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주의 신화

추락한 세계와 감춰진 빛의 이야기

by 이호창

신화 - 추락한 세계와 감춰진 빛의 이야기


세상을 뒤집는 신화: 영지주의 창조 이야기


초기 기독교가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가던 시절, 유독 영지주의를 특별하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그들이 품고 있던 경이로운 창조 신화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아는 구약의 창세기 내용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가히 충격적인 재해석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이야기를 그저 엉뚱하고 기괴하다며 외면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신성모독이라며 격렬하게 비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 이야기 속에서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해방감과 깊은 영적인 영감을 얻습니다.


이 신화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 무엇으로 기울든, 그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잠시 우리 자신의 시각을 내려놓고 영지주의자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이 신화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의 조건을 명확히 보여주고 그 근원을 설명하려는 하나의 진지한 시도였습니다.


왜 이토록 세상은 무의미한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가?

이 부조리한 현실을 넘어, 어떻게 하면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이 세계가 진정 우리가 속한 곳일까? 아니면 우리 삶의 배경에 늘 조용히 흐르는 이 절망감은, 우리의 진짜 고향이 다른 곳에 있음을 알리는 신호는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 어디에 속한 존재인가?


영지주의 창조 신화는 통일된 버전 없이, 수많은 문헌을 통해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은 제각각 흩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공통된 원형을 바탕으로 연주되는 여러 편의 변주곡과 같습니다.


그 핵심적인 줄거리를 간략히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태초의 아버지 신에게서 수많은 영적 존재, 아이온(Aeon)들이 흘러나왔고, 그들은 빛으로 가득 찬 천상계, 플레로마(Pleroma, '충만')를 이루었습니다. 그곳에는 신성한 어머니와 그리스도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마지막에 발출된 아이온 중 하나인 소피아(Sophia, 지혜)가 자신의 짝이나 아버지의 허락 없이, 홀로 새로운 존재를 낳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이렇게 태어난 존재는 플레로마의 완벽한 신들과는 전혀 다른, 무지하고 사악한 존재였습니다. 이가 바로 데미우르고스(Demiurge, '장인')이며, 영지주의자들은 그를 구약성서의 신과 같은 존재로 보았습니다. 데미우르고스는 자신의 뒤틀린 성품을 그대로 투영하여 이 물질세계를 창조했고, 그 과정에서 천상의 파편인 '신성의 불꽃'을 인간의 육체 안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와, 잠든 인간들을 일깨워 그들의 진정한 본성을 알려주고 이 감옥 같은 세계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마지막 희망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펼쳐질 이야기는 여러 버전 중에서도 고전 영지주의의 관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요한의 비밀 가르침』에 기록된 신화입니다.


『요한의 비밀 가르침』에 기록된 창조 신화


태초에, 오직 '하나(The One)', 아버지만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무한하셨으니, 앞서 아무것도 없어 그를 한계 지을 수 없었고,

그분은 헤아릴 수 없었으니, 앞서 아무것도 없어 그 깊이를 잴 수 없었으며,

그분은 보이지 않았으니, 그 누구도 그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영원히 존재하기에 영원했으며,

그 누구도 그를 온전히 이해하여 말할 수 없었기에 말로 표현할 수 없었고,

그 이전에 아무것도 없어 그에게 이름을 줄 수 없었기에 이름 붙일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아버지는 빛나는 영적인 물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분이 물속을 들여다보자 그 안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고, 그 모습은 살아있는 실체가 되어 아버지의 여성적 반쪽인 어머니, 바르벨로(Barbelo)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첫 번째 생각이자 지혜였기에 프로노이아(Pronoia, '선재 사상')라고도 불렸습니다.

바르벨로는 아버지께 '선재지식', '불멸', '영원한 생명', 그리고 '진리'를 청했고, 아버지는 기꺼이 허락했습니다. 네 신성한 힘이 생겨나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아버지가 바르벨로를 응시하자 그녀는 잉태했고, 아버지의 빛을 닮은 눈부신 불꽃 하나를 낳았습니다. 이 존재가 바로 '아들'이며, 아버지와 본질이 같았기에 아우토게네스(Autogenes, '스스로 생성된 자')라 불렸습니다. 그는 더 나아가 그리스도라 불렸으니, 이야말로 "모든 이름보다 위대한 이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선하심으로 아들에게 기름을 부어주었고, 아들은 아버지와 어머니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후로도 발출은 이어졌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마음'을 낳았고, '마음'은 다시 '의지'와 '말씀'을 낳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모든 힘과 진리의 주인으로 삼았고, 아들에게서 네 명의 위대한 광명체, 하르모젤(Harmozel), 오로이아엘(Oroiael), 다베이타이(Daveithai), 엘렐렛(Eleleth)이 나타났습니다. 그들 각각은 또 다른 세 아이온과 함께 빛났는데, '은총'과 '진리', '통찰'과 '지각', '이해'와 '사랑', '완전'과 '평화', 그리고 '지혜(소피아)'와 같은 신성한 힘들이었습니다.

마침내 "완전한 인간", 피게라다마스(Pigeradamas)가 나타나 아버지께 영광을 돌렸고, 그의 아들 셋(Seth)이 뒤를 이었습니다. 깨달음의 지혜, 즉 그노시스(Gnosis)를 가진 영혼들은 이들의 영역에서 보호받게 되었습니다.

막내 아이온이었던 소피아는 자신을 둘러싼 이 경이롭고 찬란한 존재들을 보며, 자신만의 아이온을 낳고 싶은 주체할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나 조급하고 충동적이었습니다. 자신의 신성한 짝과 상의하지도, 근원인 아버지의 동의를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힘을 물려받았던 그녀는 홀로 새로운 존재를 낳는 데 성공했지만, 그 결과는 끔찍했습니다. 다른 불멸의 존재들과는 전혀 닮지 않은, 흉측하고 뒤틀린 모습. 그것은 사자의 머리에 뱀의 몸을 하고 있었고, 두 눈은 번개처럼 이글거렸습니다.

두려움과 수치심에 휩싸인 소피아는, 플레로마의 다른 신들이 볼 수 없도록 자신의 아들을 빛의 세계 밖으로 내던졌습니다. 그녀는 빛나는 구름으로 아들을 감싸고 그 한가운데 옥좌를 놓아 숨긴 뒤, 얄다바오트(Yaldabaoth, "혼돈의 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는 이후로 사클라스(Saklas, "어리석은 자"), 사마엘(Samael, "눈먼 신")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얄다바오트는 "자신 안의 무지함과 교접하여" 열두 명의 아르콘(Archon), 즉 이 세상을 지배하게 될 악마적 존재들을 낳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원을 모르는 어리석음 때문에 오만함에 빠져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신이며, 나 외에 다른 신은 없다." 그리고는 자신 안에 어렴풋이 남아있는 플레로마의 기억을 흉내 내어 물질세계를 창조했습니다. 하지만 무지와 타락 속에서 만들어진 이 세계는 신성한 천상계의 비참하고 열등한 모조품일 뿐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본 소피아는 깊은 슬픔과 죄책감에 빠져 회개했습니다. 사랑으로 가득 찬 아버지는 그녀를 용서하고 다시 회복시켜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먼저 그녀는 자신의 실수를 속죄해야만 했습니다.

한편, 얄다바오트와 그의 아르콘들은 우연히 하늘의 아담 형상을 보고 그 모습에 매료되어 자신들만의 인간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만든 것은 생명 없는 진흙 인형일 뿐이었습니다. 그때 플레로마의 자비로운 존재들이 한 가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얄다바오트에게 나타나 아담의 얼굴에 숨을 불어넣으면 그가 살아날 것이라고 꾀었습니다. 얄다바오트가 그대로 행하자, 그의 안에 갇혀 있던 어머니 소피아의 힘이 빠져나와 아담에게로 들어갔고, 마침내 첫 인간에게 생명이 깃들었습니다. 그는 내면에 깃든 소피아의 힘 덕분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자신의 창조자들보다 더 현명하고 영적인 존재였습니다.

질투와 분노에 사로잡힌 아르콘들은 아담을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만들고, 에덴동산의 온갖 쾌락에 빠뜨려 자신의 신성한 본성을 잊게 만들려 했습니다. 그들은 아담의 신성한 통찰력을 빼내어 이브를 만들었지만, 아담은 그녀를 보자마자 자신의 영적 반쪽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속삭임에 따라 아담과 이브는 지식(그노시스)의 나무 열매를 먹었고, 창조자들을 뛰어넘는 더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증오와 시기심으로 들끓던 얄다바오트는 이브를 겁탈했고, 그 비극적인 관계에서 카인과 아벨이 태어났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이 둘을 구약의 신, 야훼와 엘로힘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이후 아담과 이브는 사랑으로 결합하여 깨달은 아들 셋(Seth)을 낳았습니다.

얄다바오트는 자신보다 우월한 존재들이 자신의 세계에 있다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망각의 물"을 마시게 하여 모든 것을 잊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노시스를 되살릴 신성의 불꽃은 그들 안에 여전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얄다바오트는 그것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인류 가운데 있는 그들의 영적 후손들은 여전히 그 구원의 빛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필요한 것은 오직 구원자, 즉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그 비밀을 다시 드러내 주시는 것뿐입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요한의 비밀 가르침의 배경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 그 자체로 영지주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핵심 신화였습니다. 그것은 흩어져 있던 영지주의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깃발이었고, 그노시스(영적 인식)나 반우주론(세상에 대한 저항)과 같은 그들의 세계관을 가장 잘 보여주는 창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화'였기에, 딱딱한 이론으로는 결코 담아낼 수 없는 생생한 활기와 가슴 시린 애절함으로 영혼에 직접 말을 걸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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