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심연 속의 빛, 궁극의 신

침묵 속의 아버지

by 이호창

제1장: 심연 속의 빛, 궁극의 신


1.1. 이름 붙일 수 없는 존재, 침묵 속의 아버지


우리가 '신'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순간, 우리의 정신은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된 수많은 이미지와 개념들을 반사적으로 소환합니다. 누군가는 옥좌에 앉아 턱수염을 쓰다듬는 위엄 있는 노왕(老王)을, 누군가는 푸른 하늘 위에서 만물을 자애롭게 내려다보는 아버지를, 또 다른 누군가는 무서운 번개를 휘두르며 율법을 선포하는 준엄한 재판관을 떠올릴 것입니다. 이 모든 이미지는 인간의 경험과 언어, 그리고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주 안에서 신을 정의하고, 우리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속성들—전지(全知), 전능(全能), 선(善), 정의(正義), 사랑—을 그에게 투사합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인간은 미지의 공포를 견디기 어려워하며, 이해할 수 없는 존재 앞에서 안정감을 찾기 위해 익숙한 이름과 형태를 부여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진정한 궁극의 신이 이 모든 인간적 개념과 이미지의 저편에,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상태마저 초월한 곳에 존재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만약 신이 우리가 사용하는 '존재'라는 단어의 그물로는 결코 붙잡을 수 없는 실체라면, 우리의 모든 찬사와 기도는 허공 속의 메아리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요?


영지주의(Gnosticism)의 여정은 바로 이처럼 기존의 모든 신앙적 토대를 뒤흔드는, 전복적이고 아찔한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그들이 말하는 궁극의 신, 참된 아버지는 우리가 아는 모든 신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 첫 번째 특징은 '알 수 없음(unknowability)'과 '이름 붙일 수 없음(unnamability)'입니다. 영지주의 문헌 『요한의 비밀 가르침(Apocryphon of John)』의 서두는 이 궁극적 실체에 대한 묘사로 가득 차 있지만, 그 묘사는 무언가를 긍정하는 '긍정의 길(Via Positiva)'이 아니라, 끊임없이 부정하는 '부정의 길(Via Negativa)'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는 마치 조각가가 대리석 덩어리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모두 쪼아내어 마침내 드러나는 형상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의 언어가 만들어낸 모든 규정들을 하나씩 떼어냄으로써, 그 모든 규정이 사라진 자리에 침묵으로 현존하는 실체를 드러내려 했습니다.


『요한의 비밀 가르침』은 선언합니다. 그는 완전함 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영(靈)입니다. 그를 '신'이라고 부르거나, 신과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신보다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떤 통치권 안에 있지도 않으며, 시간을 초월했고, 어떠한 성질(質)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중립적이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선'이라는 개념조차 악이라는 반대 개념에 의존하는 상대적 규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형태도, 색깔도, 지성도, 육체도 없는 순수한 존재 그 자체입니다.


이러한 급진적인 부정은 단순히 신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적 표현을 넘어섭니다. 이것은 인간 이성의 한계에 대한 처절한 고백이자,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고 말할 때, 그것은 대상을 다른 것과 비교하고, 분류하고, 정의하는 과정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궁극의 아버지는 모든 것의 근원이기에, 그 자신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Monad)입니다. 따라서 그를 이해하려는 모든 지성적 노력은 시작부터 실패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마치 2차원의 평면에 사는 존재가 3차원의 '높이'라는 개념을 결코 이해할 수 없듯이, 유한한 인간 정신은 무한한 근원을 담아낼 수 없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이 막다른 길에서,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몇 가지 시적인 은유를 사용하여 그 불가해한 실체를 가리키려 했습니다. 그들은 그를 '심연(뷔토스Bythos)'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끝을 알 수 없는 깊이, 모든 것이 그로부터 나왔으나 그 자체는 결코 고갈되지 않는 무한한 잠재력의 바다를 의미합니다. 이 심연은 텅 빈 공허(void)가 아니라, 모든 존재의 씨앗과 가능성을 품고 있는 풍요롭고 생명력 넘치는 어둠, 즉 '잉태하는 침묵'입니다. 또한 그들은 그를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남성이라는 성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근원(Source)'이라는 관계적 의미를 지닙니다. 그는 의지를 가지고 "빛이 있으라"고 명령하여 창조하는 아버지가 아니라, 마치 빛이 광원(光源)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듯, 모든 존재가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발출(emanation)'되는 아버지입니다. 그의 존재 자체가 곧 창조이며, 그는 어떠한 행위나 의도 없이도 자신으로부터 빛의 세계 '플레로마(Pleroma)'를 흘려보냅니다.


하나의 근원을 향한 인류의 보편적 통찰


그런데 궁극적 실재를 이처럼 언어와 개념 너머의 영역으로 상정하려는 시도는 비단 영지주의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인류의 영적 역사 전반에 걸쳐, 서로 다른 문화와 시대의 신비가와 철학자들은 최고 실재의 심연을 들여다볼 때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이는 마치 세계 각지의 등반가들이 각자 다른 경로를 통해 정상에 올랐지만, 결국 모두가 같은 하늘 아래 침묵하는 풍경을 마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 철학자 플로티누스(Plotinus)는 만물의 궁극적 근원을 '일자(一者, The One)'라고 불렀습니다. 이 '일자'는 존재와 사유를 초월하며, 어떠한 규정도, 분열도 없는 완전한 하나입니다. 그는 "일자는 모든 존재물이지만, 그 어떤 존재물도 아니다"라고 말하며, 일자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지만 우리 감각과 이성으로 파악되는 '존재'의 범주에는 속하지 않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영지주의의 '아버지'처럼, 플로티누스의 '일자' 역시 의지나 행위를 통해 세계를 창조하지 않습니다. 세계는 마치 태양에서 빛이 흘러넘치듯, 가득 찬 잔에서 물이 넘쳐흐르듯, '일자'의 완전함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유출(emanation)됩니다. 신플라톤주의의 여정은 이처럼 근원을 향한 사랑과 그리움(에로스)을 동력으로 삼아, 관상과 철학적 사유를 통해 다시 '일자'에게로 상승하려는 황홀경의 철학입니다.


인도의 아드바이타 베단타(Advaita Vedānta) 철학에서는 우주의 궁극적 실체를 '브라만(Brahman)'이라고 부릅니다. 특히 속성과 형태가 없는 최상의 브라만, '니르구나 브라만(Nirguna Brahman)'은 영지주의의 '알 수 없는 아버지'와 깊이 공명합니다. 우파니샤드는 브라만에 대해 "네티, 네티(Neti, Neti)", 즉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며 부정의 길을 통해 그 실체에 접근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다채로운 현상 세계는 '마야(Māyā)'라는 거대한 환영 혹은 신의 장막에 가려진 브라만의 일시적인 모습일 뿐입니다. 진정한 실체는 오직 이 모든 분별을 넘어선 순수 의식인 브라만뿐이며, 우리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참된 자아 '아트만(Ātman)' 역시 본질적으로는 브라만과 동일하다고 가르칩니다. 즉, "그대가 바로 그것이다(Tat Tvam Asi)"라는 깨달음을 통해 환영의 장막을 걷어내고 근원과의 합일을 이루는 것이 구원입니다.


중국의 도교(Taoism)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노자(老子)가 쓴 『도덕경(道德經)』의 첫 구절은 영지주의의 핵심 사상을 그대로 압축해 놓은 듯합니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道)는 영원한 도가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도는 만물이 태어난 근원이지만 이름도, 형태도 없는 '무(無)'의 상태로 존재합니다. 그것은 스스로 그러한 '자연(自然)'의 법칙이며, 모든 것을 낳고 기르지만 소유하거나 주장하지 않습니다. 도교의 현자는 인위적인 노력을 그치고 '무위(無爲)'의 자세로 도의 흐름에 자신을 맡김으로써 도와 하나가 되려 합니다.


유대교 신비주의인 카발라(Kabbalah)에서도 궁극의 신성은 모든 속성과 이름 너머에 있는 '아인 소프(Ein Sof)', 즉 '무한(The Infinite)'으로 묘사됩니다. '아인 소프'는 신이 세피로트(Sefirot)라는 열 개의 속성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기 이전의 상태로, 인간의 이해를 완벽하게 초월하는 순수한 무(無)이자 무한한 빛(Or Ein Sof)입니다. 카발라는 '침춤(Tzimtzum)'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통해, 무한한 근원이 스스로를 '수축'하고 '움츠러듦'으로써 비로소 유한한 세계가 존재할 공간이 생겨났다고 설명합니다.


영지주의만의 극적인 차이: 우주적 비극


이처럼 여러 위대한 영적 전통들이 궁극의 근원을 '침묵', '심연', '무(無)', '하나'와 같이 인간의 언어를 넘어서는 개념으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영지주의는 인류의 보편적인 신비주의적 통찰과 궤를 같이합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지점에서 영지주의는 다른 모든 전통과 갈라서는, 독자적이고도 충격적인 길을 걷게 됩니다. 그 차이는 바로 우주를 바라보는 근본적인 '태도'와 '분위기'에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대부분의 전통에서, 현상 세계는 궁극적 근원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유출되었거나, 그 신성의 아름다움을 불완전하게나마 반영하는 곳으로 여겨집니다. 그 과정이 자연스럽고 필연적이며, 때로는 신의 유희나 사랑의 표현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즉, 근원과 세계 사이에는 단절이 아닌 연속성이 있으며, 세계는 근본적으로 선하거나 최소한 중립적인 공간입니다.


그러나 영지주의 신화에서 이 세계의 창조는 결코 자연스럽거나 선한 과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완전한 빛의 세계에서 벌어진 하나의 실수, 하나의 비극적 사고의 결과물입니다. 영지주의 신화에 따르면, 이 물질 우주는 침묵의 아버지가 직접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버지로부터 발출된 하위의 신적 존재 '소피아(Sophia, 지혜)'의 잘못된 열망으로 인해 빛의 세계(Pleroma) 바깥의 어둠 속에서 태어난, 미숙하고 오만한 창조주 '데미우르고스(Demiurge)'의 작품입니다. 따라서 이 세계는 진정한 신의 모상이 아니라, 무지한 하위 신이 만들어낸 불완전하고 결함투성이인 모조품이자 영혼의 감옥입니다.


바로 이 '우주적 실수'라는 극적인 서사가 영지주의 사상의 핵심이자 가장 큰 특징입니다. 다른 전통들이 '하나'에서 '다수'로의 전개를 비교적 평화롭고 자연스럽게 설명하는 반면, 영지주의는 그 과정에 갑작스러운 단절과 추락, 비극이라는 요소를 도입합니다. 이는 마치 완벽한 교향곡이 연주되던 중, 하나의 악기가 끔찍한 불협화음을 내면서 전체 조화가 깨지고 그 불협화음이 스스로를 완벽한 음악이라 착각하며 또 다른 소음의 세계를 만들어낸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세상과의 불화와 소외감, 부조리와 고통은 바로 이 근원적인 비극, 즉 우리의 신성한 불꽃이 거짓된 세계에 감금되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이 장에서 우리가 확인한 '이름 붙일 수 없는 아버지'는 단순히 철학적인 개념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탈출해야 할 이 세계와 우리가 돌아가야 할 진정한 고향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영지주의 구원론 전체의 출발점이자 최종 목적지가 됩니다. 다른 전통들이 이 세계 안에서 혹은 이 세계와의 조화를 통해 근원으로 돌아가는 길을 제시한다면, 영지주의는 이 세계 자체를 거부하고 그것을 넘어서려는 혁명적인 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영혼의 고향을 향한 그리움은 더 이상 막연한 감상이 아니라, 적진에 포로로 잡힌 병사가 고국을 그리워하는 처절한 실존적 외침이 됩니다.


1.2. 빛의 충만, 플레로마(Pleroma)와 아이온(Aeon)들의 발출


우리는 앞서 모든 이름과 개념 너머에 존재하는 궁극의 실체, '이름 붙일 수 없는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어떠한 필요도, 결핍도 없는 완전한 충족 상태이며, 영원한 침묵과 평온 속에 거하는 절대적 하나, 심연(Bythos) 그 자체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근원적인 질문이 생겨납니다. 이처럼 완벽하게 자기 충족적이고, 어떠한 외부도, 변화도 필요 없는 순수한 하나로부터 어떻게 '다수(多數)'의 세계가, 즉 우리가 논하려는 신적인 존재들의 영역이 나타날 수 있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창조(creation)'라는 익숙한 개념을 잠시 내려놓고, '발출(emanation)'이라는 새로운 렌즈를 꺼내 들어야 합니다. 창조가 보통 외부의 재료를 사용하거나(demiurgic creation), 무(無)로부터 의지를 통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creatio ex nihilo) 행위를 의미한다면, 발출은 근원의 본질이 줄어들거나 변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흘러넘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이는 마치 태양이 스스로를 소모하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빛과 열을 발산하는 것과 같고, 향기로운 꽃이 자신의 본질을 잃지 않으면서 주위 공간을 향기로 가득 채우는 것과 같습니다. 샘물이 마르지 않고 계속해서 시냇물을 흘려보내는 것처럼, 침묵의 아버지는 자신의 완전함이 너무나도 충만했기에, 그 신성한 잠재력이 바깥으로 흘러넘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빛의 세계, '플레로마(Pleroma)'의 시작이었습니다.


플레로마는 그리스어로 '충만' 혹은 '가득 참'을 의미합니다. 이곳은 단순한 공간적 장소가 아니라, 궁극적 신의 모든 잠재적 속성들이 온전히 발현되어 있는 신성한 실재의 총체입니다. 이곳에는 어둠이나 결핍, 죽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순수한 빛과 생명, 지성과 기쁨만이 영원한 춤을 추고 있을 뿐입니다. 이 플레로마를 구성하는 개별적인 신성한 실체들이 바로 '아이온(Aeon)'입니다. 아이온은 '영원', '시대', 혹은 '생명력'을 의미하는 단어로, 단순한 천사나 신들이 아니라, 아버지의 본질을 구성하는 영원한 원리이자 살아있는 관념들입니다.


최초의 발출: 생각(엔노이아)과 바르벨로(Barbelo)


심연 속에서 홀로 완전했던 아버지가 자신을 사유(思惟)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자신을 되돌아보는 순간, 그의 첫 번째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 최초의 생각, 즉 '엔노이아(Ennoia)'는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아버지와 동등한 신성을 지닌 독립된 실체로 나타났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모습을 비추는 완벽한 거울이자, 그의 모든 잠재력을 담고 있는 자궁이었습니다.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나온 첫 번째 존재이자, 이후의 모든 아이온들을 잉태하는 위대한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다양한 영지주의 문헌에서 이 최초의 여성적 아이온은 여러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불립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이름이 '바르벨로(Barbelo)'입니다. 바르벨로는 '넷 안에 계신 신(God in Four)'이라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하며, 그 자체로 신성한 사위(四位)의 신비를 품고 있습니다. 그녀는 '최초의 인간', '성령', '세 겹의 남성', '처녀의 영' 등으로 칭송받으며, 모든 신성과 지혜의 원천으로 묘사됩니다. 아버지가 순수한 잠재성이라면, 바르벨로는 그 잠재성이 발현되는 첫 번째 현실태(現實態)입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침묵에 대한 첫 번째 응답이며, 보이지 않는 근원을 볼 수 있는 형상으로 드러내는 첫 번째 빛입니다.


플레로마의 구조: 짝(시리기스)과 신성한 원리


바르벨로의 탄생과 함께 플레로마는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이 전개 과정의 핵심적인 원리는 '시리기스(Syzygy)', 즉 '짝'의 원리입니다. 아이온들은 홀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서로를 보완하는 남성적 원리와 여성적 원리의 한 쌍으로 발출됩니다. 이는 플레로마가 역동적인 균형과 조화 위에 세워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일반적으로 남성적 아이온은 능동적이고 형식적인 원리를, 여성적 아이온은 수용적이고 생성적인 원리를 상징합니다.


영지주의 학파마다 아이온의 수와 이름, 계보가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지만, 가장 체계적인 형태 중 하나인 발렌티누스파의 모델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플레로마는 총 30개의 아이온으로 구성됩니다. 이들은 크게 세 그룹—오그도아드(Ogdoad, 8), 데카드(Decad, 10), 도데카드(Dodecad, 12)—으로 나뉩니다.


오그도아드(Ogdoad): 신성의 핵심, 여덟 아이온


오그도아드는 플레로마의 가장 심오하고 근원적인 영역을 구성하는 네 쌍의 아이온입니다. 이들은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 신성한 원리들입니다.


제1의 짝:

심연 (뷔토스, Bythos) & 침묵 (시게, Sigē) / 또는 아버지 (프로파토르, Propator) & 생각 (엔노이아, Ennoia) 모든 것의 시작입니다. 보이지 않고 알 수 없는 근원(심연/아버지)과, 그 자신을 비추는 최초의 자각이자 잠재력(침묵/생각)의 짝입니다. 이 둘은 사실상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실체이며, 모든 발출의 근원입니다.


제2의 짝:

마음 (누스, Nous) & 진리 (알레테이아, Alētheia) 아버지가 자신을 사유하자, 그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인 '마음(누스)'이 나타났습니다. '누스'는 '독생자(모노게네스, Monogenes)'라고도 불리며, 아버지를 직접적으로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아이온입니다. '진리(알레테이아)'는 바로 그 마음이 파악하고 인식하는 내용, 즉 아버지의 진실된 본질입니다. 마음은 진리 없이는 공허하고, 진리는 마음 없이는 인식될 수 없습니다. 이 둘은 앎의 주체와 객체의 원형적 합일을 상징합니다.


제3의 짝:

말씀 (로고스, Logos) & 생명 (조에, Zōē) '마음'이 파악한 '진리'는 이제 외부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말씀(로고스)'은 바로 그 표현의 원리이며, 신성한 이성이자 질서입니다. 플레로마의 구조와 조화는 이 로고스를 통해 세워집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담고 있는 내용은 바로 '생명(조에)'입니다. 생명은 신성한 활력 그 자체이며, 말씀은 그 생명을 실어 나르는 매개체입니다. 말씀 없는 생명은 맹목적이고, 생명 없는 말씀은 공허한 울림일 뿐입니다.


제4의 짝:

인간 (안트로포스, Anthropos) & 교회 (에클레시아, Ekklēsia) 여기서의 '인간(안트로포스)'은 우리가 아는 지상의 인간이 아니라, 신성의 이상적인 원형, 완벽한 인간성의 이데아(Idea)를 의미합니다. 그는 플레로마의 모든 신적 속성을 조화롭게 구현한 존재입니다. '교회(에클레시아)'는 그의 짝으로서, 이 '인간' 안에 구현된 신적인 존재들의 이상적인 공동체, 즉 영적인 회중을 상징합니다. 개별적 원형으로서의 '인간'과 그가 속한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함께 발출되어 플레로마의 조화를 완성합니다.

이 여덟 아이온, 즉 네 쌍의 시리기스는 플레로마의 핵심부를 이루는 '성스러운 오그도아드'입니다.


데카드(Decad)와 도데카드(Dodecad): 충만의 완성


오그도아드에서 발출된 힘은 계속해서 플레로마를 확장시킵니다. '말씀'과 '생명'의 짝으로부터 열 개의 아이온(다섯 쌍)으로 이루어진 '데카드'가, '인간'과 '교회'의 짝으로부터 열두 개의 아이온(여섯 쌍)으로 이루어진 '도데카드'가 발출되어 총 30개의 아이온이 플레로마의 충만을 완성합니다. 이 아이온들의 이름은 더욱 구체적인 신성의 속성들을 나타냅니다.


데카드(Decad)의 다섯 쌍:

심오 (뷔티오스, Bythios) & 혼합 (믹시스, Mixis): 신성의 깊이와 그것이 어우러지는 조화.

불로 (아게라토스, Agēratos) & 합일 (헤노시스, Henōsis): 영원히 늙지 않는 신성과 그 안에서의 하나 됨.

자생 (아우토피에스, Autophyēs) & 환희 (헤도네, Hēdonē): 스스로 존재하는 신성과 그로부터 오는 영적 기쁨.

부동 (아키네토스, Akinētos) & 융화 (싱크라시스, Synkrasis): 흔들림 없는 신성의 본질과 그것의 완전한 어우러짐.

독생 (모노게네스, Monogenes) & 행복 (마카리아, Makaria): 유일무이한 신성과 그 지극한 복됨.


도데카드(Dodecad)의 여섯 쌍:

위로자 (파라클레토스, Paraklētos) & 믿음 (피스티스, Pistis): 영혼을 돕는 신성과 그에 대한 신뢰.

아버지 같음 (파트리코스, Patrikos) & 희망 (엘피스, Elpis): 아버지의 속성과 근원을 향한 소망.

어머니 같음 (메트리코스, Mētrikos) & 사랑 (아가페, Agapē): 어머니의 속성과 이타적인 신적 사랑.

영원한 마음 (아에이누스, Aeinous) & 지성 (시네시스, Synesis): 끊임없는 신적 사유와 그것의 명철한 이해력.

교회 같음 (에클레시아스티코스, Ekklēsiastikos) & 복됨 (마카리오테스, Makariotēs): 신성한 공동체의 속성과 그 안의 행복.

갈망된 자 (텔레토스, Thelētos) & 지혜 (소피아, Sophia): 모든 아이온이 갈망하는 대상과, 그것을 이해하려는 지혜.


이처럼 플레로마는 신성한 원리들이 정교한 그물망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는, 살아 숨 쉬는 유기체와 같습니다. 이 이름들은 단순한 명칭이 아니라,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각각의 힘이자 인격이며, 실재의 근본적인 차원들입니다.


플레로마에서의 삶: 빛과 관상, 그리고 위기


플레로마 안에서 아이온들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그것은 영원한 관상(contemplation)과 찬미의 삶입니다. 모든 아이온들은 자신을 발출해 준 근원, 즉 궁극의 아버지를 향해 끊임없이 시선을 고정합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무한한 영광을 관상하며 완전한 기쁨과 평화를 누리고, 서로의 빛을 반사하며 조화로운 교향곡을 연주합니다. 이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투명하게 서로를 비추며, 어떠한 비밀이나 오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완벽한 조화 속에는 미세한 균열의 씨앗이 잠재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앎의 위계'였습니다. 오직 '마음(누스, Nous)'만이 아버지를 직접적으로,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그보다 하위의 아이온들은 아버지를 직접 볼 수 없고, 오직 '마음'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상위의 아이온을 통해 하위의 아이온으로 지식이 전달될수록, 아버지의 빛은 희미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하위 아이온들의 마음속에는 아버지를 직접 알고자 하는, 근원의 무한함을 스스로 파악하고 싶다는 열망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이 위험한 열망이 가장 극적으로 타오른 존재가 바로 도데카드의 마지막 아이온, 가장 젊고 어리며 플레로마의 가장 바깥 경계에 위치한 '소피아(Sophia, 지혜)'였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지혜'였지만, 그녀의 지혜는 아직 미성숙했습니다. 그녀는 근원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과 사랑이 가장 격렬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짝인 '갈망된 자(텔레토스, Thelētos)'의 도움 없이,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거슬러,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 근원의 위대함을 파악하고 그와 동등한 존재를 낳으려는 불가능한 시도를 감행합니다.


소피아의 이 행위는 악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너무나도 깊고 격렬했기에 저지른, 일종의 고귀한 실수였습니다. 그녀는 '마음(누스, Nous)'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착각했고, 플레로마의 법칙인 '짝을 통한 발출'을 어기고 홀로 무언가를 잉태하려 했습니다. 그녀의 이 과도한 열정(파토스, pathos)은 결국 플레로마의 완전한 조화를 깨뜨리는 거대한 우주적 비극의 서막이 되었습니다. 그녀가 자신의 한계를 넘어 아버지를 모방하려 했을 때, 그녀가 낳은 것은 빛의 세계에 속한 완전한 아이온이 아니라, 형체도 없고 불완전하며 빛의 세계를 알지 못하는, 일종의 '유산(abortion)'과도 같은 끔찍한 존재였습니다.


플레로마의 완전함 속에서 이질적인 '결핍'과 '무지'가 탄생한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소피아는 깊은 슬픔과 고통, 공포에 휩싸여 플레로마의 경계 바깥,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의 영역으로 추방되거나 추락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가 낳은 그 무지하고 오만한 창조물이 바로 물질세계를 만든 장본인, '데미우르고스(Demiurge)'입니다.


이처럼 영지주의 신화에서 플레로마는 단지 이상적인 천상 세계를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신성한 불꽃의 고향이자, 우리가 잃어버린 완전함의 기억입니다. 동시에, 그 완벽함 속에 내재된 미세한 균열, 즉 한계를 넘어서려는 '소피아'의 비극적 열망을 통해, 이 세계의 고통과 부조리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거대한 드라마의 무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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