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영원회귀 - 시간의 무한한 순환

by 이호창

제14장: 영원회귀 (Eternal Recurrence) - 시간의 무한한 순환


1절: 우주의 대화재(Ekpyrosis) - 창조와 파괴의 순환


스토아 철학이 그려낸 우주는 시작과 끝이 있는 직선적인 시간 위를 달려가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의 우주는 탄생과 성장, 소멸, 그리고 재탄생이라는 장엄한 순환을 영원히 반복하는 거대한 불사조 (Phoenix)와 같다. 이 우주적 순환의 정점에서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파괴의 불꽃이자,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창조의 씨앗이 되는 사건이 바로 ‘엑퓌로시스 (ekpyrosis, ἐκπύρωσις)’, 즉 ‘우주의 대화재’다. 이 개념은 스토아의 운명론과 섭리 사상이 시간이라는 거대한 무대 위에서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드라마이며, 우리의 유한한 삶이 어떻게 영원한 순환의 일부가 되는지를 이해하는 열쇠다.


‘엑퓌로시스’는 ‘불로부터(ek-)’와 ‘만들어진다(pyrosis)’는 의미의 그리스어가 합쳐진 말로, 문자 그대로는 ‘불에 의한 파괴’ 혹은 ‘대화재’를 의미한다. 스토아 철학자들에 따르면, 우주는 정해진 거대한 주기, 즉 ‘대년(Great Year)’의 끝에 이르면, 자신을 살아있게 했던 신성한 불꽃이자 이성인 로고스 (Logos)가 모든 것을 다시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려 흡수하는 과정을 겪는다. 이 과정에서 우주를 구성했던 모든 물질들은 가장 순수하고 정제된 형태의 원초적 불, 즉 ‘창조하는 불 (pyr tekhnikon)’로 환원된다. 별과 행성, 산과 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갔던 모든 생명체들의 영혼(프네우마)까지도 포함아는 세상의 모든 것은 이 거대한 불꽃 속으로 녹아들어 다시 하나의 완전한 통일체를 이룬다. 이것이 바로 우주의 겨울이자, 모든 것이 근원으로 돌아가는 종말의 순간이다.


그러나 이 종말은 결코 허무나 완전한 소멸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창조를 위한 필연적인 준비 과정이다. 모든 것이 하나가 된 이 순수한 불의 상태에서, 다음 우주를 위한 창조의 과정이 다시 시작된다. 이 재탄생의 과정을 ‘팔링게네시스 (palingenesis, παλιγγενεσία)’, 즉 ‘다시 (palin-)’ ‘태어남 (genesis)’이라고 부른다. 신성한 불꽃은 다시 한번 자신을 펼쳐내어 공기와 물, 흙이라는 원소들을 만들어내고, 이 원소들이 결합하여 이전 우주와 ‘똑같은’ 별과 행성, 그리고 생명체들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스토아의 영원회귀 사상의 가장 경이롭고도 무서운 지점이 드러난다. 새로 태어나는 우주는 이전 우주와 비슷하거나 다른 우주가 아니다. 그것은 이전 우주와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동일한’ 우주다. 똑같은 제논이 똑같은 난파를 당해 아테네에 도착하고, 똑같은 소크라테스가 똑같은 독배를 마시며, 바로 당신 자신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이 순간을 포함하여, 당신의 삶의 모든 기쁨과 슬픔, 모든 선택과 후회가 정확히 똑같은 순서로 영원히 반복된다. 우주의 역사는 단 한 번 상영되고 마는 영화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장면과 대사가 완벽하게 동일하게 영원히 재상영되는 필름과 같다.


이러한 사상은 왜 필요한가? 그것은 스토아의 섭리와 운명론의 논리적 귀결이다. 만약 우주가 완벽한 이성인 로고스에 의해 다스려진다면, 그가 만들어낸 이 우주는 ‘가능한 최선의 우주’일 수밖에 없다. 만약 다음 우주가 지금의 우주와 단 하나라도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지금의 우주보다 더 좋거나 더 나쁘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더 좋은 우주가 가능하다면 지금의 우주는 완벽한 것이 아니게 되며, 더 나쁜 우주가 만들어진다면 신적인 섭리가 불완전하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완벽한 이성은 언제나 가장 완벽한 결과물, 즉 지금과 똑같은 우주를 영원히 반복하여 창조할 수밖에 없다.


이 영원한 순환의 교리는 우리의 삶에 깊고도 엄숙한 무게를 부여한다. 만약 나의 지금 이 순간이 앞으로 무한히 반복될 것이라면, 나는 이 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소한 비겁함, 작은 불의, 순간의 나태함은 이제 단 한 번의 실수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영원히 반복될 나의 운명의 일부가 되어, 나를 영원한 후회 속에 가두게 될 것이다. 반대로, 가장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가장 큰 유혹 앞에서도 절제를 지키며, 타인에게 정의를 실천하는 모든 덕스러운 행위는, 영원히 반복될 나의 삶을 밝히는 불멸의 보석이 된다.


결론적으로, 우주의 대화재 (엑퓌로시스)와 재탄생 (팔링게네시스)이라는 스토아의 우주론은, 우리에게 삶의 모든 순간을 ‘영원의 관점’ 아래에서 바라보라고 요청하는 장엄한 초대장이다. 그것은 우리를 허무주의의 유혹으로부터 구출하여, 우리의 모든 선택과 행동에 무한한 책임을 부여한다. 스토아 현자는 단순히 한 번의 유한한 삶을 잘 살아내는 것을 넘어, 영원히 반복되어도 좋을 만큼 완벽하고도 충만한, 신적인 순간을 창조하기 위해 분투하는 예술가와 같다. 그의 모든 현재는 곧 그의 영원이며, 모든 순간은 그 자체로 완결된 하나의 우주다.



2절: 힌두 철학의 유가(Yuga) - 끝없이 반복되는 시대의 순환


스토아 철학이 우주의 대화재 (Ekpyrosis)라는 장엄한 불꽃 속에서 시간의 영원한 순환을 보았다면, 아득히 먼 인도의 땅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복잡하며, 도덕적인 깊이를 지닌 또 다른 종류의 우주적 순환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힌두 철학의 ‘유가 (Yuga)’ 사상이다.


스토아의 영원회귀가 모든 것이 완벽하게 ‘똑같이’ 반복되는 필연의 교향곡이라면, 인도의 유가 순환은 우주의 정신이 점차 타락하여 어둠 속으로 침잠했다가, 마침내 정화의 과정을 거쳐 다시 황금빛 시대로 돌아오는 거대한 도덕적 서사시다. 두 지혜 모두 시간을 직선이 아닌 원으로 보았지만, 그 원 위에서 펼쳐지는 드라마의 내용은 전혀 다르다.


‘유가’는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어로 ‘시대’ 혹은 ‘세대’를 의미하며, 힌두 철학의 우주론에서 시간의 거대한 단위를 가리킨다. 이 세계는 네 개의 서로 다른 유가가 순차적으로 반복되는 거대한 순환, 즉 ‘마하유가 (Mahayuga, 위대한 유가)’ 속에 놓여있다. 이 네 시대의 흐름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척도는 바로 ‘다르마(Dharma, धर्म)’다. 다르마는 우주적 질서, 도덕적 법칙, 그리고 각 존재에게 주어진 의무를 의미하는 심오한 단어다. 유가의 순환은 바로 이 다르마가 세상에 얼마나 온전히 서 있는가에 따라 그 빛과 어둠이 결정되는, 영적인 계절의 변화와도 같다.


첫 번째 시대이자 가장 빛나는 황금시대는 ‘사트야 유가 (Satya Yuga)’ 또는 ‘크리타 유가 (Krita Yuga)’다. 이 시대에 다르마는 네 개의 다리로 완벽하게 서 있으며, 세상에는 어떠한 불의나 거짓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신들과 직접적으로 소통하며, 그들의 수명은 수만 년에 이르고 육체는 강건하며 고통이 없다. 명상과 내면의 성찰만으로도 모든 지혜를 얻을 수 있기에, 경전이나 사원, 그리고 복잡한 종교 의례가 필요 없는 시대다. 모든 존재가 자신의 본성에 따라 조화롭게 살아가는, 우주의 완벽한 여름과도 같은 시절이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과 함께 두 번째 시대인 ‘트레타 유가 (Treta Yuga)’가 도래하면, 다르마는 하나의 다리를 잃고 세 개의 다리로 서게 된다. 세상의 선(善)이 사분의 일만큼 줄어든 것이다. 이 시대에 인간의 수명은 줄어들고, 덕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이제 의지적인 노력과 희생 제사 (yajna)와 같은 외부적인 의례가 필요해진다. 지식은 더 이상 내면에서 저절로 솟아나지 않으며, 베다 (Veda)와 같은 경전을 통해 학습되어야만 한다.


세 번째 시대인 ‘드바파라 유가 (Dvapara Yuga)’에 이르면, 다르마는 두 개의 다리마저 잃고 절반만 남게 된다. 세상은 선과 악이 거의 동등한 힘으로 맞서는 혼란의 시대로 접어든다. 인간의 수명은 더욱 짧아지고, 질병과 욕망, 그리고 끝없는 다툼이 만연하게 된다. 경전의 의미는 더욱 복잡해지고, 사람들은 진리를 두고 수많은 학파로 나뉘어 논쟁한다. 인류는 이제 황금시대의 기억을 거의 잃어버리고, 물질적인 욕망과 감각적인 쾌락에 깊이 빠져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지금 살고 있다고 전해지는 마지막 시대, 가장 어둡고 고통스러운 철의 시대인 ‘칼리 유가 (Kali Yuga)’가 도래한다. ‘칼리’는 불화와 다툼, 투쟁을 의미하는 단어로, 이 시대의 본질을 압축하여 보여준다. 칼리 유가에 이르면, 다르마는 마지막 남은 하나의 다리로 위태롭게 서 있을 뿐이며, 세상의 사분의 삼은 불의와 악으로 가득 차게 된다. 고대의 경전들은 이 시대를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묘사한다.


칼리 유가에서, 진리는 더 이상 존중받지 못하고 거짓과 위선이 미덕으로 칭송받는다. 부(富)가 유일한 가치의 척도가 되며, 가난한 자는 경멸받고 부자는 고귀한 혈통의 소유자로 여겨진다. 왕과 통치자들은 더 이상 백성을 보호하는 자가 아니라, 과도한 세금으로 백성을 착취하고 자신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폭군이 된다. 법은 힘 있는 자들의 도구로 전락하고, 정의는 돈으로 사고 팔 수 있게 된다.


인간관계는 피상적이고 계산적으로 변한다. 결혼은 더 이상 신성한 결합이 아니라, 육체적 쾌락이나 사회적 이익을 위한 계약에 불과하게 된다.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사이의 존경과 사랑은 사라지고, 오직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서로를 이용한다. 사람들은 겉으로는 예의 바른 척하지만, 마음속에는 질투와 증오를 품고 서로를 속인다.


인간의 수명은 100세를 넘기기 어려울 정도로 짧아지고, 육체는 온갖 종류의 새로운 질병으로 고통받는다. 사람들은 짧은 인생을 불안과 스트레스 속에서 살아가며, 영적인 가치를 찾는 대신 순간적인 감각적 쾌락에 탐닉한다. 자연은 인간의 끝없는 탐욕으로 인해 파괴되고, 기후는 예측할 수 없이 변하며, 땅은 본래의 풍요로움을 잃는다.


이처럼 칼리 유가는 영적인 암흑기다. 그러나 이 절망적인 묘사 속에서도 힌두 철학은 한 줄기 희망을 남겨둔다. 칼리 유가에서는 다르마를 실천하기가 지극히 어렵지만, 바로 그 어려움 때문에 아주 작은 선행만으로도 다른 시대의 거대한 공덕과 맞먹는 영적인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어둠이 깊을수록 작은 촛불의 가치가 더욱 빛나는 것과 같다.


이 칼리 유가의 끝에, 다르마가 완전히 땅에 떨어져 세상이 더 이상 구제할 수 없는 혼돈에 빠졌을 때, 비슈누 (Vishnu) 신의 마지막 화신 (avatar)인 ‘칼키 (Kalki)’가 백마를 타고 나타난다. 그는 불의 검을 휘둘러 악인들을 모두 멸하고, 세상을 뒤덮은 모든 불결함을 정화한다. 이 파괴 (pralaya, 프랄라야)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준비다. 잿더미 속에서, 세상은 다시 완벽한 다르마가 지배하는 새로운 사트야 유가, 즉 황금시대를 맞이하며 거대한 순환의 바퀴는 다시 처음부터 구르기 시작한다.


이러한 힌두의 유가 순환은 스토아의 영원회귀와 어떤 점에서 다른가. 두 사상 모두 시간이 영원히 반복된다고 보았지만, 그 반복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스토아의 영원회귀는 ‘완벽하게 동일한’ 반복이다. 다음 우주는 지금의 우주보다 더 나아지지도, 더 나빠지지도 않는다. 모든 것이 정확히 똑같이 되풀이될 뿐이다. 그러나 힌두의 유가 순환은 ‘도덕적 타락과 회복’의 드라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르마는 필연적으로 쇠퇴하며, 우주는 정화의 과정을 거쳐 다시 완벽한 상태로 돌아간다. 스토아의 순환이 닫힌 원이라면, 힌두의 순환은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거대한 나선형에 가깝다.


또한, 파괴의 의미도 다르다. 스토아의 대화재 (엑퓌로시스)는 신적인 이성 (로고스)이 스스로를 거두어들이는, 가치 중립적이고 자연스러운 우주의 호흡과 같다. 그러나 힌두의 파괴 (프랄라야)는 악 (adharma, 아다르마)이 극에 달했을 때 그것을 정화하고 선 (다르마)을 회복시키려는, 뚜렷한 도덕적 목적을 지닌 신적인 개입이다.


이 두 개의 거대한 순환론은 우리에게 삶을 바라보는 두 개의 다른 망원경을 제공한다. 스토아의 영원회귀는 우리에게 지금 이 순간의 모든 선택과 행동에 무한한 책임을 부여한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영원히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힌두의 유가 순환은 우리가 아무리 어둡고 혼란스러운 시대 (칼리 유가)에 살고 있더라도, 결코 절망할 필요가 없음을 알려준다. 왜냐하면 우주의 거대한 법칙은 결국 모든 것을 정화하고 우리를 다시 황금시대로 이끌 것이라는 희망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스토아가 ‘현재의 영원성’을 통해 우리를 일깨운다면, 힌두 철학은 ‘미래의 희망’을 통해 우리를 위로한다.



3절: 니체의 영원회귀 - "이 삶을 다시 한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하기를 원하는가?"


스토아 철학과 힌두 철학이 그려낸 영원한 순환의 우주가 신적인 질서와 도덕적 섭리라는 굳건한 축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장엄한 행성의 궤도였다면, 19세기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Nietzsche)는 그 모든 축을 부수어 버린 텅 빈 허공 속에서, 훨씬 더 무겁고도 실존적인 영원회귀의 심연을 우리 앞에 펼쳐 보인다. 스토아의 영원회귀가 우주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우주론적 ‘설명’이었다면, 니체의 영원회귀는 내가 나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윤리적 ‘질문’이다. 그것은 과학적 사실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 한 인간의 영혼의 무게를 재는 가장 무거운 저울추이며, “신은 죽었다”고 선언된 차가운 우주 속에서 우리 스스로가 삶의 의미를 창조하도록 강제하는 가장 강력한 주문이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정신적 풍경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가 보기에, 서구 문명은 수천 년간 자신들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주었던 절대적인 신이라는 앵커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과학의 발전과 계몽주의의 이성은 신을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가설로 만들었고, 그 결과 유럽의 정신은 ‘허무주의 (nihilism)’라는 깊고 어두운 바다 위를 표류하기 시작했다. 만약 신이 없다면, 만약 우리를 심판하고 구원해 줄 절대적인 존재가 없다면, 이 고통스러운 삶을 견뎌내야 할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선하게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이며, 고통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모든 것이 허무하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것이 아닌가? 니체는 이 허무주의의 심연을 누구보다도 깊이 들여다보았고, 그것을 극복할 새로운 가치를 세우는 것을 자신의 철학적 소명으로 삼았다. 영원회귀는 바로 이 허무주의라는 질병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처방전이다.


그 처방전의 내용은 니체의 저서 『즐거운 학문, Die fröhliche Wissenschaft』의 한 구절 속에, 하나의 무서운 사상 실험의 형태로 담겨있다.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상상해보라고 말한다. 어느 날 밤, 악마 한 마리가 너의 가장 깊은 고독 속으로 살며시 찾아와 이렇게 속삭인다고 말이다.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이 삶을, 너는 또다시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 거기에는 새로운 것이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고통과 모든 쾌락, 모든 생각과 한숨, 네 삶의 모든 말할 수 없이 크고 작은 것들이 똑같은 순서와 차례로 너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저 거미와 달빛, 나무들 사이의 이 순간까지도, 그리고 나 자신까지도. 존재의 영원한 모래시계는 계속해서 거꾸로 뒤집힐 것이며, 너는 그 모래알 중 하나에 불과한 먼지로서 그와 함께 뒤집힐 것이다.”


이 악마의 말을 들었을 때, 너는 땅에 몸을 내던지며 이를 갈고 악마를 저주하겠는가? 아니면 너는 한 번이라도 이렇게 대답해 본 적이 있는가? “너는 신이다. 그리고 나는 이보다 더 신적인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우리에게 던지는 궁극의 질문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영원회귀는 우주의 작동 방식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이었다. 그들은 이성적인 논증을 통해 우주가 그렇게 되어있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니체에게 영원회귀는 사실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가정’이자, 내 삶의 가치를 측정하는 가장 가혹한 ‘시험’이다. 이 시험 앞에서, 인간은 두 종류로 나뉜다. 마지막 인간 (the last man), 즉 허무주의에 굴복한 약한 자는 자신의 의미 없고 고통스러운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생각 앞에서 절망하고 몸서리칠 것이다. 반면, 이 운명을 기꺼이, 그리고 환희에 차서 긍정하는 자, 그가 바로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위버멘쉬 (Übermensch, 초인)’다.


여기서 스토아의 영원회귀와 니체의 영원회귀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가 드러난다. 스토아의 영원회귀가 ‘이성적인 긍정’이라면, 니체의 영원회귀는 ‘의지적인 긍정’이다. 스토아 현자는 우주가 완벽하고 선한 로고스의 작품임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 안의 모든 것을 필연적인 선으로 받아들인다. 그의 긍정은 우주적 질서에 대한 신뢰에서 온다. 그러나 니체의 세계에는 우리를 보살피는 신도, 선한 섭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는 그저 맹목적인 힘들이 영원히 충돌하고 생성하는,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는 혼돈 (chaos)일 뿐이다. 따라서 니체의 초인은 우주가 선하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바로 그 무의미함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 무의미함 때문에, 자신의 ‘힘에의 의지 (Wille zur Macht)’를 발휘하여 자신의 삶 전체를 그 자체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고, 그것을 영원히 원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긍정은 외부의 보증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의 창조적인 의지에서 솟아난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아모르 파티(Amor Fati)’, 즉 운명애의 진정한 의미다. 스토아의 운명 수용이 주어진 대본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현명한 배우의 태도라면, 니체의 아모르 파티는 그 대본이 자신의 피와 눈물로 쓰였음을 깨닫고, 그 모든 문장, 심지어 가장 비극적인 문장마저도 “나는 이것을 원했다”고 외치며 사랑하는 창조자의 태도다. 그것은 삶의 고통스러운 부분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없었음을 알기에 ‘바로 그것 때문에’ 삶 전체를 긍정하는 것이다.


이 영원회귀라는 “가장 무거운 무게 (das schwerste Gewicht)”는 우리를 짓누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가장 완전한 자유로 이끌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순간에 무한한 무게와 책임을 부여한다. 만약 당신이 지금 내리는 이 선택, 지금 뱉는 이 한마디 말이 앞으로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면, 당신은 얼마나 더 신중하고, 얼마나 더 진실하게 그 순간을 살아가겠는가? 영원회귀는 우리에게 매 순간을, 마치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영원인 것처럼 살아가라고 명령한다. 이 명령 앞에서, 사소한 원한이나 값싼 쾌락, 그리고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모든 비겁한 태도는 그 설 자리를 잃는다.


니체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세워놓은 영원회귀라는 고대의 신전에서 신의 조각상을 끌어내리고, 그 텅 빈 좌대 위에 인간을 올려놓았다. 스토아가 ‘우주의 관점’에서 영원을 이야기했다면, 니체는 ‘나의 관점’에서 영원을 창조하라고 말한다. 그의 영원회귀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삶은, 그 모든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 사랑과 배신을 포함한 그 모든 것을, 단 하나의 순간도 빼거나 바꾸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영원히 반복되기를 간절히 바랄 만큼, 충분히 긍정하고 사랑하는 삶인가? 이 질문에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외칠 수 있는 삶을 창조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신이 죽은 시대에 인간이 스스로에게 부여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의미이자, 허무주의의 심연을 건너는 유일한 다리다.


4절: 선형적 시간관과 순환적 시간관 - 역사를 보는 두 개의 눈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이 신비로운 강물은 과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가. 그것은 태초의 샘에서 발원하여 종말의 바다를 향해 단 한 번 흘러가는 직선의 강물인가, 아니면 자신의 꼬리를 무는 뱀처럼 시작과 끝이 맞닿아 영원히 회전하는 원형의 강물인가. 인류가 역사를 이해하고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 온 방식은, 이 두 가지 시간의 모습, 즉 ‘선형적 시간관’과 ‘순환적 시간관’이라는 두 개의 거대한 축을 중심으로 펼쳐져 왔다. 스토아 철학과 힌두 철학이 공유했던 영원회귀의 사상은 후자의 대표적인 예이며, 이를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현대의 직선적인 시간관과 비교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시간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옥에 얼마나 깊이 갇혀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순환적 시간관은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도 원초적인 시간 경험에서 비롯된다. 고대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둘러싼 자연 전체가 거대한 순환의 리듬 속에서 춤추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아침이 오면 저녁이 오고, 달이 차면 다시 기울며, 봄의 생명은 여름의 무성함을 지나 가을의 쇠락을 거쳐 겨울의 죽음 속으로 돌아갔다가, 어김없이 다시 새로운 봄을 맞이했다. 삶과 죽음 역시 이 거대한 자연의 순환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이러한 세계 속에서 시간은 앞으로만 나아가는 화살이 아니라, 계절처럼 돌고 도는 바퀴와 같았다.


우리가 앞서 탐구했던 스토아의 영원회귀와 힌두의 유가(Yuga) 사상은 바로 이 순환적 시간관을 가장 정교한 철학적 형태로 발전시킨 것이다. 스토아의 우주는 대년 (Great Year)이라는 거대한 주기의 끝에 대화재 (Ekpyrosis)로 모든 것이 불로 돌아갔다가, 이전과 완벽하게 동일한 모습으로 재탄생 (Palingenesis)하는 영원한 순환을 반복한다. 힌두의 우주 역시 창조 (사트야 유가)에서 시작하여 점진적인 타락 (칼리 유가)을 거쳐 파괴 (프랄라야)에 이른 뒤, 다시 새로운 황금시대로 돌아오는 도덕적 순환을 끝없이 되풀이한다. 이 두 세계관 속에서, 지금 이 순간은 결코 단 한 번뿐인 유일한 순간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에도 무수히 반복되었고, 미래에도 영원히 반복될 거대한 패턴의 한 부분이다. 이러한 관점은 삶에 엄숙한 무게를 부여하는 동시에, 쇠퇴와 죽음마저도 새로운 탄생을 위한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깊은 위안을 준다.


반면, 오늘날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선형적 시간관은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이 세계관에서 시간과 역사는 더 이상 끝없이 반복되는 원이 아니라, 명확한 시작과 중간, 그리고 최종적인 끝을 향해 나아가는 단 하나의 장엄한 서사다. 역사는 신이 무(無)로부터 세계를 창조한 ‘태초 (Genesis)’라는 절대적인 시작점을 가진다. 그리고 그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 부활이라는, 인류의 구원을 위한 단 한 번뿐인 결정적인 ‘중심 사건 (center of history)’을 통과한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역사는 ‘최후의 심판 (Last Judgment)’과 신의 나라가 완성되는 영원한 ‘종말 (eschaton)’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선형적 시간관에서, 모든 사건은 유일무이하며 결코 반복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은 과거에 없었고 미래에도 다시 오지 않을 단 한 번뿐인 순간이다. 따라서 역사는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의미 있는 과정이 된다. 이러한 목적론적인 시간관은 훗날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 신의 섭리라는 종교적인 옷을 벗고 ‘진보 (Progress)’라는 세속적인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제 역사는 인류가 무지와 미신에서 벗어나, 이성과 과학의 힘으로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전진해나가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라는 진보에 대한 믿음은 현대 문명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엔진이 되었다.


이 두 가지 시간관은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다르게 느끼게 한다. 순환적 시간관 속에서, 한 사건의 의미는 그것이 영원한 ‘패턴’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우리는 과거의 황금시대를 되돌아보며 현재의 타락을 슬퍼하고, 미래의 새로운 시작을 기다린다. 반면, 선형적 시간관 속에서, 한 사건의 의미는 그것이 최종적인 ‘목표’를 향한 과정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우리는 과거의 오류를 극복하고, 현재의 노력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


오늘날 우리는 대부분 이 선형적 시간관의 감옥 안에 살고 있다. ‘시간은 돈이다’라는 격언처럼, 우리는 시간을 관리하고, 절약하며, ‘낭비’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미래의 목표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며, 과거의 실수를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이러한 진보에 대한 강박은 인류에게 엄청난 물질적 발전을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우리를 자연의 리듬으로부터 소외시키고, ‘지금 이 순간’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만들며, 결코 오지 않을 완벽한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끝없는 불안 속으로 몰아넣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토아와 힌두 철학의 고대적인 순환적 시간관은 우리에게 강력한 치유의 메시지를 던진다. 그것은 우리에게 진보의 신화를 맹목적으로 거부하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질주하고 있는 이 직선의 도로 옆에, 전혀 다른 풍경을 지닌 원형의 길이 항상 존재해왔음을 기억하라고 속삭인다. 순환의 지혜는 우리에게 현재의 순간이 단지 미래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영원한 패턴이 압축되어 있는 그 자체로 완결된 우주임을 깨닫게 한다. 또한, 쇠퇴와 실패가 역사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자연스러운 과정의 일부임을 받아들이게 하여, 우리를 결과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어쩌면 진정한 지혜는 이 두 개의 눈으로 세상을 동시에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일지도 모른다. 선형적 시간관이라는 눈으로,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책임감 있게 나아가야 한다. 동시에 순환적 시간관이라는 눈으로, 우리는 그 모든 과정이 더 큰 우주적 리듬의 일부임을 알고, 지금 이 순간의 깊이를 온전히 살아내야 한다. 우리가 직선의 길을 걷는 여행자이면서 동시에, 그 길이 영원한 원 위의 한 점임을 아는 순례자가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시간의 노예에서 벗어나 시간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5절: 단 한 번의 순간을 영원처럼 사는 법


우리는 시간이라는 거대한 원 위에서 펼쳐지는 세 편의 장엄한 드라마를 보았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똑같이 반복되는 스토아의 이성적인 우주, 도덕적인 타락과 회복을 거듭하는 힌두의 신화적인 우주, 그리고 신이 죽은 허무 속에서 우리 자신의 삶을 영원히 긍정할 것을 요구하는 니체의 실존적인 우주. 이 세 개의 거대한 시간관은 서로 다른 풍경을 그리고 있지만, 놀랍게도 그들이 가리키는 최종적인 목적지는 하나의 지점에서 만난다.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라는, 지극히 짧지만 무한한 무게를 지닌 시간의 원자 속이다. 이 거대한 우주론들이 우리에게 주는 마지막이자 가장 위대한 교훈은, 결국 ‘영원’이란 저 멀리 있는 아득한 시간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스토아의 영원회귀는 우리에게 ‘책임의 영원성’을 가르쳐준다. 만약 내가 지금 행하는 이 행동, 내가 지금 내리는 이 판단이 앞으로 무한히 반복될 우주의 필연적인 한 장면이라면, 나는 이 순간을 얼마나 신중하고 진지하게 살아야 하는가. 지금 내가 행하는 작은 비겁함은 단 한 번의 실수로 끝나지 않고, 영원히 반복될 나의 인격에 새겨지는 지울 수 없는 낙인이 된다. 반대로, 가장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내가 선택하는 작은 용기와 친절은, 영원히 반복될 나의 삶을 밝히는 불멸의 훈장이 된다. 스토아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매 순간을, 마치 우주 전체의 역사가 이 순간의 도덕적 가치에 따라 심판받는 것처럼 살아가라고 요구한다. 이처럼 나의 현재는 나의 영원이 되기에, 덕을 실천하는 것은 더 이상 미래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영원한 현재를 창조하는 유일한 행위가 된다.


힌두의 유가(Yuga) 순환은 우리에게 ‘희망의 영원성’을 가르쳐준다. 우리는 지금 영적으로 가장 어두운 시대인 칼리 유가의 한가운데를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불의와 탐욕으로 가득 차 있고, 개인의 작은 노력은 거대한 혼돈 속에서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유가의 지혜는 이 어둠이 결코 영원하지 않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시간의 거대한 바퀴는 반드시 다시 굴러, 모든 것을 정화하고 새로운 황금시대 (사트야 유가)를 열 것이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 나의 작은 선행은, 비록 그 결과가 당장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가올 새로운 시대를 위한 씨앗을 심는 행위이며,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밝힌 작은 촛불 하나가 온 세상을 비출 수 있다는 희망의 증거다. 힌두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어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나의 현재가 미래의 빛을 잉태하는 소중한 순간임을 잊지 말라고 속삭인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우리에게 ‘긍정의 영원성’을 가르쳐준다. 신도 없고, 우주적 섭리도 없는 텅 빈 세계 속에서,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나 자신뿐이다. 니체의 악마가 던지는 질문, 즉 “너의 이 삶 전체를, 그 모든 고통과 눈물을 포함하여, 영원히 반복하기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은, 우리를 삶의 궁극적인 심판관이자 창조자의 자리에 세운다.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삶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가 될 수 없다. 우리는 매 순간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순간은, 영원히 반복되어도 좋을 만큼 가치 있고 아름다운가?” 이 질문은 우리에게 삶의 모든 순간을, 심지어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마저도, 내가 위버멘쉬(Übermensch)가 되려면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으로 여기고 사랑하라고(Amor Fati) 요구한다. 니체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매 순간을, 마치 그것이 그 자체로 완결된 하나의 예술 작품인 것처럼, 온전한 강렬함과 사랑으로 살아내라고 명령한다.


이 세 가지 지혜를 하나로 엮어내는 것은 결국, 단 한 번의 순간을 영원처럼 사는 법이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이 나의 영원한 인격을 결정한다는 스토아의 엄숙한 책임감을 가지고, 지금 나의 작은 선행이 미래의 희망을 싹 틔운다는 힌두의 따뜻한 믿음을 잃지 않으며, 지금 내가 겪는 이 모든 경험을 나의 삶을 완성하는 필연적인 조각으로 여기고 기꺼이 긍정하는 니체의 영웅적인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끊임없이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히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에 대한 가장 강력한 해독제다. 우리는 ‘나중에 행복해지기 위해’ 지금의 고통을 참고, ‘언젠가 성공하기 위해’ 지금의 순간을 희생한다. 그러나 이 세 명의 위대한 안내자들은 우리에게, 영원은 미래의 어느 날에 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깊이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우리가 자신의 삶을 온전히 책임지고, 희망을 잃지 않으며, 그 모든 것을 사랑하기로 선택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의 유한한 현재는 영원과 입 맞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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