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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장: 내려오는 세계들과 오르는 영혼

by DrLeeHC

제2-6장: 내려오는 세계들과 오르는 영혼



2-6.1. 네 세계: 아칠루트, 브리아, 예치라, 아시아



아인 소프 (Ein Sof)의 무한한 빛은 단번에 우리가 사는 물질 세계로 내려오지 않습니다. 그 빛이 한 걸음씩 스스로를 감추며 내려가는 네 개의 층위가 있습니다. 카발라는 이 네 층위를 올람 (Olam), 곧 세계라 부릅니다. 히브리어에서 올람이라는 단어는 헤엘렘 (he'elem), 곧 숨김이라는 말과 같은 뿌리를 지닙니다. 세계는 곧 신성이 자신을 숨기는 방식이며, 이 숨김의 정도에 따라 네 세계가 나뉩니다.


카발라 사상가들은 이 네 세계의 이름을 구약성서 이사야 43장 7절에서 찾아냈습니다. 신이 말합니다.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이를,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였고 (bara, 바라), 형성하였으며 (yatzar, 야차르), 만들었다 (asah, 아사)." 이 세 동사에 유출을 뜻하는 아칠루트 (Atzilut)를 더하여, 네 세계의 이름이 완성되었습니다. 아칠루트, 브리아 (Beriah), 예치라 (Yetzirah), 아시야 (Asiyah)가 그것입니다.


아칠루트: 빛이 근원과 하나인 세계


가장 높은 세계는 아칠루트입니다. 이 단어는 '근접함 (Nearness)' 또는 '유출 (Emanation)'을 뜻하는 히브리어 에첼 (Etzel)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이름 자체가 아칠루트의 본질을 명료하게 드러냅니다. 아칠루트는 창조된 세계 (Beriah, 브리아)가 아니라, 무한한 근원 (아인 소프)과 가장 가까이 근접하여 그 빛이 직접적으로 유출되는 신성 자체의 영역입니다. 이곳에서는 창조된 것과 창조자 사이의 구분이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칠루트의 모든 존재는 자신을 근원과 분리된 무언가로 인식하지 않으며, 오직 신성 그 자체의 움직임으로만 존재합니다. 모든 것이 신성이며, 독립된 존재라는 느낌 자체가 들지 않는 완전한 통일성의 세계입니다.


이 완전한 통일의 상태를 하시디즘 (Hasidism)의 언어로는 비툴 (Bittul), 곧 '자아의 완전한 무화 (無化)'라고 부릅니다. 아칠루트는 비툴의 상태가 지배하는 곳입니다. 하위의 세계에서는 '나'라는 의식이 신과 분리되어 '당신'을 바라보지만, 아칠루트에서는 '나'라는 의식이 신성의 빛 속에 완전히 녹아들어 소멸됩니다. 이는 마치 촛불이 거대한 태양 빛 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개별적인 빛을 잃어버리고 태양 자체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아칠루트의 세피로트 (Sefirot)와 파르추핌 (Partzufim, 신성한 얼굴들)은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아인 소프의 빛이 스스로를 인식하는 다양한 방식일 뿐입니다.


아칠루트 세계에는 열 개의 세피로트가 순수한 신성의 빛 그 자체로 존재합니다. 하위의 세계에서 세피로트가 빛을 담는 그릇 (Kelim, 켈림)으로서 기능하는 것과 달리, 아칠루트의 세피로트는 그릇과 빛이 완전히 하나가 되어 구분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빛이 곧 그릇이며, 그릇이 곧 빛입니다. 그중에서도 호크마 (Hokhmah, 지혜), 곧 '비추는 지성'은 이 아칠루트 세계를 지배하는 권능입니다. 호크마는 케테르 (Keter, 왕관)의 순수한 의지가 창조를 향해 최초로 발현하는 지점이며, 아직 형태를 갖추지 않은 순수한 통찰의 섬광입니다. 아칠루트가 통일성의 세계인 이유는, 모든 창조의 잠재력이 호크마라는 단 하나의 점 속에 아무런 분열 없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비나 (Binah, 이해)의 구조화가 아직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전, 순수한 가능성만이 빛나고 있는 세계가 바로 아칠루트입니다.


또한 아칠루트는 파르추핌, 곧 신성의 살아있는 얼굴들이 완전한 모습으로 자리하는 곳입니다. 우리가 티쿤 (Tikkun, 회복)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재결합시키고자 노력하는 그 원형들이 이곳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루리아 카발라는 다섯 개의 주요 파르추핌이 모두 이 아칠루트의 세계에서 숨 쉰다고 가르칩니다.


가장 높은 곳에는 케테르의 파르추프인 아리크 안핀 (Arikh Anpin, 긴 얼굴)이 있습니다. 이는 무한한 인내와 긍휼의 근원이며, 아인 소프의 빛을 하위 세계로 전달하는 최초의 통로입니다. 아리크 안핀은 아칠루트의 하늘 그 자체이며, 모든 창조가 시작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신성한 의지입니다.


그 아래에는 호크마와 비나의 파르추프인 아바 (Abba, 아버지)와 이마 (Ima, 어머니)가 존재합니다. 아칠루트의 세계에서 아바와 이마는 결코 분리되지 않는 영원한 결합 (Zivug, 지북) 상태에 있습니다. 아바는 창조의 씨앗인 호크마의 빛을 제공하고, 이마는 그 빛을 받아들여 모든 존재의 영혼을 잉태하는 위대한 자궁이 됩니다. 하위 세계의 모든 분열과 고통은 아바와 이마의 이 영원한 결합을 망각한 데서 비롯됩니다. 아칠루트에서 그들은 '결코 헤어지지 않는 두 친구'로서, 모든 창조를 지속시키는 지혜와 이해의 근원이 됩니다.


그리고 아바와 이마의 결합을 통해 제이르 안핀 (Ze'ir Anpin, 작은 얼굴)과 누크바 (Nukvah, 여성)가 탄생합니다. 제이르 안핀은 여섯 개의 하위 세피로트 (헤세드에서 예소드까지)가 통합된 신성한 아들 또는 왕이며, 누크바는 말쿠트 (Malkhut, 왕국)가 인격화된 신성한 딸 또는 왕비 (Shekhinah, 셰키나)입니다. 아칠루트의 세계에서 제이르 안핀과 누크바는 그들의 이상적인 원형으로 존재합니다. 비록 하위 세계에서는 이들이 분리되어 티쿤을 기다리는 비극적인 운명에 처해 있지만, 아칠루트에 있는 그들의 뿌리는 항상 완전한 통일성을 지향하며 결합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회복 행위는 지상의 제이르 안핀과 누크바를 아칠루트에 있는 그들의 원형과 다시 연결시켜 완전한 통일을 이루도록 돕는 것입니다.


생명나무의 구조로 보자면, 아칠루트는 상위 삼합, 곧 케테르 (Keter), 호크마 (Hokhmah), 비나 (Binah)에 해당합니다. 이 세 개의 세피라는 지식의 세피라로 알려진 다아트 (Da'at, 지식), 즉 '심연 (Abyss)'이라 불리는 틈을 통해 다른 일곱 개의 하위 세피로트와 분리되어 있으며, 완전히 영적인 본성을 지닙니다. 심연은 존재와 비존재, 형태와 무형태 사이의 경계입니다. 하위의 일곱 세피로트가 감정과 행위의 구체적인 세계를 구성한다면, 상위 삼합은 그 모든 것이 가능하도록 하는 순수한 의식의 영역입니다.


아칠루트는 신성이 스스로를 '창조'하기 이전의 상태, 즉 신성이 신성 안에서 활동하는 세계입니다. 아칠루트의 아래에 있는 브리아 (Beriah, 창조의 세계)는 신성이 '무 (Nothingness)'에서 '존재 (Being)'를 만들어내는 최초의 분리가 일어나는 곳입니다. 그러나 아칠루트에서는 그러한 분리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신이며, 신이 모든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삶과 어떻게 연결됩니까? 아칠루트는 지리적인 장소가 아니라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내재하는 의식의 상태입니다. 카발라는 인간의 영혼이 다섯 단계 (네페쉬, 루아흐, 네샤마, 하야, 예히다)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 중 가장 높은 두 단계인 하야 (Hayah, 생명)와 예히다 (Yehidah, 유일함)가 바로 아칠루트의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예히다는 케테르와 연결되며, 하야는 호크마와 연결됩니다. 우리가 일상의 분주함과 분리된 자아의식에 매몰되어 있을 때, 우리는 이 영혼의 뿌리를 망각합니다. 그러나 깊은 명상 속에서, 숭고한 예술을 경험할 때, 또는 조건 없는 사랑 속에서 '나'를 완전히 잊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비툴의 상태, 즉 아칠루트의 통일성을 잠시 맛보게 됩니다. 인간의 마음이 이 아칠루트의 세계를 이해하려 시도할 때, 모든 개념과 분별은 녹아 사라지고 오직 침묵만이 남습니다. 모든 영적 수행의 궁극적인 목적은 물질 세계 (아시야)에서 티쿤을 완수하고, 분리된 의식을 정화하여 우리 영혼의 고향인 아칠루트의 완전한 통일성 속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브리아: 무에서 유를 낳는 세계


아칠루트 (Atzilut)의 세계는 빛이 근원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나'와 '너'의 분리가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통일성의 영역이었습니다. 아칠루트는 신성이 신성 자신 안에서 활동하는 순수한 내면의 세계였습니다. 그러나 창조의 신비로운 드라마는 그 완벽한 통일성 속에 영원히 머무르지 않습니다. 무한한 신성 (Ein Sof, 아인 소프)이 자신을 드러내고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는, 자신과 구분되는 '타자'를 필요로 했기 때문입니다.


이 가장 근본적이고도 불가해한 도약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아칠루트 아래에 펼쳐지는 두 번째 세계, 브리아 (Beriah)입니다. 이 단어는 '창조'를 뜻하며, 히브리어에서 창조는 언제나 예쉬 메아인 (Yesh me'ayin), 곧 '무 (無)에서 유 (有)를 낳는다'는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칠루트가 신성이 스스로를 '발출 (Emanation)'하는 세계였다면, 브리아는 신성이 자신의 바깥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최초의 세계입니다. 아칠루트에서는 모든 것이 신 자체였지만, 브리아에서는 비로소 신과 구분되는 무언가가 생겨납니다.


이것은 창조의 가장 큰 신비입니다. 신성은 어떻게 자신이 아닌 것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까? 브리아에서 탄생한 이 '첫 번째 존재'는 여전히 근원의 빛에 압도되어 있습니다. 이 세계 역시 아칠루트처럼 비툴 (Bittul), 즉 '자아의 무화 (無化)' 상태가 지배합니다. 그러나 아칠루트의 비툴이 '나'라는 의식 자체가 신성 속에 완전히 용해되어 존재하지 않는 상태였다면, 브리아의 비툴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브리아에서는 '나'라는 희미한 주체가 처음으로 형성되며, 이 주체가 자신의 창조주를 인식하고 그 위대함에 압도되어 스스로를 기꺼이 무화시키는 경외의 상태입니다. 브리아는 창조주를 느끼는 최초의 존재가 탄생하는 곳이며, 모든 종교적 경험과 경외심의 근원적인 뿌리가 되는 세계입니다.


카발라 사상가들은 이 브리아의 세계를 '키세이 하카보드 (Kisei HaKavod)', 곧 '신성한 영광의 옥좌'라고 불렀습니다. 옥좌 (Throne)는 왕이 아닙니다. 하지만 옥좌는 왕의 현존과 권위를 상징하며 왕과 분리될 수 없는 가장 가까운 자리입니다. 옥좌는 왕이 자신의 자세를 낮추어 앉는 의자입니다. 마찬가지로 브리아는 무한하고 초월적인 신성이 스스로를 '낮추어' 창조된 세계와 접촉하는 첫 번째 지점입니다. 아칠루트의 빛이 너무나 강렬하여 어떤 피조물도 감당할 수 없다면, 브리아는 그 빛이 조절되고 안정되어 하위의 세계가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거대한 기반이자 인터페이스입니다.


이 신성한 옥좌의 세계를 지배하는 힘은 비나 (Binah), 곧 '이해'의 세피라입니다. 아칠루트에서는 호크마 (Hokhmah, 지혜)가 지배적인 힘이었습니다. 호크마는 형태 없는 순수한 통찰의 섬광이자 창조의 씨앗이었습니다. 비나는 신성한 어머니의 원리로서, 호크마라는 아버지의 무형적인 씨앗을 받아들이는 위대한 자궁입니다. 비나는 호크마의 섬광 같은 통찰을 받아들여 그것을 깊이 있게 전개하고 구체화합니다. 예쉬 메아인 (무에서 유를 낳음)의 신비가 실제로 일어나는 곳이 바로 이 비나의 영역입니다. 비나는 '이해'를 통해 무형에 형태를 부여하고 혼돈에 질서를 세우며, 모든 창조의 근원적인 청사진과 법칙을 만들어냅니다. 브리아의 세계는 신성한 어머니의 이해 속에서 모든 존재의 원형이 탄생하는 순수한 지성의 세계인 것입니다.


브리아가 순수한 지성의 세계이자 모든 원형의 고향이기 때문에, 이곳은 영혼들 (Neshamot, 네샤모트)이 탄생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카발라는 인간 영혼의 가장 높은 차원인 네샤마 (Neshamah)가 이 브리아의 세계에서 처음 형태를 얻는다고 가르칩니다. 특히 의로운 이들 (Tzadikim, 차디킴)의 영혼은 이 세계의 순수한 본질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 세상에서의 영적인 삶 (Tikkun, 티쿤)을 마친 뒤 다시 이곳으로 돌아가 '상위의 에덴동산'에 머물게 됩니다. 상위의 에덴동산은 물질적인 장소가 아니라, 신성한 옥좌 곁에서 신성한 이해 (비나)의 빛을 영원히 누리는 가장 숭고한 영적 환희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브리아는 가장 높은 영혼뿐만 아니라 가장 높은 천사들의 거주지이기도 합니다. 천사들 가운데 가장 높은 계급인 세라핌 (Seraphim)이 바로 이곳 브리아에 속합니다. 세라핌이라는 이름은 '불태우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사라파 (Saraiphah)에서 왔습니다. 그들은 '불타는 존재들'입니다. 왜 그들은 불타오릅니까? 세라핌은 창조된 존재로서 신성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신성한 옥좌 (키세이 하카보드)를 둘러싸고 아칠루트에서 흘러나오는 신성의 압도적인 광휘를 직접 목격합니다. 그들은 '첫 번째 피조물'로서 신과 자신의 분리를 가장 극적으로 인식하며, 그 인식이 너무나 강렬하여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끊임없이 영적 황홀경 속에서 타오릅니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신성을 향한 끝없는 사랑의 불꽃이며, 브리아가 간직하고 있는 최초의 경외심을 상징합니다. 이처럼 브리아의 세계는 무 (無)에서 최초의 유 (有)가 탄생하고, 최초의 영혼이 형성되며, 최초의 경외가 불타오르는 모든 창조의 신성한 출발점인 것입니다.


예치라: 감정이 형태를 찾는 세계


아칠루트가 신성이 신성 자신 안에서만 존재하는 완전한 합일의 영역이었다면, 브리아는 '무 (無)에서 유 (有)를 낳는 (Yesh me'ayin, 예쉬 메아인)' 최초의 창조가 일어나는 신성한 옥좌였습니다. 그곳은 순수한 지성과 원형적 관념이 탄생하는 곳이며, 신성한 어머니인 비나 (Binah, 비나)의 영역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신성한 빛의 하강을 따라 브리아의 차가운 지성 아래로 내려가, 예치라 (Yetzirah)라고 불리는 세 번째 세계로 진입합니다. 이 단어는 '형성을 뜻합니다'. 예치라는 창조의 드라마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감각적인 무대이며, 추상적인 관념이 비로소 구체적인 형태를 얻기 시작하는 자리입니다. 브리아가 '무에서 유를 낳았다면', 예치라는 '이미 존재하는 것 (유, Yesh)'으로부터 '다른 것 (유, Yesh)'을 빚어냅니다 (Yesh me'Yesh, 예쉬 메예쉬). 브리아의 세계가 건축가의 정교한 청사진이었다면, 예치라의 세계는 그 청사진에 색채를 입히고,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감정의 온기를 부여하는 예술가의 작업실입니다.


이 형성의 세계를 지배하는 근원적인 힘은 바로 감정 (Emotions)과 상상력 (Imagination)입니다. 브리아가 순수한 지성의 세계였다면, 예치라는 순수한 느낌의 세계입니다. 신성한 창조의 동력은 차가운 논리에서만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랑, 두려움, 연민, 그리고 갈망이라는 강렬한 감정을 통해서만 구체적인 형태로 움직일 힘을 얻습니다. 예치라는 바로 이 우주적 감정이 태어나고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영역입니다.


예치라의 세계에는 생명나무의 여섯 개의 감정 세피로트가 중심으로 작용합니다. 카발라의 신화적 언어로, 이 여섯 세피로트의 집합은 제이르 안핀 (Zeir Anpin, 작은 얼굴), 즉 신성한 아들의 파르추프 (Partzuf, 얼굴)를 구성합니다. 이 여섯 가지 힘은 헤세드 (Chesed)의 무한한 자비와 확장하려는 사랑, 게부라 (Geburah)의 엄격한 제한과 분리하려는 두려움, 그리고 티페레트 (Tiferet)의 이 두 극단을 조화시키는 아름다움과 연민입니다. 또한 네짜흐 (Netzach)의 영속하려는 의지와 감성적인 추진력, 호드 (Hod)의 형태를 만들려는 지성과 논리적인 구조,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소드 (Yesod)의 이 모든 감정을 통합하여 다음 세계로 전달하려는 기초와 생식력이 모두 이 세계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입니다. 브리아에서 이 여섯 가지가 단순한 관념이나 설계도의 일부였다면, 예치라에서 이들은 살아있는 인격체처럼 서로 사랑하고 갈등하며 창조의 감정적 동력을 제공합니다.


이 감정의 세계는 천사들의 대부분이 속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브리아의 천사들인 세라핌 (Seraphim)은 신성한 옥좌에 너무나 가까이 있어서 그 강렬함을 견디지 못하고 영적 황홀경 속에서 스스로를 불태우며 (Saraiphah, 사라파) 자아를 무화시켰습니다. 그러나 예치라의 천사들, 하요트 (Hayyot, 생명체들)나 오파님 (Ophannim, 바퀴들)과 같은 존재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브리아의 세라핌처럼 신성에 완전히 압도되어 타오르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신성한 근원 (브리아)으로부터 한 단계 멀어져 있음을 명확하게 인식합니다. 이 인식이 바로 예치라의 본질인 '갈망 (Longing)'을 탄생시킵니다.


예치라의 천사들은 신으로부터 자신들이 멀어져 있음을 느끼며 근원을 향해 끝없이 갈망합니다. 그들의 예배는 지적인 합일이 아니라, 분리된 연인이 서로를 그리워하듯 격렬한 감정과 뜨거운 동경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치라는 신성을 향한 이 거룩한 불만족과 영적인 그리움이 가득 찬 세계입니다. 이 갈망의 에너지는 두 가지 방향으로 작동합니다. 하나는 근원인 브리아로 돌아가려는 상승의 힘이며, 다른 하나는 이 감정을 구체적인 형태로 완성시키기 위해 아래 세계인 아시야 (Assiyah)로 내려가려는 형성의 힘입니다. 예치라는 이 두 가지 힘 사이의 장엄한 긴장이 지배하는 역동적인 공간입니다.


이 감정과 형성의 세계는 인간의 영혼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카발라는 인간 영혼의 다섯 차원 중 감정적 자아인 루아흐 (Ruach)가 바로 이 예치라의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기뻐하며, 슬퍼하고 갈망하는 모든 감정의 근원이 이곳에 있습니다. 예치라는 또한 인간의 상상력과 모든 창조적 표현이 뿌리를 두는 곳이기도 합니다. 예술가가 내면의 영감을 형태로 빚어낼 때, 그는 정확히 예치라의 힘과 연결됩니다. 예술가가 경험하는 무형의 영감 (브리아)은 그 자체로는 작품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술가는 자신의 감정 (여섯 세피로트)을 사용하여 그 영감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상상력 (예치라)을 동원하여 색채, 소리, 단어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빚어내야 합니다. 예술가가 자신의 영감을 완벽하게 표현하기 위해 고통스럽게 노력하는 그 과정은, 예치라의 천사들이 근원을 향해 갈망하는 그 모습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우리의 꿈과 신화, 그리고 모든 상징의 언어는 모두 예치라의 세계에서 옵니다. 이성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를 전달하기 위해, 영혼은 감정과 형상의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치라는 지성 (브리아)과 행동 (아시야) 사이의 필수적인 다리입니다. 이 감정적 형성의 세계가 없다면, 신성한 관념은 차가운 청사진으로만 남아 결코 물질 세계에 도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치라는 우주에 심장을 부여하고, 인간에게 창조에 동참할 수 있는 상상력을 선물하는 가장 아름답고 역동적인 지혜의 세계입니다.


아시야: 빛이 행위가 되는 세계


네 세계 가운데 가장 낮은 곳이 아시야입니다. 이 단어는 '행위 (Action)' 또는 '완성 (Completion)'을 뜻합니다. 이 이름 자체에 카발라가 현실 세계를 바라보는 심오한 역설이 담겨 있습니다. 아시야는 창조가 최종적으로 실현되는 자리이며, 신성의 빛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강한 숨김 (Hester Panim, 헤스테르 파님)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우리가 발 딛고 숨 쉬며, 고통받고 사랑하는 바로 이 물질 세계가 아시야에 속합니다. 신성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듯 보이는 이 최하층의 세계가 어떻게 '완성'이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습니까? 이 신비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카발라를 배우는 진정한 이유이며, 우리의 삶에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열쇠입니다.


아시야의 세계에서는 말쿠트 (Malkhut, 왕국)가 지배합니다. 말쿠트는 열 개의 세피로트 (Sefirot) 중 마지막이며, 모든 상위 세피로트의 빛을 받아 최종적으로 실현하는 거대한 그릇이자 왕좌입니다. 하지만 아시야의 말쿠트는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달과 같습니다. 그녀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모든 빛을 수용하지만, 이 물질 세계에서는 그 빛을 가장 두꺼운 장막 뒤에 숨깁니다. 이곳에서 신성은 완전히 감춰지며, 창조된 존재들은 자신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느낍니다. 이것이 아시야의 근원적인 조건이자 비극이며, 동시에 기회입니다.


우리는 테이블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유지하고 존재하게 하는 신성한 에너지 (Nitzotzot, 니초쪼트)를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저 나무와 못이라는 죽은 물질만을 인식합니다. 우리는 석양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도, 그것이 주인 없는 자연 현상인 양 여깁니다. 우리는 그 아름다움이 신성한 아름다움 (Tiferet, 티페레트)의 가장 낮은 차원의 반영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사업의 성공을 자신의 수완과 노력 덕분이라 생각하며, 신의 축복 (Berakhah, 브라카)이 가장 낮은 통로를 통해 흘러 들어왔음을 간과합니다. 아시야는 이처럼 신성이 가장 깊이 은폐된 '망각의 세계'이며, 클리포트 (Qliphoth, 껍데기)라 불리는 이기적인 욕망과 물질적 환상이 가장 두껍게 자리 잡은 전장입니다. 신성의 빛이 너무나 희미하기에, 우리는 스스로가 창조의 근원과 분리되었다고 느끼며 소외감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카발라는 결코 아시야가 단순히 신성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타락한 세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영지주의 (Gnosis, 그노시스)가 이 물질 세계를 악한 창조주가 만든 감옥으로 규정하고 탈출해야 할 장소로 본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카발라의 가장 위대한 역설은 바로 이곳, 가장 어둡고 낮은 아시야야말로 신성이 가장 강렬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곳이라고 선언하는 데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빛이 가장 완벽하게 감춰진 곳이기에, 그 빛을 발견하는 순간의 계시가 가장 강렬하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은 신성이 아칠루트의 완벽한 통일성 속에 홀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시디즘의 대가들이 설명하듯, 신성은 '가장 낮은 영역에 거처를 마련하려는 (Dirah b'Tachtonim, 디라 베타흐토님)' 욕망을 가졌습니다. 신성은 자신이 완전히 숨겨진 그곳에서, 자신의 피조물이 자유 의지 (Bechirah Chofshit, 베히라 호프시트)를 사용하여 스스로 신을 발견하고 선택하며, 그 어둠을 빛으로 변화시키기를 갈망했습니다. 아칠루트의 천사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들은 압도적인 빛 속에서 자동적으로 신을 찬양할 뿐입니다. 그들의 경배에는 자유 의지가 개입할 틈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시야의 인간은 다릅니다. 우리는 신성의 부재를 경험하며 절대적인 고독 속에 놓여 있습니다. 바로 이 고독 속에서, 클리포트의 이기적인 유혹 속에서, 우리가 단 한 번이라도 자유 의지를 사용하여 윤리적인 선택을 하고 선한 행위를 실천할 때, 그 행위는 전 우주를 뒤흔드는 엄청난 울림을 만들어냅니다. 카발라 사상가들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가장 높은 곳에 이르는 길은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됩니다." 아시야에서의 의식적인 선한 행위 하나가 아칠루트의 천사가 드리는 수천 번의 명상보다 더 큰 우주적 울림을 만들어냅니다.


왜냐하면 아시야는 '행위 (Action)'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브리아의 순수한 관념이나 예치라의 격렬한 감정은 그 자체로 완성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아시야라는 최종 무대에서 구체적인 행위로 실현될 때만 비로소 의미를 갖습니다. 아시야는 영적인 에너지가 물질적인 행위로 응축되고 완성되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우리가 이기적인 욕망 (클리포트)을 극복하고 자선 (쯔다카, Tzedakah)을 베풀기 위해 물리적인 동전을 손에 쥘 때, 우리는 단순히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돈'이라는 클리포트 속에 갇혀 있던 신성의 불꽃 (니초쪼트)을 해방 (Birur, 비루르)시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안식일 (Shabbat)을 지키기 위해 촛불에 불을 붙이는 물리적인 행위를 할 때, 우리는 신성한 여성성 (Shekhinah, 셰키나)을 이 땅에 불러들이는 우주적인 의식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아시야의 모든 미츠바 (Mitzvah, 계명)는 영적인 세계의 흐름을 바꾸는 실제적인 연금술입니다.


아시야는 신성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타락한 세계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곳이야말로 신성의 빛이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최전선이며, 인간의 자유 의지라는 행위를 통해 신성이 스스로의 창조를 '완성'시키는 궁극적인 목적지입니다. 아시야는 신성이 우리에게 자신의 완성을 맡긴 약속의 땅입니다. 우리의 과제는 이 세상을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일상적인 행위 속에서 숨겨진 신성을 발견하고 드러냄으로써, 이 가장 낮은 아시야의 세계를 가장 높은 아칠루트의 세계처럼 빛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신성의 빛이 우리의 행위가 될 때, 비로소 창조는 완성됩니다.


사다리를 오르고 내리는 빛의 흐름


네 세계는 서로 분리된 영역이 아닙니다. 이들은 하나로 이어진 사슬이며, 끊임없이 빛이 오르고 내립니다. 카발라는 이 연결을 야곱의 사다리에 비유합니다. 창세기에서 야곱은 꿈속에서 땅에 세워진 사다리를 봅니다.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아 있고, 천사들이 그 위를 오르고 내립니다. 이 사다리가 바로 네 세계를 관통하는 통로입니다.


각 세계의 말쿠트는 동시에 그 아래 세계의 케테르가 됩니다. 아칠루트의 말쿠트가 브리아의 케테르이고, 브리아의 말쿠트가 예치라의 케테르이며, 예치라의 말쿠트가 아시야의 케테르입니다. 이렇게 세계들은 서로 겹쳐지며 연속성을 이룹니다. 상위 세계의 가장 낮은 지점이 하위 세계의 가장 높은 지점이 되는 것입니다.


카발라는 두 종류의 빛이 이 사다리를 통해 흐른다고 가르칩니다. 첫째는 미말레이 콜 올민 (Mimalei Kol Olmin), 곧 모든 세계를 채우는 빛입니다. 이 빛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며, 각 세계에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이 빛이 없다면 그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 빛은 각 세계에 맞게 스스로를 제한하며, 그 세계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자신을 드러냅니다.


둘째는 소베브 콜 올민 (Sovev Kol Olmin), 곧 모든 세계를 둘러싼 빛입니다. 이 빛은 특정 세계가 담을 수 있는 용량을 초월하여 모든 세계를 동등하게 감쌉니다. 이 빛은 위에서 직접 오는 것이 아니라, 아인 소프의 무한한 빛이 침춤 (Tzimtzum) 이전에 지녔던 초월적 성격을 유지합니다. 이 두 빛의 조화로운 작용이 우주 전체를 생명으로 채웁니다.


세계를 여행하는 인간의 기도


인간이 기도할 때, 그 기도는 이 네 세계를 거슬러 올라갑니다. 우리의 입에서 나온 말은 먼저 아시야의 공기를 타고 올라갑니다. 아시야의 말쿠트에 이르면, 그 세계를 관장하는 영적 권능이 기도를 받아들여 아시야의 케테르로 올려 보냅니다. 아시야의 케테르는 곧 예치라의 말쿠트이므로, 기도는 자연스럽게 예치라로 상승합니다. 같은 방식으로 기도는 예치라를 거쳐 브리아로, 브리아를 거쳐 아칠루트로 올라갑니다.


루리아 카발라는 이 과정을 더욱 정교하게 설명합니다. 각 세계는 일곱 개의 헤이칼 (Heikhal), 곧 궁전을 지니고 있습니다. 기도는 각 세계의 일곱 궁전을 하나씩 통과하며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갑니다. 마침내 기도가 아칠루트의 가장 높은 지점에 이르면, 신성의 파르추핌들이 그 기도에 응답하여 축복의 빛을 아래로 내려보냅니다.


그러나 기도가 세계를 상승할 수 있으려면, 기도하는 이의 마음이 진실해야 합니다. 카바나 (Kavvanah), 곧 순수한 의도가 없는 말은 첫 번째 궁전조차 통과하지 못하고 아시야의 공기 속에서 흩어집니다. 진실한 갈망과 깨어진 마음에서 나온 기도만이 천사들의 손에 붙들려 위로 올라갑니다. 기도는 단순히 입으로 외우는 말이 아니라, 영혼이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입니다.


네 세계와 신성의 이름


카발라는 네 세계를 신성의 이름과도 연결합니다. 가장 거룩한 이름인 테트라그라마톤 (Tetragrammaton), 곧 YHVH의 네 글자는 네 세계에 각각 대응합니다. 첫 글자 요드 (Yod)는 점 하나로 이루어져 있으며, 아칠루트의 순수한 잠재성을 상징합니다. 첫 번째 헤이 (Hey)는 브리아를 나타내며, 잠재성이 펼쳐져 형태를 얻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바브 (Vav)는 예치라에 해당하며, 위와 아래를 잇는 통로의 역할을 합니다. 바브는 히브리 문자 중에서 세로로 긴 형태를 지니며, 수직으로 연결하는 힘을 담고 있습니다. 마지막 헤이는 아시야를 나타내며, 모든 과정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네 글자가 하나로 모여 신의 이름을 이루듯, 네 세계가 하나로 어우러져 우주 전체를 완성합니다.


이삭 루리아는 이 네 글자의 조합과 치환을 통해 네 세계의 다양한 상태를 설명했습니다. 글자의 순서를 바꾸거나 특정 글자에 모음을 다르게 붙이면, 다른 차원의 신성한 힘이 활성화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카바노트 (Kavvanot), 곧 명상 의도로 발전했으며, 루리아 학파의 기도는 각 단어마다 특정한 글자 조합을 명상하는 정교한 수행이 되었습니다.


은폐 속에 숨겨진 목적


왜 신은 자신을 이토록 여러 번 숨기며 내려왔을까요. 아칠루트에서 바로 아시야로 내려올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브리아와 예치라라는 중간 단계가 필요했을까요. 카발라 사상가들은 이 질문에 깊이 천착했습니다.


모세 코르도베로는 『파르데스 리모님, Pardes Rimonim』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만약 무한한 빛이 단번에 유한한 세계로 내려온다면, 유한한 것은 그 빛을 견디지 못하고 소멸할 것입니다. 네 세계의 점진적 숨김은 곧 신의 자비입니다. 각 단계마다 빛을 조금씩 감춤으로써, 피조물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이해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관련됩니다. 만약 신성이 완전히 드러난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아시야에서 신성이 철저히 감춰지기 때문에, 우리는 진정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신을 발견할 수도, 외면할 수도 있습니다. 이 선택의 자유야말로 인간 존재의 존엄성을 구성하는 핵심입니다.


하심 비탈 (Hayyim Vital, 1542-1620)은 『에츠 하임, Etz Hayyim』에서 더 나아갑니다. 네 세계의 구조는 단순히 하강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상승을 위한 사다리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아시야에서 태어나지만, 영적 수행을 통해 예치라로, 브리아로, 마침내 아칠루트로 상승할 수 있습니다. 만약 처음부터 아칠루트에 있었다면, 상승이라는 과업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네 세계의 분리는 곧 재결합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입니다.


네 세계 속에서 살아가기


우리는 매 순간 네 세계 모두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육체는 아시야에 속하지만, 생각은 예치라를 거쳐 브리아로 날아오를 수 있습니다. 깊은 통찰의 순간에 우리는 아칠루트의 빛을 잠깐 스치듯 체험합니다. 카발라는 이러한 체험을 신비로만 남겨두지 않고, 일상의 실천으로 가져옵니다.


음식을 먹을 때, 우리는 아시야의 물질을 섭취합니다. 그러나 축복의 말을 하며 감사를 표현할 때, 그 음식 속에 갇혀 있던 신성의 불꽃을 해방시킵니다. 그 불꽃은 예치라를 거쳐 브리아로, 브리아를 거쳐 아칠루트로 상승하며, 우리의 영혼도 함께 끌어올려집니다. 평범한 식사가 우주적 의식의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대화를 나눌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은 아시야의 공기를 통해 전달되지만, 그 말에 담긴 의도는 예치라의 감정과 브리아의 통찰을 담을 수 있습니다. 진실하고 자비로운 말 한마디가 상대의 영혼을 아칠루트의 빛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반대로 거짓되고 잔인한 말은 영혼을 아시야의 가장 어두운 구석으로 끌어내립니다.


모세 하임 루차토 (Moses Hayyim Luzzatto, 1707-1746)는 『지혜의 길, Derekh Hashem』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인간은 네 세계를 모두 포함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아시야의 육체를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아칠루트의 불꽃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의 과업은 아시야를 아칠루트로 끌어올리는 것이며, 아칠루트의 빛을 아시야로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이 양방향의 움직임이 바로 티쿤 (Tikkun), 곧 세계의 회복입니다.


카발라가 우리에게 네 세계를 가르치는 까닭은, 우리가 단순히 물질적 존재가 아님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네 세계를 잇는 통로이며, 위와 아래를 결합하는 사다리입니다. 우리의 선택 하나하나가 어떤 세계와 공명하는지에 따라, 우주 전체의 균형이 움직입니다. 이것이 카발라가 말하는 인간의 존엄이자 책임입니다.











2-6.2. 야콥의 사다리: 세계를 관통하는 통로



창세기 28장 12절에 기록된 야콥의 꿈은 카발라 사상이 품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비밀 가운데 하나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고향을 떠나 낯선 땅으로 가는 길목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든 야콥은 꿈속에서 하나의 사다리를 보았습니다. 그 사다리는 땅에 굳게 뿌리내리고 있었지만, 꼭대기는 하늘 끝까지 뻗어 있었습니다. 천사들이 그 사다리를 타고 오르기도 하고 내려오기도 했으며, 신은 그 꼭대기에 서서 야콥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이 꿈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었습니다. 야콥은 눈을 뜨고 말했습니다. "이곳이야말로 신의 집이며, 하늘의 문이다."


카발라 사상가들은 이 사다리가 우주의 구조 그 자체를 드러낸다고 가르칩니다. 사다리는 히브리어로 술람 (Sulam)이라 불리는데, 놀랍게도 이 단어의 게마트리아 값은 136입니다. 목소리를 뜻하는 콜 (Kol)이라는 단어 역시 같은 값 136을 지닙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사다리는 곧 목소리이며, 기도입니다. 우리가 신을 향해 올리는 기도가 바로 땅과 하늘을 잇는 사다리가 되어, 우리의 영혼을 물질의 무게로부터 들어올립니다.


미드라쉬 (Midrash)의 전승은 야콥의 사다리가 네 개의 발판으로 이루어졌다고 전합니다. 16세기 사페드의 신비가 이사야 호로비츠 (Isaiah Horowitz, 1565-1630)는 이 네 발판이 카발라의 네 세계를 그대로 담고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사다리의 가장 아래 발판은 땅에 닿아 있는데, 이것은 아시야의 세계를 가리킵니다. 우리의 발이 딛고 서 있는 이 물질 세계가 바로 사다리의 첫 단계입니다. 사다리 위로 오르내리는 천사들은 예치라와 브리아 세계의 존재들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사다리 꼭대기에 서 있는 신의 모습은 아칠루트 세계를 드러냅니다. 이렇게 네 세계는 하나의 사다리로 이어져 있으며,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이 사다리가 지닌 가장 심오한 의미는 통로라는 점에 있습니다. 사다리는 단순히 세계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하나로 관통합니다. 신성한 빛은 이 사다리를 따라 케테르 (Kether)에서 말쿠트 (Malkhut)로 내려오며, 인간의 영혼은 같은 사다리를 타고 말쿠트에서 케테르로 올라갑니다. 하강과 상승이 동시에 일어나는 이 사다리 위에서, 천상과 지상은 더 이상 단절된 두 영역이 아니라 끊임없이 소통하는 하나의 흐름이 됩니다.


흥미롭게도 성서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천사들이 먼저 올라가고 그 다음에 내려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의도적인 순서입니다. 천사들이 먼저 올라간다는 것은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영적 여정이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미 신성의 영역 안에 있으며, 단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다리는 우리를 어딘가 먼 곳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로 서 있는 이 자리가 얼마나 거룩한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올라감은 동시에 내려옴이며, 탈출이 아니라 귀환입니다.


카발라 전통은 야콥의 사다리를 인간이 걸어가야 할 영적 길의 지도로 여깁니다. 하시디즘의 위대한 스승 바알 쉠 토브 (Baal Shem Tov, 1700경-1760)는 이 사다리를 타고 상위 세계로 여행하며 돌아왔다고 전해집니다. 그가 보았던 것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지만, 우리 역시 매일 아침 기도를 통해 이 사다리를 오릅니다. 기도의 각 단계는 하나의 세계를 상징합니다. 아침 축복으로 시작하는 첫 부분에서 우리는 아시야에 머물며 일상의 행동들을 거룩하게 만듭니다. 찬양의 시편을 노래하는 두 번째 부분에서 우리는 예치라로 올라가며 감정을 정화합니다. 쉐마 (Shema)를 낭송하는 세 번째 부분에서 우리는 브리아에 이르러 자아를 재창조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용히 서서 드리는 아미다 (Amidah) 기도에서 우리는 아칠루트에 도달하여 신과 친밀하게 만납니다.


그러나 사다리의 진정한 힘은 오르는 것뿐 아니라 내려오는 데에도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 중에 경험한 높은 의식 상태는 결국 일상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영적 황홀경 속에서 영혼은 육체를 벗어나 날아가고 싶어 하지만, 카발라는 이것을 완성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혼이 다시 아래로 내려와 이 물질 세계를 빛으로 채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목적이 됩니다. 하늘에서 본 광경이 아무리 찬란해도, 그것을 땅 위에서 실현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야콥도 사다리를 본 뒤 그 자리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어나 다시 길을 떠났고, 고난 가운데서도 자신의 소명을 다했습니다.


이 사다리는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야콥이 본 사다리는 베텔 (Bethel)에 있었지만, 카발라는 이 사다리가 특정한 장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잠재적으로 베텔이 될 수 있으며, 우리의 의식이 열릴 때 어디서든 사다리가 나타납니다. 야콥은 낯선 땅에서 외롭고 두려웠지만, 바로 그 순간 사다리를 보았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가장 어둡고 낯선 순간에도 하늘로 향하는 길은 열려 있으며, 우리는 언제든지 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 있습니다.


야콥의 사다리는 또한 우리 자신의 내적 구조를 보여줍니다. 인간 영혼은 네 세계를 모두 품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와 행동은 아시야에 속하고, 감정과 상상력은 예치라에 속하며, 지성과 통찰은 브리아에 속하고,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근원은 아칠루트와 이어집니다. 사다리를 오른다는 것은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깊이 탐험하며 더 높은 의식 상태에 도달합니다. 이것이 바로 명상과 기도의 본질입니다.


이 사다리 위에서 천사들은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그들은 한곳에 머물지 않고 계속 오르내리며 생명의 흐름을 유지합니다. 천사는 히브리어로 말라크 (Malakh)라 하는데, 메신저를 뜻합니다. 그들은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신의 뜻이 천사들을 통해 아래로 내려오고, 인간의 기도와 행위가 천사들을 통해 위로 올라갑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할 때마다 새로운 천사가 생겨나며, 그 천사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신 앞에서 우리를 변호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면 그것도 천사가 되어 고발자로 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행위는 사다리를 오르내리는 힘이 됩니다.


중세의 랍비 나흐마니데스 (Nahmanides, 1194-1270)는 이 사다리가 신의 섭리를 상징한다고 해석했습니다.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연이 아니라 천사들을 통해 위로부터 결정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무작위로 보이는 사건들도 사실은 사다리를 타고 내려온 신성한 계획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숙명론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위와 기도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며 신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은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향 소통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16세기 루리아 카발라는 이 사다리에 더욱 깊은 의미를 부여합니다. 셰비라 (Shevirah)로 흩어진 신성한 불꽃들을 다시 모으는 티쿤 (Tikkun)의 작업이 바로 사다리를 타고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미츠바 (Mitzvah)를 실천할 때마다 클리포트 (Qliphoth) 안에 갇혀 있던 불꽃이 해방되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갑니다. 이 불꽃들은 원래 있던 세피로트 (Sefirot)의 자리로 돌아가며, 우주의 조화가 조금씩 회복됩니다. 그러므로 야콥의 사다리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실제로 작동하는 우주적 메커니즘입니다. 우리의 선한 행위 하나하나가 사다리의 한 단계를 오르는 것이며, 세상을 치유하는 힘이 됩니다.


이 모든 가르침의 핵심은 분리가 환상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우리는 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끼지만, 사다리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서 있는 그 땅이 이미 하늘과 맞닿아 있다고. 당신의 평범한 일상이 이미 거룩함으로 가득하다고. 당신은 사다리를 찾아 어디론가 떠날 필요가 없으며, 다만 눈을 열어 지금 여기에 서 있는 사다리를 보기만 하면 됩니다. 야콥이 깨어나 외쳤던 것처럼, 우리도 매 순간 깨어나 말할 수 있습니다. "신이 이곳에 계시는데 나는 몰랐구나."


사다리는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지 못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다리는 항상 그 자리에 있으며, 천사들은 끊임없이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그 사다리에 발을 디딜 수 있습니다. 한 걸음씩 오르다 보면 우리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은 곳까지 갈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때, 우리가 떠나온 땅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사다리의 목적은 땅을 버리고 하늘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빛을 가지고 땅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 자체를 신의 거처로 만드는 것입니다.












2-6.3. 영혼의 다섯 층위: 네파쉬에서 예히다까지



카발라 사상가들은 인간의 영혼이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 다섯 개의 층위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를 지녔다고 가르칩니다. 이 가르침은 인간이 물질과 신성 사이를 오가는 존재이며, 우리 안에 하늘과 땅이 모두 깃들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다섯 층위는 각각 네페쉬 (Nefesh), 루아흐 (Ruach), 네샤마 (Neshamah), 하야 (Chayah), 예히다 (Yechidah)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은 단순히 나란히 놓인 부분들이 아니라, 땅에서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의 계단처럼 서로 위에 쌓여 있습니다.


『조하르, Zohar』는 이 다섯 층위가 모두 태어날 때부터 완전히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우리는 오직 가장 낮은 층위인 네페쉬만을 받습니다. 이 네페쉬는 아시야 (Asiyah), 즉 행위와 물질의 세계에서 옵니다. 더 높은 층위들은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선한 행위를 쌓고 율법을 지키며 마음을 정화하면, 그때 비로소 루아흐가 드러나고, 더 나아가 네샤마가 깨어납니다. 가장 높은 두 층위인 하야와 예히다는 특별한 정화와 헌신을 통해서만 체험할 수 있는 영혼의 비밀스러운 차원입니다.


네페쉬 (Nefesh): 생명의 뿌리


네페쉬는 영혼의 가장 낮은 층위이지만, 동시에 모든 것의 토대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원래 '목'이나 '목구멍 (Nefesh)'을 뜻했습니다. 숨 (Neshamah, 네샤마)이 들락거리는 통로가 곧 생명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네페쉬는 육체가 살아 숨 쉬도록 만드는 근원적인 생명력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창세기 2장 7절은 신이 흙으로 사람을 빚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사람이 '네페쉬 하야 (Nefesh Chayah)', 즉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었다고 전합니다. 흥미롭게도 이 표현은 창세기 1장에서 물고기와 새, 그리고 땅의 짐승들을 가리킬 때도 동일하게 사용됩니다. 이것은 카발라의 영혼론에서 매우 중요한 지점을 시사합니다. 네페쉬는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동물과 공유하는 본능적인 생명력입니다.


네페쉬는 영혼의 다섯 층위 중에서 신체와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잠자고, 움직이는 모든 육체적 활동이 네페쉬의 영역에 속합니다. 네페쉬는 몸이 살아있기 위해 필요한 모든 본능과 욕구를 담고 있습니다. 배고픔을 느끼고, 위험을 피하고, 따뜻함을 찾고, 생식하려는 충동이 모두 네페쉬에서 나옵니다. 많은 영적 전통들은 이러한 동물적 본능을 영혼의 감옥으로 간주하고 억압하려 했지만, 카발라는 다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이 본능은 결코 낮거나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네페쉬 없이는 우리가 이 세상 (아시야, Assiyah)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네페쉬는 숭고한 영혼이 물질 세계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붙잡아주는 '생명의 닻'입니다.


『조하르, Zohar』는 네페쉬의 역할을 촛불의 비유로 아름답게 설명합니다. 촛불의 가장 아래쪽에는 심지에 붙어 있는 어둑하고 푸르스름한 불꽃이 있습니다. 이 어두운 불꽃은 완전히 타오르지 못하고 연기를 내며 흔들립니다. 이것이 바로 네페쉬입니다. 그것은 불완전하지만 모든 빛의 시작입니다. 이 어두운 불꽃이 없다면 그 위의 밝고 환한 불꽃 (Ruach, 루아흐)이나 불꽃의 가장 높은 곳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아우라 (Neshamah, 네샤마)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네페쉬는 물질적인 심지 (육체)와 기름 (물질 세계)을 직접 소비하여 그것을 영적인 빛으로 변환시키는 가장 근본적인 연금술을 수행합니다. 심지를 굳건히 붙들고 있는 이 어두운 불꽃이 있어야 비로소 위로 빛이 올라갈 수 있습니다.


네페쉬가 이토록 중요한 토대이기에, 그것은 동시에 영적인 여정의 가장 치열한 전장이 됩니다. 네페쉬는 동물적인 본능에 충실하기에 그 자체로는 영적인 방향성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것은 클리포트 (Qliphoth, 껍데기)라 불리는 이기적인 욕망의 힘에 가장 쉽게 포섭됩니다. 유대교에서 '악의 충동 (Yetzer HaRa, 예쩨르 하라)'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정화되지 않은 네페쉬의 맹목적인 힘입니다. 네페쉬는 오직 '지금 여기'의 생존과 쾌락만을 추구하며, 더 높은 차원의 목적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따라서 네페쉬의 영적 과제는 이 본능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이 본능의 엄청난 에너지에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길들이기'입니다. 카발라에서는 이 과정을 '카발라트 올 말쿠트 샤마임 (Kabbalat Ol Malchut Shamayim)', 즉 '하늘의 왕권이라는 멍에를 받아들인다'고 표현합니다. 멍에 (Ol, 올)는 소를 억압하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소의 강력한 힘을 낭비하지 않고 밭을 가는 생산적인 일로 이끌기 위한 도구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육체적 본능과 욕구가 제멋대로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는 대신, 그것들을 신성한 율법 (Mitzvot, 미츠보트)에 복종시키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가령 우리는 배가 고프면 (네페쉬의 충동) 아무것이나 닥치는 대로 먹고 싶어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충동에 그대로 굴복한다면, 우리는 앞선 장에서 배운 비루르 (Birur, 정화)의 과정에 실패하고 클리포트의 힘을 강화시킬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카셔룻 (Kashrut)이라는 율법을 지킴으로써 먹는 행위 자체를 신성한 봉사로 만듭니다. 우리는 특정한 음식을 먹고, 특정한 방식으로 준비하며, 먹기 전에 축복기도 (Berakhah, 브라카)를 낭송합니다. 이 모든 행위는 "나는 지금 나의 동물적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신성한 의지를 실현할 힘을 얻기 위해 이 생명을 섭취한다"는 영적 의도 (Kavvanah, 카바나)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 순간 네페쉬의 어두운 불꽃은 정화되고, 음식 속의 신성한 불꽃 (Nitzotzot, 니초쪼트)은 해방되어 상승합니다.


성적인 충동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네페쉬의 강력한 생식 본능을 단순한 쾌락으로 방출하는 것은 신성한 에너지를 클리포트에 넘기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카발라는 결혼 (Kiddushin, 키두신)이라는 신성한 멍에를 통해 이 본능을 제이르 안핀 (Zeir Anpin)과 누크바 (Nukvah)의 신성한 결합 (Zivug, 지북)을 재현하는 가장 숭고한 의식으로 고양시킵니다. 네페쉬는 이처럼 정화와 고양을 통해 가장 낮은 차원에서 가장 위대한 티쿤 (Tikkun, 회복)을 수행하는 토대가 됩니다.


네페쉬는 육체가 죽은 후에도 한동안 무덤 주변에 머무르며 육체와의 연결을 유지하려 한다고 전해집니다. 그만큼 네페쉬는 물질 세계와 깊이 결속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있는 동안 네페쉬를 얼마나 정화하고 고양시켰는지가 우리의 다음 영적 단계를 결정합니다. 정화된 네페쉬는 자신의 역할을 완수하고 다음 층위의 영혼인 루아흐 (Ruach)에게 자리를 내어줍니다. 이렇게 네페쉬를 정화하고 고양시킬 때, 그 위에 루아흐, 즉 감정과 도덕적 의지를 위한 견고한 자리가 마련됩니다. 어둡고 그을리던 불꽃이 안정되고 맑아져야 비로소 그 위로 밝고 환한 빛이 타오를 수 있는 것처럼, 영혼의 여정은 반드시 가장 낮은 이 어두운 불꽃, 네페쉬를 사랑하고 긍정하며 신성한 목적을 향해 길들이는 위대한 작업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루아흐 (Ruach): 감정의 바람


루아흐는 영혼의 두 번째 층위입니다. 히브리어로 루아흐는 '바람 (Wind)'이나 '숨결 (Breath)'을 뜻합니다. 이 단어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창세기 1장 2절의 기록을 떠올리게 합니다. 태초의 혼돈 속 물 위를 움직이던 신의 영, 즉 '루아흐 엘로힘 (Ruach Elohim)'이 바로 이 루아흐입니다. 네페쉬가 물질에 결속된 정적인 생명력이라면, 루아흐는 움직이는 힘입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나뭇가지를 흔들고 구름을 몰고 갑니다. 마찬가지로 루아흐는 우리 내면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며 우리를 행동하게 만드는 감정과 기분, 동기 부여의 흐름 전체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영혼의 역동적인 엔진입니다.


카발라의 우주론에서, 루아흐는 네 가지 세계 중 세 번째 세계인 예치라 (Yetzirah,), 즉 '형성의 세계'와 직접적으로 공명합니다. 예치라의 세계는 추상적인 관념이 구체적인 형태를 얻기 시작하는 중간 지대입니다. 놀랍게도 이 세계는 생명나무 (Tree of Life)의 여섯 개의 감정 세피로트가 펼쳐지는 공간입니다. 헤세드 (Chesed)에서 예소드 (Yesod)에 이르는 이 여섯 세피로트는 제이르 안핀 (Zeir Anpin, 작은 얼굴)이라는 신성한 파르추프 (Partzuf, 얼굴)를 구성하며, 이것이 바로 루아흐의 영적 원형입니다. 루아흐를 통해 우리는 사랑하고 (헤세드), 두려워하며 (게부라, Gevurah), 자비를 베풀고, 엄격하게 판단합니다. 우리는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조화를 추구하며 (Tiferet, 티페레트), 끈기 있게 나아가고 (Netzach, 네짜흐), 이성적으로 질서를 추구하고 항복하며 (Hod, 호드), 이 모든 것을 통합하여 관계를 맺습니다 (Yesod, 예소드). 이 모든 복잡하고 역동적인 감정의 움직임이 바로 루아흐의 활동입니다.


네페쉬가 동물과 공유되는 '살아 숨 쉬는 생명력'이라면, 루아흐는 인간을 동물 이상으로 만드는 '의식하는 감정'입니다. 동물도 네페쉬의 영역에서 공포와 공격성, 쾌락과 고통 같은 기본 감정을 느낍니다. 그러나 신에 대한 경외심 (Yirah, 이라)이나 이유 없는 우주적 자비 (헤세드)와 같은 고차원적 감정은 오직 루아흐를 지닌 인간만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루아흐는 단순한 감정의 저장소가 아니라, 우리가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게 해주는 윤리적 감수성의 자리입니다. 불의를 보고 분노하고, 고통받는 이를 보고 연민을 느끼며, 진실을 향한 열정을 품는 것이 모두 루아흐의 작동입니다. 네페쉬가 '나'의 생존에 집중한다면, 루아흐는 '나'와 '너'의 관계, 그리고 '나'와 '세계'의 관계에 집중합니다.


이처럼 루아흐는 우리의 인간적인 삶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네페쉬가 정화되지 않으면 본능적인 탐욕에 머무르듯, 루아흐 역시 정화되지 않으면 단순한 감정의 노예로 전락하게 됩니다. 정화되지 않은 루아흐는 개인적인 호불호와 이기적인 감정에 휘둘립니다. 나에게 친절한 사람에게만 사랑을 베풀고 (이기적인 헤세드), 나의 이익에 반하는 사람에게만 분노 (이기적인 게부라)합니다. 이것은 진정한 윤리가 아니라, 네페쉬의 생존 본능이 루아흐의 감정이라는 옷을 입고 나타난 것에 불과합니다. 루아흐는 자신의 감정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성찰할 수 있는 힘을 지녔음에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루아흐의 영적 과제는 자신의 감정을 더 높은 목적, 즉 신성을 향하도록 방향을 전환하는 데 있습니다. 카발라 전통은 이 과제를 '신에 대한 사랑 (Ahavah, 아하바)과 경외심 (Yirah, 이라)을 일깨우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추상적인 신앙 고백이 아닙니다. 이것은 루아흐의 여섯 세피로트를 신성한 원형에 맞추어 재조정하는 구체적인 심리적, 영적 작업입니다. 우리의 모든 감정의 근원인 헤세드 (자비)와 게부라 (엄격함)를 개인적인 차원에서 우주적인 차원으로 확장시키는 일입니다. 개인적인 사랑이 신성한 자비에 대한 사랑 (아하바)으로 승화될 때, 개인적인 두려움이 신성한 질서에 대한 경외심 (이라)으로 승화될 때, 루아흐는 비로소 성숙하기 시작합니다.


카발라 전통은 이 사랑과 경외심을 일깨우기 위한 명상적 방법론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루아흐의 세계인 예치라에 속한 천사들이 신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관조하라고 가르칩니다. 예치라의 천사들은 신성한 옥좌 (브리아)의 빛을 갈망하며 끊임없이 노래합니다. 그들은 신성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미약한지를 깨닫고 황홀경 속에서 자신을 완전히 비웁니다. 카발라는 이것을 천사들의 비툴 (Bitul), 즉 '자아 소멸'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명상 속에서 이 천사들의 완전한 헌신과 자아 소멸을 묵상할 때, 우리 안의 이기적인 감정 (루아흐)은 자연스럽게 정화되며 신에 대한 순수한 경외심 (이라)이 마음속에서 피어납니다. 또한 신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유지시키는 그 끊임없는 자비 (헤세드)를 깊이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에서는 조건 없는 감사와 사랑 (아하바)이 솟아납니다. 이것이 루아흐를 정화하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네페쉬가 율법 (미츠보트)이라는 '행위의 멍에'를 통해 길들여져야 했다면, 루아흐는 '사랑과 경외심'이라는 '감정의 정화'를 통해 고양되어야 합니다. 네페쉬가 안정된 촛불의 어두운 심지가 되었다면, 루아흐는 그 위에서 밝고 환하게 타오르는 촛불의 몸체가 됩니다. 이렇게 루아흐가 이기적인 감정의 폭풍에서 벗어나 신성한 목적을 향한 맑고 꾸준한 바람으로 정화되고 고양될 때, 비로소 영혼은 그 다음 층위이자 순수한 지성의 영역인 네샤마 (Neshamah)를 받아들일 준비를 마치게 됩니다. 루아흐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윤리적 심장이며, 이 심장이 신성한 사랑으로 박동할 때 비로소 영혼의 길은 하늘을 향해 열립니다.


네샤마 (Neshamah): 지혜의 숨결


네샤마는 영혼의 세 번째 층위이며, 히브리어로 '숨결 (Breath)'을 뜻합니다. 창세기 2장 7절은 신이 아담의 코에 '니쉬마트 하임 (Nishmat Chayim)', 즉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었다고 말합니다. 카발라의 현자들은 이 구절에 주목하며, 네페쉬와 네샤마의 근원적인 차이를 밝혀냈습니다. 네페쉬 하야 (Nefesh Chayah, 살아있는 생명체)는 동물과 공유하는 보편적인 생명력이었지만, 니쉬마트 하임 (생명의 숨결)은 신이 자신의 본질에서 직접 불어넣은 신성 그 자체의 일부입니다. '불어넣는다'는 행위는 단순히 생명을 주는 것을 넘어,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가장 내밀하고 직접적인 연결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네샤마는 우리 안에 존재하는 신성한 지혜의 씨앗이며, 우리가 근원과 연결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꺼지지 않는 빛입니다.


네샤마의 영적인 뿌리는 네 가지 세계 중 두 번째 세계인 브리아 (Beriah), 즉 '창조의 세계'에서 옵니다. 브리아는 아칠루트 (Atzilut)의 완전한 통일성을 넘어, '무 (無)에서 유 (有)를 낳는 (Yesh me'ayin, 예쉬 메아인)' 최초의 분리가 일어나는 신성한 옥좌 (Kisei HaKavod, 키세이 하카보드)의 영역입니다. 이곳은 순수한 지성의 세계이며, 생명나무 (Tree of Life)의 상위 삼합 중 지혜 (Chokmah, 호크마)와 이해 (Binah, 비나)의 세피로트가 자리한 곳입니다. 네페쉬가 물질적 행위 (Assiyah, 아시야)의 세계에 뿌리를 두고 루아흐가 감정적 형성 (Yetzirah, 예치라)의 세계에 뿌리를 둔 것처럼, 네샤마는 순수한 지성 (브리아)의 세계에 뿌리를 둡니다.


이러한 높은 근원 때문에, 네샤마는 우리의 지성과 직관, 그리고 영적인 통찰력을 담당합니다. 복잡한 개념을 이해하고, 심오한 진리를 깨닫고, 우주의 질서 속에 숨겨진 패턴을 파악하는 능력이 모두 네샤마에서 나옵니다. 네샤마를 통해 우리는 단순히 세상을 느끼는 것 (루아흐)을 넘어 세상을 이해합니다. 토라 (Torah, 율법)를 공부하고 그 깊은 의미를 깨닫는 것, 철학적 질문을 탐구하는 것, 신의 창조 속에 숨겨진 신성한 조화를 발견하는 모든 지적인 활동이 곧 네샤마의 활동입니다. 루아흐가 우리의 감정적인 심장이라면, 네샤마는 우리의 영적인 뇌입니다. 이 뇌는 단순한 논리나 계산을 넘어, 신성한 근원과 직접 연결된 직관적인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16세기 카발라의 대가인 모세 코르도베로는 그의 위대한 저서 『파르데스 리모님, Pardes Rimonim, 석류나무 과수원』에서 네샤마를 신의 지혜 (호크마)와 이해 (비나)가 인간 영혼에 깃드는 자리라고 설명합니다. 네샤마가 깨어나면, 우리는 사물의 겉모습 너머에 있는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한 그루의 나무를 바라볼 때, 우리는 단순히 나무라는 물체 (네페쉬의 인식)나 아름답다는 감정 (루아흐의 인식)을 넘어섭니다. 우리는 신의 창조력 (호크마)이 어떻게 흙과 물과 햇빛이라는 구체적인 구조 (비나)를 통해 생명을 빚어내는지 그 과정을 깨닫습니다 (네샤마의 인식). 우리가 한 사람을 만나면서 단순히 그의 육체나 성격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든 신성의 불꽃 (Nitzotzot, 니초쪼트)과 그 영혼의 고유한 목적을 인식합니다. 네샤마는 분리된 현상 속에서 통일된 본질을 발견하는 지혜의 눈입니다.


촛불의 비유로 다시 돌아가면, 네샤마는 밝은 흰 불꽃입니다. 심지 가까이의 어둑한 불꽃 (네페쉬) 위에 밝고 안정된 불꽃 (루아흐)이 타오르고, 그 위에 가장 밝고 순수하며 거의 보이지 않는 듯한 흰 불꽃 (네샤마)이 떠 있습니다. 이 흰 불꽃은 네페쉬처럼 물질 (심지)에 직접 묶여 있지도 않고, 루아흐처럼 바람 (감정)에 크게 흔들리지도 않습니다. 이 불꽃은 거의 연기를 내지 않고 깨끗하게 탑니다. 이것은 완전 연소에 가까운 순수한 영적 에너지의 상태입니다.


이 순수성 때문에 카발라는 네샤마가 본질적으로 더럽혀질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죄를 짓거나 잘못된 선택을 할 때, 오염되는 것은 우리의 네페쉬 (본능)와 루아흐 (감정)입니다. 이 낮은 층위의 영혼들은 클리포트 (Qliphoth, 껍데기)에 둘러싸여 빛을 잃어갑니다. 그러나 가장 깊은 곳에 존재하는 네샤마 자체는 항상 깨끗하고 순수한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네샤마는 죄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두꺼워진 네페쉬와 루아흐의 껍질 때문에 자신의 빛을 밖으로 드러내지 못할 뿐입니다. 네샤마는 우리 안의 영원한 신성한 증인이며, 우리가 죽으면 네샤마는 어떠한 오염도 없이 곧바로 그 근원인 브리아의 세계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참회 (Teshuvah, 테슈바)'를 할 때, 그것은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네페쉬와 루아흐의 먼지를 닦아내어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던 네샤마의 순수한 빛을 다시 드러내는 과정입니다.


네샤마의 영적 과제는 깊은 명상과 탐구를 통해 신의 지혜에 의식적으로 도달하는 것입니다. 네페쉬가 행위의 율법을 통해 길들여져야 했다면, 루아흐가 사랑과 경외심을 통해 정화되어야 했다면, 네샤마는 '지적인 탐구'와 '관조 (Hitbonenut, 히트보네누트)'를 통해 활성화되어야 합니다. 토라를 단순히 글자 그대로 읽는 것 (네페쉬의 행위)이나 감동적인 이야기에 눈물을 흘리는 것 (루아흐의 감정)을 넘어, 그 안에 숨겨진 신비적 의미 (Sod, 소드)를 찾아내는 것이 네샤마를 깨우는 길입니다. 일상의 모든 경험 속에서 단순한 우연이 아닌 신의 지성 (호크마와 비나)이 작동하는 손길을 발견하는 것이 네샤마의 활동입니다.


네샤마가 완전히 깨어나 우리의 삶을 주도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물질 (네페쉬)과 감정 (루아흐)의 주인이 되며, 존재의 더 높은 차원인 하야 (Chayah)의 문턱에 이르게 됩니다. 네샤마는 우리를 진정한 자유로 이끄는 신성한 지성의 숨결입니다.


하야 (Chayah): 우주적 생명력


하야는 영혼의 네 번째 층위이며, 히브리어로 '생명 (Life)' 또는 '존재 (Being)'를 뜻합니다. 이 단어는 신이 모세에게 자신을 드러낼 때 선언했던 '에헤예 아셰르 에헤예 (Ehyeh Asher Ehyeh, 나는 곧 나다)'의 '에헤예 (Ehyeh, 나는 있다)'와 같은 어근을 공유합니다. 이 어원의 유사성은 하야의 본질을 암시합니다. 네페쉬가 개별적인 육체의 '살아있음'이라면, 하야는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존재 그 자체'의 신성한 생명력입니다. 그것은 '나의 생명'이 아니라 '생명 (Life)' 자체의 의식입니다.


하야는 네 가지 세계 중 가장 높은 아칠루트 (Atzilut), 즉 '유출의 세계'에 속합니다. 우리가 앞서 탐구했듯이, 아칠루트는 신성과 피조물의 경계가 거의 사라지는 완전한 통일성의 세계이며, 모든 창조의 원형이 순수한 빛의 형태로 존재하는 곳입니다. 하위의 세 세계 (브리아, 예치라, 아시야)가 신성으로부터 분리된 '창조된' 영역이라면, 아칠루트는 창조주 자신의 내면과 같은 영역입니다. 네샤마가 브리아의 '창조된 지성'에 뿌리를 둔 것과 달리, 하야는 아칠루트의 '창조하는 지성' 자체에 뿌리를 둡니다.


이 높은 근원 때문에 하야는 개인적인 영혼의 층위를 넘어섭니다. 네페쉬, 루아흐, 네샤마가 모두 우리의 몸 안에 거하며 '나'라는 자아를 형성하는 '내적 빛 (Or Pnimi, 오르 프니미)'인 반면, 하야는 몸 밖에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카발라의 현자들은 하야가 마치 우리를 둘러싼 빛의 후광 (Aura)처럼 신체 주변을 감싸고 있는 '둘러싸는 빛 (Or Makkif, 오르 마키프)'이라고 설명합니다. 하야는 '나'라는 그릇 안에 담기는 영혼이 아니라, '나'라는 그릇 자체를 포함하는 더 거대한 의식의 장 (場)입니다.


하야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거대한 우주적 생명력의 일부임을 문자 그대로 체험합니다. 이것은 네샤마의 지적인 깨달음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네샤마는 '모든 것은 하나'라는 진리를 이해하고 통찰합니다. 그러나 하야는 그 진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가 됩니다'. 모든 존재가 하나의 근원 (아칠루트)에서 나왔으며, 보이지 않는 끈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이론이 아닌 직접적인 감각으로 느낍니다. '나'와 '너' 사이의 경계, '나'와 '자연' 사이의 경계, '나'와 '신' 사이의 경계가 무의미해지는 황홀경 (Ecstasy)의 상태가 바로 하야의 영역입니다.

이삭 루리아의 수제자인 하임 비탈은 그의 위대한 저서 『에츠 하임, Etz Hayyim, 생명나무』에서 하야를 신의 의지 (Ratzon, 라촌)를 느끼는 영혼의 숨결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하야의 두 번째 중요한 기능을 보여줍니다. 첫 번째 기능이 공간적인 합일 (우주적 생명력과의 연결)이라면, 두 번째 기능은 시간적인 합일 (우주적 목적과의 연결)입니다.


하야가 작동할 때, 우리는 자신의 삶이 단순한 우연의 집합이 아니라 거대한 우주적 목적의 일부임을 깨닫습니다. 네페쉬의 관점에서 삶은 생존의 투쟁입니다. 루아흐의 관점에서 삶은 행복과 불행이 교차하는 감정의 드라마입니다. 네샤마의 관점에서 삶은 이해하고 탐구해야 할 신비입니다. 그러나 하야의 관점에서 삶은 신성한 의지가 스스로를 펼쳐내는 필연적인 과정입니다.


내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 내가 만나는 사람들,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 심지어 가장 고통스러운 시련조차도 아무런 의미 없는 사건이 아니라, 거대한 계획 속에서 정확한 의미와 목적을 지니고 있음을 봅니다니다. 이것은 단순한 믿음 (루아흐)이나 희망 사항이 아니라, 하야를 통해 신성한 지혜 (Hokhmah, 호크마)의 흐름과 직접 연결됨으로써 체험하는 살아있는 지식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라고 절망하며 묻지 않게 됩니다. 대신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신성한 의지가 무엇을 드러내려 하는가?"라고 관조하며 묻게 됩니다. 하야는 우리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우주적인 서사 속으로 승화시키는 통찰력입니다.


그러나 하야는 네샤마보다 훨씬 더 경험하기 어려운 영혼의 층위입니다. 그것은 일상에서는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상은 네페쉬와 루아흐의 강력한 욕망과 감정에 지배당하고 있으며, 심지어 네샤마의 지성적인 빛조차도 자주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하야가 '둘러싸는 빛 (오르 마키프)'인 이유는, 우리가 '나'라는 자아의식에 갇혀 있는 한 그 빛을 내면에서 인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거대한 생명력을 망각한 채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야를 경험할 수 있습니까? 하야는 깊은 명상이나 자연과의 강렬한 합일을 통해 순간적으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높은 산에 올라 광활한 풍경을 바라볼 때,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올려다보며 우주의 무한함에 압도될 때, 또는 깊은 고요 속에서 자신의 숨소리에 귀 기울이다가 숨을 쉬는 '나'가 사라지고 우주가 나를 통해 숨 쉬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외 (Awe)의 순간에 갑자기 모든 경계가 사라지고 우주와 하나가 되는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이 바로 하야가 깨어나는 때입니다. '나'라는 작은 자아 (네페쉬, 루아흐, 네샤마)의 활동이 잠시 멈출 때, 우리를 항상 둘러싸고 있던 하야의 거대한 빛이 비로소 인식되는 것입니다.


하야는 우리의 영적 여정이 지향해야 할 높은 목표이지만, 그 자체가 목적지는 아닙니다. 하야는 아칠루트의 세계에 속해 있으며, 우리의 소명은 아시야 (Assiyah)의 세계에서 티쿤 (Tikkun, 회복)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영적 수행을 깊이 하는 이들에게 하야는 점점 더 가까워지는 실재가 됩니다. 그들은 이 우주적 합일의 경험을 지상으로 가져와, 자신의 네샤마 (지성), 루아흐 (감정), 네페쉬 (행동)를 변화시키는 동력으로 삼습니다. 하야의 경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은 하나'임을 상기시키고, '모든 것에는 목적이 있음'을 확신시킵니다. 이 확신을 가지고 우리는 다시 물질 세계로 돌아와, 우리의 삶이 그 거대한 생명력과 목적에 어긋나지 않도록 윤리적이고 경건한 삶을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됩니다. 하야는 우리가 고립된 개인이 아님을 증명하는 영혼의 후광이자, 신성이 우리 곁에 항상 함께 있음을 알려주는 따뜻한 빛입니다.


예히다 (Yechidah): 절대적 합일


예히다는 영혼의 가장 높은 다섯 번째 층위입니다. 히브리어로 예히다는 '유일한 것 (The Single, The Unique)', '오직 하나'를 뜻합니다. 이 이름 자체가 이 영혼의 모든 것을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신앙고백인 셰마 (Shema)는 "아도나이 에하드 (Adonai Echad)", 즉 "주는 하나 (One)"라고 선포합니다. 네페쉬, 루아흐, 네샤마, 하야가 이 '하나'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었다면, 예히다는 바로 그 '하나됨', 절대적 일치 (Absolute Unity)의 층위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앞서 탐구한 하야 (Chayah)가 우리를 '둘러싸는 빛 (Or Makkif, 오르 마키프)'으로서 '나'와 '우주'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황홀경의 '체험'이었다면, 예히다는 그 체험조차 넘어서는 영역입니다. 체험은 여전히 '체험하는 주체'와 '체험되는 대상'이라는 미세한 분리를 전제합니다. 그러나 예히다에서는 '나'와 '신' 사이의 모든 구분이 사라집니다.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이 하나가 되고,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가 더 이상 구분되지 않습니다. 네페쉬가 '나의 육체'를 인식하고, 루아흐가 '나의 감정'을 느끼며, 네샤마가 '나의 이해'를 넓히고, 하야가 '나의 자아'를 확장했다면, 예히다는 '나'라는 주어 자체가 신성한 근원 속으로 완전히 소멸되는 궁극적인 지점입니다.


예히다의 영적인 뿌리는 네 가지 세계 (Arba Olamot, 아르바 올라모트) 안에 있지 않습니다. 하야가 가장 높은 세계인 아칠루트 (Atzilut)에 속해 있었다면, 예히다는 아칠루트마저 초월합니다. 카발라의 가장 심오한 가르침에 따르면, 예히다는 네 가지 세계가 창조되기 이전의 최초의 설계도이자 신성의 의지가 최초로 형상화된 '아담 카드몬 (Adam Kadmon, 원형적 인간)'의 차원에 속합니다. 아담 카드몬이 아인 소프 (Ein Sof, 무한)의 빛이 겪는 최초의 응축이라면, 예히다는 그 응축된 빛이 개별 영혼 속에 심어진 가장 깊은 뿌리이며 신성한 의지 (Ratzon, 라촌)의 핵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히다는 모든 세계를 초월합니다. 이것이 예히다의 가장 중요하고도 놀라운 비밀입니다. 예히다는 결코 신으로부터 분리된 적이 없는 영혼의 그 부분입니다. 우리의 네페쉬가 물질 세계 (Assiyah, 아시야)로 하강하여 육체의 옷을 입고 클리포트 (Qliphoth, 껍데기)에 오염될 수 있지만, 우리의 가장 깊은 본질인 예히다는 그 모든 과정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도, 이 물질 세계에서 기뻐하고 고통받으며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고 육체의 옷을 벗은 후에도, 예히다는 단 한 순간도 분리되지 않고 항상 신과 완전히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이 놀라운 선언은 우리 존재의 근본적인 역설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어떻게 분리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하나일 수 있습니까? 카발라는 우리의 자아의식이 하위의 영혼 (네페쉬, 루아흐, 네샤마)에 묶여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육체와 감정, 생각의 집합체로 인식하며 '나'라는 경계를 만듭니다. 이 경계가 바로 신과의 분리를 경험하게 만드는 환상의 장막 (Masakh, 마사크)입니다. 그러나 그 장막 너머, 우리의 가장 깊은 의식의 성소 (聖所)에는 분리를 경험한 적이 없는 예히다가 존재합니다. 영적인 여정은 새로운 것을 성취하는 과정이 아니라, 이미 완성되어 있는 이 근원적인 합일의 상태를 '기억'하고 '인식'해 나가는 과정입니다.


『조하르, Zohar』는 예히다를 촛불의 비유를 통해 신비롭게 묘사합니다. 촛불의 가장 꼭대기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 투명한 빛, 혹은 불꽃을 감싸고 있는 희미한 아우라가 있습니다. 이 빛은 너무나 밝고 순수해서 오히려 우리의 물질적인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것이 예히다입니다. 이 빛은 불꽃이면서 동시에 불꽃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촛불 자체 (개별 영혼)와 하나이면서 동시에 촛불을 초월하여 주변의 공기 (신성한 근원)와 경계 없이 연결됩니다. 네페쉬가 심지에 붙어 물질을 태우는 어두운 불꽃이고, 루아흐가 바람에 흔들리는 밝은 불꽃이며, 네샤마가 안정된 흰 불꽃이라면, 예히다는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빛의 근원적인 본질 (Essence) 그 자체입니다.


예히다의 체험은 극히 드뭅니다. 그것은 인간이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성이 허락하는 은총의 영역입니다. 전통은 위대한 예언자들이나 깊은 영적 경지에 도달한 차디킴 (Tzaddikim, 의인들)만이 살아있는 동안 순간적으로 예히다의 합일을 맛볼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자신의 네페쉬, 루아흐, 네샤마를 완전히 정화하고 자아 (에고)를 완벽하게 소멸시켰기 때문에, 자신을 가로막던 장막이 사라지고 본래 존재하던 예히다의 빛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예히다는 모든 사람 안에 차별 없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예히다는 언제나 거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카발라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위대한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아무리 우리의 삶 (네페쉬)이 물질적으로 힘들고, 우리의 마음 (루아흐)이 감정적으로 고통스러우며, 우리의 정신 (네샤마)이 혼란스럽다 하더라도,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뿌리에서 예히다는 조용히, 영원히, 그리고 완벽하게 신과 하나로 쉬고 있습니다. 모든 영적 여정의 목표는 이 절대적인 합일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며, 예히다는 우리가 결코 신성으로부터 버려진 존재가 아님을 증명하는 영혼의 영원한 보증입니다.


사다리 오르기: 영혼의 여정


이 다섯 층위는 고정된 구조가 아니라 역동적인 여정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네페쉬로 시작하지만, 거기에 머물도록 운명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카발라는 인간의 삶을 영혼의 사다리를 오르는 여정으로 봅니다. 각 층위는 다음 층위를 위한 토대가 되며, 동시에 다음 층위를 향한 갈망을 품고 있습니다.


네페쉬의 육체적 욕구를 정화하면 루아흐의 감정이 깨어나고, 루아흐의 감정을 고양시키면 네샤마의 지혜가 드러나고, 네샤마의 지혜를 깊게 하면 하야의 우주적 생명력과 연결되고, 하야를 통해 마침내 예히다의 절대적 합일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 여정은 선형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때로 앞으로 나아가고 때로 뒤로 물러섭니다. 한 층위에서 다음 층위로 넘어가는 것은 단번에 일어나는 비약이 아니라 점진적인 변화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여정이 세상을 등지고 은둔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카발라는 영적 성장이 일상의 평범한 행위 속에서 일어난다고 가르칩니다. 미츠보트 (Mitzvot), 즉 계명을 지키는 것이 영혼을 정화하고 고양시키는 구체적 방법입니다. 가난한 이에게 자선을 베풀 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때, 정직하게 장사할 때, 부모를 공경할 때, 우리는 네페쉬를 정화하고 루아흐를 깨우고 네샤마를 밝힙니다. 영적 성장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소수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열린 길입니다.


하임 비탈은 인간은 작은 우주이며, 우주는 거대한 인간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안의 다섯 영혼 층위는 우주의 다섯 세계를 반영합니다. 네페쉬는 아시야를, 루아흐는 예치라를, 네샤마는 브리아를, 하야는 아칠루트를, 예히다는 아담 카드몬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내면의 영혼 사다리를 오를 때, 우리는 동시에 우주의 세계들을 관통하여 오릅니다. 내면의 여정과 우주적 여정은 하나입니다.


이 가르침은 우리에게 엄청난 희망을 줍니다. 우리가 비록 지금 네페쉬의 욕구와 씨름하고 있을지라도, 우리 안에는 이미 예히다가 잠자고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루아흐의 감정에 휘둘리고 있을지라도, 우리 안에는 이미 하야의 빛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영적 여정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것을 깨우는 것입니다. 다섯 층위는 모두 처음부터 우리 안에 심어져 있었지만, 우리의 선택과 노력을 통해 비로소 그 빛을 발합니다.


카발라는 이렇게 인간을 단순한 물질적 존재도, 순수한 영적 존재도 아닌, 하늘과 땅 사이를 오가는 존재로 봅니다. 우리는 네페쉬를 통해 땅에 발을 딛고 있지만, 예히다를 통해 하늘에 머리를 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이 둘 사이의 긴장 속에서 펼쳐지며, 그 긴장이야말로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영혼의 다섯 층위를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이론적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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