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장: 사랑과 우정의 기술

by 이호창

제19장: 사랑과 우정의 기술


1절: 격정적 사랑을 넘어선 이성적 애정


인간의 영혼을 뒤흔드는 가장 강력하고도 매혹적인 힘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시인들은 사랑을 노래하고, 예술가들은 그 모습을 그리며, 평범한 우리들은 그 안에서 일생일대의 기쁨과 가장 깊은 절망을 동시에 맛본다. 이처럼 예측 불가능하고 종종 파괴적이기까지 한 사랑이라는 감정을, 과연 이성의 철학인 스토아는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그들은 이 뜨거운 불꽃을 영혼의 질병으로 보고 꺼버리려 했을까, 아니면 그 불꽃을 꺼지지 않는 온기로 바꿀 수 있는 또 다른 길을 발견했을까. 스토아 철학은 우리에게, 세속의 드라마가 찬미하는 격정적인 낭만적 사랑을 넘어선, 더 깊고 흔들림 없는 ‘이성적 애정’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스토아 철학의 관점에서, 우리가 흔히 ‘사랑에 빠진다 (falling in love)’고 말하는 상태는 매우 위험한 격정 (pathos)의 일종이다. 그것은 상대방이라는 외부적인 존재가 나의 행복에 필수적인 ‘선(善)’이라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판단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판단에 ‘동의’하는 순간, 우리의 평온은 더 이상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된다. 우리의 행복은 상대방의 변덕스러운 말 한마디, 사소한 행동 하나에 좌지우지되는, 바람 앞의 촛불과 같은 신세로 전락한다.


상대방이 나를 사랑해줄 때는 더없는 쾌락 (hēdonē)에 젖어 이성을 잃고, 그가 나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는 끔찍한 두려움 (phobos)에 시달린다. 연인이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미소를 보일 때, 질투라는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고, 마침내 관계가 끝났을 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고통(lupē)에 휩싸인다. 이처럼 격정적 사랑은 네 가지의 파괴적인 격정 모두를 품고 있는 가장 위험한 영혼의 질병 중 하나다. 스토아 철학자에게, 이러한 종류의 사랑은 결코 추구해야 할 이상이 아니라, 극복하고 치유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렇다면 스토아 현자는 사랑을 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그는 격정적인 사랑 (amor) 대신, ‘스토르게 (storgē, στοργή)’라 불리는, 고요하고도 깊은 애정을 실천한다. 스토르게는 부모가 자식을 향해 느끼는 것과 같은, 자연스럽고도 이성적인 친밀감과 보살핌의 마음이다. 이 이성적 애정은 상대방을 나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나 ‘소유물’로 보지 않는다. 대신, 상대방을 나와 마찬가지로 이성(로고스)의 불꽃을 나누어 가진 존엄한 존재로 존중하며, 그의 덕(virtus)이 성장하고 꽃피우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러한 스토아의 사랑은, 그들의 위대한 선배 철학자인 플라톤(Platon)이 『향연, Symposium』에서 제시한 ‘에로스 (Eros, ἔρως)’의 사다리와 비교할 때 그 특징이 더욱 선명해진다. 플라톤에게 에로스는 하나의 아름다운 육체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하여, 모든 아름다운 육체들의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더 나아가 아름다운 영혼과 법률, 그리고 지식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며, 마침내 모든 아름다움의 근원인 ‘아름다움 그 자체(美의 이데아)’를 관조하는 것으로 상승하는, 영혼의 신성한 여정이다. 이 길 위에서, 개별적인 사랑의 대상은 더 높은 차원의 사랑으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발판이 된다.


스토아의 이성적 애정 역시 이와 유사하게, 개별적인 대상을 넘어 보편적인 것을 향한다. 그러나 그 방향은 플라톤처럼 수직적인 ‘상승’이 아니라, 히에로클레스의 동심원처럼 수평적인 ‘확장’이다. 스토아 현자는 자신의 배우자나 자녀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이 결코 그들만의 울타리 안에 갇히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가족을 사랑하는 그 마음을, 이웃과 동료 시민, 그리고 마침내 인류 전체를 향한 우주적 사랑(코스모폴리타니즘)으로 확장시킨다. 그의 사랑은 특정한 한 사람을 향한 배타적인 집착이 아니라, 모든 이성적 존재를 향한 보편적인 인애(仁愛)의 한 표현이다.


또한, 이 이성적 애정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상실’의 가능성을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데 있다. 세네카는 우리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대할 때, 마치 언젠가는 돌려주어야 할 귀한 보물을 ‘빌려온 것’처럼 여기라고 조언한다. 이는 냉소적인 태도가 아니라, 모든 외부적인 것들은 우리의 통제 밖에 있으며 영원하지 않다는 스토아의 근본적인 진실을 사랑의 관계 속에 적용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아이를 잃었다”고 말하며 절망하는 대신, “나는 나의 아이를 돌려보내 주었다”고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라는 가장 큰 비극 앞에서도 내면의 평온을 지킬 수 있다. 이성적인 애정은 집착이 아니라, 자유로운 내맡김이다.


스토아 철학이 제시하는 사랑의 기술은,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았다가 한순간에 재가 되어 흩어지는 격렬한 감정의 불꽃놀이가 아니다. 그것은 추운 겨울밤, 창밖의 눈보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방 안을 고요하고도 꾸준한 온기로 채우는, 꺼지지 않는 난로의 불꽃과 같다. 불꽃놀이와 같은 사랑은 외부의 자극과 상대방의 반응이라는 화약에 의존한다. 그것은 우리를 현기증 나는 황홀경으로 끌어올리지만, 그만큼이나 깊은 어둠과 공허 속으로 우리를 내던질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난로의 불꽃과 같은 스토아의 사랑은 외부의 조건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것은 상대방의 존재 유무나 그의 변덕스러운 행동에 따라 타오르거나 사그라드는 사랑이 아니다. 그 사랑의 연료는 오직 나 자신의 내면, 즉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바라보는 판단과, 어떤 상황 속에서도 덕을 잃지 않으려는 굳건한 의지에서 나온다. 그렇기에 이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으며, 결코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다. 이 사랑은 상대방의 아름다운 외모나 빛나는 명성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사라진 후에도 남을 그의 영혼의 본질, 즉 그 안에 깃든 이성의 불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고요하고도 흔들림 없는 사랑은 우리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외부의 그림자를 좇으며, 그 그림자의 춤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불안한 사랑의 노예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당신 자신과 상대방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결코 빼앗길 수 없는 빛으로 서로의 영혼을 고요히 비추어주는 평온한 사랑의 주인이 될 것인가.


스토아 철학은 우리에게, 가장 위대한 사랑은 ‘빠지는 것 (falling)’이 아니라, 두 발로 굳건히 서서 ‘함께 걸어가는 것’임을 가르쳐준다.



2절: 플라톤의 에로스(Eros) - 육체에서 진리로 상승하는 사랑


스토아 철학이 격정적 사랑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이성적 애정 (storgē)이라는 고요한 항구를 제시했다면, 그들의 위대한 선배 철학자인 플라톤 (Platon)은 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그에게 사랑, 즉 ‘에로스 (Eros, ἔρως)’는 영혼을 병들게 하는 질병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무지에서 진리로 이끌어주는 신성한 광기 (divine madness)이자 가장 강력한 철학적 동력이었다. 스토아가 사랑을 ‘관리’하려 했다면, 플라톤은 사랑의 날개를 타고 ‘상승’하려 했다. 이 두 관점을, 아리스토텔레스와 현대 실존주의의 거울에 비추어볼 때, 우리는 사랑이라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경험 속에 담긴 다채로운 철학적 지도를 얻게 된다.


플라톤의 사랑에 대한 가장 깊이 있는 통찰은 그의 저서 『향연, Symposium』 속에 담겨있다. 이 책에서 소크라테스는 디오티마라는 현명한 여인에게서 배운 에로스의 비밀을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면, 에로스는 단순히 특정한 사람을 향한 욕망이 아니라, 아름답고 좋은 것을 영원히 소유하고자 하는, 모든 인간 영혼의 근원적인 갈망이다. 그리고 이 갈망은 우리를 낮은 차원에서 높은 차원으로 이끄는 ‘사랑의 사다리’를 오르게 하는 힘이 된다.


그 사다리의 첫 번째 계단은, 한 사람의 ‘아름다운 육체’에 대한 사랑이다. 이것은 우리가 가장 흔하게 경험하는, 열정적이고 감각적인 사랑의 시작이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의 여정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곧 그 아름다움이 자신이 사랑하는 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육체들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함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두 번째 계단, 즉 ‘모든 육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이다.


영혼이 더 성숙해지면, 그는 곧 육체의 아름다움보다 영혼의 아름다움, 즉 지혜와 덕과 같은 내면의 아름다움이 훨씬 더 고귀하고 영원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세 번째 계단, ‘아름다운 영혼’에 대한 사랑이다. 이제 사랑은 개별적인 육체를 넘어, 보편적인 덕을 향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는 법률과 제도, 그리고 학문과 지식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고, 마침내 사다리의 가장 높은 곳에서 모든 개별적인 아름다움들의 근원이 되는 단 하나의 원형,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존재하는 ‘아름다움 그 자체 (美의 이데아)’를 직관하게 된다. 이처럼 플라톤에게 에로스는, 내가 사랑하는 ‘너’라는 개별적인 존재를 발판삼아, 신적인 진리의 세계로 상승해나가는 영혼의 위대한 여정이다.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는 스승의 이러한 수직적 상승의 길과는 다른, 훨씬 더 현실적이고 수평적인 사랑의 길을 제시한다. 그는 사랑과 우정, 즉 ‘필리아 (philia, φιλία)’를 세 종류로 나누었다. 첫째는 유용성에 기반한 우정이고, 둘째는 쾌락에 기반한 우정이다. 이 두 우정은 유용성이나 쾌락이라는 조건이 사라지면 쉽게 무너진다. 그러나 가장 완전하고 참된 우정은 ‘덕(德)에 기반한 우정’이다. 이것은 두 명의 선한 사람이, 서로의 유용성이나 쾌락 때문이 아니라, 상대방이 가진 훌륭한 인격 그 자체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관계다.


이러한 우정 속에서, 친구는 플라톤의 에로스처럼 더 높은 진리를 향한 발판이 아니다. 친구는 그 자체로 목적이며, ‘또 다른 나 자신 (another self)’이다. 우리는 이 덕 높은 친구라는 거울을 통해 나 자신을 성찰하고, 함께 덕을 실천하며 성장해나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필리아는 초월적인 세계로 우리를 이끌지 않지만, 바로 이 땅 위에서, 구체적인 한 인간과 깊고 지속적인 유대를 맺으며 함께 좋은 삶을 만들어가는 길을 보여준다. 스토아의 이성적 애정은 바로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에 기반한 우정’과 그 맥이 닿아있다.


20세기의 실존주의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 (Simone de Beauvoir)는 이러한 고대의 사랑론에 현대적인 비판의 메스를 들이댄다. 그녀는 전통적인 낭만적 사랑이, 특히 여성에게 있어서, 자신의 자유로부터 도피하려는 ‘자기기만 (mauvaise foi)’의 한 형태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많은 경우,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상대방을 자신의 존재 이유 전체로 만들고, 그에게 완전히 자신을 종속시킴으로써,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실존의 불안으로부터 도망치려 한다는 것이다.


보부아르가 제시하는 ‘진정한 사랑’은 두 사람이 하나로 합쳐지는 융합이나 종속의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두 명의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주체가, 서로의 자유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각자의 고유한 삶의 프로젝트를 성취해나가도록 서로를 지지하고 격려하는 관계다. 진정한 사랑은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 위대한 지혜들은 우리에게 사랑의 다채로운 얼굴들을 보여준다. 플라톤의 에로스는 우리 안의 신적인 상승에 대한 갈망을, 아리스토텔레스의 필리아는 동등한 인격체와의 깊은 상호 존중을, 보부아르는 개별자로서의 자유에 대한 책임을, 그리고 스토아는 그 모든 관계의 기초가 되는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평온을 가르쳐준다.


어쩌면 가장 완전한 사랑이란, 에로스의 열정으로 서로에게 이끌리되, 필리아의 우정으로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며, 보부아르의 가르침처럼 각자의 자유를 지지해주고, 그 모든 과정의 기반에 스토아의 이성적 애정처럼 어떤 외부의 조건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신뢰를 두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이 모든 지혜를 동원하여 평생에 걸쳐 함께 지어나가는 위대한 예술 작품이다.



3절: 스토아 현자들의 우정은 가능한가


“현자들의 우정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언뜻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덕을 갖춘 현자들이 당연히 훌륭한 우정을 나눌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질문은 스토아 철학의 가장 단단한 두 개의 주춧돌, 즉 ‘완전한 자기 충족성 (autarkeia)’과 ‘인간의 사회적 본성’이 서로 부딪히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가장 깊고도 미묘한 균열을 정확히 짚어내는 질문이다.


스토아 철학의 핵심 원리에 따르면, 현자 (Sage)의 행복 (에우다이모니아)은 오직 그 자신의 덕 (virtus)에만 의존하며, 그 외의 어떤 외부적인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완벽하게 자기 충족적인 존재이며, 내면의 왕국을 다스리는 흔들림 없는 군주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고대의 비판가들은 묻는다. 만약 현자가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그는 왜 친구를 필요로 하는가? 친구를 필요로 한다는 것 자체가, 내 행복이 타인에게 의존한다는 약함의 증거가 아닌가? 이처럼 우정이라는 개념은 스토아의 엄격한 자기 충족성의 원리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딜레마에 대해, 스토아 철학자들은 우정의 본질을 재정의함으로써 그들만의 독창적인 해답을 내놓는다. 그들에게 현자의 우정은 결핍을 채우기 위한 ‘필요 (need)’의 관계가 아니라, 충만함을 나누기 위한 ‘선택 (choice)’의 관계이다. 현자는 행복해지기 위해 친구를 사귀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미 완벽하게 행복하며, 바로 그 행복한 상태에서 자신의 덕을 함께 실천하고 나눌 또 다른 덕스러운 존재를 자연스럽게 원하게 된다.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친구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무관한 것 (adiaphora)’에 속하지만, 그중에서도 이왕이면 갖는 편이 자연의 순리에 더 부합하는 ‘선호할 만한 것 (preferred indifferent)’이다. 현자는 친구가 없어도 불행하지 않지만, 친구가 있다면 그의 삶은 더욱 풍요로워진다. 왜냐하면 우정은 덕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훈련장 (gymnasium)’이 되기 때문이다. 친구와의 관계 속에서 정의를 배우고, 그의 어려움을 도우며 관대함을 실천하고, 그의 덕 있는 모습을 보며 자신을 성찰한다. 현자는 친구로부터 무언가를 ‘얻기’ 위해 우정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덕을 ‘주기’ 위해, 그리고 함께 덕을 실천하기 위해 우정을 나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덕에 기반한 우정 (friendship of virtue)’에 닿아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진정한 친구란, 서로의 유용성이나 쾌락 때문이 아니라, 상대방이 가진 훌륭한 인격 그 자체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관계이며, 친구는 곧 ‘또 다른 나 자신 (another self)’이다. 스토아는 이 개념을 받아들여, 두 명의 현자 사이의 우정이란, 각자의 완벽한 이성이 서로를 알아보고 기뻐하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자기 인식이라고 본다.


이 고요하고 이성적인 우정의 그림 이전에, 인류의 가장 오래된 서사시 『길가메쉬, Gilgamesh』는 훨씬 더 원초적이고 격렬하며, 운명을 뒤흔드는 우정의 원형을 보여준다. 신의 아들이자 오만한 왕이었던 길가메쉬와, 야생의 진흙으로 빚어진 엔키두의 우정은 덕의 공유가 아닌, 치열한 싸움 끝에 서로의 동등함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그들의 관계는 서로의 결핍을 채우는 것을 넘어, 서로를 ‘완성’시키는 과정이었다. 엔키두는 길가메쉬의 폭정을 가라앉히고 그에게 인간성을 가르쳤으며, 길가메쉬는 엔키두를 문명의 세계로 이끌었다. 그들은 함께 괴물 훔바바를 쓰러뜨리고 신의 황소를 죽이며 세계의 질서에 도전했고, 그들의 우정은 이성을 통한 성찰이 아니라, 생사를 넘나드는 투쟁 속에서 피로 맺어졌다. 엔키두의 죽음 앞에서 길가메쉬가 보여준 절규와 필멸의 운명에 맞선 그의 처절한 불멸의 탐구는, 친구의 상실이 자기 충족적인 현자의 평정을 얼마나 무참히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장엄한 증언이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사상가 미셸 드 몽테뉴 (Michel de Montaigne)는 그의 수필 『우정에 관하여, On Friendship』에서 이 이성적인 우정과는 전혀 다른, 훨씬 더 신비롭고 운명적인 우정의 모습을 그린다. 그는 자신의 일생일대의 친구였던 에티엔 드 라 보에시와의 관계를 설명하며, 그들이 왜 친구가 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그였기 때문에, 나였기 때문에 (Parce que c'était lui, parce que c'était moi)”라는 말뿐이었다고 고백한다. 몽테뉴의 우정은 이성적인 선택이나 덕의 공유를 넘어선, 두 영혼이 하나의 존재로 합일되는, 거의 신비 체험에 가까운 기적적인 사건이다. 그것은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경험될 뿐이다.


20세기의 사상가 C.S. 루이스 (C.S. Lewis)는 그의 저서 『네 가지 사랑, The Four Loves』에서 우정 (philia, 필리아)의 독특한 본질을 다른 각도에서 조명한다. 그에게 우정은 가족애 (storge)나 연애 감정 (eros)처럼 본능적인 것이 아니라, 두 사람 이상이 공통의 관심사나 진리에 대한 열정을 공유하고 있음을 발견할 때 탄생하는, 가장 자유롭고도 정신적인 사랑이다. 우정의 순간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뭐라고? 너도 그렇게 생각해? 나는 나 혼자인 줄 알았는데!”라고 외치는 순간에 시작된다.


이러한 관점은 스토아 현자들의 우정을 완벽하게 설명해준다. 두 명의 현자가 만났을 때, 그들은 서로에게서 무엇을 발견하겠는가? 그들은 바로 이 세상에서 가장 희귀하고도 가치 있는 공통의 관심사, 즉 ‘덕과 지혜에 대한 사랑’을 발견할 것이다. 그들의 우정은 바로 이 궁극적인 진리를 함께 바라보고, 그 길을 함께 걸어가는 동반자의 관계다.


스토아 현자들의 우정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철학이 맺는 가장 아름다운 열매 중 하나이다. 그것은 결핍과 외로움에서 비롯된 의존적인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두 개의 완벽하게 자기 충족적인 태양이, 서로의 빛을 빼앗는 대신, 서로의 빛을 나란히 비추어 세상을 더욱 밝게 만드는, 가장 자유롭고도 평등한 관계이다.


그러나 길가메쉬의 서사시는 우리에게 우정의 또 다른 얼굴을 상기시킨다. 우정은 때로 나의 완전성을 뒤흔들고, 나의 자족적인 세계에 균열을 내며, 타인의 죽음을 통해 나의 필멸성을 직면하게 만드는 가장 고통스러운 통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한다.


스토아 철학은 우리에게, 진정한 우정이란 나의 불완전함을 채워줄 누군가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나의 완전함 속에서 기꺼이 함께 걷고 싶은 동반자를 알아보는 것임을 가르쳐준다. 동시에 인류의 오래된 이야기는 그 동반자의 상실이 우리의 완전함을 어떻게 무너뜨리고 더 깊은 차원의 탐구로 이끌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4절: 이별과 상실을 받아들이는 법


사랑과 우정이 인간 영혼이 맺는 가장 아름다운 열매라면, 이별과 상실은 그 열매를 잃는 필연적인 고통이다. 한 존재가 다른 존재의 삶에 깊이 들어올수록, 그의 부재가 남기는 상처와 공허함 역시 깊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상실을 받아들이는 기술은 삶의 그림자를 외면하는 법이 아니라, 그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하는 가장 심오한 지혜에 해당한다.


고통의 근원은 상실 그 자체가 아니라, 모든 것이 영원할 것이라는 우리의 그릇된 믿음에 있다. 우리는 타인의 존재를, 함께한 시간을, 그리고 그로 인한 행복을 나의 ‘소유물’이라 착각한다. 상실은 바로 그 소유의 환상을 무참히 깨뜨리는 사건이다. 이 지점에서 스토아 철학은 우리에게 가장 냉철하면서도 위대한 위안을 건넨다. 현자 에픽테토스 (Epictetus)는 말했다. “어떤 것에 대해서도 ‘나는 그것을 잃었다’고 말하지 말고, ‘그것을 되돌려 주었다’고 말하라.”


이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사랑하는 존재는 처음부터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우주 혹은 운명이라는 거대한 힘이 우리에게 잠시 맡겨둔 선물과도 같다. 우리는 그 선물의 소유자가 아니라, 그것을 누리는 동안의 충실한 관리인이었을 뿐이다. 이별의 순간은 선물을 빼앗기는 순간이 아니라, 그것을 원래 있던 자리로 돌려보내야 할 때가 왔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태도는 감정의 마비나 차가운 체념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진정한 질서를 이해하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영혼의 위엄, 즉 아파테이아 (apatheia)의 경지이다.


불교의 지혜는 이 통찰을 더욱 깊은 차원으로 이끌고 간다. 불교의 핵심 가르침은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며, 영원히 머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진리, 즉 무상 (無常, anicca)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조건에 따라 생겨나고, 그 조건이 다하면 사라지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우리가 겪는 고통 (dukkha)은 이 자연스러운 흐름에 저항하려는 헛된 집착 (upadana)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흐르는 강물을 손에 쥐려 할 때 고통을 느끼는 것과 같다.


따라서 상실을 받아들이는 길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집착 없이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데 있다. 그것은 눈앞의 존재를 영원히 붙잡아두려는 소유의 사랑이 아니라, 그와의 만남이 얼마나 찰나적이고 귀한 기적인지를 매 순간 온전히 깨닫는 사랑이다. 꽃이 언젠가는 질 것을 알기에 그 아름다움을 더욱 깊이 음미하듯이, 우리는 모든 관계의 유한성을 직시할 때 비로소 그 관계의 순간들을 진정으로 축복할 수 있다.


그러나 때로 상실의 고통은 이성적 통찰이나 철학적 명상만으로 다스려지지 않는 거대한 파도처럼 우리를 덮친다. 길가메쉬가 친구 엔키두를 잃고 황야를 헤맸던 것처럼, 상실은 우리를 문명의 안락함에서 존재의 근원적인 질문 앞으로 내 던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상실은 단순한 고통을 넘어 영적 성장을 위한 가장 강력한 촉매제가 된다. 상실이 남긴 마음의 빈자리는, 그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결핍인 동시에,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진리가 들어올 수 있는 신성한 공간이 되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상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고통을 잊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스토아 현자처럼 우주의 질서에 고개를 끄덕이고, 불교의 수행자처럼 모든 것의 무상함을 통찰하며, 마침내 길가메쉬처럼 그 고통을 끌어안고서 삶의 의미를 묻는 구도자의 길을 떠나는 것이다.


상실이라는 깊은 상처는, 마침내 우리 영혼이 세상의 더 깊은 본질을 내다볼 수 있도록 열리는 창문이 된다. 우리는 그 창을 통해 모든 만남이 이별을 품고 있으며, 모든 생명이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는 진실을 본다. 그리고 바로 그 유한함 속에서 빛나는 삶의 존엄함과 사랑의 가치를 배우게 된다.



5절: 사랑하는 사람을 '빌려온 것'처럼 대하기


“사랑하는 사람을 빌려온 것처럼 대하라”는 가르침은, 그 첫인상에서 차갑고 비정한 거리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가장 뜨거운 인간관계의 심장에 계산적인 태도를 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역설적인 지혜의 껍질을 한 겹 벗겨내면, 우리는 소유와 집착이라는 독(毒)에서 벗어난, 가장 순수하고 자유로운 형태의 사랑과 마주하게 된다.


이 가르침의 핵심은 관계의 본질을 소유에서 환대로 전환하는 데 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것’이라는 무의식적인 전제 위에서 관계를 쌓아간다. ‘나의 아내’, ‘나의 친구’, ‘나의 자식’이라는 말 속에는, 그들의 삶과 감정이 나의 소유권 아래에 있다는 미묘한 폭력성이 숨어있다. 그러나 그 어떤 인간도 타인의 소유물이 될 수 없다. 모든 영혼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우주이며, 잠시 우리의 삶과 궤도를 함께할 뿐,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과 신(神), 혹은 우주에 속한 존재이다.


사랑하는 이를 ‘빌려온 존재’로 인식하는 순간, 우리의 역할은 주인이 아니라 ‘관리인’ 혹은 ‘손님을 맞이한 주인’으로 바뀐다. 우리는 우리에게 잠시 맡겨진 이 귀한 존재를 소중히 여기고, 그가 본연의 모습으로 가장 아름답게 빛날 수 있도록 돕는 책임을 지게 된다. 이 관리인의 마음에는 감사함이 깃들어 있다. 당연하게 여기던 그의 존재가, 실은 우주가 나에게 허락한 한시적인 선물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필연적으로 현재의 순간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만든다. 언젠가는 돌려주어야 할 것을 알기에, 우리는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게 된다.


또한, 이 지혜는 질투와 통제라는 파괴적인 감정의 뿌리를 잘라낸다. 질투는 나의 소유물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만약 상대방이 처음부터 나의 소유가 아니었음을 안다면, 그의 자유로운 선택과 성장을 억압하고 통제하려는 욕망 또한 설 자리를 잃는다. 진정한 사랑은 새를 내 손안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도록 기꺼이 손을 펴주는 것과 같다. 그가 내 곁에 머무는 것은 나의 구속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의 자유로운 선택 때문이어야 한다.


시인 칼릴 지브란 (Kahlil Gibran)은 그의 책 『예언자, The Prophet』에서 자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아이들은 당신의 아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생명의 아들이고 딸이다. 그들은 당신을 통해 왔지만, 당신으로부터 온 것은 아니다.” 이 통찰은 비단 부모와 자식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관계의 본질이 이와 같다. 연인도, 친구도, 가족도 모두 우리를 통해 그들의 삶을 펼쳐 보일 뿐, 우리에게서 비롯된 존재가 아니다.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빌려온 것처럼 대하는 것은, 관계를 포기하거나 거리를 두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모든 관계의 필연적인 끝, 즉 이별과 상실을 관계가 진행되는 모든 순간 속으로 미리 끌어안는 가장 용기 있는 사랑의 방식이다. 그것은 두 개의 독립적인 영혼이 서로의 주권을 온전히 존중하며, 유한한 시간 동안 서로의 삶을 축복하고 동행하는 가장 성숙한 태도이다. 이 사랑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상실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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