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악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부딪히는 질문이 있습니다. 악은 실재하는 무엇입니까, 아니면 단지 선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까? 카발라는 이 질문에 서양 철학 전통과는 다른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그 대답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먼저 카발라가 거부한 하나의 오래된 이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선의 부재로서의 악
서양 신학과 철학은 오랫동안 악을 선의 부재로 이해해왔습니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e of Hippo, 354-430)가 체계화한 이 관점은 프리바티오 보니 (privatio boni)라는 라틴어 용어로 불립니다. 이 말은 선의 결핍 또는 박탈을 뜻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의 이원론을 거부하면서 이 이론을 발전시켰습니다. 마니교는 선한 신과 악한 신이라는 두 개의 독립적인 원리가 우주를 지배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이 신의 유일성과 전능함을 부정한다고 보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에서 악은 실체가 아닙니다. 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악은 존재해야 할 어떤 좋은 것이 결여된 상태입니다. 그는 『신국론』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악은 긍정적인 본성을 갖지 않으며, 선의 상실이 악이라는 이름을 받았을 뿐입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은 눈 자체에 무엇이 더해진 것이 아니라, 시각이라는 선이 사라진 것입니다. 상처가 몸에 생기는 것은 새로운 실체가 들어온 것이 아니라, 건강이라는 선이 손상된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 1225-1274)는 이 이론을 더욱 정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모든 부재가 악은 아니라고 지적했습니다. 인간이 사슴처럼 빠르게 달리지 못하는 것은 악이 아닙니다. 이것은 단순한 부정적 부재입니다. 그러나 있어야 할 것이 없는 상태는 악입니다. 이것을 그는 결핍적 부재라고 불렀습니다. 눈이 있어야 할 사람이 시각을 잃는 것은 악입니다. 왜냐하면 시각은 인간 본성이 요구하는 선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론은 신학적으로 강력한 이점을 지닙니다. 만약 악이 실체가 아니라면, 신이 악을 창조했다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은 모든 존재를 창조했지만, 악은 존재가 아니므로 신의 창조 행위에서 제외됩니다. 악은 피조물의 유한성과 자유의지의 오용에서 비롯된 결과입니다. 이렇게 하여 신의 선함은 보존됩니다.
카발라의 급진적 전환
그러나 카발라 사상가들은 이 설명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12세기에 등장한 『세페르 바히르』 (Sefer Bahir)는 악의 문제를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했습니다. 이 문헌은 악이 신적 구조 자체의 일부라고 선언했습니다. 악은 신과 별개로 분리되어 있는 무엇이 아닙니다. 악은 신성의 내부에서, 신성의 역동적 과정 속에서 발생합니다.
『조하르』는 이 통찰을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조하르에 따르면, 악의 근원은 열 개의 거룩한 세피로트 안에 있습니다. 특히 다섯 번째 세피라인 게부라 (Geburah)가 핵심입니다. 게부라는 엄격함과 심판과 제한을 담당하는 신성의 권능입니다. 게부라는 그 자체로 악이 아닙니다. 헤세드 (Chesed)의 무한한 자비와 균형을 이룰 때, 게부라는 우주에 질서와 형태를 부여하는 필수적인 힘입니다.
문제는 게부라가 지나치게 강해질 때 발생합니다. 자비와 분리된 심판은 파괴적이 됩니다. 사랑 없는 정의는 냉혹한 잔인함으로 변질됩니다. 카발라는 이것을 게부라의 불균형이라고 불렀습니다. 세피로트는 하나의 유기적 체계입니다. 어느 한 세피라가 다른 세피라들과의 조화로운 관계를 잃으면, 그 힘은 왜곡됩니다. 이 왜곡이 악의 씨앗입니다.
카발라는 이 왜곡된 힘을 시트라 아흐라 (Sitra Achra)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다른 면을 뜻합니다. 시트라 아흐라는 거룩함의 반대편에 있는 영역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과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 실재가 아닙니다. 시트라 아흐라는 신성에서 나왔지만, 그 본래의 조화로운 관계를 잃어버린 힘입니다.
껍질로서의 악
카발라는 악의 구체적 현현을 클리포트 (Qliphoth)라고 불렀습니다. 클리포트는 히브리어로 껍질을 뜻하는 클리파 (Qlipha)의 복수형입니다. 이 은유는 심오합니다. 껍질은 열매를 감싸고 보호합니다. 그러나 껍질은 또한 열매를 가립니다. 클리포트는 바로 이런 이중적 성격을 지닙니다.
클리포트는 신성한 빛을 가두는 장벽입니다. 그릇들의 파괴라는 우주적 재앙이 일어났을 때, 신성한 불꽃들은 깨진 그릇의 파편 안에 갇혔습니다. 이 파편들이 클리포트입니다. 클리포트는 빛을 차단합니다. 클리포트는 신성한 에너지를 왜곡하고 오염시킵니다. 이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악의 실체입니다.
그러나 클리포트 안에는 여전히 신성한 불꽃이 숨어 있습니다. 껍질이 열매를 완전히 파괴하지 못하듯, 클리포트는 그 안에 갇힌 빛을 소멸시키지 못합니다. 빛은 감춰져 있고, 억압되어 있고, 왜곡되어 있지만, 여전히 존재합니다. 이것이 카발라가 제시하는 희망의 근거입니다. 악은 궁극적으로 신성과 분리될 수 없기에, 악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부재가 아니라 왜곡
카발라의 악 이론과 아우구스티누스의 프리바티오 보니 사이의 차이는 근본적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악은 부재입니다. 악은 무가 있는 곳입니다. 악은 존재의 결핍입니다. 그러나 카발라에게 악은 왜곡입니다. 악은 존재하는 무엇입니다. 악은 신성한 힘이 그 본래의 자리를 벗어나 불균형 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철학적 논쟁이 아닙니다. 이 차이는 실천적 함의를 지닙니다. 만약 악이 단순한 부재라면, 악과 싸우는 방법은 선을 더하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 빛을 비추면 어둠은 자동으로 사라집니다. 그러나 만약 악이 왜곡이라면, 상황은 더 복잡합니다. 우리는 왜곡된 힘을 다시 바로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불균형한 세피로트를 조화로운 관계로 되돌려야 합니다.
카발라는 악을 치유 가능한 것으로 봅니다. 클리포트 안에 갇힌 신성한 불꽃은 구출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티쿤 (Tikkun)이라는 복원 작업의 핵심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선한 행위와 의도를 통해 흩어진 불꽃을 제자리로 되돌릴 수 있습니다. 각각의 미츠바 (Mitzvah), 즉 계명의 실천은 하나의 불꽃을 해방시킵니다.
게르숌 숄렘은 카발라의 이 측면을 유대교적 영지주의라고 불렀습니다. 영지주의는 물질 세계를 악한 데미우르고스의 창조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카발라는 다릅니다. 카발라는 물질 세계를 신성의 가장 낮은 현현으로 봅니다. 세상은 타락했지만, 세상은 여전히 신성의 일부입니다. 세상은 치유되어야 할 환자이지, 파괴되어야 할 감옥이 아닙니다.
역설적 긴장
카발라의 악 이론은 하나의 역설적 긴장을 품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카발라는 악을 신성의 내부에 위치시킵니다. 악은 세피로트의 불균형에서 나옵니다. 이것은 악이 신성과 분리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카발라는 악의 독립적 현실성을 인정합니다. 시트라 아흐라는 실제로 작동하는 힘입니다. 클리포트는 실재하는 장벽입니다.
이 긴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카발라는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명확한 답은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악의 신비는 신의 신비만큼이나 깊기 때문입니다. 『조하르』는 악을 설명하면서도 동시에 악의 궁극적 불가해성을 암시합니다.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카발라는 악을 심각하게 받아들입니다. 악은 단순히 무의 다른 이름이 아닙니다. 악은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실재하는 힘입니다. 동시에 카발라는 악을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악은 신과 동등한 지위를 갖지 못합니다. 악은 결국 일시적이고 부차적인 현상입니다.
모세 코르도베로는 『파르데스 리모님』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신은 모든 실재이지만, 모든 실재가 신은 아닙니다. 이 명제는 악의 문제에도 적용됩니다. 악은 신성에서 나왔지만, 악은 신성의 참된 본질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악은 신성의 왜곡된 반영입니다.
체험적 차원
철학적 논의를 넘어서, 카발라의 악 이론은 우리의 구체적 삶과 만납니다. 우리는 악을 추상적 개념으로만 만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악을 고통으로, 상실로, 불의로 경험합니다. 카발라의 가르침은 이런 경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까요?
카발라는 우리에게 악 속에서도 신성한 불꽃을 찾으라고 가르칩니다. 가장 어두운 경험 안에도 구원의 가능성이 숨어 있습니다. 클리포트는 빛을 가두지만, 동시에 빛을 보존합니다. 고통 속에서 우리는 깨어질 수 있지만, 그 깨어짐 자체가 새로운 빛이 들어올 틈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하시디즘의 창시자인 바알 솀 토브 (Baal Shem Tov, 1700경-1760)는 이 통찰을 일상의 영성으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신성을 담고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악한 충동조차 그 근원에는 신성한 에너지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 에너지가 잘못된 방향으로 흐른다는 것입니다. 영적 수행은 그 에너지를 바른 방향으로 돌리는 작업입니다.
이것은 악을 정당화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악은 여전히 악입니다. 악은 극복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카발라는 악과의 투쟁이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변형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악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악 안에 갇힌 신성한 힘을 해방시킵니다. 우리는 왜곡을 바로잡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악은 역설적으로 성장의 기회가 됩니다. 완벽한 조화 속에서는 티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릇이 깨졌기에 우리는 그것을 복원하는 신성한 작업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악이 존재하기에 우리의 선택이 의미를 갖습니다. 이것이 카발라가 제시하는 악의 신비에 대한 하나의 응답입니다.
2-7.2. 클리포트: 세피로트의 어두운 거울
껍데기가 감추는 빛
우리는 때로 아름다운 과일을 먹으면서 그것을 감싸고 있던 껍질을 버립니다. 그 껍질은 과일이 자라는 동안 내부의 단맛을 보호했지만, 이제는 우리가 열매의 과육에 다가가는 것을 가로막습니다. 카발라는 이 단순한 일상의 경험 속에서 악의 본질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발견했습니다.
클리포트 (Qliphoth)는 히브리어로 껍데기나 껍질을 뜻합니다. 이 용어는 복수형이며, 단수형은 클리파 (Qliphah)입니다. 카발라 사상가들은 이 단어를 통해 악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려 했습니다. 악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실체가 아니라, 신성한 빛을 가두고 있는 깨진 껍데기와 같습니다.
『조하르, Zohar』는 클리포트를 견과류의 단단한 껍질에 비유합니다. 호두나 아몬드의 껍질이 내부의 영양분을 보호하듯, 클리포트는 원래 신성한 빛을 담기 위한 그릇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릇들의 파괴라는 우주적 재앙이 일어났을 때, 이 껍질들은 빛을 가둔 채로 흩어졌습니다. 껍질은 더 이상 보호자가 아니라 감옥이 되었습니다.
이 개념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먼저 셰비라트 하켈림 (Shevirat HaKelim), 즉 그릇들의 파괴라는 사건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인 소프 (Ein Sof)의 빛이 창조를 위해 흘러내렸을 때, 그 빛을 담아야 할 그릇들이 준비되었습니다. 그러나 빛이 너무 강렬했습니다. 특히 게부라 (Geburah), 엄격함의 세피라가 담고 있던 그릇이 먼저 견디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파국에서 태어난 그림자
깨진 그릇의 파편들은 창조의 공간 속으로 떨어졌습니다. 이 파편들은 완전히 생명력을 잃지 않았습니다. 루리아 카발라는 이 파편들 안에 288개의 신성한 불꽃이 갇혀 있다고 가르칩니다. 기름 항아리가 깨질 때 파편에 기름 방울이 남아 있듯이, 깨진 그릇 안에는 여전히 신성한 빛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 갇힌 불꽃들이 껍데기에 어둡고 왜곡된 생명력을 불어넣었습니다. 하임 비탈은 그의 저서 『에츠 하임, Etz Hayyim』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클리포트는 빛을 향한 그리움으로 존재하지만, 동시에 그 빛에 다가가면 자신들의 존재가 소멸된다는 것을 압니다. 이 역설이 악의 본질입니다. 클리포트는 살아남기 위해 빛을 필요로 하지만, 그 빛을 은폐하고 왜곡해야만 자신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카발라 전통은 이 어둠의 영역을 시트라 아크라 (Sitra Achra), 즉 다른 면이라고 부릅니다. 이 용어는 『조하르』에서 처음 등장했으며, 거룩함의 반대편을 가리킵니다. 시트라 아크라는 독립된 악의 왕국이 아니라, 신성으로부터 멀어진 최대한의 거리를 의미합니다. 빛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그림자가 가장 짙듯이, 신성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클리포트가 자리합니다.
거울 속의 왜곡된 얼굴들
생명의 나무에 열 개의 세피로트가 있듯이, 그 나무의 그림자에는 열 개의 클리포트가 있습니다. 각각의 클리포트는 해당하는 세피로트의 어두운 거울입니다. 거울은 같은 형태를 비추지만 좌우가 뒤바뀌듯이, 클리포트는 세피로트와 같은 구조를 지니지만 그 본질이 왜곡되어 있습니다.
케테르 (Kether), 왕관의 세피라에 대응하는 클리포트는 타미엘 (Thaumiel)입니다. 이 이름은 신의 쌍둥이를 뜻합니다. 케테르가 절대적 통일을 나타낸다면, 타미엘은 거짓된 이원성을 나타냅니다. 하나여야 할 것이 둘로 갈라진 상태, 신성의 통일성을 부정하고 분리를 주장하는 힘이 타미엘입니다.
호크마 (Chokmah), 지혜의 세피라에 대응하는 클리포트는 가기엘 (Ghagiel) 또는 차이기델 (Chaigidel)입니다. 이 이름은 방해자들을 뜻합니다. 호크마가 순수한 창조적 통찰이라면, 가기엘은 거짓과 외적 현상에 집착하는 힘입니다. 진정한 지혜는 실재를 꿰뚫어 보지만, 가기엘은 겉모습에 속아 본질을 놓치게 만듭니다.
비나 (Binah), 이해의 세피라에 대응하는 클리포트는 사타리엘 (Sathariel)입니다. 이 이름은 은폐자들을 뜻합니다. 비나가 형태를 부여하여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면, 사타리엘은 형태 안에 진리를 가두어 버립니다. 이해는 빛을 드러내지만, 사타리엘은 빛을 숨깁니다.
헤세드 (Chesed), 자비의 세피라에 대응하는 클리포트는 가쉐클라 (Gha'agsheblah)입니다. 이 이름은 부수는 자들을 뜻합니다. 헤세드가 무한한 사랑으로 베푼다면, 가쉐클라는 경계 없는 탐욕으로 모든 것을 삼키려 합니다. 사랑은 타자를 존중하지만, 탐욕은 타자를 소유하려 합니다.
게부라 (Geburah), 엄격함의 세피라에 대응하는 클리포트는 골라캅 (Golachab)입니다. 이 이름은 불타는 자들을 뜻합니다. 게부라가 정의로운 제한이라면, 골라캅은 파괴적인 잔혹함입니다. 정의는 질서를 세우지만, 잔혹함은 모든 것을 재로 만듭니다.
티페레트 (Tiferet), 아름다움의 세피라에 대응하는 클리포트는 타기리온 (Thagirion)입니다. 이 이름은 논쟁하는 자들을 뜻합니다. 티페레트가 조화로운 균형이라면, 타기리온은 끝없는 분쟁입니다. 아름다움은 서로 다른 것들을 하나로 묶지만, 논쟁은 모든 것을 갈라놓습니다.
네짜흐 (Netzach), 영원함의 세피라에 대응하는 클리포트는 아랍 자라크 (A'arab Zaraq)입니다. 이 이름은 흩어진 까마귀들을 뜻합니다. 네짜흐가 끈기 있는 승리라면, 아랍 자라크는 무질서한 분산입니다. 지속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지만, 분산은 모든 방향으로 흩어집니다.
호드 (Hod), 영광의 세피라에 대응하는 클리포트는 사멜 (Samael)입니다. 이 이름은 신의 독을 뜻합니다. 호드가 진리를 형식으로 표현한다면, 사멜은 형식을 우상으로 만듭니다. 진리는 해방하지만, 우상은 속박합니다.
예소드 (Yesod), 기초의 세피라에 대응하는 클리포트는 가말리엘 (Gamaliel)입니다. 이 이름은 음란한 자들을 뜻합니다. 예소드가 신성한 결합의 통로라면, 가말리엘은 왜곡된 욕망입니다. 거룩한 결합은 생명을 낳지만, 음란함은 생명력을 낭비합니다.
말쿠트 (Malkhut), 왕국의 세피라에 대응하는 클리포트는 릴리트 (Lilith) 또는 네헤모트 (Nehemoth)입니다. 말쿠트가 신성한 임재의 거처라면, 릴리트는 공허한 물질성입니다. 물질은 영을 담는 그릇이지만, 공허한 물질성은 영을 거부합니다.
불균형이 낳은 왜곡
클리포트의 본질은 불균형입니다. 모세 코르도베로는 그의 저서 『파르데스 리모님, Pardes Rimonim』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세피로트가 서로 균형을 이룰 때 생명의 나무는 조화롭게 작동합니다. 그러나 어느 하나가 다른 것들로부터 고립되면, 그 세피라는 클리포트로 전락합니다.
자비는 그 자체로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비만이 있고 엄격함이 없다면, 그 자비는 방종이 됩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되 전혀 훈계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자녀를 망칩니다. 반대로 엄격함도 그 자체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엄격함만이 있고 자비가 없다면, 그 엄격함은 잔혹함이 됩니다. 부모가 자녀를 끊임없이 벌주기만 한다면, 그 훈계는 자녀의 영혼을 짓밟습니다.
이것이 클리포트가 생겨나는 메커니즘입니다. 클리포트는 새로운 악의 창조가 아니라, 선한 것의 왜곡입니다. 지혜가 교만으로, 사랑이 집착으로, 정의가 복수로 변질될 때, 세피로트는 클리포트가 됩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일상의 경험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열정을 가졌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열정은 그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진리에 대한 확신이 너무 강해져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그의 열정은 독선이 됩니다. 진리를 향한 사랑은 호크마의 빛이지만, 독선은 가기엘의 그림자입니다.
또 다른 사람이 질서를 사랑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는 모든 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규칙을 존중하며, 약속을 지킵니다. 이것은 호드의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규칙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 규칙을 위해 사람을 희생시킨다면, 그의 질서 사랑은 율법주의가 됩니다. 형식을 존중하는 것은 호드의 빛이지만, 형식을 우상화하는 것은 사멜의 그림자입니다.
껍데기 안에 갇힌 불꽃
클리포트에 대한 카발라의 가르침 중 가장 역설적이면서도 희망적인 것은, 클리포트 안에 여전히 신성한 불꽃이 갇혀 있다는 통찰입니다. 이 불꽃들을 니초초트 (Nitzotzot)라고 부릅니다. 그릇들의 파괴가 일어났을 때, 깨진 그릇 속에 담겨 있던 빛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빛의 조각들이 껍데기 안에 갇혀서, 클리포트에 생명력을 부여합니다.
이것은 악의 본질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악은 완전한 무나 절대적 어둠이 아닙니다. 악은 선이 왜곡되고 감춰진 상태입니다. 가장 사악한 행위 속에도, 원래는 선했을 무언가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탐욕은 왜곡된 풍요의 추구이며, 교만은 왜곡된 자존감이며, 분노는 왜곡된 정의감입니다.
이 이해는 티쿤 (Tikkun), 즉 복원의 작업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줍니다. 만약 악이 독립적인 실체라면, 우리는 악과 끝없이 싸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악이 갇힌 선이라면, 우리의 임무는 싸움이 아니라 해방입니다. 우리는 클리포트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클리포트 안에 갇힌 불꽃을 구해내야 합니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분노라는 감정을 생각해 봅시다. 어떤 사람이 불의를 목격하고 분노를 느낍니다. 이 분노는 게부라의 에너지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이 분노를 제어하지 못하고 폭력으로 표출한다면, 게부라의 에너지는 골라캅의 클리포트로 전락합니다. 이제 그의 분노는 파괴적인 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카발라의 관점에서 볼 때, 이 파괴적 분노 안에는 여전히 정의를 향한 열망이라는 불꽃이 남아 있습니다. 티쿤의 작업은 이 불꽃을 구해내는 것입니다. 만약 그가 자신의 분노를 인식하고, 그 분노의 근원에 있는 정의감을 발견한다면, 그는 분노를 건설적인 행동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폭력 대신 평화적 시위를, 파괴 대신 새로운 질서의 건설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클리포트 안에 갇힌 불꽃을 해방시키는 과정입니다.
거울을 마주하는 용기
카발라의 클리포트 개념은 20세기 심리학과 놀라운 공명을 보입니다. 칼 융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 그림자 (Shadow)라는 영역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림자는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어두운 면입니다. 우리는 그림자를 억압하고 부정하려 하지만, 억압된 그림자는 더욱 강력한 힘으로 우리를 지배합니다.
융은 개성화 (Individuation) 과정에서 그림자와의 대면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우리는 그림자를 파괴할 수 없습니다. 그림자를 파괴하려는 시도는 자신의 일부를 파괴하려는 것이기에, 결국 자기 파괴로 이어집니다. 대신 우리는 그림자를 인정하고, 이해하고, 통합해야 합니다. 그림자 안에는 억압된 생명력과 창조적 에너지가 갇혀 있습니다. 그림자를 통합함으로써, 우리는 그 에너지를 건설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클리포트와 니초초트에 대한 카발라의 가르침과 놀랍도록 유사합니다. 클리포트는 융의 그림자에 해당하며, 니초초트는 그림자 안에 갇힌 창조적 에너지에 해당합니다. 티쿤 올람 (Tikkun Olam), 세상의 복원은 개인적 차원에서 그림자의 통합으로 실현됩니다.
우리는 이 지혜를 구체적인 삶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취약함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는 항상 강한 척하고, 도움을 청하는 것을 약함의 표시로 여깁니다. 이 거부된 취약함은 그의 클리포트가 됩니다. 그것은 그림자 속에 숨어서,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를 무너뜨립니다.
다른 사람은 자신의 분노를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녀는 항상 친절하고 상냥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웃으며 넘어갑니다. 그러나 억압된 분노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클리포트가 되어, 우울증이나 신체적 질병으로 나타나거나, 엉뚱한 대상에게 폭발합니다.
티쿤은 이렇게 억압된 부분들을 의식의 빛 속으로 끌어내는 작업입니다. 취약함을 인정하는 것은 약함이 아니라 용기입니다.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은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사람보다 더 강합니다. 분노를 인정하는 것은 사악함이 아니라 정직함입니다. 자신의 경계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참아내는 사람보다 더 건강합니다.
클리포트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악을 단순히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관점을 넘어서게 합니다. 악은 왜곡된 선입니다. 클리포트는 잘못된 자리에 있는 세피로트입니다. 우리의 과제는 파괴가 아니라 재배치이며, 제거가 아니라 변화이며, 정죄가 아니라 구원입니다.
어둠 속에 숨은 자유의 씨앗
클리포트에 대한 명상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명확한 선과 악의 구분을 원합니다. 선한 것은 지키고, 악한 것은 버리는 단순한 길을 원합니다. 그러나 카발라는 이 단순함을 거부합니다. 클리포트는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가장 밝은 빛도 그림자를 드리우며, 가장 어두운 곳에도 빛의 불꽃이 숨어 있습니다.
이 역설적 진리는 우리에게 새로운 책임을 부여합니다. 만약 클리포트 안에 신성한 불꽃이 갇혀 있다면, 우리는 그 불꽃을 해방시킬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악을 방관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악과 더욱 깊이 씨름해야 합니다. 단지 악을 정죄하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악의 뿌리를 이해하고 변화시켜야 합니다.
한 사람이 범죄를 저질렀다고 가정해 봅시다. 사회는 그를 처벌합니다. 이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정의는 지켜져야 하며, 피해는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카발라의 관점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의 범죄 안에는 어떤 왜곡된 열망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존중받기를 원했지만 그 방법을 잘못 선택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힘을 원했지만 그 힘을 파괴적으로 사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클리포트의 관점에서 볼 때, 진정한 정의는 단순히 범죄자를 격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갇힌 불꽃을 구해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범죄를 용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범죄자 안에 여전히 인간성이 남아 있으며, 그 인간성을 회복할 가능성이 있다는 믿음입니다. 응보적 정의를 넘어 회복적 정의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클리포트의 지혜가 현대 사회에 주는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또한 사회적 악과 마주할 때 이 지혜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불의한 체제나 억압적 구조를 볼 때, 우리는 분노를 느낍니다. 이 분노는 정당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 체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단순히 악인으로 규정한다면, 우리는 그들 안에 갇힌 불꽃을 놓치게 됩니다. 어쩌면 그들은 안정을 원하지만 잘못된 방식으로 추구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정의를 원하지만 왜곡된 정의관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변화는 파괴가 아니라 변혁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불의한 체제를 무너뜨려야 하지만, 동시에 그 체제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가진 정당한 욕구를 이해하고 더 나은 방식으로 충족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티쿤입니다. 깨진 것을 단순히 버리는 것이 아니라, 깨진 조각들을 모아 새로운 그릇을 만드는 것입니다.
클리포트는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누구도 완전히 선하지 않으며, 누구도 완전히 악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클리포트를 비난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클리포트를 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그림자를 지적할 때, 그것은 종종 우리 자신의 억압된 그림자를 투사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영적 성숙은 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의 클리포트를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탐욕, 교만, 분노, 두려움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러나 단지 직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어둠 안에 갇힌 빛을 발견해야 합니다. 탐욕 안에는 풍요를 향한 열망이, 교만 안에는 자존감의 씨앗이, 분노 안에는 정의감이, 두려움 안에는 신중함이 숨어 있습니다.
이 불꽃들을 구해내는 것, 이것이 개인적 차원에서의 티쿤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클리포트와 씨름할 때, 우리는 세상의 클리포트와도 더 지혜롭게 씨름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안의 그림자를 통합한 사람만이, 세상의 그림자와도 건설적으로 마주할 수 있습니다.
클리포트는 결국 자유의 대가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악도 없을 것입니다. 로봇은 악을 행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로봇에게는 선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악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 선택할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클리포트의 존재는,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자유를 증명합니다.
이 자유는 무거운 책임을 동반합니다. 우리는 매 순간 선택합니다. 세피로트의 길을 걸을 것인가, 클리포트의 길을 걸을 것인가. 자비와 엄격함의 균형을 유지할 것인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칠 것인가. 빛을 드러낼 것인가, 빛을 가릴 것인가. 이 선택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듭니다.
카발라는 우리에게 절망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비록 우리가 클리포트의 길로 빠졌다 하더라도, 돌아올 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깨진 그릇 안에 빛이 남아 있듯이, 우리 안에도 신성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그 빛을 다시 발견하는 것, 그것이 회개이며, 회복이며, 부활입니다.
클리포트에 대한 명상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해방시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선과 악의 단순한 이분법에 갇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복잡한 현실을, 모순으로 가득한 인간 존재를, 빛과 어둠이 뒤섞인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 용기 있는 직시로부터, 진정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2-7.3. 불균형의 메커니즘
우주는 완벽한 고요 속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생명나무의 구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중심에는 멈춰 있는 균형이 아니라 끊임없이 진동하는 긴장이 자리합니다. 카발라가 말하는 균형은 쇠줄에 묶인 추처럼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진자가 끊임없이 좌우로 흔들리며 중심을 유지하는 살아있는 역동입니다.
생명나무를 구성하는 세 기둥 가운데, 왼쪽의 엄격함의 기둥과 오른쪽의 자비의 기둥은 서로를 향해 끊임없이 당기고 밀어냅니다. 게부라 (Geburah)는 제한하고 심판하는 힘으로, 헤세드 (Chesed)가 무한히 확장하려는 흐름을 막아섭니다. 헤세드는 모든 경계를 허물고 베풀려는 사랑의 힘으로, 게부라의 엄격한 구조를 녹이려 합니다. 이 두 힘이 서로를 향해 당기는 긴장이 바로 우주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밧줄입니다.
다이온 포춘 (Dion Fortune, 1890-1946)은 『신비주의 카발라, The Mystical Qabalah』에서 이 긴장을 밧줄을 당기는 두 사람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두 사람이 밧줄 양끝을 잡고 서로를 향해 힘껏 당길 때, 그들은 균형을 이룹니다. 하지만 한쪽이 갑자기 손을 놓으면, 반대편에서 당기던 사람은 뒤로 넘어집니다. 우주도 마찬가지입니다. 헤세드와 게부라가 서로를 향해 당기는 저항이 사라지면, 우주는 무너집니다. 이 저항은 악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맞닥뜨리게 되는 필연적인 균형추입니다.
더 높은 층위에서도 같은 긴장이 작동합니다. 비나 (Binah)는 형태를 부여하는 엄격함의 힘으로, 호크마 (Chokmah)의 순수한 힘을 틀 안에 담습니다. 호크마는 무한히 흘러나오려는 능동적 힘으로, 비나의 구조를 밀어냅니다. 생명나무의 두 기둥은 위에서 아래까지 서로를 향해 끊임없이 당기며, 그 중앙에 균형의 기둥이 세워집니다. 티페레트 (Tiferet)는 바로 이 양극단의 긴장이 조화를 이루는 중심입니다.
하지만 이 균형은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진자가 좌우로 흔들리듯, 세피로트의 힘은 한쪽으로 기울었다가 다른 쪽으로 기울기를 반복합니다. 게부라 쪽으로 너무 멀리 흔들리면, 우주는 불타오르는 파괴의 영역으로 들어갑니다. 미움과 분노가 지배하는 클리포트의 영역입니다. 반대로 헤세드 쪽으로 너무 멀리 흔들리면, 파괴를 허용하는 자들의 영역에 이릅니다. 이 이름이 담고 있는 의미는 깊습니다. 무분별한 사랑은 필요한 제한을 거부하고, 결국 붕괴를 불러옵니다.
그렇다면 클리포트는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카발라는 악의 기원을 세피로트의 발현 과정 그 자체에서 찾습니다. 케테르 (Kether)가 호크마를 향해 흘러넘치던 초기의 순간, 호크마가 아직 완전히 자리를 잡지 못했던 그 짧은 시간 동안, 케테르는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아직 보상받지 못한 넘침이었습니다. 각 세피라가 다음 세피라를 형성하던 과도기마다, 이런 일시적 불균형이 반드시 발생했습니다.
우리는 이 현상을 인간의 삶에서도 목격합니다. 어린아이가 청소년이 되는 시기를 떠올려 보십시오. 더 이상 부모의 통제 아래 있지 않지만, 아직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어른도 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이 전환기의 혼란이 바로 병리학적 과도기입니다. 새로운 힘이 솟아오르지만 그것을 조절할 구조가 아직 마련되지 않았을 때, 불균형이 발생합니다. 세피로트의 발현 과정도 이와 같았습니다. 각 클리포트는 이런 불균형의 순간에 생겨난 그림자입니다.
따라서 악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그것을 억압하거나 잘라내는 것이 아닙니다. 균형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케테르의 넘치는 힘이 클리포트를 낳았다면, 그 해결은 호크마의 활동을 증가시켜 케테르를 보상하는 데 있습니다. 게르솀 숄렘은 『유대 신비주의의 주요 경향, Major Trends in Jewish Mysticism』에서 루리아 카발라가 악의 뿌리를 세피로트의 빛 속에 이미 섞여 있던 찌꺼기로 설명한다고 말합니다. 그릇들이 깨지기 전부터, 순수한 빛 속에는 정화되어야 할 요소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릇들의 파괴는 이 찌꺼기를 분리해내는 과정이었습니다. 악이 실제로 존재하며 독립된 영역을 갖게 된 것은 이 파괴와 그 후의 선별 과정을 통해서입니다. 깨진 그릇의 파편들에서가 아니라, 원초적 빛의 찌꺼기로부터 클리포트의 영역이 일어났습니다. 루리아는 이 과정을 출산의 비유로 설명했습니다. 셰비라 (Shevirah)는 죽음이 아니라 탄생입니다. 유기체의 가장 깊은 경련이며, 폐기물이 밖으로 배출되는 순간입니다. 신비적인 원초의 왕들의 죽음은, 사실은 순수한 새 그릇들의 신비적 탄생이었습니다.
각 세피라에서 넘쳐흘렀던 불균형한 힘은, 그 자체로는 순수하고 선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보상받지 못한 채 오랜 세월 방치되면, 그것은 점차 조직화되고 발전하여 긍정적이고 역동적인 악의 중심이 됩니다. 생각 형태들이 그 주위에 모여들기 때문입니다. 의식 있는 존재들의 마음에서 생겨난 악의 생각 형태나, 균형을 잃은 맹목적 힘들이 자신과 같은 성질의 곳을 찾아갑니다. 각각의 부조화는 제 자리를 찾아갑니다.
화성의 에너지인 게부라의 넘침을 예로 들어 봅시다. 게부라는 관성을 밀어내고 낡고 쇠한 것을 치워버리는 필요한 에너지입니다. 하지만 티페레트가 발현되기 전, 구원자가 나타나기 전의 시기에는 게부라의 엄격함이 보상받지 못한 채 넘쳐흘렀습니다. 티페레트가 발현되자마자, 구원자는 게부라의 가혹함을 보상했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율법을 가져온 순간입니다. 하지만 그 전까지, 불균형한 게부라의 에너지는 클리포트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카발라는 우리에게 중요한 진리를 가르칩니다. 대립하는 두 힘 가운데 어느 한쪽을 선으로, 다른 쪽을 악으로 규정하는 것은 근본적인 이원론의 오류입니다. 빛과 어둠, 영과 물질의 투쟁이 결국 신의 승리와 반대 세력의 완전한 소멸로 끝날 것이라 믿는 것은, 균형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루시퍼 (Lucifer)는 빛을 나르는 자이고, 사탄 (Satan)은 타락한 천사입니다. 그리스도는 인류에게만 아니라 지옥에 내려가 갇힌 영들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악을 잘라내고 파괴함으로써 다룰 수 없습니다. 오직 흡수하고 조화시킴으로써만 다룰 수 있습니다. 불균형의 메커니즘을 이해한다는 것은, 악이 선의 부재가 아니라 선의 왜곡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너무 많은 선도 해롭습니다. 현대 종교 사상은 이 점을 크게 오해합니다. 복수하고 뇌물을 받는 여호와 아래서의 영원한 보상과, 악마의 지배 아래서의 영원한 형벌이라는 기독교의 가혹한 교리를 보십시오. 이것이 대립하는 두 힘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완벽한 균형이 존재하는 유일한 시간은 프랄라야 (Pralaya), 즉 신들의 밤 동안입니다. 균형 상태의 힘은 정적이고 잠재적입니다. 결코 역동적이지 않습니다. 균형 속의 힘은 서로를 완벽히 중화시켜 불활성 상태가 된 두 대립하는 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균형이 깨져야 힘들이 작동을 위해 풀려납니다.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성장과 진화와 조직화가 가능해집니다. 완벽한 균형 속에서는 진보의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것은 휴식의 상태입니다.
우주적 밤이 끝날 때, 균형이 무너졌다고 합니다. 그 결과 힘의 흘러나옴이 다시 일어나고 진화가 다시 시작됩니다. 우주의 균형은 조임쇠의 고정보다는 진자의 흔들림에 가깝습니다. 이 두 개념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균형 속에는 항상 미세한 진동이 있습니다. 대립하는 힘들 사이의 밀고 당김이 균형을 안정되게 유지합니다. 이것은 관성의 안정이 아니라 긴장의 안정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우리는 저항과 맞서 힘을 쓰게 됩니다. 이 긴장과 저항은 악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힘에 필요한 균형추입니다. 만약 이 맞당김이 멈춘다면, 밧줄이 끊어졌을 때 밧줄을 당기던 사람이 쓰러지듯 우주는 무너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명확히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맞서 힘을 써야 하는 이 저항은 악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힘에 필요한 보상입니다.
클리포트는 이렇게 태어났습니다. 균형을 향한 영원한 진동 속에서, 과도기의 불균형이라는 피할 수 없는 순간들로부터 생겨났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과제는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하는 것입니다. 넘쳐흐른 힘을 제자리로 돌려보내고, 왼쪽 기둥과 오른쪽 기둥이 다시 조화롭게 당기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티쿤 (Tikkun)의 지혜입니다. 깨진 것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흐트러진 균형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2-7.4. 역설의 신학: 어둠도 빛의 일부
카발라 사상의 가장 깊은 역설은 어둠의 본질에 대한 이해에서 드러납니다. 『조하르, Zohar』는 악과 클리포트를 단순히 신성한 영역에 대한 불법적 침입이나 신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 세력으로 보지 않습니다. 악은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지만, 신의 빛이 그 안에 갇혀 있기에 존재할 수 있습니다.
게르솜 숄렘은 조하르의 악 이론을 분석하며, 악이 생명의 과정에서 남겨진 죽은 잔여물이라고 설명합니다. 클리포트는 그 자체로는 완전히 죽어 있습니다. 하지만 신의 거룩함에서 나온 빛의 광선이 아무리 희미하다 해도 그 위에 떨어지거나, 인간의 죄가 그것에 양분을 주어 활기를 불어넣으면 비로소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이 악의 존재 방식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악의 의인화인 사마엘 (Sammael)조차도 신의 생명의 불꽃이 그 안에서 타오르고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조하르는 사마엘을 시트라 아크라 (Sitra Achra), 즉 다른 쪽 또는 왼쪽이라 부르며, 이 어두운 악마적 세계가 모든 살아있는 것의 어두운 면을 형성하고 내부로부터 그것을 위협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어둠의 존재조차 신성에서 유래한 불꽃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 사상은 카발라가 지닌 가장 과감한 신학적 통찰입니다. 13세기 스페인의 카발라 사상가인 요셉 기카틸라 (Joseph Gikatila, 1248경-1305경)는 악이 본래 제자리에 있을 때는 선한 것이지만, 자신에게 적합하지 않은 자리를 찬탈하려 할 때 악이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는 악이 존재론적으로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균형에서 벗어난 선의 왜곡된 형태라는 뜻입니다. 게부라 (Geburah)의 엄격함이 헤세드 (Chesed)의 자비와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홀로 과도하게 작용하면, 그 정당한 제한의 힘이 파괴적인 악으로 변질됩니다.
조하르는 클리포트를 견과의 껍질에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견과는 딱딱한 껍질로 둘러싸여 있고, 그 껍질 안에 영양이 풍부한 과육이 들어 있습니다. 클리포트는 이 껍질과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거칠고 쓸모없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내부의 거룩함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껍질이 없다면 연약한 과육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클리포트는 신성한 불꽃을 감추고 보호하는 기능을 지닙니다.
셰비라트 하켈림 (Shevirat HaKelim), 즉 그릇들의 파괴가 일어났을 때, 신성한 빛의 불꽃들인 니초초트 (Nitzotzot)가 흩어져 클리포트의 껍질 안에 갇혔습니다. 이 불꽃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어둠의 껍질 속에서 구출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티쿤 (Tikkun)의 작업은 바로 이 갇힌 불꽃들을 해방시켜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보내는 것입니다.
조하르의 한 구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에스겔이 클리포트 가운데서 셰키나를 보았을 때, 그는 그녀와 함께 열 개의 세피로트를 보았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충격적입니다. 신의 임재인 셰키나 (Shekhinah)가 클리포트의 영역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가장 어두운 곳에서조차 신성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조하르는 클리포트가 순수한 악의 영역으로 여겨지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소량의 선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것을 겨로부터 밀을 분리하듯 걸러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루리아 카발라는 이 역설을 더욱 심화시킵니다. 이삭 루리아의 가르침에 따르면, 클리포트는 침춤 (Tzimtzum) 이후 창조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난 불균형의 결과입니다. 신이 자신을 수축시켜 텅 빈 공간을 만들었을 때, 그 공간에는 레쉬무 (Reshimu), 즉 신성의 희미한 흔적이 남았습니다. 이 흔적 없이는 창조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흔적이야말로 빛과 어둠, 선과 악의 분리가 시작된 지점이기도 합니다.
어둠이 빛의 부재가 아니라 빛이 약해진 상태라는 이해는 카발라 신학의 핵심입니다. 오르 (Or), 즉 빛이라는 단어에서 요드 (י) 문자를 빼면 아비르 (Avir), 즉 공기 또는 희미한 빛이 됩니다. 아비르는 완전한 빛도 완전한 어둠도 아닌 중간 상태입니다. 클리포트는 이처럼 신성한 빛이 극도로 약해지고 왜곡된 상태에서 생겨납니다. 하지만 그 안에 빛의 흔적이 전혀 없다면, 클리포트조차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 역설의 신학이 던지는 질문은 심오합니다. 왜 신은 악이 존재하도록 허용했을까요? 조하르는 한 대목에서 이렇게 답합니다. 신은 인간이 자유롭기를 원했고, 그래서 악의 존재를 정하여 인간이 악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도덕적 힘을 증명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만약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 인간의 선한 행위는 의미를 잃습니다. 악은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 의지를 부여하기 위한 신의 배려입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모든 설명이 끝나지 않습니다. 악은 단순히 인간의 도덕적 시험을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악은 창조 과정 자체에 내재된 필연적 측면입니다. 무한한 아인 소프 (Ein Sof)에서 유한한 창조 세계가 생겨나려면, 신성은 스스로를 제한하고 감추어야 합니다. 이 자기 제한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분리와 불균형이 발생하며, 이것이 악의 근원이 됩니다. 따라서 악은 창조의 불가피한 부산물입니다.
16세기 사페드의 위대한 카발라 사상가 모세 코르도베로는 이 문제를 철학적으로 정교하게 다루었습니다. 그는 신이 모든 실재이지만, 모든 실재가 곧 신은 아니라는 유명한 공식을 남겼습니다. 신성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본질이지만, 창조 세계는 신성을 완전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왜곡하고 가립니다. 클리포트는 바로 이 가림과 왜곡의 극단적 형태입니다.
하시디즘의 창시자 바알 솀 토브 (Baal Shem Tov, 1700경-1760)는 이 역설을 더욱 대담하게 해석했습니다. 그는 모든 것에는 신성한 불꽃이 깃들어 있으며, 심지어 가장 낮은 것, 가장 악한 것조차 예외가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바알 솀 토브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있다면, 그 담배 안에도 신성한 불꽃이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그 담배를 거룩한 의도를 가지고 피운다면, 그 불꽃을 해방시켜 신에게로 돌려보낼 수 있습니다." 이는 세속적인 것과 신성한 것 사이의 절대적 경계를 무너뜨리는 혁명적 가르침입니다.
현대의 카발라 해석자들은 클리포트를 칼 융의 그림자 개념과 연결합니다. 융은 인간의 정신이 의식에서 배제하고 억압한 모든 것이 무의식의 그림자로 축적되며, 이 그림자를 통합하지 않으면 온전한 자기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클리포트 역시 신성이 스스로 감춘 어두운 면입니다. 이 어두운 면을 부정하고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변화시키는 것이 티쿤의 길입니다.
조하르는 의인들의 신비적 과제가 이 숨겨진 신성한 일체성을 드러내고 절대적 선을 보여주며, 쓴맛을 단맛으로, 어둠을 빛으로 전환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어둠을 단순히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 안에 갇힌 빛을 구출하여 본래의 빛나는 상태로 회복시키는 작업입니다. 하시디즘은 이를 더욱 급진적으로 해석하여, 사랑에서 우러난 참회는 죄를 거꾸로 미덕으로 바꿀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어둠 자체가 빛의 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역설의 신학은 악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악은 신과 무관한 독립적 세력도 아니고, 신의 본질에 포함된 요소도 아닙니다. 악은 신성이 자기 제한을 통해 창조를 가능케 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난 그림자입니다. 하지만 이 그림자조차 완전히 신성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가장 어두운 클리포트의 껍질 안에도 신성한 불꽃이 갇혀 있으며, 그 불꽃을 해방시키는 것이 인간의 영적 소명입니다.
카발라는 우리에게 악과 어둠을 대하는 새로운 태도를 가르칩니다. 악을 단순히 증오하고 파괴해야 할 대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갇힌 신성을 구출해야 할 대상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조하르의 저자는 클리포트의 어두운 세계에 매혹되었지만, 그것은 호기심이나 탐닉이 아니라 구원의 열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어둠의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가 그곳에 갇힌 빛을 찾아내는 것, 이것이 카발라가 제시하는 악에 대한 궁극적 승리의 길입니다.
결국 어둠과 빛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빛만 있다면 아무것도 구별할 수 없고, 어둠만 있다면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클리포트의 껍질이 없다면 신성한 과육도 보호받지 못합니다. 창조는 빛과 어둠의 긴장 속에서 이루어지며, 티쿤은 이 둘을 조화로운 균형으로 회복시키는 작업입니다. 어둠도 빛의 일부라는 이 역설적 진리는, 우리 삶의 고통과 시련조차 신성한 목적의 일부로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선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