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아 철학의 현자는 결코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린 채 홀로 살아가는 고독한 은둔자가 아니다. 그는 이 우주가 하나의 거대한 몸(쉼파테이아)이며, 모든 인간이 그 몸의 일부임을 아는, 가장 깊은 의미에서의 ‘사회적 동물’이다. 따라서 그의 덕(virtus)은 내면의 평온(아파테이아) 속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반드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나야만 한다. 스토아 철학은 바로 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할 올바른 행동을 ‘카테콘 (kathēkon, καθῆκον)’이라고 불렀으며, 이는 종종 ‘의무’ 혹은 ‘적절한 행위’로 번역된다. 이 의무는 어떻게 발견되고, 누구를 향해, 어디까지 확장되어야 하는가. 2세기의 스토아 철학자 히에로클레스(Hierocles)는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아름답고도 명료한 지도를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그것이 바로 ‘동심원’의 그림이다.
이 그림의 가장 중심에는 우리 자신의 몸과 마음이 있다. 모든 의무의 출발점은 바로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이다. 이는 스토아의 ‘오이케이오시스(oikeiōsis)’ 원리의 첫 번째 표현이다. 모든 생명체가 자기 자신을 보존하고 아끼려는 자연스러운 본능을 지니고 있듯이, 우리 역시 자신의 육체를 건강하게 유지하고, 자신의 이성을 맑고 건강하게 단련시킬 일차적인 책임을 지닌다.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는 자는 결코 타인을 돌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토아 철학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결코 이기심의 감옥에 갇히지 않는다. 그것은 밖으로, 더 넓은 세상을 향해 퍼져나가는 파문의 첫 번째 물방울일 뿐이다.
첫 번째 원 바로 바깥의 두 번째 원은, 우리의 부모, 형제, 배우자, 그리고 자녀와 같은 가장 가까운 가족들을 품에 안는다.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에 대한 효도와 공경, 나의 피를 나눈 형제에 대한 우애, 나의 삶을 함께하는 배우자에 대한 신의, 그리고 내가 세상에 내놓은 자녀에 대한 양육의 책임은, 자기 보존의 본능 다음으로 가장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인 의무다. 이 원 안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나’를 넘어 ‘우리’라는 관계의 문법을 배운다.
그러나 우리의 의무는 이 혈연의 울타리 안에서 멈추지 않는다. 다음 원은 삼촌이나 사촌과 같은 조금 더 먼 친척들을, 그 다음 원은 같은 동네에 사는 이웃과 친구들을, 그리고 그 다음 원은 내가 속한 도시 국가(polis)나 나라의 동료 시민들을 포함하며 계속해서 밖으로 확장되어 간다. 스토아 철학자에게 좋은 부모가 되는 것과 좋은 시민이 되는 것은 분리된 의무가 아니다. 그것은 오이케이오시스라는 동일한 강물이 그 폭을 점차 넓혀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바깥의, 가장 거대한 원의 테두리 안에는 이 땅의 모든 인류가 포함된다. 이것이 바로 스토아의 우주시민주의 (Cosmopolitanism)가 완성되는 지점이다. 내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와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피부색을 가진 저 먼 땅의 사람에 대해서도 나는 의무를 지니는가? 스토아 철학은 단호하게 ‘그렇다’고 답한다. 왜냐하면 그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신성한 이성(로고스)의 불꽃을 나누어 가진 나의 ‘친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테네나 로마의 시민이기에 앞서, 이 우주라는 단 하나의 거대한 도시 국가의 동료 시민이다.
히에로클레스에 따르면, 철학을 배우고 영혼을 단련하는 자의 평생에 걸친 신성한 과업은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저 멀리 있는 바깥쪽 원들을 그대의 의식적인 노력과 의지를 통해 끊임없이 안쪽으로, 그대의 심장 가까이로 끌어당기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이 위대한 과업을 위한 구체적인 수련법까지 자애롭게 제시했다. 가령, 그대의 사촌을 만날 때 그를 ‘형제’ 혹은 ‘자매’라 부르고, 그대의 삼촌이나 이모를 ‘아버지’나 ‘어머니’라 부르며, 길에서 마주친 나이 든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공경하는 마음을 담아 ‘할아버지’나 ‘할머니’라고 부르기 위해 애쓰라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단순한 말놀이나 호칭을 바꾸는 유희가 아니다. 이는 그대의 언어와 생각을 날카로운 끌과 망치로 삼아, 우리가 스스로 그어놓은 ‘나’와 ‘남’을 가르는 저 차디찬 경계의 벽을 의도적으로 허물어뜨리는 치열한 영혼의 수련이다.
히에로클레스가 그린 이 동심원의 지도는 스토아 철학만의 독창적인 발명품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이와 유사한 지혜의 지도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동양의 위대한 사상 속에서도 발견된다.
그 가장 강력한 공명은 바로 공자(孔子)의 유교(儒敎) 사상에서 울려 퍼진다. 공자의 윤리학 역시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 시작하여 점차 확장되는 동심원의 구조를 띤다. 모든 덕의 뿌리는 부모를 향한 ‘효(孝)’와 형제간의 ‘제(悌)’라는 가장 원초적인 가족 윤리에 있다. 이처럼 자신의 가장 가까운 관계를 바로 세우는 ‘제가 (齊家)’가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그 덕은 나라를 다스리는 ‘치국 (治國)’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온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평천하 (平天下)’의 이상으로 확장된다. 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 (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과정은 히에로클레스의 동심원과 정확히 같은 구조를 보여준다. 다만, 스토아의 확장이 모든 인간이 평등한 ‘우주 시민’이라는 이성적 통찰에 기반한다면, 유교의 확장은 군신, 부자, 부부와 같은 구체적이고 위계적인 ‘인륜 (人倫)’ 관계를 조화롭게 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그 결을 달리한다.
이러한 확장의 논리는 대승불교의 보살 (Bodhisattva) 사상에서 그 정점에 이른다. 불교의 수행자는 ‘자비희사 (慈悲喜捨)’의 ‘사무량심 (四無量心)’을 닦는 훈련을 한다. 이것은 사랑 (慈, 자), 연민 (悲, 비), 함께 기뻐함(喜, 희), 평온함(捨, 사)이라는 네 가지 마음을, 처음에는 자신에게, 다음에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리고 점차 중립적인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 마침내는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게까지 경계 없이 확장해나가는 구체적인 명상 수련이다. 이 수련의 끝에서, 보살의 마음은 히에로클레스의 가장 바깥 원이었던 ‘인류’마저 넘어서, 풀벌레 한 마리, 미물 하나까지도 포함하는 무한한 자비의 공간이 된다.
이 확장의 동력은, 모든 존재가 ‘나’라고 할 만한 고정된 실체가 없으며(無我, 무아), 본래부터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형이상학적 깨달음’에 있다.
스토아의 동심원은 인류의 보편적인 윤리적 직관을 가장 명료하게 그려낸 그림 중 하나다. 자신을 향한 자연스러운 사랑을, 이성의 힘(스토아)으로, 관계의 조화(유교)를 통해, 혹은 존재의 실상에 대한 깨달음(불교)으로 점차 확장시켜, 마침내 모든 존재를 끌어안는 것. 이것이야말로 동서고금의 현자들이 한목소리로 가리켰던, 인간이 자신의 이기심이라는 작은 감옥에서 벗어나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길이다. 스토아의 의무는 고정된 규칙의 목록이 아니라, 나의 공감과 책임의 범위를 인류 전체를 향해 끊임없이 확장해나가는, 살아있고 역동적인 사랑의 실천이다.
2절: 유교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 (修身齊家治國平天下)
스토아 철학의 현자가 ‘나’라는 중심에서 시작하여 인류 전체를 끌어안는 동심원의 의무를 사유했다면, 동양에서는 이와 놀랍도록 유사하면서도 전혀 다른 결을 지닌, 개인의 수양과 사회적 질서의 관계에 대한 가장 장엄한 청사진이 그려졌다. 그것이 바로 유교 (儒敎)의 핵심적인 이상인 ‘수신제가치국평천하 (修身齊家治國平天下)’다.
스토아의 길이 우주적 이성(로고스)과의 합일을 통해 세계시민으로 거듭나는 길이었다면, 유교의 길은 가장 가까운 인간관계의 온기 속에서 시작하여 온 세상을 하나의 조화로운 가족으로 만드는 길이다. 이 두 위대한 인간학의 지도를 비교하고, 나아가 플라톤과 인도의 지혜까지 탐색할 때, 우리는 내면의 덕이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한 보편적인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여덟 단계로 이루어진 하나의 유기적인 과정이다. 그 뿌리는 ‘수신(修身)’, 즉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는 데 있다. 공자에게 모든 사회적 질서의 시작과 끝은 바로 한 개인의 도덕적 완성이다. 배움을 통해 지혜를 밝히고 (格物致知, 격물치지), 뜻을 성실하게 하며 (誠意, 성의), 마음을 바로잡는 (正心, 정심) 과정을 통해, 군자(君子)는 먼저 자기 자신의 내면을 다스린다.
이 내면의 덕이 처음으로 시험받고 실현되는 무대가 바로 ‘제가(齊家)’, 즉 가정을 바로 세우는 것이다. 유교에게 가족은 단순히 개인의 집합이 아니라, 모든 사회관계의 원형이자 윤리의 뿌리다. 부모를 향한 효(孝)와 형제간의 우애(悌, 제)라는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해, 개인의 덕은 비로소 현실적인 힘을 얻는다. 자신의 가정을 조화롭게 이끌지 못하는 자는 결코 더 큰 공동체를 다스릴 자격이 없다.
가정이 바로 서면, 그 원리는 자연스럽게 ‘치국(治國)’, 즉 나라를 다스리는 것으로 확장된다. 나라란 결국 수많은 가정들이 모인 더 큰 가족이기 때문이다. 군주의 백성에 대한 사랑(仁)은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사랑과 그 본질이 같으며, 백성의 군주에 대한 충(忠)은 자식의 부모에 대한 효(孝)와 연결된다. 유교의 정치는 법률이나 제도를 통한 통치가 아니라, 통치자 자신의 덕이 백성에게 감화(感化)되어 사회 전체가 저절로 조화를 이루게 하는 ‘덕치(德治)’다.
그리고 마침내 나라가 평안해지면, 그 덕의 물결은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 ‘평천하(平天下)’, 즉 천하가 태평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는 군사력으로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내면에서 시작된 덕의 빛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가 온 세상을 비추는, 지극히 유기적이고도 평화로운 질서의 완성이다.
이러한 ‘내면의 질서가 외부 세계의 질서를 결정한다’는 생각은 놀랍게도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 (Platon)에게서 그 가장 강력한 서양적 메아리를 찾을 수 있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 Politeia』에서, 이상적인 국가(폴리스)는 정의로운 개인 영혼의 구조를 거울처럼 확대한 것이라고 보았다. 개인의 영혼이 이성, 기개, 욕망이라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조화를 이루듯이, 이상 국가는 철인 통치자, 군인, 생산자라는 세 계급이 각자의 역할을 다하며 조화를 이룬다. 즉, 플라톤과 공자는 둘 다 ‘올바른 사회는 올바른 개인에게서 시작된다’는 위대한 통찰을 공유했다. 그러나 플라톤의 이상 국가가 변치 않는 이데아 (Idea)의 세계를 본 철학자들이 위에서부터 다스리는 정적이고 이상적인 청사진이라면, 공자의 이상 사회는 구체적인 인간관계와 예(禮)라는 실천 속에서 아래로부터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훨씬 더 역동적이고 현실적인 그림이다.
또한, 개인의 사회적 역할과 의무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유교의 가르침은 인도의 ‘다르마(Dharma, धर्म)’ 사상과도 연결된다. 다르마 역시 각 개인이 자신의 계급 (varna)과 생의 주기 (ashrama)에 따라 마땅히 수행해야 할 우주적, 사회적 의무를 의미한다. 자신의 고유한 다르마 (svadharma)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 우주적 질서(ṛta)를 유지하고 개인의 업 (karma)을 정화하는 길이라고 본다. 그러나 유교의 의무가 오직 이 인간 세상의 조화로운 질서를 목표로 하는 현실적인 윤리학이라면, 힌두의 다르마는 윤회 (samsara)의 사슬을 끊고 궁극적인 해탈 (moksha)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하는, 훨씬 더 거대한 형이상학적, 우주론적 배경 속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한 개인의 내면 수양이 어떻게 온 세상을 평화롭게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인류 역사상 가장 웅대한 윤리적 비전 중 하나다.
스토아가 이성적 통찰을 통해 ‘나’의 경계를 우주 전체로 확장했다면, 공자는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해 ‘나’의 책임을 온 세상으로 확장했다.
이 고대의 지혜들은 우리에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가르쳐준다.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모든 위대한 여정은, 외부의 제도를 바꾸려는 시끄러운 외침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의 내면을 고요히 들여다보는 작은 발걸음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3절: 개인주의 시대의 공동체적 삶의 의미
우리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더 연결된 시대에 살고 있다. 기술은 대륙을 넘어선 실시간 소통을 가능하게 했고, 소셜 미디어는 수천 명의 ‘친구’를 우리 손안에 쥐여주었다. 그러나 이 눈부신 연결의 시대 속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가장 깊은 고립과 외로움을 경험한다. ‘나’라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 그리고 자아실현이 최고의 가치로 칭송받는 개인주의의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타인과, 그리고 공동체와 진정한 유대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사회학적인 문제를 넘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가장 근본적인 철학적 질문으로 우리를 이끈다.
스토아 철학은 이미 2천 년 전에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장엄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들은 우주 전체가 보이지 않는 숨결(프네우마)로 연결된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쉼파테이아)라고 보았으며, 모든 인간이 이성(로고스)을 나누어 가진 ‘우주의 시민’이라고 선언했다. 그들에게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동물이었으며,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야말로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길이었다. 이 고대의 지혜는, 고립된 개인이라는 현대적 자아상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것인지를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그리고 이 통찰은 스토아의 현관을 넘어, 서양 철학사의 다른 위대한 사상가들의 목소리 속에서도 그 깊은 메아리를 발견한다.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는 스토아 철학자들보다 한 세대 앞서, 인간을 ‘폴리스적 동물 (zōon politikon, 조온 폴리티콘)’이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폴리스 (polis)’는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인간이 함께 모여 좋은 삶에 대해 토론하고 실천하는 정치 공동체 전체를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인간은 결코 홀로 완성될 수 없는 존재다. 용기, 정의, 우정과 같은 우리의 가장 고귀한 덕 (aretē)들은, 오직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즉 폴리스라는 무대 위에서만 발휘되고 연마될 수 있다. 숲속에 홀로 사는 인간은 짐승이거나 신일 뿐, 진정한 의미의 ‘인간’이 될 수 없다. 그에게 공동체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외부적인 제약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의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실현하고 궁극적인 목적인 행복 (에우다이모니아)에 도달하게 하는 필수적인 조건이다.
20세기의 유대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 (Martin Buber)는 이 공동체적 삶의 의미를 훨씬 더 깊고 실존적인 차원으로 이끌고 간다. 그는 그의 저서 『나와 너, Ich und Du』에서, 우리가 세계와 관계 맺는 두 가지 근본적인 방식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나-그것(Ich-Es)’의 관계이며, 다른 하나는 ‘나-너(Ich-Du)’의 관계다. ‘나-그것’의 관계는, 내가 타인이나 사물을 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나 분석의 대상으로 대하는 관계다. 이때 ‘그것’은 나의 경험 속에 존재하며, 나는 그것을 이용하고 분류하고 판단한다. 현대 개인주의 사회의 대부분의 관계는 바로 이 ‘나-그것’의 관계다. 우리는 동료를 경쟁의 대상으로, 연인을 나의 만족을 위한 대상으로, 자연을 개발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나-너’의 관계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내가 나의 모든 선입견과 목적을 내려놓고, 타인의 존재 전체를 온 마음으로 마주하는 상호적인 만남의 순간이다. 이 순간, ‘너’는 나의 경험 속에 있는 대상이 아니라, 나와 마주 서 있는 동등한 현존이 된다. 진정한 삶은 바로 이 ‘나-너’의 관계 속에서만 일어난다고 부버는 말한다. 공동체란 단순히 ‘나-그것’의 관계를 맺는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라, ‘나-너’의 관계들이 피어나는 ‘사이 (Zwischen)’의 공간이다. 우리가 느끼는 깊은 고립감은 바로 이 ‘너’를 만나지 못하고, 온 세상을 ‘그것’으로만 대하는 데서 비롯되는 영적인 병이다.
캐나다의 현대 철학자 찰스 테일러 (Charles Taylor)는 이러한 통찰을 현대 사회의 정체성 문제와 연결시킨다. 그는 서구 근대성이 ‘원자론적 자아 (atomistic self)’라는 환상을 만들어냈다고 비판한다. 이는 개인이 사회나 문화와는 독립적으로, 스스로의 내면에서 모든 가치를 발견하고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테일러에 따르면, 이는 불가능하다. 우리의 자아는 근본적으로 ‘대화적 자아 (dialogical self)’다. 우리는 결코 홀로 ‘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모와, 친구와, 그리고 우리가 속한 문화와 언어라는 거대한 ‘의미의 지평’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투쟁하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나’라는 정체성을 형성해나간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 내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 심지어 내가 느끼는 가장 깊은 감정마저도, 나 혼자 발명한 것이 아니라 이 거대한 대화의 유산 속에서 물려받은 것이다.
이 모든 위대한 지혜들은 하나의 공통된 진실을 가리킨다. 바로 ‘고립된 개인’이라는 것은 하나의 위험한 허구라는 것이다. 스토아가 우리를 우주라는 거대한 몸의 일부로 보았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를 폴리스라는 공동체 속에서만 완성되는 존재로, 부버는 진정한 관계 속에서만 살아나는 존재로, 그리고 테일러는 타인과의 대화 속에서만 형성되는 존재로 보았다. 개인주의 시대에 공동체적 삶의 의미를 되찾는 것은, 나의 개성을 포기하고 집단에 맹목적으로 순응하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나의 존재가 얼마나 깊이 타인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깨닫고, 그 건강한 관계 속에서 비로소 가장 나다운 나로 성장할 수 있다는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외로움은 사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관계의 깊이가 얕기 때문이다. 진정한 공동체는 바로 그 깊이를 회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4절: 올바른 역할 수행 - 아들, 친구, 시민으로서의 삶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진정한 너 자신이 되라”고 속삭인다. 우리는 ‘나’를 억압하는 모든 전통적인 역할과 기대로부터 벗어나, 온전한 개인으로서 나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살아간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아들, 친구, 시민과 같은 ‘역할’들은 종종 나의 자유를 구속하는 낡은 굴레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고대의 현자들은 이와는 정반대의 길을 제시했다. 그들에게 진정한 자아는 역할로부터 ‘벗어나는’ 것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것에서 완성된다.
스토아 철학은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할 올바른 행동, 즉 ‘의무 (kathēkon, 카테콘)’가 바로 우리의 자연적인 ‘역할’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히에로클레스의 동심원이 보여주듯이, 우리는 진공 속의 개인이 아니라, 누군가의 자식이고, 누군가의 친구이며, 어떤 공동체의 시민이라는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따라서 ‘자연에 따라 사는 것’은 곧 나에게 주어진 이 역할들을 이성(logos)에 따라 훌륭하게 수행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처럼 ‘역할 수행’을 윤리의 중심으로 삼는 스토아의 통찰은, 동양의 유교(儒敎) 사상과 서양의 실존주의 철학이라는 두 개의 거대한 거울에 비추어볼 때, 그 의미가 더욱 깊고 선명해진다.
동양에서 역할 윤리학을 가장 정교하게 발전시킨 사상은 단연 공자(孔子)의 유교다. 유교 윤리의 핵심에는 ‘정명(正名)’, 즉 ‘이름을 바로잡는다’는 원리가 있다.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모든 존재가 자신의 이름, 즉 사회적 역할에 걸맞은 의무와 책임을 다할 때 비로소 세상의 질서가 바로 선다는 의미다. 군주의 역할은 백성을 어질게(仁, 인) 다스리는 것이고, 자식의 역할은 부모를 공경(孝, 효)하는 것이다.
스토아 철학이 모든 인간을 ‘우주 시민’이라는 보편적 관계로 본 반면, 유교는 군신(君臣), 부자(父子), 부부(夫婦), 장유(長幼), 붕우(朋友)라는 ‘오륜(五倫)’의 구체적이고도 위계적인 관계를 통해 덕이 실현된다고 보았다. 나에게 주어진 역할에 맞는 ‘예(禮)’를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내면의 ‘인(仁)’을 완성하고 사회적 조화를 이루는 길이다. 이처럼 유교에게 ‘나’라는 존재는 나의 역할들의 총합과 다르지 않으며, 진정한 자아실현은 이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데 있다.
반면, 20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 (Jean-Paul Sartre)가 대표하는 실존주의는 이 모든 역할 윤리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반론을 제기한다. 사르트르의 유명한 명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미리 정해진 본성이나 역할, 즉 ‘본질’이 없다는 선언이다. 우리는 그저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 (thrownness)’일 뿐이며, 자신의 모든 것을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만들어가야 하는, 무서운 자유 아래 놓여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아들’, ‘친구’, ‘시민’과 같은 사회적 역할들은 나의 진정한 자아가 아니라, 내가 선택하고 연기하는 수많은 ‘가면’에 불과하다. 사르트르는 우리가 이 역할을 자신의 본질과 동일시하며 그 뒤에 숨어버리는 것을 ‘자기기만 (mauvaise foi, 모베즈 푸아)’이라고 불렀다. 그는 카페의 웨이터를 예로 든다. 손님을 향해 과장된 친절함을 보이고, 쟁반을 나르는 그의 몸짓이 지나치게 정형화되어 있을 때, 그는 더 이상 한 명의 자유로운 인간이 아니라, ‘웨이터’라는 역할 자체를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나는 웨이터일 뿐, 다른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다’고 스스로를 속임으로써,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자유의 불안과 책임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셈이다. 사르트르에게, 진정한 자아실현은 이 모든 사회적 역할의 가면을 벗어 던지고, 자신의 순수한 실존적 선택 앞에 정직하게 서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세 개의 다른 길 위에 서 있다. 스토아는 보편적 이성에 따라 우리의 자연적 역할을 수행하라고 말한다. 유교는 사회적 조화를 위해 우리의 관계적 역할을 수행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실존주의는 이 모든 주어진 역할을 거부하고 우리 자신의 역할을 스스로 창조하라고 말한다.
이 세 길은 오늘날 정체성의 혼란 속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어쩌면 진정한 지혜는 이 세 길의 통찰을 하나로 엮어내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르트르의 경고처럼, 사회가 우리에게 부여한 역할의 가면 뒤에 안주하며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유교와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르쳐주었듯이, 우리의 자아가 타인과의 구체적인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찾고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스토아의 지혜가 그 종합의 열쇠를 제공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아들, 친구, 시민이라는 역할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거나, 혹은 냉소적으로 거부하는 대신, 그것을 나의 ‘자유로운 선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나는 사회가 정해줬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이성이 그것이 올바른 길임을 ‘선택’했기 때문에 훌륭한 아들이 되고자 노력할 수 있다. 이때 나의 역할 수행은 더 이상 자기기만이 아니라, 나의 자유의지를 통해 덕을 실현하는 가장 진실한 행위가 된다.
이처럼 우리가 각자의 역할을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이성적으로 수행할 때, 우리의 역할은 더 이상 우리를 가두는 감옥이 아니라, 우리를 진정한 자유로 이끄는 길이 될 수 있다.
5절: 정치에 참여할 것인가, 초연할 것인가
내면의 덕을 닦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는 현자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거대한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바로 흠 많고 부조리한 이 ‘정치’라는 이름의 소용돌이에 과연 몸을 던져야 하는가, 아니면 그로부터 초연하게 물러나 자신의 영혼을 지키는 데 집중해야 하는가. 이는 철학의 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한 영혼들을 끊임없이 괴롭혀 온, 행동하는 삶 (vita activa)과 관조하는 삶 (vita contemplativa) 사이의 영원한 긴장이다.
스토아 철학의 대답은 원칙적으로 명료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며, 우주라는 거대한 도시의 시민이기에, 공동체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것은 그의 가장 중요한 의무 (kathēkon) 중 하나다. 철학은 동굴 속에 숨기 위한 것이 아니라, 광장(아고라)에서 실천되기 위한 것이었다. 로마의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철학자로서의 삶을 꿈꿨지만, 제국을 다스려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피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였다. 세네카 역시 폭군 네로의 곁에서 로마 정치를 이끌며, 자신의 철학을 현실 속에서 시험했다. 그들에게 정치 참여는 선택이 아닌, 이성적 존재로서 마땅히 짊어져야 할 짐이었다.
그러나 스토아 철학은 결코 순진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치의 세계가 얼마나 타락하고 위험한지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따라서 그들은 이 의무에 하나의 중요한 단서를 달았다. 즉,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자신의 덕 (virtus)을 훼손하지 않고, 공동체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 때에만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정치 상황이 너무나 타락하여, 그 안에서 정직과 정의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고 오히려 악에 동참하도록 강요받는다면, 현자는 기꺼이 물러나 자신의 내면적 평온 (아파테이아)을 지키는 길을 택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물러남은 비겁한 도피가 아니라, 더 큰 타락을 막기 위한 현명하고도 전략적인 후퇴였다.
이러한 스토아의 조건부적인 참여론은, 플라톤 (Platon)이 제시했던 훨씬 더 급진적이고 의무적인 요구와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 Politeia』에서, 진정한 앎, 즉 선 (善)의 이데아 (Idea)를 본 철학자야말로 국가를 다스릴 유일한 자격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철학자는 권력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으며, 오직 진리를 관조하는 삶의 기쁨만을 원한다. 바로 이 때문에, 플라톤은 철학자에게 동굴 밖의 빛의 세계를 본 후에, 다시 어두운 동굴(정치 현실) 속으로 ‘내려가야만 할 의무’가 있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이는 어둠 속에 갇힌 다른 죄수들을 계몽하고 국가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할, 철학자의 가장 신성한 사회적 책임이다. 플라톤에게 정치 참여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앎을 가진 자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자 의무였다.
반면, 스토아 철학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에피쿠로스학파 (Epicureanism)는 이 모든 논의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정반대의 길을 제시했다. 에피쿠로스의 유명한 가르침은 “드러나지 않게 살아라 (λάθε βιώσας, lathe biōsas)”는 한마디로 요약된다. 그의 철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모든 종류의 고통과 불안, 즉 ‘타락시아 (taraxia, ταραχή)’가 없는 마음의 평온한 상태, ‘아타락시아 (ataraxia, ἀταραξία)’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야말로 인간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가장 큰 원천 중 하나라고 보았다. 권력에 대한 야망, 정적에 대한 두려움, 대중의 변덕스러운 평판에 대한 걱정은 결코 영혼의 평온과 양립할 수 없다. 따라서 현명한 사람은 정치라는 소란스러운 무대를 멀리하고, 소수의 친구들과 함께 ‘정원 (kēpos, κῆπος)’에 은둔하며 소박하고도 평온한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좋은 삶이다. 에피쿠로스에게 정치로부터의 초연은 선택이 아니라, 행복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이었다.
이러한 ‘물러남의 지혜’는 동양의 도가(道家) 사상에서도 그 깊은 메아리를 찾을 수 있다. 노자(老子)가 말하는 이상적인 통치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다스리는 ‘무위(無爲)’의 성인이다. 그는 인위적인 법률이나 제도로 백성을 억압하지 않고, 그저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길(道)을 따라 살아가도록 내버려 둔다. 이는 정치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을 최소화하고, 거대한 흐름에 자신을 맡기는 궁극의 초연함이다. 장자(莊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쓸모없어 보이는 거대한 나무가 그 쓸모없음 때문에 도끼날을 피하고 가장 오래 살아남듯이, 세속적인 명예나 권력이라는 ‘쓸모 있음’을 멀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와 생명을 얻는 길이라고 가르쳤다.
이 위대한 지혜들은 우리에게 정치와 삶의 관계에 대한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깊이 성찰해야 할 하나의 스펙트럼을 제시한다.
플라톤의 길은 ‘세상을 바꾸어야 할 의무’를, 에피쿠로스와 도가의 길은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켜야 할 지혜’를, 그리고 스토아의 길은 그 둘 사이의 긴장 속에서 ‘균형’을 찾으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오늘날처럼 정치가 우리의 삶 모든 영역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시대에, 완전한 초연은 불가능한 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토아의 지혜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어떻게 이 소란스러운 세상에 참여하면서도, 우리 영혼의 평온을 잃지 않을 수 있는가? 어느 지점까지가 우리의 책임 있는 참여이며, 어느 지점부터가 우리 자신을 파괴하는 어리석은 집착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 이것이야말로 정치의 시대에 철학을 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