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예지 - 미래를 아는 지혜

by 이호창

제16장: 예지 (Divinatio) - 미래를 아는 지혜


1절: 이성을 통한 예측과 신성한 계시


만약 이 우주가 신성한 섭리 (pronoia)에 의해 다스려지는 거대한 유기체이며, 모든 사건이 운명 (Heimarmenē)이라는 필연적인 인과의 사슬로 엮여 있다면, 여기서 하나의 대담하고도 논리적인 가능성이 고개를 든다. 그것은 바로 미래를 알 수 있다는 가능성, 즉 ‘예지 (divinatio, 디비나티오)’의 가능성이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점술이나 예언은 비합리적인 미신으로 치부되지만,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예지는 그들의 철학 체계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진지하고도 중요한 탐구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우주의 연결성 (sympatheia)을 믿었기에, 미래의 징후가 현재 속에 나타날 수 있다고 보았으며, 그 징후를 읽어내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길을 인정했다.


첫 번째 길은 ‘이성을 통한 예측’으로,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를 ‘인위적 예지 (artificial divination)’ 혹은 ‘기술적 예지’라고 불렀다. 이것은 신비로운 영감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경험과 관찰을 통해 축적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미래의 사건을 추론하는 합리적인 기술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과학적 예측이라고 부르는 것과 그 본질이 매우 유사하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의사의 진단이다. 유능한 의사는 환자의 현재 증상 (얼굴빛, 맥박, 체온)을 관찰하고, 자신의 의학적 지식과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앞으로 이 병이 어떻게 진행될 것이며 환자가 회복될지 아닐지를 예측한다. 또한, 노련한 뱃사공은 하늘의 구름 모양과 바람의 방향을 보고, 다가올 폭풍우를 예측하여 미리 대비한다. 농부는 계절의 변화와 동물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언제 씨앗을 뿌리고 언제 수확해야 할지를 안다.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이러한 예측은 결코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주가 일정한 법칙과 패턴(로고스)에 따라 움직인다는 믿음에 근거한, 지극히 이성적인 활동이었다. 모든 것은 인과의 사슬로 연결되어 있기에, 현재의 사건 속에는 미래의 결과에 대한 정보가 암호처럼 숨겨져 있다. 이성을 잘 훈련시킨 사람은 바로 이 암호를 해독하여 미래를 엿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 별들의 움직임을 통해 국가의 운명을 예측하려 했던 점성술이나, 제물로 바친 동물의 내장을 통해 전쟁의 승패를 점쳤던 내장점 (haruspicina) 역시, 고대인들에게는 우주의 공감 (sympatheia) 원리를 바탕으로 한, 수천 년간 축적된 데이터에 근거한 일종의 ‘과학’으로 여겨졌다.


두 번째 길은 ‘신성한 계시’를 통한 예지로, 이를 ‘자연적 예지 (natural divination)’라고 불렀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적인 추론을 통하지 않고, 신적인 존재가 인간의 영혼에 직접 미래의 정보를 전달하는 경우를 말한다. 이는 이성적인 기술이 아니라, 영혼이 특별한 상태에 있을 때 경험하는 직접적인 영감의 영역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신탁 (oracles)’과 ‘예언 (prophecy)’이다. 델포이의 신녀 피티아 (Pythia)와 같이, 특별히 선택된 예언자들은 신적인 영감에 사로잡힌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인간의 언어를 넘어선 신의 뜻을 전달한다고 믿어졌다. 또한, 스토아 철학자들은 ‘꿈’을 통한 예지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들은 우리가 잠들어 이성적인 의식의 활동이 멈추었을 때, 우리의 영혼(프네우마)이 우주 전체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세계영혼(프네우마)과 더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연결을 통해, 우주의 섭리는 때때로 상징적인 이미지나 사건의 형태로 우리에게 미래에 대한 경고나 암시를 보내준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예지의 길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진실을 다른 방식으로 드러내는 두 개의 창문과 같았다. 이성적 예측이 현재라는 땅 위에서 미래의 지도를 그려나가는 작업이라면, 신성한 계시는 미래라는 하늘에서 현재의 우리에게 직접 번개를 내리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여기서 스토아 철학의 가장 중요한 윤리적 반전이 일어난다. 만약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지식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불행한 미래를 피하고 행복한 미래를 좇기 위해 사용해야 하는가? 스토아 철학은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답한다.


그들에게 예지의 진정한 목적은 운명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이다. 예지를 통해 내가 곧 병에 걸릴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해도, 그것에 대해 슬퍼하거나 불안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질병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그 정보를 통해 다가올 시련 앞에서 나의 용기와 인내라는 덕을 어떻게 발휘할 것인지를 미리 준비할 수 있다. 예지는 우리에게 사건의 내용을 바꿀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선택할 힘을 강화시켜 준다.


스토아 철학의 예지는 운명론적인 세계관 속에서도 인간의 이성과 영혼이 지닌 능동적인 역할을 긍정하는 방식이었다. 이성을 통한 예측은 우리에게 우주의 합리적인 질서를 탐구하고 이해하도록 이끌며, 신성한 계시는 우리의 영혼이 우주의 더 깊은 차원과 연결되어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그 모든 앎의 끝에서, 스토아 철학은 다시 한번 우리를 우리 자신의 내면으로 되돌려 보낸다. 진정한 지혜는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평온과 덕을 잃지 않고 그것을 맞이할 수 있는 영혼의 준비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2절: 『주역(周易)』의 원리 - 변화의 패턴을 읽는 지혜


스토아 철학이 운명이라는 거대한 인과의 사슬을 ‘이성’의 눈으로 읽어내려 했다면, 동양의 가장 오래되고도 심오한 지혜인 『주역, 周易』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주의 춤을 ‘상징’의 눈으로 읽어내는 전혀 다른 종류의 지도를 우리 앞에 펼쳐 보인다. 스토아의 예지가 필연적인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면, 『주역』의 지혜는 변화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가장 조화로운 길을 찾아내는 것이다. 서양의 현자가 운명이라는 거대한 강의 흐름을 이해하려 했다면, 동양의 성인(聖人)은 그 강물의 모든 소용돌이와 여울의 의미를 읽어내어 가장 안전하게 강을 건너는 법을 탐구했다. 이 두 위대한 지혜는 모두 미래를 아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지만, 그들이 읽어낸 미래의 본질과 그것을 대하는 태도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주역』은 흔히 미래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단순한 점술서로 오해받지만, 그 본질은 점술을 훨씬 뛰어넘는 깊은 철학적 체계다. 그 이름인 ‘주역’에서 ‘역(易)’이라는 글자 자체가 이 책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역’은 ‘변화’를 의미한다. 즉, 『주역』은 고정된 미래를 예언하는 책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사실을 우주의 가장 근본적인 원리로 받아들이고, 그 변화의 패턴과 법칙을 이해하여 우리가 어떻게 그 변화에 조화롭게 참여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는 ‘변화의 철학’이다.


이 철학의 뿌리는 태극(太極)이라는 하나의 근원에서 시작한다. 태극은 모든 분화 이전의 완전한 통일체이자, 모든 가능성을 품고 있는 우주의 씨앗이다. 이 태극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세상의 모든 현상을 낳는 두 개의 근원적인 힘, 즉 음(陰)과 양(陽)이 생겨난다. 양(⚊)은 밝고, 능동적이며, 하늘로 솟아오르는 힘을 상징하고, 음(⚋)은 어둡고, 수용적이며, 땅으로 내려오는 힘을 상징한다. 이 둘은 선과 악처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밤과 낮, 남성과 여성, 들숨과 날숨처럼 서로를 보완하고 서로에게 의지하며 우주의 영원한 춤을 만들어낸다.


이 음과 양이라는 두 개의 기호를 세 겹으로 쌓아 올린 것이 바로 ‘팔괘(八卦)’다. 하늘(乾, 건), 땅(坤, 곤), 우레(震, 진), 바람(巽,손), 물(坎, 감), 불(離, 이), 산(艮, 간), 연못(兌, 태)을 상징하는 이 여덟 개의 기본 패턴은, 자연과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근본적인 힘과 상태를 상징하는 원형(archetype)과 같다. 그리고 이 팔괘를 다시 위아래로 짝을 지어 여섯 겹으로 쌓아 올린 것이 바로 『주역』의 핵심인 ‘육십사괘(六十四卦)’다. 이 64개의 괘는, 우주와 인간사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상황과 변화의 과정을 담고 있는, 하나의 완벽하고도 상징적인 지도 체계다.


『주역』을 통해 미래를 묻는 행위는, 신에게 정해진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처한 이 순간의 상황이 64괘라는 거대한 지도 위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점을 치는 사람은 보통 50개의 시초(蓍草)나 세 개의 동전을 사용하여, 우연의 과정을 통해 하나의 괘를 얻는다. 이때의 ‘우연’은 맹목적인 우연이 아니라, 융의 동시성 (Synchronicity) 개념처럼, 질문을 던지는 그 순간의 내면적 상태와 우주적 상황이 의미 있는 패턴으로 조응(照應)하여 나타난 것이라고 본다. 즉, 내가 뽑은 괘는 바로 지금, 여기의 우주가 나에게 보여주는 자신의 얼굴인 셈이다.


이러한 『주역』의 원리는 스토아의 예지 개념과 어떤 점에서 만나는가. 두 사상 모두 이 세계가 결코 무의미한 혼돈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질서와 법칙 아래 움직인다는 깊은 믿음을 공유한다. 스토아에게 그 질서는 로고스(Logos)의 합리적인 인과 사슬이었고, 『주역』에게 그것은 도(道)가 음양의 조화로운 춤을 통해 드러내는 자연스러운 패턴이었다. 또한 두 사상 모두 현재의 상태를 면밀히 관찰함으로써 미래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다고 보았다. 스토아의 의사가 현재의 증상을 통해 병의 경과를 예측하듯이, 『주역』의 군자(君子)는 현재의 괘상을 통해 상황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려 하는지를 통찰한다.


그러나 두 지혜가 읽어내는 미래의 성격과 그것을 대하는 태도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스토아의 운명은 ‘필연적’이고 ‘결정론적’이다. 모든 사건은 이미 정해져 있으며, 바꿀 수 없다. 따라서 예지의 목적은 그 필연적인 운명을 미리 알고, 그것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여 마음의 평정 (아파테이아)을 잃지 않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그것은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파도가 밀려올 것을 미리 알고, 그 파도에 휩쓸리지 않도록 굳건히 자세를 잡는 훈련이다.


반면, 『주역』이 보여주는 미래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가능성’과 ‘경향성’으로 가득 찬, 유동적이고 살아있는 것이다. 『주역』은 “너의 미래는 이렇게 될 것이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대신, “지금 너의 상황은 이러하며, 만약 네가 교만하게 행동한다면 흉한 결과로 나아갈 경향이 있고, 만약 네가 겸손하게 행동한다면 길한 결과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다”고 조언한다. 각각의 괘사(卦辭)와 효사(爻辭)는 상황에 대한 분석과 함께, 그 상황 속에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윤리적 권고를 담고 있다.


따라서 『주역』을 통해 미래를 아는 목적은 운명에 수동적으로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흐름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가장 조화롭고 ‘덕(德)스러운’ 행동을 ‘선택’함으로써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는 파도의 흐름을 읽고, 그 힘을 이용하여 가장 멋지게 파도를 타는 능숙한 서퍼의 지혜와 같다. 미래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끊임없이 창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토아와 『주역』은 모두 우리를 우주적 질서와 조화를 이루는 삶으로 이끈다. 그러나 그 조화에 이르는 길은 다르다.


스토아 철학은 우리에게 바꿀 수 없는 운명의 필연성을 사랑하고(Amor Fati),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자유를 찾으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우리에게 ‘부동심(不動心)’이라는 방패를 준다.


반면, 『주역』은 우리에게 변화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고, 매 순간 가장 올바른 길을 선택하여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나가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우리에게 ‘변화에 적응하는 지혜’라는 나침반을 준다.


스토아가 우리에게 ‘세계의 논리’를 이해하라고 한다면, 『주역』은 우리에게 ‘시간의 춤’에 동참하라고 초대하는 것이다.



3절: 예언, 직관, 통찰 - 앎의 여러 경로들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있다는 가능성의 문을 열었을 때, 우리는 그 문 너머에 단 하나의 길이 아니라, 여러 갈래의 신비로운 길이 놓여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미래를 안다’는 것은 결코 단일한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의식이 우주의 보이지 않는 질서와 만나는 방식에 따라 각기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어떤 앎은 하늘에서 내리는 번개처럼 갑작스럽게 우리를 덮치고, 어떤 앎은 땅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샘물처럼 조용히 흘러나오며, 또 어떤 앎은 오랜 시간 공들여 쌓아 올린 탑의 정상에서 비로소 보이는 풍경과 같다. 이 세 가지 앎의 경로가 바로 예언과 직관, 그리고 통찰이다. 이 길들을 구분하여 탐험하는 것은, 우리가 진실에 다가가는 다양한 방식과, 그 안에서 스토아 철학이 궁극적으로 어떤 길을 선택했는지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첫 번째 길은 ‘예언 (prophecy)’이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추론을 통해 얻어지는 앎이 아니라, 인간을 넘어선 신적인 근원으로부터 직접 주어지는 ‘계시’의 형태를 띤다. 이 길 위에서 인간은 앎의 주체가 아니라, 앎이 통과하는 ‘통로’ 혹은 ‘매개체’가 된다. 고대 델포이 신전의 여사제 피티아 (Pythia)가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신의 목소리를 전달했듯이, 예언은 종종 개인의 이성적 의지가 마비된 특별한 정신 상태에서 경험된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자연적 예지’라고 불렀던 꿈을 통한 계시 역시 이와 같다. 잠든 동안 우리의 개별적인 영혼(프네우मा)이 우주 전체의 영혼과 합일할 때, 우주의 섭리는 상징적인 이미지의 형태로 우리에게 미래의 소식을 전해준다는 것이다. 예언이 전하는 진실은 종종 암호화되어 있으며, 그것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종류의 지혜가 필요하다. 이 길에서 앎은 위에서 아래로, 즉 신에게서 인간으로 수직적으로 하강한다.


두 번째 길은 ‘직관 (intuition)’이다. 예언이 외부에서 온다면, 직관은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그러나 이성적인 사유 과정을 거치지 않고 솟아나는 앎이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직감’ 혹은 ‘육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수십 년간 바다 위에서 살아온 노련한 뱃사공은 하늘의 구름 한 점이나 바람의 미세한 냄새만으로도 다가올 폭풍을 ‘느낀다’. 그는 기상학 데이터를 분석해서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니다. 그의 무의식은 과거의 수많은 경험들을 종합하여, 의식적인 언어로 표현되기 이전의 순수한 ‘앎’의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위대한 장군이나 예술가는 복잡한 상황 앞에서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하지 않고도, 마치 번개처럼 최선의 수를 ‘본다’. 이 직관은 비합리적인 감정이 아니라, 오랜 경험과 훈련을 통해 고도로 발달된, 압축되고 응축된 형태의 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스토아의 현자는 그의 영혼이 우주의 이성인 로고스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기에, 그의 직관적인 느낌마저도 우주의 질서와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이 길에서 앎은 아래에서 위로, 즉 무의식의 깊은 땅속에서 의식의 지상으로 솟아오른다.


세 번째 길은 ‘통찰 (insight)’이다. 이것이야말로 철학자의 길이며, 스토아 철학이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앎의 방식이다. 통찰은 신비로운 계시나 갑작스러운 직감과는 다르다. 그것은 오랜 시간 동안 이성적인 탐구와 깊은 사유, 그리고 꾸준한 자기 성찰의 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찾아오는, 전체를 꿰뚫어 보는 지혜의 눈이다. 통찰은 미래에 일어날 ‘특정한 사건’을 예측하는 데 관심이 없다. 대신, 그것은 모든 사건을 지배하는 ‘보편적인 원리’와 ‘법칙’을 이해하고자 한다.


스토아 현자는 내일 자신의 배가 폭풍을 만날지 아닐지를 아는 것보다, ‘폭풍이란 무엇이며, 인간에게 진정한 해를 끼칠 수 있는가?’라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는 이성적인 탐구를 통해, 폭풍은 자연의 필연적인 과정이며, 그것이 나의 배를 부술 수는 있어도 나의 덕 (virtus)을 결코 파괴할 수 없다는 진리를 ‘통찰’하게 된다. 이 통찰에 도달한 사람에게, 미래는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그는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덕과 평온 속에서 맞이하는 ‘법’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스토아 철학이 추구했던 궁극의 예지다. 그것은 미래의 내용을 아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본질’을 아는 것이다. 이 길에서 앎은 중심에서 바깥으로, 즉 나의 이성이라는 중심에서 세계 전체의 원리를 향해 확장된다.


예언과 직관, 그리고 통찰은 진실에 이르는 세 개의 서로 다른 문이다. 예언은 신의 목소리를 듣는 귀를, 직관은 세상의 미세한 떨림을 느끼는 피부를, 그리고 통찰은 모든 것의 구조를 꿰뚫어 보는 눈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 모든 경로의 가능성을 인정했지만, 그들이 궁극적으로 신뢰하고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쳐 단련했던 것은 바로 이 ‘통찰의 눈’이었다. 왜냐하면 예언은 드물고, 직관은 우리를 속일 수 있지만, 이성을 통해 얻은 통찰은 우리에게 어떤 운명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영원하고도 온전한 자유를 약속하기 때문이다.



4절: 미래에 대한 불안을 다루는 스토아적 방법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는 가장 집요하고도 보편적인 질병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미래에 대한 불안’이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 우리가 결코 통제할 수 없는 가능성의 영역인 미래는, 우리의 마음속에 희망의 씨앗을 심기도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자주 걱정과 두려움이라는 독초를 자라게 한다. 우리는 내일 있을 중요한 발표를 걱정하고, 언젠가 닥쳐올 질병과 노화를 두려워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앞에서 잠 못 이룬다. 이처럼 미래라는 유령은 우리의 소중한 현재를 끊임없이 침범하여, 우리를 지금 여기가 아닌, 일어나지 않은 상상의 고통 속에서 살게 만든다.


스토아 철학은 바로 이 미래에 대한 불안이라는 질병을 치유하기 위한, 가장 강력하고도 체계적인 정신적 처방전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스토아의 방법은 ‘걱정하지 말라’거나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식의 막연한 위로가 아니다. 그것은 불안의 뿌리를 근본적으로 잘라내는, 지극히 이성적이고 실천적인 심리 기술의 체계다.


그 첫 번째 단계는 우리가 이미 탐구했던, 스토아 철학의 가장 위대한 무기인 ‘통제권의 이분법(Dichotomy of Control)’을 미래라는 대상에 적용하는 것이다. 불안의 본질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언제나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통제하려는 헛된 시도에서 비롯된다. 내일의 날씨, 발표를 듣는 사람들의 반응, 내 몸의 노화 과정, 그리고 최종적인 죽음의 순간은 모두 명백히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닌’ 영역에 속한다. 스토아 철학은 우리에게, 이 통제 불가능한 영역에 대한 걱정은 비이성적일 뿐만 아니라 완전히 무익한 정신적 에너지의 낭비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마치 하늘의 구름을 향해 소리치며 멈추라고 명령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따라서 불안을 다루는 첫걸음은, 나의 의식의 초점을 통제 불가능한 ‘결과’에서 내가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과정’과 ‘행동’으로 옮겨오는 것이다. 내일의 발표가 불안한가? 청중의 박수갈채(결과)를 통제하려는 욕심을 버려라. 대신,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준비(과정)에만 온전히 집중하라. 질병이 두려운가? 영원히 건강할 것이라는 불가능한 보장(결과)을 갈망하는 대신, 오늘 건강한 식사를 하고 운동을 하는 나의 ‘행동’에만 집중하라. 이처럼 우리의 정신적 에너지를 통제 가능한 영역으로 되돌려오는 것만으로도,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은 구체적인 현재의 행동 계획으로 바뀌고, 그 힘의 상당 부분을 잃게 된다.


두 번째 단계는, 이성적 통찰을 넘어 우리의 감정적 뿌리까지 파고드는 더 적극적인 훈련, 즉 ‘악의 예행연습(praemeditatio malorum)’이다. 이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미래의 최악의 시나리오를 의도적으로, 그리고 생생하게 상상해보는 것이다. 이는 불안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안의 유령을 대낮의 밝은 빛 속으로 끌어내어 그 실체를 똑똑히 마주함으로써, 그것이 생각보다 무섭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심리적 예방접종이다.


당신이 해고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막연한 불안감 속에서는 그 상황이 세상의 끝처럼 느껴진다. 이때 ‘악의 예행연습’을 시작한다. 실제로 해고당하는 장면을 구체적으로 상상한다. 상사의 차가운 통보, 동료들의 시선, 텅 빈 책상을 정리하는 나의 모습. 그리고 그 최악의 상황 속에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자, 결국 이 일이 일어났다. 나는 죽었는가? 나의 가족은 나를 버렸는가? 나의 인격, 나의 용기, 나의 지혜가 이 사건으로 인해 파괴되었는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해고라는 사건이 비록 고통스럽고 불편하기는 하지만, 결코 나의 존엄성이나 내면의 가치를 파괴할 수 없는 ‘외부적인 일’임을 깨닫게 된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그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지를 구체적으로 그려본다. “나는 얼마간의 퇴직금을 받을 것이고, 그동안 새로운 직장을 알아볼 것이다. 이 기회에 내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일에 대해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나의 진정한 친구들은 여전히 내 곁에 있을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미래에 대한 막연한 공포는 내가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하나의 구체적인 ‘문제’로 바뀌게 된다. 우리는 최악의 시나리오와 미리 친구가 됨으로써, 더 이상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불안을 다루는 가장 궁극적인 경지인 ‘운명애(Amor Fati)’의 태도를 기르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미래의 불행을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그것이 우주적 이성(로고스)의 완벽한 계획의 일부임을 신뢰하고 기꺼이 사랑하는 것이다. 스토아 철학자에게, 미래는 단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사건들의 집합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전체의 조화를 위해 가장 선한 방식으로 짜인, 필연적인 운명의 직물이다.


따라서 미래에 대한 불안은, 우주의 완벽한 질서에 대한 불신이자, 신의 지혜에 대한 오만한 저항이다. 진정으로 섭리를 신뢰하는 사람은, 미래에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그것이 결국에는 자신과 우주 전체를 위한 최선의 것임을 안다. 그는 더 이상 “만약 ~하면 어떡하지?”라고 묻지 않는다. 대신 그는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나는 그것을 나의 덕을 실현할 기회로 삼을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스토아 철학이 제시하는 불안을 다루는 방법은, 우리의 시선을 미래라는 상상의 영역에서 현재라는 유일한 현실의 영역으로 되돌려오는 것이다. 통제권의 이분법을 통해 우리의 행동을 현재에 집중시키고, 악의 예행연습을 통해 미래의 고통을 현재의 지혜로 바꾸며, 운명애를 통해 미래의 불확실성을 현재의 신뢰로 끌어안는 것이다. 이 훈련들을 통해, 우리는 더 이상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의 노예로 살아가지 않게 된다. 우리는 모든 불안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의 빛 속에서 평온하고도 온전하게 살아가는, 우리 시간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다.



5절: 최고의 예언은 현재를 올바로 사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성과 계시, 그리고 『주역』의 상징을 통해 미래를 알고자 했던 인류의 오랜 열망을 탐험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우리에게 강력한 유혹으로 다가온다. 만약 내일의 주식 시장을 알 수 있다면, 몇 년 뒤에 닥쳐올 재난을 피할 수 있다면, 내 운명의 상대가 누구인지를 미리 알 수 있다면, 우리는 고통을 피하고 행복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래라는 미지의 땅에 대한 지도를 손에 넣어, 삶이라는 위험한 항해를 안전하게 마치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이 모든 탐험의 끝에서, 스토아 철학은 우리를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끄는, 가장 급진적이고도 역설적인 결론을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설령 우리가 미래를 완벽하게 알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더라도, 그 앎은 우리의 행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스토아 철학에 따르면, 진정으로 미래를 아는 지혜는 미래를 예측하는 기술이 아니라, 어떤 미래가 닥치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현재를 만드는 기술에 있다.


이 대담한 주장의 뿌리에는, 우리가 이미 탐구했던 스토아 철학의 두 가지 근본적인 원리가 자리하고 있다. 첫째는 ‘통제권의 이분법’이다. 미래에 일어날 모든 사건들—내가 부자가 될지, 병에 걸릴지, 전쟁이 일어날지—은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닌’ 외부적인 일들의 영역에 속한다. 내가 내일 교통사고를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신탁을 통해 미리 알게 되었다고 해도, 그 사건 자체를 막을 수 있는 힘은 나에게 없다. 그 압은 나에게 무력한 공포만을 안겨줄 뿐이다.


둘째는 ‘덕(virtus)만이 유일한 선’이라는 원리다. 우리의 진정한 행복(에우다이모니아)은 미래에 어떤 ‘내용’의 사건이 일어나는가에 달려있지 않다. 그것은 그 사건에 대해 우리가 어떤 ‘태도’로 반응하는가, 즉 얼마나 덕스럽게 행동하는가에 달려있다. 내가 미래에 황제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다고 가정해보자. 이 예언은 내가 행복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만약 내가 그 권력을 탐욕스럽고 부당하게 사용한다면, 나는 황제가 된 비참한 인간이 될 뿐이다. 반대로, 내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다 하더라도, 그 사실이 나의 불행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만약 내가 그 죽음 앞에서 소크라테스처럼 용기 있고 존엄하게 행동한다면, 나의 삶은 가장 위대한 덕의 승리로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스토아 철학의 관점에서, 미래의 내용을 미리 아는 것은 우리의 행복과 무관하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를 현재의 의무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위험한 족쇄가 될 수 있다. 즐거운 미래를 알게 된 사람은 교만에 빠져 현재의 노력을 게을리할 것이고, 비극적인 미래를 알게 된 사람은 절망에 빠져 현재의 삶을 포기해버릴 것이다. 두 경우 모두, 그들은 ‘지금 여기에서’ 덕을 실천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그렇다면 진정한 예지는 무엇인가? 스토아 철학이 말하는 최고의 예언은, 미래에 대한 것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어떤 미래가 닥치더라도, 덕을 갖춘 영혼은 언제나 평온을 유지할 수 있다’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진리를 아는 것이다. 미래를 위한 최선의 준비는, 미래의 불확실성을 예측하려는 헛된 노력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나의 내면을 단련하여 어떤 불확실성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인격의 성채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훌륭한 선장의 지혜와 같다. 어리석은 선장은 다가올 모든 폭풍우의 정확한 위치와 시간을 알기 위해 하늘에만 매달린다. 그러나 현명한 선장은 어떤 폭풍우가 닥치더라도 그것을 견뎌낼 수 있도록, 지금 여기서 자신의 배를 튼튼하게 만들고, 선원들을 훈련시키며, 자신의 항해술을 연마하는 데 집중한다. 스토아 철학자는 바로 이 현명한 선장과 같다. 그의 과업은 운명의 바다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이라는 배를 완벽하게 건조하는 것이다.


스토아 철학은 예지에 대한 우리의 모든 관심을 미래라는 환영의 세계에서, 우리가 실제로 살아 숨 쉬는 유일한 현실인 현재로 되돌려 놓는다. 진정한 지혜는 별들의 움직임이나 거북이의 등껍질 무늬 속에서 미래의 징조를 읽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내 앞에 놓인 상황 속에서 내가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와 덕의 징조를 읽어내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결코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 유일한 예언이며, 우리 스스로가 매일의 삶 속에서 성취해나가는 살아있는 예언이다.


최고의 예언은, 현재를 올바로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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