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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장: 사페드의 예언자: 이삭 루리아

by DrLeeHC

제3-8장: 사페드의 예언자: 이삭 루리아



3-8.1. 추방의 도시 사페드와 16세기 신비주의



1492년 3월 31일,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에서 한 칙령이 선포되었습니다. 가톨릭 공동 국왕 페르디난도 2세와 이사벨라 1세는 스페인 땅에 사는 모든 유대인에게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7월 말까지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레콘키스타를 통해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지 석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이 칙령은 단순한 추방령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천 년 넘게 이베리아 반도에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세파르디 (Sephardim) 유대인 공동체를 뿌리째 흔드는 재앙이었습니다.


당시 스페인에는 최소 20만 명에서 25만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금융업, 무역, 의학, 철학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며 이베리아 사회의 중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특히 세파르디 유대인들은 당대 세계 어디에 있던 유대인들보다 부유했으며, 학문적으로도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종교재판소의 위협 앞에서 이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졌습니다. 기한은 촉박했습니다. 가족과 함께 떠날지, 조상의 믿음을 버리고 개종할지 선택할 시간은 불과 네 달이었습니다. 칙령에는 냉혹한 경고가 담겨 있었습니다. 기한 이후에 남아있거나 되돌아오는 유대인은 법적 절차 없이 즉결 처형되며, 모든 재산은 국고에 귀속된다고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추방은 겉으로는 재산권을 보호하는 듯 보였으나 실상은 약탈이었습니다. 칙령은 유대인들이 동산과 부동산을 자유롭게 처분하고 국외로 반출할 권리를 인정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문장에서 금과 은, 화폐의 반출을 금지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집과 포도원과 사업체를 헐값에 팔아야 했습니다. 어떤 이는 집 한 채를 당나귀 한 마리 값에 넘겼고, 어떤 이는 포도원을 천 한 필과 바꾸었습니다. 금과 은을 가져갈 수 없었기에 많은 이들이 보석으로 바꾸어 몸에 지니고 떠났습니다. 이 보석들은 후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그들이 다시 일어서는 밑천이 되었습니다.


약 10만 명의 유대인이 국경을 넘어 포르투갈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불과 4년 후인 1496년에 스페인과 같은 추방령을 내렸습니다. 또 다른 무리는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북아프리카로, 이탈리아로, 그리스로 흩어졌습니다. 이주 과정은 참혹했습니다. 배가 난파하거나 해적에게 약탈당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어떤 선장들은 유대인 승객들을 태운 채 공해상에서 배를 버렸고, 어떤 이들은 노예로 팔아넘겼습니다. 약 2만 명이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고, 수많은 이들이 질병과 굶주림으로 길 위에서 죽어갔습니다.


그러나 이 비극적인 흐름 속에서 한 인물이 역사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 바예지드 2세 (Bayezid II, 재위 1481-1512)는 스페인의 결정을 조롱하며 말했습니다. "페르디난도를 현명한 왕이라고 부른다던데, 어찌 현명한 자가 자기 보물을 내던지는가?" 그는 제국 전역에 칙령을 내려 추방당한 유대인들을 환영했습니다. 이스탄불, 살로니카, 이즈미르와 같은 도시들이 세파르디 유대인들에게 문을 열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단순히 난민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술탄은 유대인들이 가져온 지식과 기술이 제국을 풍요롭게 만들 것임을 알았습니다. 실제로 스페인에서 온 유대인들은 화약 제조, 인쇄술, 의학, 무역 분야에서 오스만 제국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도 오스만 제국의 일부였습니다. 1516년 술레이만 대제 (Suleiman the Magnificent, 재위 1520-1566)가 맘루크 왕조를 무너뜨리고 이 땅을 정복한 뒤, 유대인들의 정착은 더욱 활발해졌습니다.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한 것도 바로 이 술레이만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성벽은 이때 세워진 것입니다. 술레이만이라는 이름이 솔로몬의 아랍어 발음이라는 사실은 우연처럼 보이지만, 많은 유대인들에게 이것은 하늘의 뜻으로 여겨졌습니다. 솔로몬 왕이 성전을 지었듯이, 솔로몬이라는 이름을 가진 술탄이 거룩한 도시를 다시 세웠다는 것입니다.


이 시기에 수많은 유대인들이 성지로 돌아왔습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한 도시가 영적 구심점으로 떠올랐습니다. 갈릴리 산악 지대의 고지에 자리한 사페드 (Safed, 히브리어로는 Tzfat)였습니다. 해발 900미터가 넘는 높이에 위치한 이 도시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도시였습니다. 맑은 공기와 깊은 침묵이 감도는 이곳은 명상과 사색에 이상적인 환경이었습니다. 밤이 되면 중동에서 가장 밝은 별들이 하늘을 수놓았고, 서쪽으로는 헤르몬 산의 눈 덮인 정상이, 남쪽으로는 갈릴리 호수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사페드는 이미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였습니다. 탈무드에는 제2성전 시대에 사페드가 신월을 알리는 봉화대 가운데 하나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두 증인이 초승달을 목격했다고 증언하면 그곳에서 불을 피웠고, 사페드를 포함한 주변 지역들이 차례로 봉화를 올려 새 달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이를 통해 전국의 유대인들이 같은 날 명절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 전통은 사페드가 멀리서도 보이는 높은 곳에 위치했음을 증명합니다. 십자군 시대에는 거대한 요새가 세워져 아코 (Acre) 항구에서 다마스쿠스로 이어지는 주요 교역로를 지켰습니다. 1266년 맘루크 왕조는 사페드를 팔레스타인 전체에서 둘만 있는 지역 수도 가운데 하나로 지정할 만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사페드가 진정으로 빛을 발한 것은 16세기였습니다.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학자들과 랍비들이 이곳에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작은 산간 도시는 유대 정신문화의 중심지로 변모했습니다. 1525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사페드에는 633개의 무슬림 가구와 232개의 유대인 가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30년 뒤인 1553년에는 유대인 가구가 716개로 급증했습니다. 1584년에 이르자 사페드에는 32개의 회당이 오스만 당국에 등록되어 있었습니다. 한 세기도 안 되는 기간에 사페드의 유대인 인구는 300가구에서 1만 명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이는 당시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가장 큰 유대인 공동체였습니다.


이 급격한 성장에는 경제적 요인도 작용했습니다. 사페드는 양모와 직물 생산의 중심지로 발전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염색업, 방직업에 종사하며 생계를 꾸렸고, 이들이 생산한 직물은 지중해 전역으로 수출되었습니다. 경제적 안정은 학문 연구를 위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부유한 상인들이 학자들을 후원했고, 예시바 (yeshiva, 유대교 학당)들이 속속 문을 열었습니다. 예를 들어 요세프 카로 (Joseph Caro, 1488-1575)의 예시바에는 무려 200명의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페드를 특별하게 만든 것은 경제력만이 아니었습니다. 추방이라는 집단적 트라우마가 유대인들의 영혼을 뒤흔들었고, 많은 이들이 그 고통의 의미를 찾고자 했습니다. 왜 이런 재앙이 일어났는가? 신은 어디에 계셨는가? 이 고난이 끝날 날은 언제인가? 이러한 물음 앞에서 전통적인 랍비 학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더 깊은 차원의 답을, 우주와 역사의 은밀한 구조를 이해하고 싶어 했습니다. 이 갈망이 카발라를 학문의 변두리에서 중심부로 끌어올렸습니다.


16세기 사페드에는 세 갈래의 지적 흐름이 함께 흘렀습니다. 첫째는 할라카 (Halakha), 곧 유대교 율법 연구였습니다. 요세프 카로는 이곳에서 유대교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율법서인 『슐한 아루크, Shulchan Aruch, 차려진 식탁』를 저술했습니다. 이 책은 오늘날까지도 정통 유대교의 실천 지침서로 쓰입니다. 둘째는 탈무드 연구였습니다. 수많은 학자들이 복잡한 법적 논쟁을 분석하고 주석을 달았습니다. 셋째이자 가장 독특한 흐름은 카발라, 곧 신비주의 연구였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세 흐름은 서로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요세프 카로는 율법학자였지만 동시에 열렬한 신비주의자였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사페드의 한 동굴에서 천사와 함께 『슐한 아루크』를 저술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영적 일기인 『마기드 메샤림, Maggid Mesharim, 정직한 전령』에서 마기드 (maggid), 곧 천상의 멘토가 매일 밤 찾아와 토라의 비밀을 계시해주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율법과 신비주의가 하나의 영적 삶 안에서 조화를 이룬 것입니다.


사페드의 카발라 학자들은 단순히 서재에 틀어박혀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살아있는 영적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금요일 저녁이 되면 하얀 옷을 입은 카발라 학자들이 도시 밖 들판으로 나가 안식일 여왕을 맞이했습니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며 걸었습니다. "레카 도디 리크라트 칼라, 페네이 샤바트 네카벨라" (오라 나의 친구여, 신부를 맞으러 가자, 안식일의 얼굴을 환영하자). 이 찬송은 사페드의 랍비 슐로모 알카베츠 (Shlomo Halevi Alkabetz, 1505-1584)가 지은 것으로, 오늘날 전 세계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맞이하며 부르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안식일을 맞이하는 카발라트 샤바트 (Kabbalat Shabbat) 의식 자체가 16세기 사페드에서 창조된 것입니다.


이 시기 사페드에서는 메시아적 기대감이 고조되어 있었습니다. 추방이라는 극심한 고난은 많은 이들에게 구속의 날이 가까웠다는 신호로 보였습니다. 랍비 야코브 베이라브 (Jacob Berav, 1474-1546)는 산헤드린 (Sanhedrin), 곧 유대 대법정을 재건하려는 대담한 시도를 했습니다. 산헤드린을 재건하려면 특별한 형태의 랍비 서품인 세미카 (semicha)가 필요했는데, 이것은 천 년 넘게 단절되어 있었습니다. 베이라브는 1538년 사페드에서 이 고대 서품을 부활시키려 했습니다. 그는 요세프 카로를 비롯한 네 명의 저명한 랍비에게 세미카를 수여했습니다. 이 움직임은 유대 자치의 회복을 향한 첫걸음이었고, 많은 이들은 이를 메시아 시대가 임박했다는 징조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예루살렘의 랍비 레비 이븐 하비브 (Levi ibn Chaviv)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이븐 하비브는 산헤드린 재건을 위한 절차가 제대로 따라지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신학적 논쟁이자 동시에 권위를 둘러싼 갈등이었습니다. 결국 베이라브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지만, 이 사건은 사페드가 단순한 학문의 중심지가 아니라 유대 민족 전체의 운명을 좌우할 영적 행동의 무대였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사페드 카발라의 두 거인이 등장했습니다. 모세 코르도베로와 이삭 루리아였습니다. 이 두 인물은 성격도 접근 방식도 달랐지만, 둘 다 카발라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습니다.


모세 코르도베로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스페인 코르도바 출신 가문이었습니다. 그의 가족도 1492년 추방의 물결 속에서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코르도베로는 젊은 시절 사페드로 와서 요세프 카로 밑에서 할라카를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스무 살이 되었을 때 그는 카발라에 매료되었고, 이후 평생을 이 학문에 바쳤습니다. 1550년경 그는 사페드에 카발라 아카데미를 세웠고, 약 20년간 이곳을 이끌었습니다.


코르도베로의 가장 큰 업적은 카발라를 체계화한 것이었습니다. 그 이전까지 카발라는 산발적인 가르침들과 난해한 상징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조하르, Zohar』는 신화적 이미지와 우화로 가득했고,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구절들도 많았습니다. 코르도베로는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일관된 철학 체계로 통합하려 했습니다. 그는 세피로트 (Sefirot) 이론을 정교하게 다듬었고, 각 세피라가 어떻게 서로 연결되며 작동하는지 상세히 설명했습니다. 그의 대표작 『파르데스 리모님, Pardes Rimonim』 (석류 과수원)은 카발라 사상을 철학적으로 재구성한 기념비적 저작이었습니다.


코르도베로는 또한 아인 소프 (Ein Sof, 무한자)와 세피로트의 관계를 깊이 탐구했습니다. 그는 "신은 모든 실재이지만, 모든 실재가 신은 아니다"라는 유명한 공식을 남겼습니다. 이 문장은 범신론과 유신론 사이의 긴장을 정확히 포착합니다. 신이 모든 것에 내재하면서도 동시에 초월한다는 역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코르도베로는 이 문제를 철학적 정밀함으로 파고들었습니다. 그의 사상은 후대에 스피노자와 말브랑슈보다 한 세기 앞서 있었습니다.


코르도베로는 토마스 아퀴나스나 보나벤투라에 비견될 만큼 다작의 저술가였습니다. 그는 방대한 『조하르』 주석을 남겼고, 수많은 카발라 논문을 썼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문자로 옮기는 재능을 지녔습니다. 그의 글은 명료하고 논리적이었으며, 복잡한 신비적 개념들을 철학적 언어로 번역하는 능력이 탁월했습니다. 코르도베로는 카발라를 신화의 세계에서 이성의 세계로 끌어올리려 했습니다.


1570년 여름, 코르도베로는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사페드 전체가 애도하는 가운데 치러졌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한 젊은 학자가 사페드에 도착했습니다. 이삭 루리아였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루리아는 장례 행렬에 합류했고, 오직 그만이 코르도베로의 관을 따르는 불기둥을 보았다고 합니다. 『조하르』에 따르면 이러한 영적 계시는 고인의 뒤를 이어 영적 지도력을 물려받을 자에게 나타나는 표시였습니다. 그러나 루리아는 즉시 이 역할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다른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삭 루리아는 코르도베로와는 전혀 다른 유형의 인물이었습니다. 루리아는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이집트 카이로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부유한 숙부 밑에서 자라며 탈무드를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는 사람들을 피해 나일강의 한 섬으로 들어가 홀로 『조하르』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승은 그가 그곳에서 예언자 엘리야를 만났고, 엘리야가 그에게 사페드로 가서 하임 비탈이라는 제자를 찾으라고 지시했다고 전합니다.


루리아는 1570년 사페드에 도착했을 때 이미 36세였습니다. 그는 사페드에서 단 2년밖에 살지 않았습니다. 1572년, 38세의 나이로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 짧은 기간 동안 그는 카발라의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놓았습니다. 코르도베로가 카발라를 철학 체계로 만들었다면, 루리아는 카발라를 우주적 드라마로 변모시켰습니다.


루리아의 방식은 코르도베로와 정반대였습니다. 코르도베로는 모든 것을 글로 남겼지만, 루리아는 거의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코르도베로는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설명했지만, 루리아는 신화적 이미지와 상징으로 가르쳤습니다. 코르도베로는 정적인 구조를 제시했지만, 루리아는 역동적인 과정을 보여주었습니다. 루리아에게 카발라는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는 사페드의 들판과 무덤을 걸으며 제자들에게 영혼들의 비밀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각 장소에 어떤 영혼들이 머물고 있는지,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지 설명했습니다.


루리아의 제자들은 그를 아리 (Ari)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거룩한 사자라는 뜻의 아리 하카도쉬 (Ari HaKadosh)를 줄인 말이었습니다. 또한 아쉬케나지 이삭 랍비 (Ashkenazi Yitzchak Rabbi)의 약자이기도 했습니다. 사자는 힘과 왕권의 상징이었고, 루리아는 실제로 왕과 같은 권위를 지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도적 권위가 아니라 영적 카리스마였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눈빛만 보아도 자신의 영혼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느꼈다고 전합니다.


루리아는 자신의 가르침을 소수의 제자들에게만 전했습니다. 그 가운데 하임 비탈이 수석 제자였습니다. 비탈은 스승이 세상을 떠난 뒤 평생을 바쳐 루리아의 가르침을 기록했습니다. 그가 쓴 『에츠 하임, Etz Hayyim, 생명나무』과 『프리 에츠 하임, Pri Etz Hayyim, 생명나무의 열매』 등은 루리아 카발라의 핵심 문헌이 되었습니다. 루리아 자신은 거의 글을 남기지 않았기에, 비탈의 기록이 없었다면 루리아의 사상은 사라졌을 것입니다.


16세기 사페드는 단순한 지리적 장소 이상이었습니다. 그곳은 추방의 고통이 신비적 통찰로 변화하는 연금술의 도가니였습니다. 스페인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갈릴리의 산 위에 모여 우주의 비밀을 탐구했습니다. 그들은 개인의 상실을 우주적 드라마로 확장했고, 자신들의 고난 속에서 신의 고난을 보았습니다. 이 통찰은 단순히 신학적 이론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삶의 의미를 되찾는 실존적 투쟁이었습니다.


사페드의 황금기는 짧았습니다. 17세기 들어 도시는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 전염병, 지진이 연이어 도시를 황폐화시켰습니다. 학자들은 다른 곳으로 흩어졌고, 사페드는 다시 고요한 산간 마을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짧은 반세기 동안 사페드에서 꽃핀 카발라는 유대 영성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특히 루리아 카발라는 이후 모든 카발라 전통을 지배했고, 오늘날까지도 카발라를 공부한다는 것은 곧 루리아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페드는 오늘날에도 카발라의 도시로 불립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고대 회당들이 서 있고, 언덕 아래 묘지에는 코르도베로와 루리아를 비롯한 위대한 학자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매년 수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을 찾아와 그들의 무덤 앞에서 기도합니다. 사페드의 공기는 여전히 맑고, 밤하늘의 별은 여전히 밝습니다. 추방의 아픔 속에서 피어난 지혜가 이곳에서 숨 쉬고 있습니다.












3-8.2. 아리잘의 생애와 하임 비탈의 기록



이삭 루리아는 1534년 예루살렘에서 태어났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아리 (Ari) 또는 아리잘 (Arizal)이라 불렀습니다. 아리는 히브리어로 사자를 뜻합니다. 원래는 하아리 (Ha-Ari), 즉 신성한 랍비 이츠하크라는 뜻의 히브리어 약자였습니다. 아버지는 독일에서 온 유대인이었고, 어머니는 스페인과 북아프리카를 거쳐 온 유대인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죽자 어린 루리아는 어머니를 따라 이집트 카이로로 건너갔습니다. 외삼촌 모르데카이 프란세스가 부유한 세금 징수업자였기에, 루리아는 돈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외삼촌은 루리아를 이집트 최고의 랍비들에게 보냈습니다. 당시 이집트 수석 랍비였던 다비드 이븐 아비 지므라 (David ibn Abi Zimra) 밑에서 탈무드를 배웠습니다. 루리아는 신동이었습니다. 열다섯 살에 사촌과 결혼했고, 처가의 재산 덕분에 평생 학문에만 매달릴 수 있었습니다.


스물두 살 무렵, 루리아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최근 처음 인쇄된 『조하르,Zohar』를 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루리아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는 세상과의 모든 관계를 끊었습니다. 나일강 한가운데 있는 작은 섬으로 들어갔습니다. 장인이 소유한 섬이었습니다. 그곳에서 7년을 홀로 지냈습니다.


루리아는 일주일에 한 번, 안식일에만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내와 나누는 몇 마디 말을 빼고는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나마도 반드시 히브리어로만 말했습니다. 그 7년은 오직 『조하르』를 읽고 명상하고 금식하는 데 바쳐졌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예언자 엘리야가 루리아에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성지로 돌아가라는 계시였습니다. 1569년, 루리아는 가족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그곳 사람들은 루리아의 새로운 카발라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루리아는 북쪽 갈릴리의 산악 도시 사페드 (Safed)로 향했습니다.


당시 사페드는 특별한 곳이었습니다. 1492년 스페인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이 이곳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곧 갈릴리에서 나타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사페드에는 카발라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의 지도자가 모세 코르도베로였습니다.


루리아가 사페드에 도착한 것은 1570년 초였습니다. 그는 코르도베로에게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해 6월 27일, 코르도베로가 갑자기 죽었습니다. 사페드의 카발라 공동체는 새 스승을 찾았습니다. 루리아가 그 자리를 채웠습니다.


루리아는 두 종류의 제자를 받았습니다. 보통 제자들에게는 기본적인 카발라를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선택받은 제자들에게만 진짜 비밀을 전했습니다. 그들만이 루리아의 새로운 카발라와 기도의 비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루리아는 환상을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영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무도, 돌도, 모든 것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사페드 근처를 걸을 때면, 루리아는 갑자기 멈춰 섰습니다. "여기 옛날 의로운 이의 무덤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표지도 없는 무덤을 그는 알아보았습니다. 그 영혼들과 대화한다고 했습니다.


루리아의 수석 제자 하임 비탈은 스승의 작은 습관까지 모두 적어두었습니다. 그 기록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습니다. 비탈에 따르면 루리아는 사람의 얼굴만 봐도 그가 지은 죄를 알 수 있었습니다. 나무가 하는 말, 새가 지저귀는 소리, 천사들의 언어를 이해했다고 합니다.


안식일이 되면 루리아는 특별한 옷을 입었습니다. 온몸을 흰옷으로 감쌌습니다. 네 겹짜리 옷을 걸쳤는데, 이는 신의 이름 네 글자를 상징했습니다. 루리아의 제자들은 점점 늘어났습니다. 그들은 별도의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매주 금요일 모여서 서로에게 죄를 고백했습니다. 루리아는 기도의 모든 단어에 깊은 뜻을 부여했습니다. 안식일과 명절은 영적 경험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루리아가 사페드에서 보낸 시간은 놀랍도록 짧았습니다. 1572년 여름, 사페드에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루리아는 8월 5일에 죽었습니다. 서른여덟 살이었습니다. 사페드의 고대 묘지에 묻혔습니다.


루리아는 평생 거의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을 위한 아람어 찬송시 세 편이 있습니다. 『조하르』의 한 부분에 대한 짧은 주석이 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우리가 루리아의 가르침을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제자들이 기록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스승의 말을 적었습니다. 루리아의 대화는 체계가 없었습니다. 이야기가 이리저리 뛰었습니다. 다행히 여러 제자가 각자 기록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기록에만 의존하지 않아도 됩니다.


가장 중요한 제자가 하임 비탈이었습니다. 비탈은 1542년 10월 23일 사페드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천재로 소문났습니다. 유명한 랍비 요셉 카로 (Joseph Karo)가 비탈의 스승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 아이를 특별히 잘 가르치시오. 이 아이는 당신을 이을 사람이오." 1557년, 열다섯 살 비탈이 처음으로 이삭 루리아를 만났습니다.


루리아가 사페드에 왔을 때, 모세 코르도베로가 그곳 카발라 공동체의 중심이었습니다. 코르도베로의 제자들은 느슨하게 연결된 모임이었습니다. 중요한 제자로는 엘리야 데 비다스, 아브라함 갈란테, 모세 갈란테, 하임 비탈 등이 있었습니다. 루리아도 코르도베로를 스승으로 여겼습니다. 이집트 역사가 요셉 삼바리 (Joseph Sambari, 1640-1703)는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코르도베로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루리아의 스승이었다."


루리아는 1570년 초에 사페드에 도착했고, 코르도베로는 그해 6월 27일에 죽었습니다. 가장 뛰어난 스승을 잃은 공동체는 새 지도자를 원했습니다. 루리아가 그 빈자리를 채웠습니다.


하임 비탈은 루리아의 제자 38명의 이름을 기록했습니다. 비탈에 따르면 제자들은 네 그룹으로 나뉘었습니다.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그룹은 11명이었습니다. 하임 비탈, 요나단 사기스, 요셉 아르진, 이삭 코헨, 게달리야 하레비, 사무엘 우세다, 유다 미샨, 아브라함 가브리엘, 샤바타이 메나세, 요셉 이븐 타불, 엘리야 팔코가 그들이었습니다.


1년 안에 하임 비탈이 선두 제자가 되었습니다. 1572년 루리아가 죽었을 때, 비탈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루리아는 가르침을 글로 남기지 않았기에, 비탈은 스승에게 배운 모든 것을 적기 시작했습니다.


비탈의 작업은 엄청났습니다. 그는 루리아 사상을 여러 버전으로 기록했습니다. 가장 방대한 것은 다섯 권짜리였습니다. 이 책의 이름은 『에츠 하임, Etz Hayyim, 생명의 나무』이었습니다. 비탈은 이 작업을 여덟 부분으로 나누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를 여덟 문 (Shemonah She'arim)이라 불렀습니다.


『에츠 하임』은 1573년에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비탈은 루리아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이 책은 신의 질서와 만물의 존재를 다룹니다. 인간이 실재를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탐구합니다. 책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알라, 창조가 시작되기 전에는 오직 가장 높고 충만한 빛만이 있었다."


『에츠 하임』은 루리아 카발라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루리아 이전에도 카발라 사상가들은 많았습니다. 그들은 실재가 근원에서 우리 세계로 펼쳐지는 과정을 연구했습니다. 하임 비탈에 따르면 루리아는 이 실재를 더 깊이 이해하는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비탈은 다른 중요한 책들도 썼습니다. 『프리 에츠 하임』(Pri Etz Hayyim)은 생명의 나무의 열매라는 뜻입니다. 『세페르 하카바노트, Sefer HaKavanot』는 기도의 신비한 명상법을 다룹니다. 『세페르 하길굴림, Sefer HaGilgulim』은 영혼의 윤회를 설명합니다.


비탈의 삶에는 극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비탈은 자신의 원고가 세상에 퍼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부자들이 큰돈을 주겠다며 원고를 복사할 허락을 구했습니다. 비탈은 모두 거절했습니다.


비탈이 심하게 아팠을 때 일이 벌어졌습니다. 비탈의 동생 모세가 돈이 급히 필요했습니다. 모세는 형의 원고를 부자에게 팔았습니다. 비탈이 병으로 누워 있는 동안, 그의 가장 가까운 제자 요슈아 벤 눈 (Joshua Ben-Nun)이 움직였습니다. 요슈아는 비탈의 동생 모세에게 금화 50닢을 주었습니다. 모세는 형의 원고가 담긴 상자를 요슈아에게 빌려주었습니다.


요슈아는 즉시 100명의 필사가를 고용했습니다. 각자에게 6페이지씩 맡겼습니다. 단 3일 만에 600페이지를 복사했습니다. 나중에 비탈이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비탈은 화를 냈다고 합니다. "그건 내 글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원고들은 빠르게 퍼졌습니다.


처음 인쇄된 판본은 8권이었습니다. 여덟 문이라는 뜻의 『쉐모나 쉐아림, Shemonah She'arim』입니다. 세파르디 카발라 사상가들 중 일부는 지금도 이 판본을 씁니다. 나중에 나온 가장 유명한 판본은 『에츠 하임, Etz Hayyim』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이 판본은 내용을 더 체계적으로 배열했습니다.


비탈의 아들 사무엘 (Samuel Vital)이 『쉐모나 쉐아림』을 편집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비탈은 죽으면서 이런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내 원고를 관 속에 넣어 함께 묻어라." 그의 유언은 지켜졌습니다. 그런데 아들과 제자들은 그 가르침을 세상에 내놓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허락을 구하는 계시를 간구했습니다.


마침내 꿈에서 하임 비탈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원고를 꺼내 출판하라고 허락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권의 책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비탈의 책들은 100년 넘게 필사본으로만 돌았습니다. 카발라를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조용히 전해졌습니다. 처음 인쇄된 것은 1782년이었습니다. 이 방대한 책들은 루리아 카발라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루리아 카발라는 곧 세파르디와 아슈케나지 유대교 모두에서 주류가 되었습니다.


비탈은 1577년에 이집트로 갔습니다. 하지만 곧 오스만 시리아로 돌아왔습니다. 사페드 근처 아인 제이팀 (Ein Zeitim) 마을에 정착했습니다. 나중에는 예루살렘으로 옮겼습니다. 비탈은 1620년 4월 23일 다마스쿠스에서 죽었습니다.


루리아와 비탈의 관계는 묘합니다. 루리아는 거의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혁명적 사상이 오늘날까지 남은 것은 비탈이 끈질기게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비탈은 자기 원고가 퍼지는 것을 막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간절함 때문에 그 가르침은 전 유대 세계로 퍼졌습니다. 단 2년의 만남이 이후 수백 년의 전통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루리아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코르도베로보다 훨씬 더 잘 압니다. 루리아가 죽은 뒤 얼마 안 되어 전설들이 그를 둘러쌌습니다. 그래도 비탈이 남긴 기록 덕분에 진짜 루리아의 모습을 만날 수 있습니다.


루리아는 끊임없이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에게 신비의 세계는 일상이었습니다. 제자들이 글로 옮긴 그 복잡한 세계를, 루리아는 사페드 거리를 걷듯 자연스럽게 거닐었습니다. 당대 사람들은 루리아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그가 예언자 시대에 살았다면 예언자가 되었을 것이다."


루리아 카발라는 『조하르』의 가르침을 완전히 새롭게 해석했습니다. 신과 세계, 악과 구원에 대한 전혀 다른 이해를 제시했습니다. 침춤 (Tzimtzum), 셰비라트 하켈림 (Shevirat HaKelim), 티쿤 (Tikkun)이라는 세 가지 우주적 사건이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루리아가 남긴 것은 단순한 이론이 아닙니다. 그것은 파괴된 세계를 회복하자는 영적 부르심입니다. 루리아는 모든 사람이 중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흩어진 신성의 불꽃을 구원하는 일에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메시아는 이 과정의 끝에 옵니다. 인간의 모든 선한 행위가 우주를 고치는 일에 기여합니다.


사페드에서의 그 짧은 2년이 카발라 역사 전체를 바꾸었습니다. 환상을 보는 루리아와 기록하는 비탈의 만남이 없었다면 이 혁명적 사상은 사라졌을 것입니다. 비탈의 펜이 스승의 목소리를 종이 위에 붙잡아 두었습니다. 그 목소리는 오늘날까지 카발라를 배우는 모든 이에게 들립니다.











3-8.3. 정적 구조에서 역동적 서사로의 전환



모세 코르도베로가 세상을 떠난 지 불과 몇 개월 뒤, 사페드의 카발라 공동체는 전혀 다른 세계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루리아가 가르치기 시작한 카발라는 코르도베로의 체계와는 근본부터 달랐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같은 『조하르』를 읽고, 같은 세피로트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루리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가르침은 완전히 새로운 언어였습니다. 정적인 지도가 살아 숨 쉬는 드라마로 변모했고, 추상적인 개념이 인격을 지닌 존재로 깨어났습니다.


코르도베로의 세계: 완벽한 건축


코르도베로는 카발라 역사에서 사상을 체계로 정리하는 일에서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수세기 동안 흩어져 있던 카발라 사상들을 하나의 거대하고 정교한 철학 체계로 엮어냈습니다. 그의 대표작 『파르데스 리모님, Pardes Rimonim』은 카발라를 이성의 언어로 번역한 작품이었습니다. 세피로트는 신성의 속성이 선형적으로 펼쳐지는 과정이었고, 네 세계는 위에서 아래로 질서 정연하게 내려오는 위계였습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고, 모든 관계가 논리적으로 설명되었습니다.


코르도베로는 신이 모든 실재라고 가르쳤습니다. 그의 유명한 공식은 이렇습니다. 신은 모든 것이지만, 모든 것이 신은 아닙니다. 이 말은 신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담아내려는 철학적 시도였습니다. 세피로트는 아인 소프의 빛이 점진적으로 약해지면서 단계별로 드러나는 모습이었습니다. 각 세피라는 고유한 위치와 역할을 지니며, 위로부터 아래로 흐르는 빛의 통로 역할을 했습니다. 이 구조는 안정적이고 조화로웠으며, 영원불변한 우주의 설계도처럼 보였습니다.


코르도베로의 카발라에서 인간의 역할은 명상과 관조였습니다. 우리는 이 완벽한 구조를 이해하고, 각 세피라의 의미를 명상하며, 우리 영혼이 위계의 사다리를 따라 올라가도록 노력해야 했습니다.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이유는 빛이 충분히 도달하지 못한 곳, 즉 신성한 흐름이 약해진 영역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이미 정해진 질서 안에서 움직였고, 우리는 그 질서를 깨닫고 따라야 했습니다.


루리아의 세계: 파국과 드라마


루리아가 펼쳐 보인 우주는 완벽한 건축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살아 움직이는 드라마였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야기였습니다. 루리아는 코르도베로가 설명하지 못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졌습니다. 무한한 신이 어떻게 유한한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는가? 선하고 완전한 신이 다스리는 세상에 왜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가? 유대인은 왜 추방당하고 흩어졌는가?


이 물음들에 답하기 위해 루리아는 창조 자체를 전혀 다르게 이야기했습니다. 창조는 신의 빛이 펼쳐지는 과정이 아니라, 신이 자신을 숨기는 행위로 시작되었습니다. 침춤이라 불리는 이 신의 자기 수축은 역설적이었습니다. 무한한 존재가 자신을 줄여 빈 공간을 만들었고, 그 공간에서 비로소 무언가가 존재할 여지가 생겼습니다. 신이 자신을 감춤으로써 타자가 존재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침춤 이후 빈 공간으로 흘러든 빛은 너무나 강렬했습니다. 그 빛을 담으려던 그릇들은 견디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셰비라라 불리는 이 우주적 파국은 코르도베로의 조화로운 세계상에는 없던 개념이었습니다.


창조의 중심에 파괴가 자리 잡았고, 신성한 불꽃은 깨진 그릇의 파편 안에 갇혀 세상 곳곳에 흩어졌습니다. 악은 단순히 빛이 약해진 곳이 아니라, 이 파국의 흔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부서진 세계를 다시 세우는 작업이 바로 티쿤이었습니다. 루리아는 티쿤이 신만의 일이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인간이 계명을 지키고, 기도하고, 선한 행위를 할 때마다 흩어진 불꽃이 제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가 우주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완성된 구조를 관조하는 존재가 아니라, 파괴된 세계를 복원하는 능동적 참여자가 되었습니다.


파르추핌: 인격을 얻은 신성


루리아 카발라의 가장 혁명적이고 동시에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는 개념 중 하나가 바로 '파르추핌 (Partzufim, 복수형)'입니다. 이 개념은 신성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킵니다. 기존의 카발라 체계, 예를 들어 모세 코르도베로와 같은 이전 카발리스트들에게 세피로트(Sefirot)는 주로 신의 추상적인 속성들이나 무한한 빛이 흘러내리는 10단계의 등급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삭 루리아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세피로트들이 단순히 개별적인 속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인간처럼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로 결합하고 재구성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단순히 세피로트의 이름만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루리아는 여러 세피로트가 뭉쳐져 새로운 '얼굴' 또는 '인격체'를 형성한다고 보았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파르추핌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리크 안핀 (Arikh Anpin, 긴 얼굴 / 큰 얼굴):


가장 높은 파르추프로, 케테르 세피라를 확장한 것입니다. '오랜 인내의 존재'로 묘사되며, 신의 자비롭고 초월적인 의지를 상징합니다.


아바 (Abba, 아버지):


호크마 세피라를 인격화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원형적 지혜와 창조적 씨앗을 나타냅니다.


이마 (Imma, 어머니):


비나 세피라를 인격화한 것입니다. '어머니'의 이해와 양육, 형태 부여의 원리를 상징합니다. 아바의 추상적인 씨앗을 품어 구체적인 형태로 발현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제이르 안핀 (Ze'ir Anpin, 짧은 얼굴 / 작은 얼굴):


헤세드, 게부라, 티페레트, 네차흐, 호드, 예소드라는 여섯 개의 세피로트가 결합하여 형성된 파르추프입니다. '아들' 또는 '신랑'의 인격으로 묘사되며, 신성한 빛이 이 세상을 향해 구체적으로 발현되는 남성적 원리입니다.


누크바 (Nukvah, 여성):


말쿠트 세피라를 인격화한 것입니다. '딸' 또는 '신부'의 인격으로 묘사되며, 제이르 안핀의 빛을 받아들이고 물질 세계에서 현현시키는 여성적 원리입니다. 그녀는 셰키나와 동일시되기도 합니다.


이 파르추핌들은 더 이상 정적인 도표 위에 고정된 추상적인 구조가 아니었습니다. 루리아 카발라에서 이들은 살아있는 인격체들처럼 상호작용하고, 드라마를 펼칩니다. 그들은 때로는 서로 조화롭게 결합하고 (예: 아바와 이마의 결합, 제이르 안핀과 누크바의 결합), 때로는 멀어지거나 갈등하기도 합니다. 그들의 신성한 '결합 (Zivug)'에서 새로운 빛과 생명이 태어나고, 그들의 '분리 (Perud)'에서 어둠과 혼돈이 생겨났습니다. 즉, 우주는 이제 추상적인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라, 신성한 인격체들 사이의 복잡하고 역동적인 관계의 드라마가 된 것입니다. 신성 자체도 이미 완성된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고 발전하며, 때로는 상처받고 회복하는 미완성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파르추핌' 개념은 왜 그토록 강력하고 혁명적이었을까요?


첫째, 신을 우리 삶에 더 가깝고 공감 가능한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이전까지 신은 너무나 멀리 떨어진 철학적 개념이나 초월적인 절대자로만 느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파르추핌은 신성 안에 '아버지'와 '어머니', '남성'과 '여성'이라는 원형적인 인격들이 존재하며, 그들 사이에 '결합'과 '분리', '사랑'과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관계 경험과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모님과 자녀, 연인 관계를 통해 사랑하고 미워하고, 만나고 헤어지는 모든 경험이, 사실은 이 우주적 파르추핌 드라마의 반영임을 깨닫게 됩니다. 신학이 심리학이 되었고, 우주론이 인간학이 된 것입니다.


둘째, 인간의 행동에 신성한 의미와 책임감을 부여했습니다. 파르추핌의 드라마가 신성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루리아 카발라의 핵심입니다. 오히려 이 신성한 인격체들의 조화와 불화는 인간의 행동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습니다. 인간이 선하고 정의로운 행동을 하고(미츠바), 신의 뜻과 일치하는 삶을 살면, 파르추핌들이 조화롭게 결합하여 세상에 더 많은 빛과 은혜를 가져다줍니다. 반대로 인간이 죄를 짓고 이기심에 빠지면, 파르추핌들이 분리되고 갈등하여 세상에 어둠과 고통이 증가합니다. 우리의 '티쿤(복원)' 작업은 단순히 개인의 구원을 넘어, 신성한 인격체들을 재결합시키고 우주적 드라마를 완성시키는 지대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신성 자체도 '완성되지 않은' 존재라는 파격적인 관점을 제시했습니다. 코르도베로의 카발라가 '완전한 신'의 질서정연한 발현에 초점을 맞췄다면, 루리아 카발라는 '셰비라(파괴)'를 통해 신성 자체가 불완전해지고 상처를 입었으며, 이제는 인간의 노력을 통해 회복되어야 하는 존재로 묘사합니다. 파르추핌들 사이의 '결합'은 단순히 신의 본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은 신성이 자신을 치유하고 '복원'해나가는 역동적인 과정인 셈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신성 복원'이라는 엄청난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종교적 수행을 단순한 의무가 아닌, 우주적 의미를 가진 가장 고귀한 참여로 끌어올렸습니다.


따라서 파르추핌 개념은 신을 멀리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내면과 세상의 모든 관계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역동적인 인격들의 총합으로 이해하게 합니다. 우리의 삶의 드라마가 곧 신성한 드라마의 일부가 되고, 우리의 깨어짐과 회복의 여정이 곧 우주의 깨어짐과 회복의 여정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파르추핌이 루리아 카발라의 가장 강력하고 혁명적인 통찰인 이유입니다.


전환의 의미: 무엇이 달라졌는가


코르도베로에서 루리아로의 전환은 단순히 이론이 바뀐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카발라가 세계를 바라보는 근본 방식의 변화였습니다. 코르도베로의 세계가 공간이었다면, 루리아의 세계는 시간이었습니다. 코르도베로가 존재의 위계를 그렸다면, 루리아는 생성의 과정을 이야기했습니다. 코르도베로가 완성된 구조를 보여주었다면, 루리아는 아직 진행 중인 드라마를 펼쳐놓았습니다.


코르도베로의 카발라에서 세상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완성된 질서를 이해하고 따라야 했습니다. 하지만 루리아의 카발라에서 세상은 부서진 채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세상을 고쳐야 했고, 우리의 행위가 실제로 우주를 변화시켰습니다. 관조의 신비주의가 실천의 신비주의로 바뀌었습니다. 명상하는 자가 행동하는 자로 변모했습니다.


이 전환은 특히 16세기 후반 사페드 공동체의 상황과 깊이 공명했습니다.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고통에 의미를 찾고자 했습니다. 코르도베로의 조화로운 우주는 추방의 아픔을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루리아의 우주적 추방, 신성 자체의 갈라짐과 흩어짐은 유대인의 역사적 경험을 우주적 차원으로 끌어올렸습니다. 우리의 추방이 곧 신의 추방이었고, 우리의 귀환이 곧 우주의 회복이 되었습니다.


루리아는 또한 악의 기원을 전혀 다르게 설명했습니다. 코르도베로에게 악은 빛의 부재였고, 신성한 흐름이 약해진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루리아에게 악은 창조 과정 자체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셰비라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우리가 사는 세계도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악은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창조의 그림자였고, 그 그림자 안에도 신성한 불꽃이 숨어 있었습니다. 악을 단순히 피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시키고 회복시키는 것이 우리의 과제가 되었습니다.


구조에서 서사로


루리아 카발라가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카발라 전통과 가장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지점 중 하나는 바로 카발라를 정적인 '구조'에서 역동적인 '서사'로 전환시켰다는 점입니다. 이 변화는 유대 신비주의의 얼굴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으며, 이후 수많은 영적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삭 루리아 이전, 예를 들어 16세기의 위대한 카발리스트 모세 코르도베로의 체계에서 세피로트 (Sefirot)는 마치 정교하게 펼쳐진 지도와 같았습니다. 우리는 그 지도를 보며 신성의 여러 층위와 속성 (10개 세피로트)들이 어떻게 배열되어 있는지, 빛이 어떻게 흘러내려 각 지점에 도달하는지 (경로)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 지도는 아름답고 완벽했지만, 본질적으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는 명확한 논리와 질서가 있었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신성 안에는 시작과 끝, 갈등과 해결이라는 드라마가 부재했습니다.


그러나 루리아가 제시한 우주는 달랐습니다. 그의 카발라는 단순한 지도가 아니라, 강렬하고 극적인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명확한 플롯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시작 (The Beginning): 침춤 (Tzimtzum).


무한한 신이 스스로를 수축하는 충격적인 자기 비움의 행위. 이것은 모든 존재가 시작되는 기이하고 역설적인 서막이었습니다.


위기 (The Crisis): 셰비라트 하켈림 (Shevirat HaKelim).


신성한 빛을 담으려던 그릇들이 그 강렬함을 견디지 못하고 산산조각 나는 대파국. 이는 우주에 고통과 불완전함, 악이 들어오는 비극적인 사건이자 갈등의 핵심이었습니다.


해결 (The Resolution): 티쿤 (Tikkun).


깨어진 세상을 회복하고 흩어진 신성의 불꽃들을 다시 모아 본래의 자리로 돌려놓는, 현재 진행형의 영웅적인 복원 작업. 이것은 아직 끝나지 않은 미래이자, 모든 존재가 참여해야 할 공동의 목표였습니다.


이 루리아의 우주적 이야기에는 깊은 긴장과 갈등이 내재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미완의 미래가 있었습니다. 신성 자체가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었으며, 영원히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상처받고 회복하며 진화하는 존재로 묘사되었습니다.


서사는 '구조'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구조는 관계와 배열을 설명하지만, 서사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서사에는 주체 (actors)가 있고, 그 주체는 선택 (choices)을 하며, 그 선택은 결과 (consequences)를 낳습니다. 루리아의 우주에서 파르추핌 (Partzufim)은 더 이상 단순한 세피로트의 구조적 배열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살아있는 행위하는 주체였습니다. 아바와 이마가 결합하고, 제이르 안핀과 누크바가 얼굴을 마주하며 하나 되는 그들의 상호작용은 단순한 상태가 아니라 사건 (events)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들은 우주를 변화시켰습니다. 빛이 태어나고, 어둠이 생겨나고, 세상은 계속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습니다.


더욱 혁명적인 것은, 이 드라마에서 인간 또한 수동적인 관찰자가 아니라 능동적인 참여자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행위 하나하나가 이 거대한 우주적 이야기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선행을 하고, 계명을 지키며, 깨어진 세상을 치유하려 노력할 때, 우리는 신성의 복원 드라마에 직접 개입하여 파르추핌들의 결합을 돕고 흩어진 불꽃들을 해방시키는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존재에 이토록 거대한 우주적 의미를 부여한 것은 루리아 카발라가 가져온 가장 강력한 영적 동기 부여였습니다.


이러한 서사적 전환은 카발라를 추상적인 '철학'에서 생생한 '신화'로 옮겨 놓았습니다. 물론 루리아의 가르침은 여전히 깊은 철학적 통찰과 복잡한 개념적 구조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건조한 논리적 전개나 추상적 개념들의 나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환상적인 이미지와 감동적인 사건들로 가득 찬 하나의 생생한 신화였습니다.


이 신화는 듣는 이의 마음에 직접적으로 말을 걸었습니다. 코르도베로의 세피로트 체계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고도의 철학적 훈련과 개념적 사고가 필요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루리아의 이야기는 지식인의 머리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마음에도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침춤의 고독, 셰비라의 비극, 티쿤의 희망은 종교적 학식의 유무를 떠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근원적인 서사의 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카발라는 소수의 엘리트 신비가들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대중의 영혼에까지 깊이 침투할 수 있는 생명력 있는 전통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루리아는 우주를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의 설명이 아닌, '왜' 우리가 여기에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살아있는 우주


루리아 이후 카발라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곧 유대 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코르도베로의 체계를 거의 완전히 대체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루리아의 카발라가 더 논리적이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더 신화적이고 비합리적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루리아의 우주는 살아있었습니다. 그것은 숨 쉬고, 움직이고, 고통받고, 치유되는 세계였습니다.


루리아의 제자들은 스승의 모든 행동을 기록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기도했는지, 어떻게 걸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언제 침묵했는지까지 세세히 적어두었습니다. 왜냐하면 루리아의 모든 행위가 우주적 의미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코르도베로의 카발라에서는 이해가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루리아의 카발라에서는 행위가 중요했습니다. 가장 사소한 행동도 흩어진 불꽃을 회복시킬 수 있었고, 가장 평범한 순간도 티쿤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루리아가 단 3년간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향이 이토록 컸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였습니다. 그 세계에서 우리는 무력한 관찰자가 아니라 창조의 동반자였습니다. 그 세계에서 우리의 고통은 의미 없는 불행이 아니라 우주적 드라마의 일부였습니다. 그 세계에서 희망은 단순한 소망이 아니라 우리 손으로 실현할 수 있는 현실이었습니다.


정적 구조에서 역동적 서사로의 전환은 단순한 이론적 발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유대 신비주의가 세계와 맺는 관계 전체의 변화였습니다. 루리아 이후 카발라는 더 이상 소수 엘리트의 비밀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살아있는 지혜가 되었습니다. 코르도베로가 카발라를 체계화했다면, 루리아는 카발라를 삶으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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