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문명은 죽음을 우리 삶의 시야 밖으로 부지런히 밀어내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죽음은 병원의 소독된 공간과 장례식장의 정형화된 절차 속에 감추어져 있으며, 우리는 마치 그것이 우리에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인 양 살아간다. 그러나 이 위생적인 망각 속에서, 우리는 삶을 가장 찬란하게 비추던 거울을 잃어버렸다. 고대의 현자들은 죽음을 외면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가장 정직한 조언자로 여겼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의 라틴어 경구,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는 병적인 우울함에 대한 초대가 아니라, 가장 절박하고도 생생한 삶을 향한 가장 강력한 명령이다.
이 지혜의 중심에는 스토아 철학이 자리하고 있다. 로마의 황제이자 철학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너는 바로 지금이라도 삶을 떠날 수 있다. 이 사실이 너의 모든 행동과 말과 생각을 결정하게 하라.” 이 문장은 우리를 공포에 빠뜨리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모든 불필요한 것들을 걸러내는 가장 날카로운 체와 같다. 언젠가 끝날 것이라는 명징한 사실 앞에서, 타인의 사소한 평가에 대한 불안, 부와 명예에 대한 끝없는 갈망, 그리고 내일로 미루는 오늘의 게으름은 그 무게를 잃고 한낱 먼지처럼 흩어진다.
죽음이라는 종착역을 정면으로 응시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에게 주어진 여정이 얼마나 유한하고 소중한지를 깨닫게 된다. 이것은 단지 스토아 학파만의 통찰이 아니었다. 불교의 수행 전통에는 죽음에 대한 마음 챙김을 의미하는 마라나사티 (Maranasati)라는 명상법이 있다. 이는 죽음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찾아올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함으로써, 현재의 순간에 대한 집착과 혐오를 내려놓고 모든 호흡의 가치를 깨닫게 하는 수행이다. 심지어 티베트의 불교 전통은 『바르도 퇴돌, Bardo Thödol』, 즉 『티벳 사자의 서』를 통해 죽음 이후의 의식 상태를 상세히 안내하며, 죽음의 과정을 삶의 가장 중요한 영적 기회로 삼도록 가르친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존재의 문턱으로 이해된다.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를 허무주의로 이끌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를 가장 온전한 현실주의자로 만든다. 우리는 이 땅 위에 영원히 머물 손님이 아니며,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이 진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묻기 시작한다. 무엇이 나의 영혼을 노래하게 하는가? 누구를 진심으로 사랑하는가? 세상에 어떤 흔적을 남기고 싶은가? 죽음이라는 거울은 우리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잡아주는 가장 엄격한 스승이다.
따라서 메멘토 모리의 실천은 어두운 묘지를 서성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햇살을 온전히 느끼는 것이다. 언젠가 이 숨이 멎을 것을 알기에, 지금 들이마시는 한 번의 호흡이 기적임을 깨닫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대화가 마지막이 될 수도 있음을 알기에, 온 마음을 다해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절망 속에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이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날인 것처럼 감사와 사랑과 의미로 가득 채우는 것이다. 죽음은 삶의 끝에 있는 적이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에 스며들어 그것을 더욱 가치있게 만드는 영원한 동반자이다.
2절: 『티벳 사자의 서』 - 죽음과 환생의 여정
스토아 철학이 죽음을 삶을 비추는 거울로 삼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구했다면, 티벳의 지혜는 죽음 그 자체를 하나의 정교하고 통과 가능한 여정으로 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문제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지도를 제시한다. 이 위대한 지혜의 정수가 바로 『바르도 퇴돌 (Bardo Thödol)』, 서양에 『티벳 사자의 서, The Tibetan Book of the Dead』로 알려진 경전이다. 이 경전의 본래 의미는 ‘중간계에서 듣는 것을 통한 해탈’로, 이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넘어가는 ‘중간계’, 즉 바르도 (Bardo)의 연속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바르도 퇴돌』은 죽은 자를 위한 책이 아니라, 죽어가는 자와 갓 죽은 자의 의식을 위해 낭송되는 안내서이다. 그 목적은 죽음의 과정에서 펼쳐지는 여러 현상의 본질을 깨닫게 하여, 그 의식이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완전한 해탈에 이르도록 돕는 데 있다. 이 경전에 따르면, 의식은 죽음 이후 육신이라는 닻을 잃고 홀로 표류하며, 크게 세 가지의 결정적인 바르도를 거치게 된다.
첫 번째는 죽음의 순간에 경험하는 ‘치카이 바르도 (Chikhai Bardo)’이다. 지수화풍(地水火風)의 네 가지 원소가 차례로 해체되고 육체의 기능이 완전히 멈추는 순간, 모든 감각적 경험과 분별적 사유가 소멸한다. 이때 의식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 어떤 개념이나 형상에도 물들지 않은 자신의 가장 근원적인 본성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그 본성은 텅 비어 있으면서도 모든 것을 알아차리는 순수하고 눈부신 ‘참된 빛 (Ösel, 외셀)’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모든 존재의 본래 바탕이자 우주의 근원적 실재인 법신 (法身, Dharmakāya)의 빛이다. 만약 생전의 깊은 명상 수행을 통해 자신의 마음이 본래 이 빛과 다르지 않음을 깨달은 이라면, 이 빛을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의 품처럼 알아보고 그 안으로 기꺼이 합일하여 즉시 윤회의 사슬을 끊고 해탈을 이룰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의식은 평생을 구체적인 형상과 감각에 의존해 살아왔기 때문에, 이 형상 없는 절대적인 빛의 광휘 앞에서 극심한 두려움과 낯섦을 느끼고 기절하거나 본능적으로 외면하게 된다. 그리하여 가장 위대한 해탈의 기회를 놓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두 번째는 ‘최니 바르도 (Chönyid Bardo)’, 즉 실재의 바르도이다. 참된 빛을 알아보지 못한 의식은 이제 자신의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던 업(業)의 씨앗들이 투영해내는 강렬한 환영의 세계로 들어선다. 이 단계에서 의식은 7일에 걸쳐 평화로운 신들을, 다음 7일에 걸쳐 분노에 찬 신들의 모습을 차례로 마주하게 된다. 눈부신 빛과 아름다운 형상으로 나타나는 평화의 신들은 우리 의식의 순수한 측면, 즉 자비, 지혜, 사랑, 평정과 같은 다섯 가지 지혜(五智)가 의인화되어 투영된 모습이다. 반면,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흉측하고 무시무시한 형상으로 나타나는 분노의 신들은 우리 내면에 억압되고 뒤틀렸던 분노, 탐욕, 질투, 오만과 같은 격정적인 에너지들이 그 본래의 순수한 힘을 드러낸 모습이다. 『바르도 퇴돌』의 핵심 가르침은 이 모든 신들이 외부에서 온 심판자나 구원자가 아니라, 전적으로 자기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 (幻影)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이들을 두려워하여 도망치거나 반대로 그 화려함에 이끌리지 않고, 그저 내 마음의 투영임을 알아차리고 평온을 유지하기만 한다면, 환영은 무지개처럼 사라지고 의식은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마지막은 ‘시드파 바르도 (Sidpa Bardo)’, 즉 윤회의 바르도이다. 앞선 두 단계에서 해탈의 기회를 모두 놓친 의식은 이제 자신의 과거 업 (業, Karma)이 만들어낸 강력한 ‘업의 바람 (karmic wind)’에 걷잡을 수 없이 휩쓸려 다음 생을 찾아 헤매게 된다. 의식은 자신이 살아생전 지은 선업과 악업의 결과에 따라 천상, 인간, 아수라, 축생, 아귀, 지옥이라는 여섯 세계 (六道)의 이미지를 보게 된다. 과거의 행위가 만들어낸 강력한 습관과 성향은 의식을 특정 세계의 이미지로 강하게 끌어당긴다. 예컨대 생전에 분노를 많이 일으킨 의식은 지옥의 맹렬한 불길에, 탐욕이 많았던 의식은 아귀 세계의 굶주림에 끌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의식은 미래에 자신의 부모가 될 남녀의 결합 장면을 보고, 강렬한 욕망이나 질투를 느끼며 그곳으로 이끌려 무의식적으로 다음 생의 잉태가 이루어진다. 이 마지막 단계에서 경전은 의식에게 윤회의 문을 닫고 좋은 부모와 환경을 선택하여 다음 생에 다시 수행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마지막 지혜를 간절하게 일깨워주려 노력한다.
『바르도 퇴돌』이 주는 가르침은 죽음에 대한 단순한 안내를 넘어선다. 그것은 삶이 곧 죽음을 위한 가장 중요한 준비 과정임을 역설한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겪는 모든 생각과 감정의 파도, 밤마다 꾸는 꿈의 환영, 그리고 깊은 명상 속에서의 체험은 모두 죽음 이후 바르도에서 겪게 될 일들의 생생한 예행연습과 같다. 내 마음의 본성이 본래 순수한 빛임을 아는 것, 내 안에서 일어나는 분노와 욕망의 환영에 속지 않고 그것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죽음이라는 마지막 시험을 두려움 없이 통과하고 영원한 자유를 얻는 유일한 길임을 이 위대한 지혜는 가르쳐주고 있다.
3절: 하이데거의 죽음으로의 선구(Sein-zum-Tode) - 죽음을 통해 찾는 실존
앞서 우리는 스토아 철학이 죽음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비추는 거울로, 티벳의 지혜가 죽음을 ‘어떻게 통과할 것인가’의 여정으로 삼았음을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는 20세기 가장 심오한 사상가 중 한 명인 마르틴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와 함께, 죽음이 가진 가장 근원적인 의미의 심연으로 내려가 보고자 한다. 하이데거에게 죽음은 삶을 성찰하게 하는 도구이거나 통과해야 할 과정 너머에 있는, 바로 우리 존재의 본질을 규정하는 가장 근원적인 조건이다. 그의 철학은 난해하기로 유명하지만, 그가 던지는 질문은 우리 모두의 삶의 심장을 겨누고 있다. “인간은 왜 존재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하이데거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의 열쇠가 바로 ‘죽음’을 어떻게 마주하는가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하이데거의 여정을 따라가기 위해, 우리는 먼저 그가 사용하는 몇 가지 독특한 개념의 지도를 손에 넣어야 한다. 그의 주저 『존재와 시간, Sein und Zeit』에서 그는 인간을 단순히 ‘생각하는 동물’이나 ‘이성적 존재’로 규정하는 전통 철학의 방식을 거부한다. 그는 인간만이 가진 독특한 존재 방식을 ‘현존재 (Dasein, 다자인)’라는 용어로 부른다. 이는 문자 그대로 ‘거기(Da)에 있음(Sein)’을 의미하며, 인간이 그저 세상 속에 놓인 사물이 아니라, 세상 ‘속에’ 있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존재를 물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돌이나 나무는 그냥 존재할 뿐, “나는 왜 여기에 있지?”라고 묻지 않는다. 오직 현존재만이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고, 그 의미를 찾아가야 하는 운명을 지고 태어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이 무겁고도 중요한 질문을 잊은 채 살아간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일상적인 삶의 방식을 ‘비본래적 (uneigentlich)’ 상태라고 부르며, 이 상태는 ‘세상 사람 (das Man)’의 지배 아래에 있다. ‘세상 사람’이란 특정한 누군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사람들은 보통 그렇게 말해”, “다들 그렇게 살아”라고 말할 때의 불특정한 ‘사람들’을 의미한다. 우리는 ‘세상 사람’이 좋다고 하는 것을 욕망하고, ‘세상 사람’이 입는 옷을 따라 입고, ‘세상 사람’이 하는 방식으로 슬퍼하고 기뻐한다. 이 속에서 ‘나’라는 고유한 존재는 사라지고, 익명의 ‘그들 중 하나’로 대체된다. 우리는 세상 속으로 ‘퇴락 (Verfallen)’하여,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피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세상에 ‘내던져진 (geworfen)’ 존재라는 사실을 잊고, 마치 세상의 주인이 된 것처럼 소소한 일상에 안주하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이처럼 ‘세상 사람’의 소음 속에 파묻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현존재는 어떻게 다시 ‘본래적 (eigentlich)’인 자기 자신을 되찾을 수 있을까? 하이데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죽음’이라는 개념을 철학의 중심으로 가져온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죽음은 의학적인 죽음, 즉 생명의 기능이 정지하는 사건이 아니다. 그에게 죽음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항상 우리와 함께하며 우리 존재를 규정하는 가장 근원적인 ‘가능성’이다.
하이데거는 죽음을 “현존재 자신의 가장 고유하고, 관계없으며, 확실하고, 무규정적이며, 따라잡을 수 없는 가능성”이라고 정의한다. 이 복잡한 문장을 하나씩 풀어본다.
첫째, 죽음은 ‘가장 고유한 (eigenste)’ 가능성이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나의 죽음을 대신해 줄 수 없다. 사랑하는 가족도, 친구도 나의 죽음의 순간에 함께 슬퍼해 줄 수는 있지만, 나의 죽음을 대신 죽어줄 수는 없다. 이 절대적인 고독함 속에서, ‘나’는 ‘세상 사람’이라는 익명의 군중 속에서 비로소 단독자로서 분리되어 나온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그들 중 하나’일 수 없으며, 오롯이 ‘나 자신’으로 서야만 한다.
둘째, 죽음은 ‘관계없는 (unbezügliche)’ 가능성이다. 나의 죽음은 다른 무엇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모든 관계, 내가 쌓아온 모든 성취, 내가 맺어온 모든 인연을 단번에 끊어버리는 절대적인 무관계성 그 자체이다. 이 사실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 관계를 통해 얻으려 했던 모든 안정감과 의미가 얼마나 허약한 기반 위에 서 있었는지를 폭로한다.
셋째, 죽음은 ‘확실하면서도 무규정적인 (gewisse, aber unbestimmte)’ 가능성이다. 내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은 그 어떤 진리보다도 확실하다. 그러나 그 죽음이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이 ‘확실한 불확실성’은 우리를 끊임없는 긴장 상태에 놓이게 한다. 우리는 죽음을 먼 미래의 일로 미뤄두고 안심할 수 없으며, 바로 다음 순간에도 닥쳐올 수 있는 가능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넷째, 죽음은 ‘따라잡을 수 없는 (unüberholbare)’ 가능성이다. 죽음은 우리가 성취하거나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가능성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가능성의 불가능성’이다. 죽음 너머에는 더 이상의 선택도, 기회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절대적인 한계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라는 유한한 시간의 무게를 실감하게 된다.
이러한 죽음의 본질을 우리에게 드러내 주는 특별한 감정이 바로 ‘불안 (Angst)’이다. 하이데거는 ‘공포 (Furcht)’와 ‘불안’을 엄격히 구분한다. 공포는 뱀이나 맹수처럼 그 대상이 명확하다. 그러나 불안은 그 대상이 명확하지 않다. 그것은 세상 전체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고,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모든 기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근원적인 불편함, ‘무 (Nichts)’와의 대면이다. ‘세상 사람’ 속에서 안락하게 살 때는 이 불안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죽음의 가능성을 직시하는 순간, 우리는 이 불안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불안은 ‘세상 사람’의 소음을 뚫고 우리를 침묵하게 만들며, 우리를 고독한 단독자로 세워 진정한 자기 자신과 대면하게 만드는 실존의 부름이다.
이 불안 속에서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결단을 하이데거는 ‘죽음으로의 선구 (Sein-zum-Tode)’ 혹은 ‘죽음을 향한 앞서 달려감 (Vorlaufen in den Tod)’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죽음을 염세적으로 기다리거나 자살을 택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죽음이라는 절대적 한계를 미리 내다봄으로써, 유한한 삶의 시간을 어떻게 채워나갈 것인지를 주체적으로 결단하는 가장 능동적인 삶의 태도이다. 죽음으로 선구하는 자는 더 이상 ‘세상 사람’이 정해준 길을 따라가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유한성을 깨닫고, 그 안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의 가능성을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진다. 이것이 바로 하이데거가 말하는 ‘본래적 실존’이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사상은 스토아 철학의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와 비교할 때 그 차이가 더욱 선명해진다.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죽음은 자연의 일부이며, 우주의 이성적인 질서 (Logos, 로고스)에 속한 필연적인 과정이다. 그들은 죽음을 기억함으로써 불필요한 욕망과 감정적 동요에서 벗어나, 덕을 쌓고 평온한 마음 (apatheia, 아파테이아)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즉, 스토아에게 죽음은 ‘이성’을 통해 받아들여야 할 우주적 사실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보편적인 덕을 실현하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게 된다.
반면, 하이데거에게 죽음은 이성으로 파악되는 자연법칙이 아니라, ‘불안’이라는 감정을 통해 마주하게 되는 가장 개인적이고 고독한 ‘실존적’ 가능성이다. 스토아 철학의 목표가 우주적 질서와의 합일을 통해 평온을 얻는 것이라면, 하이데거의 목표는 죽음과의 대면을 통해 ‘세상 사람’이라는 보편성에서 벗어나, 대체 불가능한 ‘나 자신’의 고유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스토아에게 죽음은 우리를 더 큰 전체의 일부로 돌려보내는 문이지만, 하이데거에게 죽음은 우리를 절대적인 단독자로 분리시키는 벽이다. 스토아 철학이 죽음을 통해 ‘어떻게 평온하게 살 것인가’를 가르친다면, 하이데거 철학은 죽음을 통해 ‘어떻게 나답게 결단하며 살 것인가’를 촉구한다.
하이데거가 제시하는 ‘죽음으로의 선구’는 죽음에 대한 어두운 사유가 아니다. 그것은 유한한 존재가 자신의 한계를 끌어안음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되는 가장 역설적이고도 위대한 가르침이다. 죽음은 우리 삶의 의미를 빼앗아가는 허무가 아니라, 오히려 삶의 모든 순간에 의미와 무게를 부여하는 궁극적인 원천이다.
내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 나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나를 ‘세상 사람’의 무의미한 일상에서 깨어나게 하고, “나는 무엇을 위해 나의 남은 시간을 사용할 것인가?”라는 가장 절박하고도 진실한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실존의 종소리이다. 하이데거는 우리에게, 그 종소리에 귀 기울이고, 죽음을 향해 앞서 달려감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자신의 삶을 시작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4절: 나의 장례식을 상상하는 연습
지금까지 우리는 죽음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스토아의 이성과 티벳의 신비, 그리고 하이데거의 실존이라는 세 개의 창을 통해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철학적 이해가 아무리 깊다 할지라도, 그것이 구체적인 삶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공허한 지적 유희에 머물게 될 위험이 있다. 이제 우리는 이 모든 사유를 하나의 강력하고 실천적인 명상으로 모아보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나의 장례식을 상상하는 연습’이다.
이 연습은 병적인 자기 연민이나 우울한 공상과는 그 본질을 완전히 달리한다. 이것은 우리가 앞서 살펴본 ‘메멘토 모리’와 ‘죽음으로의 선구’를 가장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실천하는, 가장 정직한 자기 성찰의 도구이다. 이 명상의 목적은 슬픔에 잠기는 것이 아니라, 삶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가장 확실한 기준점을 통해 지금 나의 삶을 남김없이 조명하고, 진정으로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가려내는 데 있다.
먼저, 고요히 홀로 있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눈을 감고, 당신이 세상을 떠난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당신의 장례식이 열리는 풍경을 마음속에 그려본다. 그곳이 어떤 장소인지 떠올려본다. 엄숙한 성당일 수도, 평화로운 숲 속일 수도, 혹은 당신이 사랑했던 바다가 보이는 언덕일 수도 있다. 날씨는 어떠한지, 비가 내리는지 아니면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지 상상해본다. 공기 중에 감도는 분위기가 슬픔인지, 아니면 평화로운 추모의 기운인지 느껴본다.
이제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려 본다. 당신의 가족, 배우자, 자녀, 그리고 부모님이 그곳에 있다. 당신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 서로의 어깨를 감싸며 앉아 있다. 당신과 함께 일했던 동료들과 당신이 속했던 공동체의 사람들도 보인다. 당신이 잊고 지냈던 얼굴이나,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물이 와 있을 수도 있다. 누가 그곳에 와 있으며, 또 누가 와 있지 않은지를 가만히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많은 것이 드러난다.
명상의 핵심은 이제부터 시작된다. 장례식의 순서에 따라, 몇몇 사람들이 당신을 추모하기 위해 연단에 오른다. 당신은 이제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 그들의 목소리에 온전히 귀를 기울인다.
첫 번째로, 당신의 가족 중 한 사람이 일어나 당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당신이 어떤 배우자였고, 어떤 부모였으며, 어떤 자식이었는지를 말한다. 그는 당신과 함께했던 일상의 작은 순간들을 추억한다. 그의 목소리에 당신의 어떤 성품이 담겨 있는지, 따뜻함과 인내인지 아니면 무관심과 짜증이었는지 들어본다. 그는 당신으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느꼈다고 말하는지, 아니면 늘 당신의 부재를 아쉬워했는지 생각해본다.
두 번째로,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연단에 선다. 그는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했던 당신의 진짜 모습을 이야기한다. 당신이 함께 나누었던 비밀, 함께 웃고 울었던 기억, 당신이 어떤 신념을 가졌고 무엇에 열광했는지를 말한다. 그의 추도사 속에서 당신은 신뢰할 수 있고 의리가 있는 친구였는지, 아니면 필요할 때만 찾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는지 돌아본다. 그는 당신과의 우정을 통해 자신의 삶이 더 풍요로워졌다고 고백하는지 귀 기울여본다.
세 번째로, 당신의 직장 동료나 당신의 사회적 활동을 함께했던 사람이 당신을 기억한다. 그는 당신의 일에 대한 태도, 당신의 책임감과 정직함,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미쳤던 영향력에 대해 말한다. 당신은 자신의 이익을 넘어 공동체의 발전에 기여한 사람으로 기억되는지, 아니면 자신의 성공만을 위해 타인을 밟고 일어섰던 사람으로 기억되는지 떠올려본다. 당신이 남긴 사회적 발자취는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그려본다.
이 상상의 추도사를 듣는 동안, 당신의 마음속에서는 하나의 거대한 질문이 떠오를 것이다. “지금 저들이 말하고 있는 저 사람이, 진정 내가 살고 싶었던 나의 모습인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자기기만이나 변명 뒤에 숨을 수 없다. 상상 속의 추도사와 내가 마음 깊이 바라는 나의 모습 사이에 벌어진 틈, 그 간극이야말로 이 명상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값진 선물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죽음을 기억함으로써 삶의 사소한 것들을 걸러냈듯이, 이 연습은 우리 삶의 우선순위를 근본적으로 재편한다. 내일 아침 부질없는 일로 누군가와 다투려 할 때, 나의 장례식장에서 들려올 목소리를 기억한다면 우리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하이데거가 죽음을 가장 고유한 가능성으로 직시할 때 ‘본래적 실존’이 시작된다고 말했듯이, 나의 장례식이라는 절대적 종말을 직시하는 것은 우리를 ‘세상 사람’의 평가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나 자신’의 목소리에 따라 살아가도록 촉구하는 가장 강력한 부름이다.
이 연습의 가장 위대한 점은, 우리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는 것이다. 상상 속의 장례식은 아직 확정된 미래가 아니다. 추도사의 내용은 지금부터 다시 쓰일 수 있다. 만약 상상 속의 내 모습이 부끄럽고 후회스럽다면, 그것은 절망의 이유가 아니라 변화를 위한 가장 확실한 동력이 된다.
우리는 우리의 장례식에 울려 퍼질 말을, 바로 오늘, 지금 이 순간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직접 써 내려갈 수 있다. 이 연습은 죽음을 통해 우리를 현재로 온전히 돌려보내는, 가장 역설적이고도 강력한 부활의 의식이다.
5절: 죽음은 자연스러운 과정인가, 피해야 할 악인가
죽음을 마주하는 인간의 오랜 역사 속에서, 인류의 지혜는 크게 두 갈래의 강물처럼 흘러왔다. 한 줄기는 죽음을 우주적 질서의 일부로 보고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수용의 길’이며, 다른 한 줄기는 죽음을 우리에게 주어진 부당한 족쇄로 보고 그것에 저항하거나 그것을 넘어서려 하는 ‘저항의 길’이다. “죽음은 자연스러운 과정인가, 아니면 피해야 할 악인가?”라는 질문은 결국 우리가 이 세계를 조화로운 집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벗어나야 할 감옥으로 볼 것인가라는 더 근원적인 질문과 맞닿아 있다.
‘수용의 길’을 대표하는 가장 굳건한 목소리는 단연 스토아 철학자들에게서 나온다. 그들에게 우주는 맹목적인 힘의 경연장이 아니라, 신성한 이성, 즉 로고스 (Logos)가 관통하는 완벽하고 조화로운 유기체이다. 이 거대한 질서 속에서 탄생과 죽음은 계절의 순환처럼 지극히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과정이다. 나뭇잎이 가을에 떨어져 나무의 뿌리로 돌아가듯, 인간 또한 우주를 구성하는 원소들로 잠시 뭉쳤다가, 죽음의 순간에 다시 그 원소들을 우주로 되돌려주는 것뿐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마치 올리브 열매가 나무에서 떨어져 대지를 저주하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했다. 스토아 철학에서 죽음은 선도 악도 아닌 ‘무관한 것 (adiaphora)’이며, 그것을 두려워하는 우리의 ‘판단’이야말로 유일한 악이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이 수용의 태도를 더욱 명쾌한 논리로 뒷받침한다. 그들은 죽음 그 자체는 우리에게 아무런 해를 끼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에피쿠로스는 말했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죽음이 없고, 죽음이 찾아왔을 때에는 내가 없다. 그러므로 죽음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죽음이라는 ‘상태’는 고통을 느낄 주체 자체가 사라진 상태이므로,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실체 없는 그림자를 보고 놀라는 것과 같다. 또한 그의 제자 루크레티우스는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의 무한한 비존재의 시간을 슬퍼하지 않듯이, 죽음 이후의 무한한 비존재의 시간 또한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대칭 논증’을 펼쳤다.
동양의 도가(道家) 사상가 장자(莊子)는 이러한 수용의 지혜를 한 차원 높은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다. 그는 아내가 죽었을 때, 슬퍼하기는커녕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고 전해진다. 그는 죽음을 거대한 도(道)의 흐름 속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변화의 한 과정으로 보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순환하듯, 인간의 삶과 죽음 또한 기(氣)가 모였다 흩어지는 과정일 뿐이다. 그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거대한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 편히 쉬는 것이며, 이를 슬퍼하는 것은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무지한 행동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 평화로운 수용의 길에 모두가 동의했던 것은 아니다. 인류 지성의 다른 한편에서는 죽음을 부조리한 폭력이자 극복해야 할 악으로 규정하는 강력한 ‘저항의 길’이 존재했다. 인류 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쉬』의 주인공 길가메쉬는 친구 엔키두의 죽음 앞에서 스토아 현자와 같은 평정을 찾지 못했다. 그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영원한 생명을 찾아 필사적인 여행을 떠난다. 그의 여정은 죽음이라는 운명에 순응하기를 거부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저항 정신을 상징한다.
이러한 저항의 정신을 가장 정교한 철학적 체계로 빚어낸 이들이 바로 영지주의자 (Gnostics)들이다. 그들에게 이 물질세계는 선하고 완전한 신이 창조한 조화로운 공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미숙하고 오만한 하위의 창조주, 즉 데미우르고스 (Demiurge)가 만들어낸 불완전한 감옥이었다. 인간의 육체는 빛의 세계로부터 추락한 신성한 불꽃, 즉 프네우마 (pneuma)를 가두고 있는 어두운 족쇄이다. 따라서 이 세계의 법칙인 탄생과 죽음의 순환은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라, 영혼을 이 감옥에 영원히 묶어두려는 사악한 시스템의 일부이다. 영지주의자들에게 죽음은 로고스의 질서로 돌아가는 평화로운 과정이 아니라, 창조주의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위험천만한 기회이자, 동시에 윤회의 굴레에 다시 떨어질 수 있는 위기였다. 그들의 목표는 죽음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비밀스러운 지혜, 즉 영지 (gnosis)를 통해 죽음과 윤회의 시스템 자체를 파괴하고 영원한 빛의 고향으로 ‘탈출’하는 것이었다.
죽음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은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계의 본질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서 비롯된다.
만약 이 세계가 스토아 철학자들이 믿었던 것처럼 신성한 이성이 깃든 질서정연한 집이라면, 죽음은 그 집의 법칙에 순응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 세계가 영지주의자들이 절규했던 것처럼 신성이 유배된 어두운 감옥이라면, 죽음은 어떻게든 부수고 넘어서야 할 감옥의 벽과 같은 악일 수밖에 없다.
죽음이 자연인가 악인가는 결국 우리 각자가 자신의 삶과 세계를 어떤 이야기 속에서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실존적 선택의 문제이다. 우리는 우주의 장엄한 교향곡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마치고 조용히 퇴장하는 연주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이 부조리한 연극의 무대를 부수고 무대 뒤의 진실을 찾아 나서는 반역자가 될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