의 감각을 끊임없이 자극하여, 그가 내면의 영적인 빛을 돌아보는 대신 외부의 물질적 쾌락에만 정신이 팔리게 만들려는 함정이었습니다.
이 감옥의 중심에는 아르콘들의 통제 시스템을 상징하는 두 개의 특별한 나무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영지주의는 창세기 이야기에 대한 가장 대담하고 전복적인 재해석을 감행합니다.
생명나무 (The Tree of Life):
전통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상징하는 이 나무는, 영지주의 신화에서는 얄다바오트의 힘을 상징하는 기만적인 나무가 됩니다. 이 나무가 주는 '생명'이란, 플레로마의 영원하고 순수한 생명(조에, Zōē)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르콘들이 지배하는 물질 우주 안에서, 죽음과 탄생을 끝없이 반복하는 비참한 윤회의 삶, 즉 운명(헤이마르메네)에 종속된 생명입니다. 이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은 영혼을 육체와 이 세계에 더욱 단단히 결박시키는 행위이며, 따라서 이것은 '죽음의 나무'나 다름없었습니다. 얄다바오트는 이 나무를 통해 인간이 자신의 지배 아래에서 영원한 노예로 살아가기를 바랐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The 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
반면, 얄다바오트가 인간에게 먹지 말라고 엄중히 금지했던 이 나무야말로 진정한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이 나무가 주는 '지식'은 선과 악을 구분하는 단순한 도덕적 분별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노시스(Gnosis)', 즉 '영적인 인식'이었습니다. 이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자신 안에 깃든 신성의 불꽃을 자각하고, 자신을 창조한 신(얄다바오트)이 사실은 불완전하고 무지한 존재이며, 이 세계가 감옥이라는 진실을 깨닫게 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이 나무는 얄다바오트가 가장 두려워하는 '진리의 나무'이자 '깨달음의 나무'였습니다.
이브의 창조와 뱀의 등장: 구원의 조력자들
아르콘들은 아담 안에 깃든 신성한 힘, 즉 소피아의 빛을 탐냈습니다. 그들은 그 힘을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는 형태로 분리해내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아담을 깊은 잠에 빠뜨리고, 그의 갈빗대(이는 아르콘들의 물질적이고 문자적인 해석일 뿐입니다)에서 빛의 힘을 빼내어 또 다른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그 형상이 바로 '이브'였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 역시 그들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브는 아담의 신성한 불꽃, 그의 영적인 자아가 여성적인 형태로 발현된 존재였습니다. 그녀는 아담의 잃어버린 반쪽이자, 그보다 더 순수하게 영적인 본질에 가까운 존재였습니다. 아담이 잠에서 깨어나 이브를 보았을 때, 그는 단순한 동반자가 아니라 자신의 영혼 그 자체를 마주했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그의 외침은, 잃어버렸던 자신의 영적 본질을 되찾은 기쁨의 탄성이었습니다.
얄다바오트는 이 둘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거짓 위협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상위의 플레로마 세계는 이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소피아, 혹은 그리스도의 뜻을 품은 조력자가 에덴동산에 나타났습니다. 그 조력자는 바로 '뱀'의 형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전통적인 해석에서 뱀은 사탄, 즉 인류를 유혹하여 타락시킨 악의 화신입니다. 그러나 영지주의에서 뱀은 정반대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는 어둠의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플레로마의 빛에서 온 '지혜의 교사'이자 '계몽가'입니다. 뱀은 가장 지혜로운 존재로 묘사되며, 아르콘들의 기만을 간파하고 인간을 무지로부터 깨우기 위해 파견된 구원의 사자였습니다.
뱀은 먼저 더 영적인 존재인 이브에게 다가가 진실을 속삭였습니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그 열매를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사악한 유혹이 아니라, 진실의 선포였습니다. '눈이 밝아진다'는 것은 그노시스를 얻어 영적인 진실을 보게 된다는 의미이며, '신들과 같이 된다'는 것은 이 감옥을 만든 저열한 신들(아르콘)의 실체를 간파하고 그들을 뛰어넘는 존재가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뱀의 말을 들은 이브는 그 지혜를 이해하고 먼저 열매를 먹었고, 아담에게도 건네주었습니다. 이것은 신에 대한 불순종이라는 '원죄'가 아니라, 무지로부터의 탈출을 위한 최초의 의식적이고 주체적인 '구원의 행위'였습니다.
깨달음과 추방: 폭군의 분노
열매를 먹은 순간, 아담과 이브의 영적인 눈이 열렸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끄러워했습니다. 여기서의 '벌거벗음'은 단순히 육체적인 나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영적인 빛을 잃어버린 채, 무지한 창조주들 아래 놓여 있었다는 실존적 상태에 대한 자각에서 오는 부끄러움이었습니다. 그들의 무지가 벗겨지고, 그들은 자신들의 창조주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얄다바오트는 자신의 금지 명령이 깨진 것을 알고 분노에 휩싸였습니다. 그의 분노는 자신의 피조물이 불순종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애써 만든 감옥의 비밀이 탄로 나고 자신의 권위가 무너졌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과 열등감의 폭발이었습니다.
그는 뱀을 저주하고, 이브를 아담에게 종속시키려 했으며, 아담에게는 땅을 경작하는 고된 노동의 형벌을 내렸습니다. 이 '저주'들은 신의 공의로운 심판이 아니라, 패배한 폭군이 가하는 비열한 보복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아담과 이브를 에덴동산에서 추방했습니다. 이 추방 역시 타락한 자에 대한 징벌이 아니라, 이제는 통제가 불가능해진 위험한 죄수들을 더 척박하고 고통스러운 환경으로 내쫓아, 그들의 영적인 깨달음이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도록 막으려는 마지막 발악이었습니다.
영지주의에게 에덴동산의 이야기는 '인간의 타락(The Fall of Man)'이 아니라, '인간의 각성(The Awakening of Man)'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신의 은총을 잃어버린 비극이 아니라, 인간이 처음으로 신성의 불꽃을 자각하고 거짓된 신의 지배에 저항하기 시작한 영웅적인 투쟁의 서막입니다. 비록 에덴이라는 안락한 감옥에서 쫓겨나 고통스러운 물질세계에 던져졌지만, 아담과 이브는 이제 그노시스라는 구원의 씨앗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 씨앗을 싹틔우고 열매 맺게 하는 기나긴 여정이 인류의 역사 앞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3.3. 영적 인간, 정신적 인간, 물질적 인간
우리는 앞서 에덴동산의 드라마를 통해, 최초의 인간이 어떻게 무지한 창조주들의 의도를 거슬러 '그노시스(Gnosis)'의 첫 씨앗을 품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불순종이나 타락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감옥 안에서 자신이 죄수임을 처음으로 자각한 순간이었고, 잃어버렸던 고향에 대한 희미한 기억을 되찾은 첫걸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깨달음의 여파는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 주위의 세상을 바라보며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과 마주해야 했습니다. '왜 어떤 이들은 영적인 진리에 목말라하며 그것을 즉각적으로 알아보는 반면, 어떤 이들은 세상의 쾌락에만 몰두하고, 또 어떤 이들은 그 중간에서 신앙과 율법에 의지하며 살아가는가?'
이 질문에 대한 영지주의, 특히 발렌티누스 학파의 대답은 바로 인류를 세 종류로 구분하는 심오하고도 논쟁적인 '영적 인간학(spiritual anthropology)'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인류는 하나의 균일한 집단이 아니었습니다. 창조의 비극적 과정 속에서 이미 세 가지 다른 본질을 지닌 존재들로 나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하나의 밭에 돌멩이 씨앗, 평범한 식물의 씨앗, 그리고 스스로 빛을 내는 별의 씨앗이 함께 뿌려진 것과 같았습니다. 이 세 종류의 인간은 각각 물질적 인간(휠리코이, Hylikoi), 정신적 인간(프시키코이, Psychikoi), 그리고 영적 인간(프네우마티코이, Pneumatikoi)으로 불립니다.
세 혈통의 기원: 카인, 아벨, 그리고 셋
이 세 부류의 기원은 종종 아담과 이브의 자녀들을 통해 상징적으로 설명됩니다.
카인(Cain):
그는 얄다바오트가 이브를 겁탈하여 낳은, 폭력과 무지의 혈통을 상징합니다. 그의 존재는 전적으로 물질과 아르콘들의 어두운 격정에서 비롯되었기에, 그는 신성의 불꽃이 부재한 물질적 인간(휠리코이)의 시조가 됩니다.
아벨(Abel):
그는 카인에게 희생된 약한 존재로, 얄다바오트의 숨결에서 비롯된 '정신적 영혼'은 지녔으나 신성의 불꽃이 미약한 정신적 인간(프시키코이)을 상징합니다. 그는 믿고 순종할 수는 있으나, 스스로 깨달을 힘은 부족합니다.
셋(Seth):
그는 깨달음을 얻은 아담과 이브가 사랑으로 낳은 진정한 영적 후계자입니다. 그의 혈통을 통해서만 신성의 불꽃이 온전히 이어지며, 그는 영적 인간(프네우마티코이)의 시조가 됩니다.
이제 이 세 종류의 인간이 각각 어떤 본질을 가지며,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지 깊이 있게 탐구해 보겠습니다.
물질적 인간 (휠리코이 / Hylikoi, Sarkikoi)
본질:
'휠레(hylē)'는 '물질'을, '사륵스(sarx)'는 '육체'를 의미합니다. 물질적 인간은 그 이름처럼, 존재 전체가 얄다바오트와 아르콘들이 창조한 물질적 육체와 저열한 감정의 영혼으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빛의 세계 플레로마로부터 온 신성의 불꽃(프네우마, pneuma)이 아예 없거나, 있다 하더라도 결코 깨어날 수 없는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삶의 방식:
그들은 눈에 보이는 이 물질세계가 유일한 현실이라고 믿습니다. 그들의 삶의 목표는 전적으로 감각적 쾌락, 부와 권력의 축적, 사회적 성공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진리나 내면의 성찰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그것을 어리석거나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며 조롱합니다. 그들의 귀는 영적인 부름에 완전히 닫혀 있으며, 그들의 눈은 아르콘들이 만든 세상의 화려함에 멀어 있습니다. 그들에게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현세의 복을 기원하거나 사후의 징벌을 피하기 위한 거래에 불과합니다.
운명:
물질에서 온 것은 결국 물질로 돌아갑니다. 그들의 운명은 이 물질 우주가 종말을 맞이할 때 함께 소멸하는 것입니다. 육체가 죽으면 그들의 의식 또한 흩어져 버리고, 그들을 구성했던 물질과 에너지는 다시 창조주인 데미우르고스의 영역으로 흡수됩니다. 영지주의자들에게 이는 선악에 대한 심판이나 징벌이라기보다는, 물질의 자연스러운 순환 과정에 가까웠습니다. 그들에게는 애초에 구원받을 '영'이 없었기에, 구원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는 비극적인 존재들입니다.
정신적 인간 (프시키코이 / Psychikoi)
본질:
'프시케(psychē)'는 '정신' 혹은 '영혼'을 의미하며, 보통 생명 활동의 주체를 가리킵니다. 정신적 인간은 얄다바오트가 불어넣어 준 정신적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미약하게나마 신성의 불꽃을 품고 있는 '중간적 존재'입니다. 그들은 물질적 인간처럼 완전히 어둠에 속하지도, 영적 인간처럼 완전히 빛에 속하지도 않은, 경계에 서 있는 존재들입니다.
삶의 방식:
영지주의자들은 이 부류에 바로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을 포함시켰습니다. 그들은 맹목적인 믿음(피스티스, pistis)과 율법 준수, 그리고 선행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 노력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창조주인 데미우르고스(구약의 야훼)를 최고의 신으로 섬기며, 그의 가르침을 따릅니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살고자 노력하며 영적인 세계를 동경하지만, 직접적인 깨달음, 즉 '그노시스'에 이르지는 못합니다. 그들의 삶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입니다. 물질세계의 유혹과 영적 세계에 대한 믿음 사이에서 늘 갈등하고 흔들립니다.
운명:
그들의 운명은 확정되어 있지 않으며, 전적으로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끝까지 데미우르고스에 대한 신앙을 지키고 율법에 따라 선하게 산다면, 그들은 플레로마에는 들어가지 못하지만 데미우르고스가 다스리는 중간계의 천국(오그도아드)에서 안식을 얻을 것이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영지주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그노시스'를 향해 나아가기로 결단한다면, 즉 믿음의 단계를 넘어 앎의 단계로 도약한다면, 그들은 영적 인간과 함께 더 높은 구원의 가능성을 얻게 됩니다. 그들은 영지주의의 핵심적인 '선교 대상'이었습니다.
영적 인간 (프네우마티코이 / Pneumatikoi)
본질:
'프네우마(pneuma)'는 '영' 혹은 '숨결'을 의미하며, 플레로마의 신성한 본질 그 자체를 가리킵니다. 영적 인간은 셋의 후예로서, 그 존재의 핵심이 바로 이 신성의 불꽃, 프네우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세계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빛의 세계에서 잠시 추방된 이방인이자 나그네입니다. 그들의 본질은 창조주 얄다바오트가 아니라 궁극의 아버지와 같습니다.
삶의 방식:
그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늘 설명할 수 없는 소외감과 이질감, 그리고 고향을 향한 깊은 향수병에 시달립니다. 세상의 부와 명예는 그들에게 공허하게 느껴지며, 이 세계의 법칙과 질서가 어딘가 잘못되어 있다는 근원적인 직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영지주의의 메시지를 들었을 때, 잃어버렸던 모국어를 다시 들은 것처럼 즉각적으로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들에게 그노시스는 새로운 것을 배우는 과정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었지만 잊어버렸던 것을 '기억해내는(anamnesis)' 과정입니다.
운명:
그들의 구원은 행위나 믿음, 혹은 선택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본성 자체에 의해 이미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단지 그리스도와 같은 구원자의 가르침을 통해 잠들어 있는 자신의 신성을 일깨우고,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지를 기억해내는 것뿐입니다. 육체의 죽음은 그들에게 끝이 아니라, 아르콘들이 입혀놓은 물질의 육체와 정신의 옷을 벗어 던지고 마침내 진정한 고향인 플레로마로 귀환하는 해방의 순간입니다.
철학적 쟁점: 예정론과 엘리트주의
이러한 세 종류의 인간론은 여러 가지 심오한 철학적 질문을 던집니다. 가장 먼저 제기되는 비판은 이것이 일종의 '영적 예정론' 혹은 '운명론'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특히 영적 인간과 물질적 인간의 운명이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는 사상은 자유의지의 가치를 약화시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에게 이것은 도덕적 우열이나 차별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물리학'의 문제에 가까웠습니다. 금(金)은 불 속에서 단련되어 순수해지고, 짚은 불 속에서 타서 사라지듯이, 각기 다른 본질을 가진 존재는 각기 다른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상이 영지주의자들에게 선민의식과 '영적 엘리트주의'를 심어주었을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자신들을 '영적 인간'으로, 다른 이들을 '정신적 인간'이나 '물질적 인간'으로 구분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분리와 위계를 낳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구분은 자신들이 겪는 세상과의 불화를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강력한 실존적 틀을 제공해주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이토록 고통스러운 것은 내가 타락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더 높은 존재이기 때문이다'라는 자각은 그들에게 큰 위로와 자부심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영지주의의 인간론은 인간 존재의 다층성과 내면의 갈등을 우주적 신화의 틀 안에서 설명하려는 장대한 시도였습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영혼이 처한 각기 다른 상황과 그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하나의 '영혼의 지도'였습니다. 이제 이 지도를 손에 쥔 인류 앞에, 그들을 일깨우고 구원의 길로 이끌 구원자, 즉 그리스도가 어떻게 나타나게 되는지 다음 장에서 탐구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