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이 우주가 신성한 섭리(pronoia)에 의해 다스려진다면, 그 필연적인 귀결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내 삶의 모든 순간, 내가 내리는 모든 선택, 그리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무겁고도 장엄한 결론이다. 스토아 철학은 이 결론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들은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의 빈틈없는 사슬, 즉 ‘운명 (Heimarmenē, εἱμαρμένη)’에 의해 결정된다는 엄격한 결정론 (determinism)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들의 결정론은 우리의 모든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무기력한 숙명론 (fatalism)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스토아 철학의 진정한 위대함은, 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의 강물 속에서 어떻게 인간의 자유의지가 존엄하게 헤엄칠 수 있는지에 대한 독창적이고도 유연한 길을 발견했다는 데 있다.
스토아 철학의 관점에서 운명은, 우리가 앞서 탐구했던 로고스, 섭리, 자연, 그리고 신과 동의어다. 운명은 외부에서 우리를 억압하는 변덕스러운 힘이 아니라,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합리적이고 필연적인 인과의 법칙 그 자체다. 우주의 시작과 함께 신성한 이성이 원인들의 첫 번째 고리를 만들었고, 그 이후의 모든 것은 앞선 원인의 필연적인 결과로서, 하나의 거대한 직물처럼 촘촘하게 짜여간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행위와,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는 행위 모두 이 거대한 운명의 직물에 이미 짜여있는 하나의 무늬다.
이러한 생각, 즉, ‘모든 것은 정해져 있다’는 스토아의 엄격한 결정론은, 즉시 우리의 상식과 의지에 하나의 거대한 반론을 불러일으킨다. 만약 내 삶의 모든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다면, 내가 노력하고, 고뇌하며, 더 나은 선택을 하려는 이 모든 의지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어차피 내가 부자가 될 운명이라면 게으름을 피워도 부자가 될 것이고, 가난해질 운명이라면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는 것이 아닌가? 병에서 회복될 운명이라면 의사를 찾을 필요가 없고, 죽을 운명이라면 의사도 소용없을 것이다. 그러니 선하게 살려고 애쓸 필요도, 악을 피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이 그저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고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바로 ‘게으른 논증 (lazy argument)’이라 불리는, 결정론을 무기력한 숙명론 (fatalism)으로 오해하는 데서 비롯된 치명적인 유혹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 유혹이 그들의 철학을 어떻게 왜곡하는지를 명확히 알았고, 운명이 작동하는 방식을 더 정교하게 설명함으로써 이 궤변을 극복하고자 했다.
스토아 철학자 크리시포스(Chrysippus)는 사건의 원인을 두 종류로 나누어 설명함으로써, 운명의 필연성 속에서 인간의 책임과 노력이 들어설 자리를 마련했다. 그에 따르면,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항상 두 종류의 원인이 함께 작동한다. 하나는 외부에서 오는 ‘주된 원인 (principal and perfect cause)’이고, 다른 하나는 그 사건을 겪는 사물 자체의 내부에 있는 ‘보조 원인 (proximate and auxiliary cause)’이다. 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원통 (cylinder)’의 비유를 들었다. 당신이 언덕 위에 놓인 원통을 손으로 민다고 생각해보자. 당신의 손길, 즉 외부에서 가해진 힘(주된 원인)이 없었다면 원통은 결코 굴러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원통이 ‘굴러가는’ 이유는 단순히 외부의 힘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은 원통이 ‘굴러갈 수 있는 둥근 형태’라는 고유한 본성(보조 원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똑같은 힘으로 네모난 돌멩이를 밀었다면, 그것은 결코 굴러가지 않았을 것이다. 돌멩이의 내적 본성은 ‘굴러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행동 역시 이와 같다. 외부의 사건들, 즉 운명은 우리를 미는 손길(주된 원인)과 같다. 그것은 우리에게 특정한 ‘인상 (phantasia)’을 던져준다. 그러나 그 인상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내적 본성, 즉 우리가 평생에 걸쳐 훈련하고 쌓아온 우리의 인격과 이성(보조 원인)에 달려있다. 누군가 나에게 모욕적인 말을 던지는 사건(주된 원인)은 운명에 의해 정해져 있다. 그러나 그 모욕 앞에서 이성을 잃고 분노로 폭발할 것인지(네모난 돌멩이의 반응), 아니면 그것을 무지한 자의 소리로 여기고 평온을 유지할 것인지(원통의 반응)는, 오직 나의 내면적 성품과 내가 내리는 ‘동의 (sunkatathesis)’에 달려있다.
따라서 ‘게으른 논증’의 오류는 명백해진다. 병에서 회복될 운명은, ‘내가 의사를 찾아가 치료를 받기로 선택하는 행위’를 이미 포함하고 있는 운명이다. 의사를 찾아가는 나의 노력은 운명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운명이 나를 회복으로 이끌기 위해 사용하는 인과의 사슬의 일부다. 나의 행동은 운명과 나의 자유의지가 ‘함께 협력하여(co-fated)’ 만들어낸 필연적인 결과다. 즉, 스토아 철학에서 우리의 선택과 행동은 운명을 거스르는 헛된 몸짓이 아니라, 오히려 운명의 사슬을 완성하는 필수적인 고리다. 우리의 노력이 바로 운명의 일부인 것이다.
이러한 운명과 자유의 공존을 설명하는 또 다른 유명한 비유는 ‘수레에 묶인 개의 비유’다. 한 마리의 개가 빠르게 움직이는 수레에 밧줄로 묶여있다고 상상해보자. 수레는 우주의 거대한 흐름, 즉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운명이다. 그것은 정해진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간다. 이때 밧줄에 묶인 개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현명한 개는 수레가 어디로 가는지를 이해하고, 그 흐름에 맞추어 기꺼이 자신의 발걸음을 옮긴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다리로 걷는다. 그의 걸음은 운명의 방향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그는 고통 없이, 그리고 존엄하게 자신의 길을 간다. 이것이 바로 스토아 철학이 말하는 진정한 자유다. 반면, 어리석은 개는 수레의 흐름에 저항하며 엉뚱한 방향으로 가려고 버틴다. 그는 자신의 자유의지를 운명에 맞서는 데 사용한다. 그러나 밧줄에 묶여있기에, 그의 모든 저항은 헛될 뿐이다. 그는 결국 목이 졸리고, 땅에 끌리며, 온몸에 상처를 입으면서도, 결국에는 현명한 개와 똑같은 목적지로 끌려가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의 고통이 수레(운명)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의 고통은 수레의 움직임에 ‘저항’하려는 그 자신의 어리석은 ‘선택’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다. 운명이라는 수레는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를 앞으로 이끌고 간다. 스토아 철학이 말하는 진정한 자유는 이 수레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진정한 자유는, 우주의 이성적인 흐름을 이해하고, 그것이 결국 선(善)하다는 것을 신뢰하며, 기꺼이 그 흐름과 함께 걷기로 ‘선택’하는 데 있다. 우리의 자유의지는 운명을 바꾸는 능력이 아니라, 운명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선택하는 능력’이다.
이렇듯, 스토아 철학은 결정론과 자유의지라는 두 개의 상반된 개념을 ‘유연한 결정론’이라는 틀 안에서 화해시킨다. 모든 것은 정해져 있다. 그러나 그 정해진 드라마 속에서 내가 어떤 배우가 될 것인지는 나에게 달려있다. 운명은 나에게 주어진 대본과 같다. 그러나 그 대본을 훌륭하게 연기하여 나의 덕을 드러낼 것인지, 아니면 형편없이 연기하여 비참함에 빠질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오직 나의 자유다.
스토아의 길은 운명'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운명 ‘안에서의’ 자유를 찾는 것이다.
2절: 불교의 연기(緣起) 법칙 -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세계
스토아 철학이 운명(Heimarmenē)이라는 이름으로 우주를 하나의 거대한 인과의 직물로 보았다면, 동양의 지혜는 ‘연기(緣起, pratītyasamutpāda)’라는 이름으로 그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심오한 관계의 그물을 우리 앞에 펼쳐 보인다.
스토아의 운명이 신성한 이성(로고스)이라는 하나의 중심에서 뻗어 나오는 필연적인 질서였다면, 불교의 연기는 중심도 없고 시작도 없는, 오직 무수한 조건들이 서로에게 의지하여 끊임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텅 빈 춤과 같다. 이 두 위대한 통찰은 모두 이 세계가 무의미한 우연의 장소가 아님을 말해주지만, 그 질서의 본질과 그 안에서 인간이 찾아야 할 자유의 길은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연기(緣起)’는 ‘인연(因緣)에 따라 일어난다’는 의미다. 이것은 이 세상에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세계관이다. 모든 것은 반드시 다른 무언가에 의지하고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만 생겨난다.
붓다는 이 심오한 법칙을 다음과 같은 간결한 공식으로 압축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此有故彼有, 차유고피유).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 (此生故彼生, 차생고피생).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 (此無故彼無, 차무고피무).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진다 (此滅故彼滅, 차멸고피멸).”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촛불의 비유를 생각해보자. 촛불의 불꽃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심지에서 오는가, 아니면 양초에서 오는가, 아니면 공기 중의 산소에서 오는가? 정답은 그 어느 것 하나에서도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꽃은 심지, 양초, 산소, 그리고 최초의 점화라는 수많은 조건들이 함께 만났을 때 비로소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이다. 그 조건들 중 어느 하나라도 사라지면, 불꽃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불꽃 안에는 ‘불꽃’이라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다. 오직 조건들의 춤만이 있을 뿐이다. 연기의 법칙에 따르면, 이 우주의 모든 것, 즉 나의 육체와 생각, 감정, 그리고 저 멀리 있는 별들까지도 모두 이 촛불의 불꽃과 같다. 모든 것은 조건에 따라 잠시 생겨났다가, 조건이 다하면 사라지는 덧없는 현상들의 연속이다.
이러한 연기의 세계관은 스토아의 운명론과 어떤 점에서 만나는가. 두 사상 모두 이 세계가 빈틈없는 인과의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는 엄격한 결정론의 형태를 띤다. 어떤 현상도 원인 없이 일어나지 않으며, 모든 것은 거대한 관계의 그물망 속에 촘촘하게 엮여있다. 그러나 그 법칙의 성격과 그 안에서 인간이 취해야 할 태도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첫째, 법칙의 주체가 다르다. 스토아의 운명은 신성한 로고스라는, 이성적이고 목적을 가진 ‘주체’가 이끌어가는 거대한 계획이다. 그 안에는 우주 전체를 가장 선한 방향으로 이끌려는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반면, 불교의 연기 법칙은 철저히 ‘비인격적’이다. 그 배후에는 어떤 신이나 절대적인 주체도 없다. 연기는 그저 우주가 작동하는 방식, 즉 ‘그렇게 되어 있는’ 자연 법칙일 뿐이다. 그것은 도덕적이지도 비도덕적이지도 않으며, 어떤 궁극적인 목적을 향해 나아가지도 않는다.
둘째, 인간의 역할과 자유의 의미가 다르다. 스토아 철학에서 인간의 자유는 이성적인 운명의 흐름을 이해하고, 그것이 선하다는 것을 신뢰하며 기꺼이 ‘동의’하고 ‘협력’하는 데 있다. 우리는 운명의 일부가 됨으로써 자유로워진다. 그러나 불교에서 인간의 목표는 연기 법칙 자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법칙이 만들어내는 ‘고통의 순환 (輪廻, samsara)’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불교는 인간의 고통이 어떻게 이 연기 법칙에 따라 일어나는지를 ‘십이연기(十二緣起)’라는 열두 개의 고리로 이루어진 사슬을 통해 매우 상세하게 분석한다. 이 사슬은 우리의 삶이 어떻게 고통의 수레바퀴 속에서 끝없이 순환하는지를 보여주는 정밀한 심리적 지도다. 이 지도는 과거의 원인, 현재의 결과, 현재의 원인, 그리고 미래의 결과라는 시간적 흐름을 보여주는 동시에, 지금 이 한순간의 경험 속에서도 똑같이 작동하는 마음의 법칙을 드러낸다.
그 사슬의 첫 번째 고리는 무명(無明, avijjā), 즉 존재의 실상을 모르는 ‘근본적인 무지’다. 이것은 세상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고(無常), 고정된 실체가 없으며(無我), 따라서 궁극적인 만족을 줄 수 없다(苦)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어둠이다.
이 무지의 어둠 속에서, 우리는 두 번째 고리인 행(行, saṅkhāra), 즉 의도적인 행위(業, karma)의 씨앗을 심는다. 이것은 무지에 가려진 채 우리가 일으키는 생각과 말, 행동들로, 미래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잠재적인 힘이다.
이 행위의 힘은 세 번째 고리인 식(識, viññāṇa), 즉 ‘분별하는 의식’을 조건 짓는다. 이 의식은 과거의 업의 경향성을 품은 채, 죽음 이후 새로운 생으로 이어지는 의식의 흐름 그 자체다.
이 의식의 흐름은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는 순간, 네 번째 고리인 명색(名色, nāmarūpa)을 일으킨다. ‘명색’은 ‘정신(名, nāma)’과 ‘물질(色, rūpa)’의 결합으로, 한 생명체를 이루는 가장 원초적인 심리적·물리적 구성 요소의 덩어리다.
이 명색이라는 원초적 유기체는 다섯 번째 고리인 육처(六處, saḷāyatana)로 발전한다. 이것은 세상과 만나는 여섯 개의 문, 즉 눈, 귀, 코, 혀, 몸, 그리고 마음(意)이라는 여섯 가지 감각의 장(場)이다.
여섯 개의 문이 열리면, 여섯 번째 고리인 촉(觸, phassa), 즉 ‘접촉’이 일어난다. 이는 감각의 장(육처)이 외부의 대상, 그리고 의식(識)과 만나는 사건이다. 눈이 형상을 보고, 귀가 소리를 듣는 것이 바로 촉이다.
이 접촉의 결과로, 우리는 일곱 번째 고리인 수(受, vedanā), 즉 즐겁거나(樂受), 불쾌하거나(苦受), 혹은 그저 그런(不苦不樂受) ‘느낌’을 경험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과거의 업에 따른, 거의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이다.
그러나 바로 다음, 여덟 번째 고리가 우리가 새로운 업을 짓고 고통의 사슬을 단단히 묶는 가장 결정적인 지점이다. 그 느낌(受)에 반응하여, 우리는 여덟 번째 고리인 애(愛, taṇhā), 즉 즐거운 느낌에 대한 ‘갈애’와 불쾌한 느낌에 대한 ‘혐오’를 일으킨다.
이 갈애와 혐오는 더욱 강해져 아홉 번째 고리인 취(取, upādāna), 즉 강렬한 ‘집착’으로 발전한다. 이것은 내 것이라는 생각, 내가 옳다는 생각, 나의 존재 자체에 대한 뿌리 깊은 붙잡음이다.
이 집착의 행위는 다음 생을 만들어내는 강력한 업의 에너지, 열 번째 고리인 유(有, bhava), 즉 ‘존재의 과정’ 자체를 형성한다.
이 존재의 힘은 필연적으로 열한 번째 고리인 생(生, jāti), 즉 미래의 어느 시점에 새로운 ‘태어남’을 이끈다.
그리고 마침내, 태어난 모든 것은 예외 없이 열두 번째 고리인 노사(老死, jarāmaraṇa), 즉 ‘늙고 병들어 죽는’ 고통과 슬픔을 맞이하게 된다.
이처럼 십이연기는 무명에서 시작하여 늙고 죽는 고통에 이르기까지, 단 하나의 고리도 끊어지지 않고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순환의 고리다. 따라서 불교가 제시하는 자유는 이 인과의 사슬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명상과 지혜를 통해 이 사슬의 가장 약한 고리, 즉 ‘무명’을 끊어냄으로써 순환 자체를 ‘멈추게 하는’ 것이다. 위빠사나(vipassanā)와 같은 명상 수행은, 바로 저 여덟 번째 고리, 즉 느낌(受)이 갈애(愛)로 넘어가는 바로 그 찰나의 순간을 알아차리는 훈련이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날 때, 그것에 집착하지 않고 그저 ‘즐거운 느낌이 있구나’라고 알아차리고, 불쾌한 느낌이 일어날 때, 그것을 혐오하지 않고 그저 ‘불쾌한 느낌이 있구나’라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 알아차림을 통해 우리는 갈애라는 새로운 업의 씨앗을 심지 않게 되며, 마침내 모든 것의 실상(무상, 고, 무아)을 꿰뚫어 보는 지혜를 통해 가장 근본적인 고리인 무명을 타파하게 된다.
스토아가 운명이라는 강물에 순응하여 평화롭게 헤엄치는 법을 가르친다면, 불교는 그 강물을 만들어내는 근원인 무명의 샘을 말려버려 강 자체를 걸어서 건너는 법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
스토아의 운명론과 불교의 연기 법칙은 둘 다 우리를 개인이라는 좁은 감옥에서 해방시켜, 거대한 우주적 질서의 일부로 바라보게 하는 위대한 통찰이다. 그러나 두 질서가 그려내는 풍경은 다르다. 스토아의 세계는 목적과 의미로 가득 찬, 우리가 기꺼이 참여해야 할 이성적인 드라마다. 반면, 불교의 세계는 조건에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우리가 궁극적으로는 그 집착을 내려놓고 벗어나야 할 덧없는 연극이다.
스토아는 우리에게 ‘필연성 안에서의 자유’를, 불교의 가르침은 ‘조건으로부터의 자유’를 약속한다.
3절: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 - 현대물리학이 본 운명
스토아 철학이 세운 ‘운명(Heimarmenē)’의 세계는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의 빈틈없는 사슬로 엮여있는, 거대하고도 완벽한 시계와 같았다. 그 안에서 미래는 원칙적으로 과거와 현재의 상태를 통해 완벽하게 예측 가능했다. 그러나 20세기에 이르러, 인류는 원자보다 더 작은 미시 세계의 문을 열었고, 그 문틈으로 스토아의 결정론적 우주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경이롭고도 혼란스러운 빛을 목격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의 세계이며, 그 세계의 가장 근본적인 법칙 중 하나인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Werner Heisenberg)의 ‘불확정성 원리 (Uncertainty Principle)’는 ‘모든 것은 정해져 있는가’라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질문에 전혀 다른 종류의 대답을 속삭이기 시작했다.
고전 물리학의 세계는 스토아의 세계와 그 근본적인 믿음을 공유했다. 스토아 철학이 이 우주를 신성한 이성(로고스)이라는 보편적 법칙이 지배하는 질서정연한 체계로 보았듯이, 17세기 아이작 뉴턴 (Isaac Newton)이 수학적으로 완성한 고전 물리학의 세계 역시, 예외 없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자연법칙 아래 움직이는 거대한 시계 장치와 같았다. 뉴턴의 운동 법칙과 만유인력의 법칙은, 행성의 궤도에서부터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현상에 이르기까지, 이 세계의 모든 움직임이 원인과 결과의 명확한 사슬로 엮여 있음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뉴턴의 세계관을 그 논리적 극단까지 밀어붙인 인물이 바로 18세기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였던 피에르시몽 라플라스 (Pierre-Simon Laplace)다. 그는 이 결정론적 우주관의 완전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라플라스의 악마 (Laplace's demon)’라 불리는 유명한 사고 실험을 제안했다.
상상해보자.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단 한 순간에 정확히 알 수 있는, 무한에 가까운 지성을 가진 존재, 즉 ‘악마’가 있다고 말이다. 만약 이 지성적 존재가 뉴턴의 운동 법칙과 같은 자연의 모든 법칙을 완벽하게 알고 있다면, 그에게 미래와 과거는 현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우주는 더 이상 신비나 미지의 영역이 아니라, 완벽하게 풀 수 있는 하나의 거대한 수학 문제와 같기 때문이다.
뉴턴의 물리 법칙은 ‘현재 상태’라는 값을 입력하면 ‘미래의 상태’라는 결과값이 정확하게 도출되는 하나의 함수와 같다. 악마는 모든 초기값과 함수를 알고 있기에, 미래는 그에게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아니라 단순히 계산하면 되는, 이미 답이 정해진 문제지와 같다. 마찬가지로, 그는 물리 법칙을 거꾸로 적용하여 현재의 상태로부터 과거의 모든 상태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역추적할 수 있다. 과거는 희미한 기억이 아니라, 현재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또 다른 답안지일 뿐이다. 이처럼 과거와 미래가 모두 현재의 데이터로부터 완벽하게 계산 가능하다면, 그 지성에게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구분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우리에게 미래가 불안하고 과거가 아쉬운 이유는 그것을 완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만, 라플라스의 악마에게 시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내용이 적혀있는, 펼쳐진 책과 같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영원한 ‘현재’로 존재한다. 따라서 그는 이 방대한 데이터를 공식에 대입하여, 마치 시계태엽을 되감거나 앞으로 감듯이, 우주의 모든 과거를 재구성하고 모든 미래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예언할 수 있을 것이다. 혜성의 다음 출현 시기뿐만 아니라, 수억 년 뒤에 모래알 하나가 어느 해변에 놓여있을지까지도 정확하게 계산해낼 수 있다.
이처럼 완벽하게 예측 가능한 ‘시계 장치 우주’ 속에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우연’이나 ‘무작위’는 설 자리가 없다. 이 세계에서 ‘우연’이란, 단지 우리가 모든 원인을 알지 못하는 인간의 ‘무지’가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다. 예를 들어, 동전을 던졌을 때 앞면이 나올지 뒷면이 나올지는 우리에게 우연처럼 보인다. 그러나 라플라스의 악마에게는 그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는 동전을 던진 손가락의 정확한 힘, 동전의 초기 회전 각도, 공기의 저항과 미세한 바람의 흐름까지 모든 초기 조건을 알고 있기에,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계산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스토아 철학의 운명(Heimarmenē) 개념이 과학의 언어로 표현된 모습이다. 고전 물리학의 세계는 스토아 철학자들처럼,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의 빈틈없는 사슬로 엮여 있으며, 그 안에는 진정한 의미의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그러나 양자역학의 세계는 이 단단한 믿음의 기반을 허물어뜨렸다. 불확정성 원리는 우리에게 충격적인 사실을 알려준다. 우리는 결코 하나의 입자(예를 들어,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속도)’을 동시에 완벽하게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측정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주 그 자체의 근본적인 성질이다. 우리가 전자의 위치를 더 정확하게 측정하려 할수록, 그 운동량은 더 불확실해지고, 반대로 운동량을 더 정확하게 측정하려 할수록, 그 위치는 더 불확실해진다.
이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 어두운 방 안에서 움직이는 작은 공의 위치를 찾는다고 상상해보자. 위치를 알려면 빛(광자)을 쏘아 공에 부딪혀 돌아오는 것을 보아야 한다. 만약 공이 당구공처럼 크다면, 빛 알갱이 하나가 부딪히는 것은 그 움직임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공이 먼지처럼 극도로 작고 가볍다면, 그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쏜 빛 알갱이 자체가 공을 세게 때려서 그 원래의 운동 경로를 완전히 바꾸어 버릴 것이다. 즉, ‘보는 행위’ 자체가 ‘보이는 대상’을 교란시키는 것이다. 불확정성 원리는 이처럼 미시 세계에서 관찰자와 대상이 분리될 수 없으며,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확률의 구름 속에 존재함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 어두운 방 안에서 벽을 향해 날아가는 아주 작은 전자 하나의 경로를 추적한다고 상상해보자. 고전적인 상식으로는, 이 전자는 명확한 하나의 경로를 따라 날아갈 것이다. 그러나 이 전자를 ‘보기’ 위해서는, 즉 그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반드시 빛 알갱이, 즉 ‘광자(photon)’를 쏘아 그 전자에 부딪히게 해야 한다. 바로 이 ‘보는 행위’ 자체에서 우주의 근본적인 비밀이 드러난다.
만약 우리가 전자의 ‘위치’를 매우 정밀하게 알고 싶다면, 우리는 파장이 짧은, 즉 매우 강력한 에너지를 가진 광자를 사용해야 한다. 이는 마치 아주 작은 물체를 보기 위해 매우 날카롭고 밝은 바늘로 찌르는 것과 같다. 이 강력한 광자는 전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려주겠지만, 동시에 전자를 세게 때려서 그 원래의 운동 방향과 속도, 즉 ‘운동량’을 완전히 바꾸어 버린다. 위치를 정확히 아는 순간, 그 미래의 경로는 완전히 불확실해지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전자의 ‘운동량’을 교란시키지 않고 최대한 원래대로 유지하고 싶다면, 우리는 파장이 긴, 즉 아주 약한 에너지를 가진 광자를 사용해야 한다. 이는 마치 부드러운 솜털로 살짝 건드리는 것과 같다. 이 약한 광자는 전자의 운동량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겠지만, 그 대가로 우리에게 돌아오는 정보는 매우 흐릿하고 퍼져있어서, 우리는 전자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운동량을 정확히 아는 순간, 그 현재의 위치는 흐릿한 안갯속으로 사라진다.
이것은 우리의 측정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주 그 자체의 근본적인 성질이다. 위치와 운동량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존재하지만, 우리가 한쪽 면을 선명하게 보는 순간 다른 쪽 면은 필연적으로 흐릿해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즉, ‘보는 행위(관찰)’ 자체가 ‘보이는 대상(실재)’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미시 세계에서 관찰자와 대상이 분리될 수 없다”는 경이로운 통찰이 탄생한다. 뉴턴의 세계에서 우리는 외부 세계를 그 어떤 영향도 주지 않고 완벽하게 관찰할 수 있는 ‘수동적인 관객’이었다. 그러나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관찰은 결코 수동적일 수 없다.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과 상호작용한다는 것이며, 그 상호작용의 행위 자체가 우리가 알아내려는 현실의 일부가 된다. 관찰자는 더 이상 연극을 구경하는 관객이 아니라, 무대 위로 올라가 배우의 대사와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배우가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확률의 구름 속에 존재한다”는 말은 이 세계관의 가장 충격적인 결론이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우리가 관찰하기 전의 전자는 특정한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벽에 도달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경로들을 동시에 지나가는, 일종의 ‘가능성의 파동(wave function)’ 혹은 ‘확률의 구름’으로 존재한다. 이 구름은 어떤 곳은 짙고(발견될 확률이 높음), 어떤 곳은 옅지만(발견될 확률이 낮음), 우리가 관찰이라는 행위를 통해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기 전까지는, 그 전자는 확정된 위치를 가지지 않는다.
우리의 관찰은 바로 이 퍼져있는 확률의 구름을 하나의 점으로 ‘붕괴 (collapse)’시키는 행위다. 우리가 벽의 한 지점에서 전자를 발견하는 순간, 다른 모든 가능성들은 사라지고 오직 하나의 현실만이 선택된다. 그러나 이 선택은 스토아의 결정론처럼 미리 정해져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라는 거대한 주사위가 던져진, 근본적으로 ‘확률적인’ 결과다. 우리는 그 주사위의 눈이 나올 확률은 계산할 수 있지만, 어떤 눈이 나올지는 결코 미리 알 수 없다. 이처럼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는, 라플라스의 악마가 꿈꾸었던 완벽하게 예측 가능한 시계 장치 우주의 심장을 꿰뚫고, 그 자리에 우리가 결코 완전히 알 수 없는, 신비와 가능성으로 가득 찬 새로운 우주를 세워놓았다.
이러한 양자역학의 통찰은 스토아의 엄격한 운명론에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 만약 우주의 가장 근본적인 수준이 본질적으로 불확정적이고 확률적이라면,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의 빈틈없는 사슬로 엮여있다는 스토아의 결정론은 더 이상 유효할 수 없는가? 어쩌면 이 세계는 에피쿠로스가 상상했던 것처럼, 예측 불가능한 ‘빗나감 (clinamen)’이 지배하는 우연의 장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기 전에, 두 세계가 다루는 ‘규모’의 차이를 명확히 해야 한다.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은 원자 이하의 미시 세계에서 지배적인 원리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거시 세계, 즉 돌멩이를 던지거나 행성이 운행하는 세계에서는 그 영향이 거의 나타나지 않으며, 뉴턴의 결정론적 법칙이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작동한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탐구했던 ‘운명’은 바로 이 인간적인 규모의 거시 세계에서 작동하는 인과 법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역학은 스토아의 세계관에 더 깊은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만약 우주의 가장 근본적인 벽돌들이 확률의 안개로 이루어져 있다면, 어떻게 그 벽돌로 지어진 거대한 성채(거시 세계)가 완벽하게 결정론적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이는 현대 물리학과 철학이 여전히 씨름하고 있는 난제다.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가능한 대답은, 스토아 철학이 말하는 운명이 물리적 사건의 세세한 경로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규모의 ‘패턴’과 ‘목적’을 향해 세계를 이끌어가는 힘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수많은 물 분자들이 개별적으로는 무작위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도, 강물 전체는 바다라는 하나의 방향을 향해 흘러가는 것과 같다. 양자적 수준에서의 미세한 불확정성들이, 거시적인 차원에서는 서로 상쇄되어 로고스라는 거대한 이성적 흐름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현대물리학이 본 운명은 스토아의 그것처럼 단순하고 명확하지 않다. 양자역학은 우리에게 우주의 근본적인 수준에 내재된 예측 불가능성과 우연의 가능성을 보여줌으로써, 스토아의 엄격한 결정론에 중요한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우리가 외부 세계를 완벽하게 알고 통제할 수 있다는 인간의 오만을 근본적으로 깨뜨렸다는 점에서, 스토아 철학의 핵심적인 윤리적 태도와 깊이 공명한다.
스토아 철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측 불가능하고 통제 불가능한 세계 속에서도, 우리 자신의 내면적 반응만큼은 온전히 통제함으로써 평온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양자역학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세계는 우리가 결코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신비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불확실성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외부 세계에 대한 헛된 통제 욕구를 내려놓고,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우리 자신의 내면적 선택에 집중하는 것이다.
현대물리학은 스토아의 운명론을 과학적으로는 위협했지만, 그들의 윤리적 지혜가 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4절: 신의 예지(豫知)와 인간의 선택 - 보에티우스의 질문
스토아 철학이 ‘운명’을 로고스라는 비인격적인 인과 사슬로 설명했다면, 그들의 사상적 유산을 물려받은 후대의 기독교 철학은 전혀 다른 종류의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을 아시는 인격적인 신’의 존재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과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다. 만약 전지(全知)한 신이 내가 내일 아침에 무엇을 할지를 영원 전부터 이미 알고 있다면, 나의 내일 아침의 선택은 과연 진정으로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 심오한 질문은 고대 세계의 끝자락과 중세의 문턱에 서 있었던 철학자, 아니키우스 만리우스 세베리누스 보에티우스(Anicius Manlius Severinus Boethius)에 의해 가장 깊이 있게 탐구되었다. 반역죄 누명을 쓰고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감옥 안에서, 그는 이 고통스러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철학의 위안, De consolatione philosophiae』이라는 불후의 명저를 남겼다.
보에티우스가 마주한 딜레마는 명료하다. 만약 신이 모든 것을 미리 안다면(豫知, foreknowledge), 그가 아는 것은 반드시 일어나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신의 지식은 불완전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미래의 모든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는 것이라면,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반대로, 만약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의지가 있다면, 미래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것이며, 따라서 신은 미래를 확실하게 알 수 없게 된다. 이처럼 신의 전지(全知)와 인간의 자유의지는 서로를 파괴하는 모순 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철학’이라는 여인으로 의인화된 지혜는 보에티우스에게 시간과 영원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근본적으로 바꾸라고 요청한다. 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신의 ‘앎’을 인간의 ‘앎’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는 데 있다. 인간은 시간이라는 강물 속에 잠겨있는 존재다. 우리는 오직 ‘현재’만을 직접 경험하며, 과거는 기억으로, 미래는 예측으로만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미래를 ‘미리 안다(foresee)’고 말할 때, 그것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앞으로 일어날 일을 추측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신이 이런 방식으로 미래를 본다면, 그의 예지는 우리의 선택을 필연적으로 결정해버릴 것이다.
그러나 보에티우스의 ‘철학’은 신이 우리처럼 시간 속에 갇혀있지 않다고 말한다. 신은 ‘영원(eternity)’ 속에 존재한다. 여기서 영원은 단순히 끝없이 긴 시간이 아니라, 시간이 아예 없는, 모든 시간을 한순간에 포함하는 상태다. 신은 시간이라는 강물 속에서 우리와 함께 떠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강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높은 산 정상에 서 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길게 이어지는 퍼레이드 행렬을 생각해보자. 길가에 서 있는 우리는 퍼레이드가 우리 앞을 지나가는 순서대로, 즉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부분적으로만 행렬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다음에 어떤 차량이 올지 ‘예측’할 수는 있지만, 확실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아주 높은 빌딩 꼭대기에서 이 퍼레이드를 내려다본다면, 그는 행렬의 시작과 중간, 그리고 끝을 모두 ‘동시에’ 하나의 장면으로 볼 수 있다. 그에게는 ‘미리 보는’ 예지의 개념이 무의미하다. 그는 모든 것을 지금, 여기서, 한눈에 보고 있기 때문이다.
보에티우스에 따르면, 신이 세계를 아는 방식이 바로 이와 같다. 신은 우리의 미래를 ‘미리’ 보는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를 포함한 시간 전체를 그의 ‘영원한 현재(eternal present)’ 속에서 동시에 보고 있다. 따라서 신이 내가 내일 아침에 자유의지로 커피를 마실 것을 아는 것은, 나의 선택을 ‘결정’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영원 속에서, 내가 시간 속에서 ‘자유롭게’ 선택하는 그 행위를 그저 ‘보고 있기’ 때문이다. 높은 빌딩 위의 관찰자가 퍼레이드 행렬의 움직임을 결정하지 않고 그저 보듯이, 신의 지식은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을 강제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완벽하게 포괄한다.
이러한 보에티우스의 해법은 스토아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길을 걷는다.
스토아 철학은 운명과 자유의지의 문제를 시간이라는 거대한 인과 사슬 ‘내부’에서 해결하고자 했다. 스토아의 세계에서, 우주는 시작부터 끝까지 원인과 결과의 빈틈없는 사슬(운명, Heimarmenē)로 이어져 있으며, 어떤 사건도 이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나의 ‘선택’과 ‘행동’ 역시 이 거대한 인과 사슬의 일부라는 것이다. 나의 선택은 운명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운명이 작동하는 방식 그 자체다. 예를 들어, 운명이 나를 의사로 만들었다면, 그것은 내가 의사가 되기로 ‘선택’하고, 의학을 ‘공부’하며, 환자를 ‘치료’하는 구체적인 행동들을 통해 실현된다. 나의 자유로운 선택이 바로 운명을 완성하는 필수적인 고리인 셈이다. 따라서 스토아적 자유는 운명의 논리를 이해하고, 그 거대한 흐름에 기꺼이 동의하며,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데서 오는 내재적 자유 (immanent freedom)다. 우리는 정해진 시스템 안에서 가장 이성적이고 훌륭한 행위자가 됨으로써 자유로워진다.
반면, 보에티우스는 이 문제를 신을 시간이라는 인과 사슬 ‘외부’의 존재로 상정함으로써 해결한다. 보에티우스에게 신은 우리처럼 시간의 흐름을 따라 미래를 ‘예측’하는 존재가 아니다. 신은 시간의 강물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영원한 현재(eternal present)’에 존재한다. 이것이 핵심이다. 신이 내가 내일 할 행동을 아는 것은, 그가 나의 행동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미래에 ‘자유롭게’ 할 행동이, 신의 영원한 현재 속에서는 이미 일어나 있는 사건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는 마치 우리가 이미 모든 내용이 완성된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과 같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이 잠시 후에 어떤 선택을 할지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스크린을 보고 있는 우리의 ‘앎’이, 과거에 그 영화를 만들었던 감독이나 배우의 자유로운 선택을 강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영화 속 주인공이 과거에 자유롭게 내렸던 선택이, 지금 우리가 그것을 ‘알게 되는’ 원인이다. 마찬가지로, 신의 ‘앎’은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이지, 그 원인이 아니다. 따라서 보에티우스적 자유는 신의 전지(全知)가 우리의 선택에 인과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신뢰하는 데서 오는 초월적 자유(transcendent freedom)다. 신은 우리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완벽한 관객이며, 우리는 그 시선 아래에서 온전한 자유의지를 행사한다.
보에티우스의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은 스토아 이후 서양 정신사가 신과 인간, 그리고 시간의 관계를 얼마나 깊이 고뇌했는지를 보여주는 장엄한 증거다.
스토아 철학이 우리에게 우주라는 내재적 질서 안에서 존엄하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었다면, 보에티우스의 철학은 그 질서를 넘어선 영원한 관점 속에서 우리의 유한한 자유가 어떻게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위안을 제공한다. 두 사상 모두,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결코 무의미한 우연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질서와 관계 맺고 있음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5절: 운명 안에서 발견하는 궁극의 자유
우리는 운명이라는 거대한 강물의 흐름을 보았다. 스토아의 필연적인 인과 사슬에서부터, 불교의 조건 따라 일어나는 연기의 그물, 그리고 고전 물리학의 완벽하게 예측 가능한 시계 장치 우주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지혜들은 한목소리로 이 세계가 우리의 작은 의지를 넘어선 거대한 법칙 아래 있음을 말해주었다. 이 피할 수 없는 질서 앞에서, ‘자유의지’라는 우리의 가장 소중한 가치는 과연 어디에 설 자리가 있는가. 만약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면, 우리는 결국 운명의 쇠사슬에 묶인 무력한 죄수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이 절망적인 질문의 한가운데서, 스토아 철학은 인류 정신사에서 가장 대담하고도 역설적인 해방의 길을 제시한다. 그들은 진정한 자유가 운명의 사슬을 ‘끊어내는 것’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슬을 ‘기꺼이 끌어안는 것’에서 발견된다고 선언한다. 궁극의 자유는 운명으로부터의 자유 (freedom from fate)가 아니라, 운명 ‘안에서의’ 자유 (freedom within fate)라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자유’라는 단어에 씌워진 통념의 굴레를 벗어 던져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자유란, 외부의 어떤 제약도 없이 내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 즉 ‘~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그러나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이러한 종류의 자유는 환상일 뿐만 아니라, 모든 고통의 근원이다. 왜냐하면 이 우주의 거의 모든 것은 우리의 통제 밖에 있기 때문이다. 날씨를 바꾸려 하고, 타인의 마음을 돌리려 하며, 늙음과 죽음을 피하려 하는 시도는, 수레에 묶인 개가 수레의 흐름에 저항하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 상처와 좌절만을 안겨줄 뿐이다.
스토아 철학은 자유를 근본적으로 재정의한다. 그들에게 진정한 자유란, 내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어떤 상황 속에서도 ‘덕스럽게 행동할 수 있는 능력’, 즉 ‘~을 향한 자유’다. 그것은 외부 세계를 내 뜻대로 바꾸는 힘이 아니라, 외부 세계의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나 자신의 내면 왕국, 즉 나의 판단과 선택의 주권을 지켜낼 수 있는 힘이다. 이 내면의 자유야말로 그 어떤 폭군도, 그 어떤 운명의 폭풍우도 빼앗아갈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다.
이 궁극의 자유는 우리가 지금까지 탐구해온 모든 스토아적 훈련이 하나의 정점에서 만날 때 비로소 성취된다. 그것은 ‘동의의 훈련’이 극치에 이른 상태, 즉 내 삶에 일어나는 개별적인 사건들뿐만 아니라, 우주의 시작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운명의 거대한 흐름 전체에 대해 온 영혼으로 “그렇다”고 동의하는 순간이다. 이것은 더 이상 운명에 대한 소극적인 ‘수용’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의 이성(로고스)이 곧 나의 이성이며, 우주의 의지가 곧 나의 의지임을 깨닫고, 운명을 나의 것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능동적인 ‘사랑(Amor Fati)’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른 현자의 영혼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곳에서는 파괴적인 격정(파토스)들이 더 이상 자라날 수 있는 토양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미래가 우주적 선(善)의 필연적인 전개 과정임을 신뢰하기에 사라진다. 과거에 대한 ‘후회’는, 과거가 결코 다른 모습일 수 없었음을 이해하기에 사라진다. 타인에 대한 ‘분노’와 ‘원망’은, 그들 역시 운명이라는 거대한 드라마 속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연기하고 있을 뿐임을 알기에 사라진다.
그리고 이 격정의 소음이 멎은 고요한 자리에는, ‘좋은 감정 (eupatheiai)’이라는 맑고 깊은 음악이 울려 퍼진다. 현자는 우주의 완벽한 질서를 바라보며 흔들리지 않는 ‘환희 (khara)’를 느끼고, 그 질서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기꺼이 수행하려는 합리적인 ‘의지 (boulēsis)’를 가지며, 자신의 영혼을 오염시킬 수 있는 유일한 악인 악덕에 대해서만 ‘신중함 (eulabeia)’을 발휘한다. 그의 삶은 더 이상 외부의 자극에 의해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혼란스러운 반응의 연속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에서부터 흘러나와 우주의 흐름과 완벽하게 합류하는, ‘순조로운 흐름 (euroia biou)’ 그 자체가 된다.
스토아 철학이 발견한 궁극의 자유는, 운명이라는 감옥의 벽을 부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옥 전체가 사실은 내가 속한 신성한 우주의 왕국이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로마의 황제도 빼앗을 수 없었던 노예 에픽테토스의 자유이며, 전쟁터의 한가운데서도 제국의 평화를 유지했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자유다.
운명의 사슬은 우리를 묶는 족쇄가 될 수도, 우리를 신의 춤에 동참하게 하는 리본이 될 수도 있다. 그 사슬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하고도 유일한 자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