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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장: 세 가지 움직임: 침춤, 파괴, 회복

by DrLeeHC

제3-9장: 세 가지 움직임: 침춤, 파괴, 회복



3-9.1. 침춤 (Tzimtzum): 신의 자기 수축과 공허의 탄생



우리는 흔히 창조를 생각할 때, 신이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이삭 루리아가 제시한 침춤 (Tzimtzum)의 개념은 이러한 상상을 완전히 뒤집습니다. 창조의 첫 번째 행위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이 자신을 움츠리고 물러서는 것이었습니다. 이 놀라운 역설이 루리아 카발라의 출발점입니다.


무한이 품은 역설적 질문


루리아는 매우 단순하지만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만약 신이 무한하다면, 즉 아인 소프 (Ein Sof)가 모든 것을 가득 채우고 있다면, 세상은 어디에 존재할 수 있을까요? 무한한 신성의 빛이 온 우주를 가득 메우고 있다면, 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존재할 공간이 어디에 있을까요? 물이 가득 찬 그릇에 더 이상 무엇을 담을 수 없듯이, 신의 충만함 속에서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이 질문은 결코 추상적인 철학 놀이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수수께끼를 건드립니다. 우리가 여기 있다는 것, 신과 구분되는 개별적 존재로 숨 쉬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전통적인 카발라는 신성이 단계적으로 흘러내려 세상이 만들어진다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루리아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보았습니다. 아무리 빛을 약하게 만들어도, 무한한 것은 여전히 무한합니다. 진정한 유한함이 생겨나려면, 근본적으로 다른 무언가가 먼저 일어나야 했습니다.


안으로 향한 첫걸음


루리아의 대답은 충격적입니다. 창조의 첫 번째 행위는 밖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물러서는 것이었습니다. 아인 소프는 자신의 빛을 거두어들였습니다. 무한한 신성이 스스로를 수축시켜, 자기 안에 텅 빈 공간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공간을 할랄 하파누이 (Halal HaPanuy)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텅 빈 공간, 신이 없는 곳,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신이 자신을 감춘 곳입니다.


이 수축, 이 물러섬, 이 자기 제한의 행위가 바로 침춤입니다. 히브리어로 침춤은 수축, 움츠림, 집중을 뜻합니다. 신은 자신의 무한함을 스스로 제한했습니다. 팽창이 아니라 수축이, 드러남이 아니라 숨음이 창조의 시작이었습니다. 게르솜 숄렘은 이것을 계시의 행위가 아니라 한계 설정의 행위라고 표현했습니다. 신은 자신을 드러내기 전에 먼저 자신을 감추었습니다.


이 개념이 얼마나 대담한지 상상해보십시오. 전통적으로 신은 충만함과 현존 그 자체였습니다. 하지만 루리아는 신의 첫 번째 행위가 부재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신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물러났습니다. 자신의 본질 깊숙한 곳으로 후퇴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숨을 깊이 들이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움츠리는 것입니다. 이 움츠림이 없었다면, 신 아닌 그 무엇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역설의 심장부


여기에 침춤의 깊은 역설이 있습니다. 신이 자신을 제한함으로써 세상이 자유로워졌습니다. 신이 물러섬으로써 우리가 존재할 공간이 생겼습니다. 신의 부재가 우리의 현존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창조를 완전히 새로운 빛으로 비춥니다. 세상은 신의 힘의 표현이 아니라, 신의 자기 제한의 결과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신의 전능함이 아니라 신의 겸손함, 신의 물러섬에서 비롯됩니다.


루리아의 제자 하임 비탈은 『에츠 하임, Etz Hayyim』에서 이 과정을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침춤 이전에는 오직 아인 소프의 순수한 빛만이 존재했습니다. 그 빛은 완전히 단순하고 구분이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위도 아래도, 앞도 뒤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절대적으로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신이 자신을 수축시키는 순간, 그 완벽한 통일 속에 균열이 생겼습니다. 중심이 생겨났고, 그 중심으로부터 신성이 물러나면서 둥근 공간이 형성되었습니다.


이 공간은 진정으로 텅 비어 있었을까요? 여기에서 카발라 사상가들 사이에 깊은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어떤 이들은 침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신이 정말로 그 공간에서 완전히 물러났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이것을 은유로 이해했습니다. 신은 여전히 모든 곳에 계시지만, 자신의 현존을 감추었을 뿐이라고 봤습니다.


남겨진 흔적


루리아 학파의 후대 사상가들은 레쉬무 (Reshimu)라는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이것은 흔적, 인상, 잔상을 뜻합니다. 신이 자신을 수축시켜 물러났을 때,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미세한 흔적이 남았습니다. 마치 향수병을 비워도 향기가 희미하게 남듯이, 신의 빛이 물러간 후에도 그 자취가 할랄 하파누이 안에 머물렀습니다.


이 레쉬무가 없었다면 창조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완전히 비어 있는 공간에서는 아무것도 생겨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신성의 희미한 흔적이 있었기에, 그것이 씨앗이 되어 창조의 과정이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레쉬무는 신과 세상을 잇는 보이지 않는 끈입니다. 신이 완전히 떠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부재 속의 현존, 떠남 속의 머무름입니다.

또한 침춤은 신 안에 있던 딘 (Din), 즉 엄격함과 심판의 힘을 정제하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신의 무한한 자비 속에는 제한과 경계를 세우는 힘도 섞여 있었습니다. 침춤을 통해 이 딘이 분리되고 정돈되었습니다. 이것이 없었다면 개별적인 존재들이 생겨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경계가 없으면 형태도 없고, 형태가 없으면 세상도 없습니다.


빛의 다리


침춤으로 공간이 만들어진 후, 두 번째 단계가 시작되었습니다. 아인 소프로부터 하나의 가느다란 빛줄기가 그 빈 공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이것을 카브 (Kav)라고 부릅니다. 이 빛의 선은 무한과 유한을 잇는 다리였습니다. 물러났던 신성이 다시 돌아와 창조의 작업을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 빛은 제한되고 측정된 형태로 흘러들어왔습니다.


이 카브를 통해 아담 카드몬 (Adam Kadmon), 즉 원형적 인간이 형성되었습니다. 이것은 창조된 첫 번째 형태이며, 모든 세피로트와 세계들의 원형입니다. 아담 카드몬은 인간의 모습으로 묘사되지만, 이것은 우리가 아는 물리적 인간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성이 형태를 취한 첫 번째 모습이며, 우주 전체의 청사진입니다.


침춤과 카브, 이 두 움직임이 창조의 근본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수축과 팽창, 물러섬과 나아감, 숨김과 드러냄입니다. 루리아에 따르면 모든 새로운 발현은 새로운 침춤을 먼저 필요로 합니다. 신은 무언가를 드러내기 전에 먼저 자신을 움츠립니다. 이 리듬이 없다면, 이 끊임없는 긴장이 없다면, 세상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신이 자신을 계속 억제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 있을 수 있습니다.


추방의 가장 깊은 상징


침춤은 단순히 우주론적 개념이 아닙니다. 이것은 16세기 유대인들이 겪고 있던 추방의 고통을 신학적으로 표현한 것이기도 합니다. 1492년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은 뿔뿔이 흩어져 낯선 땅을 떠돌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집에서, 자신의 땅에서 쫓겨났습니다. 이 역사적 트라우마가 루리아의 신학에 깊이 스며들었습니다.


숄렘은 침춤을 추방의 가장 깊은 상징이라고 보았습니다. 신 자신이 자기로부터 추방당했습니다. 자신의 충만함으로부터, 자신의 전체성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켰습니다. 만약 신조차도 자기 추방을 경험했다면, 인간의 추방은 우주적 드라마의 일부가 됩니다. 우리의 고통은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 창조 자체에 새겨진 패턴입니다. 신이 자신을 제한했듯이, 우리도 제한을 경험합니다. 신이 자신을 감추었듯이, 우리도 신을 찾지 못하고 방황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희망도 있습니다. 침춤이 창조를 위한 것이었다면, 우리의 추방도 더 큰 목적을 위한 것일 수 있습니다. 신이 물러섬으로써 우리에게 존재의 공간을 주었듯이, 우리의 고난도 새로운 무언가를 낳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수동적인 체념이 아니라 능동적인 참여입니다. 우리는 단지 추방당한 피해자가 아니라, 우주적 과정의 동반자가 됩니다.


신의 유한함이라는 힘


침춤 개념은 신의 본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근본적으로 바꿉니다. 15세기 카발라 사상가 메이르 이븐 가바이 (Meir ibn Gabbai)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이 무한함의 힘을 가졌다면, 유한함의 힘도 가져야 합니다. 만약 신이 무한할 수만 있고 유한할 수 없다면, 그것은 오히려 신의 완전함을 손상시킵니다. 진정한 전능함은 스스로를 제한할 수 있는 능력도 포함합니다.


이것은 심오한 통찰입니다. 우리는 흔히 신의 위대함을 끝없는 확장과 지배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루리아의 카발라는 신의 진정한 위대함이 자기 제한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물러설 수 있는 능력, 자신을 감출 수 있는 능력, 다른 존재에게 공간을 내어줄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최고의 힘입니다. 신은 자신을 비움으로써 우리를 채웁니다. 자신을 감춤으로써 우리를 드러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세상의 존재 자체가 신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신이 자신의 무한함을 포기하고 우리에게 존재의 선물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여기 있다는 것,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택할 수 있다는 것, 심지어 신을 부정할 수도 있다는 것은 모두 침춤의 결과입니다. 신이 우리를 압도하지 않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우리는 독립적인 존재로 설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긴장


침춤은 한 번 일어나고 끝난 사건이 아닙니다. 이것은 지금도 계속되는 과정입니다. 매 순간 신은 자신을 억제하고 있습니다. 매 순간 신은 자신의 무한한 빛이 모든 것을 삼켜버리지 않도록 그것을 거두어들이고 있습니다. 이 끊임없는 긴장, 이 계속되는 노력이 없다면 세상은 한순간에 무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하시디즘의 창시자 바알 셈 토브 (Baal Shem Tov, 1700경-1760)와 그의 후계자들은 침춤을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들에게 침춤은 신의 부재가 아니라 신의 감춰진 현존을 의미했습니다. 신은 물러난 것이 아니라 옷을 갈아입은 것입니다. 무한함의 옷에서 유한함의 옷으로 바꿔입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이 감춰진 신성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평범함 속에서 거룩함을 찾고, 물질 속에서 영을 보는 것입니다.


침춤은 우리에게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줍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신의 자기 제한의 결과입니다. 나무 한 그루, 돌멩이 하나, 우리 자신의 존재까지도 신이 자신을 감춘 공간 안에서 피어난 것입니다. 이것을 알 때, 우리는 존재 자체에 대한 경외감을 느낍니다. 세상은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곳이 아니라, 신이 가장 깊은 사랑으로 선물한 공간입니다.


침춤의 개념은 우리 삶에도 적용됩니다. 때로 우리도 물러서야 합니다. 우리의 자아를 움츠리고, 우리의 욕망을 제한하고, 다른 이에게 공간을 내어주어야 합니다. 진정한 창조는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말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하는 것에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경청하는 것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탄생합니다. 이것이 침춤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삶의 지혜입니다.









3-9.2. 셰비라트 하켈림 (Shevirat HaKelim): 그릇들의 파괴



일곱 그릇의 파국


신이 자신을 수축시켜 텅 빈 공간을 만든 뒤, 그곳에 빛의 가느다란 선을 보냈습니다. 이 빛은 아담 카드몬 (Adam Kadmon)이라는 원형적 인간의 모습을 취했습니다. 아담 카드몬의 머리와 몸에서 빛이 흘러나왔고, 이 빛들이 조화롭게 결합하여 높은 세계들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아담 카드몬의 눈에서 나온 빛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흘러나왔습니다. 열 개의 빛의 점들이 각각 독립된 그릇을 입고 세상으로 쏟아져 내렸습니다.


이때 우주를 뒤흔드는 재앙이 일어났습니다. 위에서 세 개의 그릇인 케테르 (Kether), 호크마 (Chokmah), 비나 (Binah)는 신성한 빛을 견뎌냈습니다. 그러나 아래 일곱 개의 그릇들은 너무나 강렬한 빛의 압력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릇들이 산산이 부서졌고, 파편들이 텅 빈 공간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이 사건을 루리아 카발라는 셰비라트 하켈림이라 부릅니다. 신이 세피로트의 체계를 세우려던 첫 번째 시도가 실패로 끝났고, 신성의 영역 안에 파괴와 위기가 들어왔습니다.


깨진 그릇 안에 담겼던 빛의 대부분은 근원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일부 빛은 파편들과 함께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이 떨어진 빛의 조각들을 니초초트 (Nitzotzot), 곧 신성한 불꽃이라 부릅니다. 깨진 그릇의 파편들은 클리포트 (Qliphoth)라는 껍데기가 되었고, 이것이 악의 근원을 이루었습니다. 동시에 이 파편들은 우리가 사는 물질 세계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파괴의 비밀


왜 그릇들은 깨졌을까요. 이 질문은 루리아 가르침에서 가장 심오하고 비밀스러운 주제입니다. 하임 비탈을 비롯한 제자들의 기록에도 이 문제는 단 몇 구절에서만 다루어지며, 그마저도 서로 다른 설명을 제시합니다. 전능한 신이 시도한 일이 실패로 끝났다는 것은 종교적 사유에 심각한 역설을 안깁니다.


게르솜 숄렘과 이사야 티쉬비가 제시한 해석은 가장 깊고 신화적인 성격을 지닙니다. 침춤이 일어났을 때 텅 빈 공간은 사실 완전히 비지 않았습니다. 마치 물을 쏟아낸 그릇의 안쪽이 여전히 젖어 있듯이, 어떤 신성한 빛이 공간의 벽면에 달라붙어 있었습니다. 루리아 학파는 이것을 아람어로 레쉬무 (Reshimu), 곧 흔적이라 불렀습니다.


이 레쉬무 안에는 이전에 무한한 신 안에 흩어져 있던 차이와 타자성의 요소들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침춤의 진짜 목적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신이 자신 안에서 이질적일 가능성을 지닌 요소들을 한곳에 모아 분리해냄으로써, 나머지 부분의 균일함과 완전성을 이루려 했습니다. 이 과업은 침춤 과정에서 성공적으로 완수되었습니다. 침춤은 무한한 신 안에서 일어난 일종의 정화 과정이었습니다.


두 번째 단계인 빛을 텅 빈 공간에 쏟아붓고 그릇들을 형성하는 작업은 더 급진적인 목적을 지녔습니다. 이 차이의 요소들을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실체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였습니다. 만약 레쉬무가 신성한 발현을 형성하는 작업에 참여했다면, 그 차이는 나머지 신성한 빛과 함께 과정에 동참함으로써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실패했습니다. 그릇들은 자신의 본질을 공유하지 못했습니다. 토후 (Tohu), 곧 혼돈의 세계에서 그릇들은 서로 분리되고 미숙한 상태로 존재했습니다. 각 그릇은 독립된 점으로 존재했고, 상호 연결과 조화가 없었습니다. 그릇들의 능력은 약했고, 신성한 빛은 지나치게 강렬했습니다. 이 불균형이 파국을 불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깊은 역설을 마주합니다. 그릇들이 깨지지 않았다면 차이와 개별성이 신성 안으로 통합되어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릇들이 깨짐으로써 차이는 파국의 형태로 보존되었습니다. 파괴는 실패인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의 시작이었습니다. 완벽한 신성의 세계 대신, 불완전하지만 자유와 선택이 가능한 세계가 생겨났습니다.


아담 카드몬의 눈에서 나온 빛이 특별히 문제가 되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눈은 보는 기관이며, 봄은 주체와 객체의 분리를 전제합니다. 눈의 빛은 이미 차이와 분리의 성격을 내포했고, 이것이 그릇들을 독립된 개체로 만들었습니다. 반면 머리의 빛은 아직 분화되지 않은 통일성을 유지했기에 안정적이었습니다.


위의 세 그릇이 깨지지 않고 남은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만약 케테르, 호크마, 비나까지 산산조각 났다면 우주는 완전한 혼돈으로 되돌아갔을 것입니다. 창조 이전의 토후 와 보후, 곧 혼돈과 공허의 상태로 빠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지와 지혜와 이해를 상징하는 위의 세 세피로트는 온전하게 남았습니다. 영적, 도덕적, 미적, 물질적 가치를 담은 아래 여섯 그릇만 깨졌고, 따라서 이것들만 복원이 필요합니다.


이 파괴는 진정 파국적인 사건입니다. 의지와 지혜와 이해는 남았지만, 다른 모든 가치들은 산산이 흩어졌습니다. 특히 인류의 문화적이고 상징적인 질서를 구현하는 가치들이 파편화되었습니다. 형태는 어느 정도 남았을지 몰라도, 그것들이 물질 안에 구현되는 방식은 혼란스럽고 뒤죽박죽이 되었습니다. 셰비라트 하켈림은 모든 것을 청산하고 새로 시작하라는 도전이었습니다. 우리가 문명화된 삶이라 여기는 구조들에 대한 근본적 물음이었습니다.


하임 비탈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릇들은 우주의 어머니인 여성적 파르추프 (Partzuf)의 자궁 안에 있었습니다. 이 이미지는 여성을 그릇이자 담는 자로 보는 오래된 상징을 계승합니다. 그릇들의 파괴는 남성적 측면과 여성적 측면이 얼굴을 맞댄 성적 결합 상태에서 서로 등을 돌리고 완전히 분리되는 사건을 가져왔습니다. 셰비라가 일으킨 혼돈은 성적 소외를 낳았고, 이는 남성과 여성의 새로운 결합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출산을 알리는 양수가 터지듯, 그릇의 파괴는 새로운 개인적이고 세계적인 질서의 탄생을 예고합니다. 이 질서는 인간이 티쿤의 과정을 통해 완성해야 합니다.


셰비라는 또한 악의 기원을 설명합니다. 깨진 그릇의 파편인 클리포트는 떨어진 신성한 불꽃들을 가두는 껍데기가 되었습니다. 이 껍데기들이 바로 악의 세력이며, 시트라 아흐라 (Sitra Ahra), 곧 다른 쪽의 세력을 구성합니다. 악은 독립된 창조가 아니라 그릇 파괴의 결과로 생겨났습니다. 악은 본래 선이었던 것의 왜곡이며, 제자리를 잃은 신성의 조각입니다.


여기서 루리아 카발라는 대담한 신학적 전환을 이룹니다. 전통적으로 유대교는 아담과 하와의 죄로 인해 타락이 일어났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루리아는 우주적 오류가 인간 창조 훨씬 이전에 이미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존재의 타락한 상태에 대한 책임이 아담과 하와에게서 신에게로 옮겨갑니다. 이것은 루리아 신화가 지닌 대담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어떤 현대 주석가들, 특히 여성 학자들은 다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세피로트의 수축 과정은 산통을 닮았으며, 그릇의 파괴는 우주의 탄생 과정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빅뱅과 유사하게, 이것은 파국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폭발적 출현일 수 있습니다. 랍비 잘만 샤흐터 샬로미 (Zalman Schachter-Shalomi)는 이러한 해석이 정당하며 우리 시대에 적합하다고 봅니다.


셰비라트 하켈림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신이 무한하고 완전하다면, 왜 창조는 불완전하고 파괴를 겪어야 했을까요. 루리아의 답은 역설적입니다. 완전성만으로는 진정한 창조가 불가능합니다. 무한한 빛이 모든 것을 채우면 다른 것이 존재할 여지가 없습니다. 따라서 신은 먼저 자신을 수축시켜 공간을 만들었고, 그다음 그 공간에 빛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릇들이 깨져야만 진정한 개별성과 자유가 가능해졌습니다. 완전한 세피로트의 체계 안에서는 모든 것이 신성한 질서에 완전히 종속됩니다. 거기에는 선택도 자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릇들이 깨지고 불꽃들이 흩어지면서, 각 존재는 독립성을 얻었습니다. 물질 세계가 생겨났고,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능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루리아 카발라의 가장 혁명적인 통찰입니다. 존재는 완전한 창조자가 불완전한 우주를 만드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주의 존재 자체가 무한한 신 안의 내재적 결함이나 위기의 결과입니다. 창조의 목적은 이 결함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신의 첫 번째 창조 행위가 실패했기에, 두 번째 창조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 두 번째 창조에서 인간은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라 공동 창조자가 됩니다.


하나의 비유가 이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예술가가 완벽한 작품을 구상합니다. 그러나 그 완벽함은 예술가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한 실현되지 않습니다. 예술가는 작품을 물질로 만들어야 하고, 이 과정에서 원래 구상은 불가피하게 깨지고 변형됩니다. 물감은 캔버스에 예상과 다르게 번지고, 대리석은 정에 맞아 예기치 않게 갈라집니다. 그러나 바로 이 불완전함 속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이 탄생합니다. 작품은 예술가의 완벽한 구상이 아니라, 구상과 물질이 충돌하고 깨지면서 생겨난 제삼의 것입니다.


셰비라트 하켈림은 또한 인간 삶의 근본 조건을 설명합니다. 우리는 모두 깨진 그릇의 파편들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 불완전함, 단절은 이 우주적 파괴의 흔적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신성한 불꽃들은 클리포트의 껍데기에 갇혀 있습니다. 우리의 가장 고귀한 충동들조차 이기심과 두려움의 껍질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그릇들이 깨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완전한 신성의 세계에는 인간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오직 불완전하고 깨진 세계에서만 우리 같은 존재가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 불완전함이 곧 우리의 소명이 됩니다. 우리는 흩어진 불꽃들을 모으고, 깨진 그릇들을 다시 맞추는 일을 하도록 불려졌습니다.


셰비라는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파괴 뒤에는 티쿤, 곧 복원의 과정이 옵니다. 루리아 이후 모든 일은 이 최초의 재앙을 극복하고 바로잡으려는 신성한 시도로 이해됩니다. 그릇들이 다시 조직되어 파르추핌, 곧 신성한 얼굴들을 형성합니다. 이 새로운 구조는 이전보다 더 복잡하고 역동적입니다. 세피로트가 정적인 체계였다면, 파르추핌은 살아 숨 쉬는 인격들입니다.


그리고 이 복원 과정에서 인간의 역할이 결정적입니다. 신만으로는 티쿤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떨어진 불꽃들은 클리포트 안에 너무 깊이 묻혀 있어서, 위에서 내려오는 빛만으로는 닿을 수 없습니다. 오직 물질 세계 안에 사는 인간만이 이 불꽃들에 손을 뻗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 모든 선택, 모든 미츠바 (Mitzvah)는 하나의 불꽃을 해방시킵니다.


깨진 세상 속 우리의 소명


이것이 루리아 카발라가 유대교 신비주의와 윤리를 통합하는 방식입니다. 루리아 이전의 카발라 학파는 주로 명상과 관조를 통해 신적인 세계를 이해하는 영적인 여정에 집중했습니다. 그러나 루리아는 이 초월적인 신비주의를 일상의 종교적 실천이라는 구체적인 삶에 접목하여 우주적인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그는 인간이 수행하는 모든 행위가 창조의 드라마를 완성하는 데 직접적으로 기여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루리아 카발라의 핵심 신화인 셰비라트 하켈림 (Shevirat ha-Kelim, 그릇의 깨짐)은 우주의 창조 과정에서 신성한 빛 (Ohr)을 담는 그릇들 (Kelim)이 그 빛의 강렬함을 견디지 못하고 산산조각 났다는 교리입니다. 이 파편들은 곧 클리포트 (Qliphoth, 껍데기)라는 악의 영역을 형성하며, 신성한 빛의 불꽃 (Nitzotzot, 니쪼쪼트)들이 그 안에 포로로 갇히게 됩니다. 루리아는 이 불꽃을 해방시키는 일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우주적 소명이라고 가르쳤는데, 이를 티쿤 올람 (Tikkun Olam, 세상의 회복)이라고 부르며, 이로써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신비적 목적과 윤리적 행위가 완전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티쿤 올람의 맥락에서, 당신의 일상적인 행위는 단순히 선행에 그치지 않고 우주적 드라마의 일부가 됩니다. 당신이 가난한 사람에게 빵을 줄 때, 당신은 단순히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행위는 헤세드 (Ḥesed, 자비)라는 신성한 속성이 현실 세계에 구현되는 것이며, 자비의 빛을 가두고 있던 클리포트에서 그 헤세드의 불꽃을 해방시키고 원래의 세피로트 자리로 돌려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부정의에 맞서 싸울 때, 당신은 게부라 (Gevurah, 준엄)의 불꽃을 원래의 자리 (세피로트)로 돌려보내고 있습니다. 이는 정의와 심판이라는 신적 질서를 회복하는 우주적 복원 행위입니다. 결론적으로, 루리아 카발라는 미츠보트 (Mitzvot, 계명)를 지키는 모든 종교적 실천을 티쿤 올람이라는 우주적인 복원 작업으로 승화시켰습니다. 가장 평범한 행동조차 깊은 의미를 지니게 되어, 아침에 기도할 때, 음식을 먹을 때, 안식일을 지킬 때, 당신은 문자 그대로 세상을 복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셰비라트 하켈림의 신화가 16세기 중반 이삭 루리아가 활동했던 사페드 (Safed)에서 강력하게 퍼져나간 데는 중요한 역사적 맥락이 있습니다. 루리아는 1492년 스페인에서 유대인들이 추방당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살았습니다. 수백 년간 비교적 평화롭게 살던 이베리아 유대인들이 갑자기 칼과 화형의 위협 아래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추방당했습니다. 이는 제2의 성전 파괴에 필적하는 민족적 재앙이자, 유대 민족에게 악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만든 역사적 트라우마였습니다. 게르솜 숄렘과 같은 현대 카발라 연구의 대가들은 루리아 카발라가 바로 이 역사적 트라우마에 대한 직접적인 신화적 응답이라고 주장합니다. 유대인들은 왜 신의 선택을 받은 백성에게 이토록 엄청난 악이 닥쳤는지 신학적으로 설명해야 했습니다. 셰비라트 하켈림의 신화는 이 질문에 근본적인 답을 제시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악은 신의 창조 계획의 일부나 선택된 백성에 대한 징벌이 아니라, 신이 자신을 드러내려다 발생한 우주적 사고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즉, 세상은 원래부터 깨져 있었고, 인간의 고통, 특히 추방과 고난은 이 우주적 파편이 현실에 반영된 것일 뿐이라는 위로를 제공했습니다. 이 가르침은 박해받고 지친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위로와 힘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고난을 무의미한 징벌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추방과 유배조차 신성한 불꽃을 해방시키기 위해 온몸으로 악의 세계에 들어가는 영웅적인 임무로 해석되었습니다. 단순히 미츠보트 (계명)를 지키는 행위가 악과 싸우는 우주적 복원의 행위가 된다는 생각은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희망과 존재 이유를 부여하는 강력한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루리아 카발라는 티쿤 올람 교리는 큰 영적 힘을 주었지만, 동시에 위험을 내포하기도 했습니다. 세상이 근본적으로 깨져 있다는 신화적 인식은, 세상의 회복 (티쿤)을 이끌 메시아가 곧 도래할 것이라는 강렬한 메시아적 열광과 결합되었습니다. 세상이 너무나 심각하게 깨져 있으므로, 급진적이고 파격적인 행동이 그 회복을 가속화할 수 있다는 믿음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열광은 결국 샤브타이 체비 (Sabbatai Zevi, 1626-1676)와 야코프 프랑크 (Jacob Frank, 1726-1791)와 같은 거짓 메시아 운동을 낳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깨진 세상을 고치기 위해서는 기존 질서를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일부 추종자들은 율법을 위반하는 것조차 '죄를 통한 티쿤'이라는 왜곡된 논리로 정당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루리아 카발라는 티쿤 올람이라는 인류의 윤리적 소명을 제시함으로써 유대 신비주의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었지만, 그 급진적인 해석은 유대 역사에 큰 혼란을 가져온 양날의 검이 되었습니다.


샌퍼드 드롭과 데리다의 해체주의


샌퍼드 드롭 (Sanford Drob, 1947-)은 자신의 저서 『카발라와 포스트모더니즘』을 통해 루리아 카발라와 현대 해체주의 철학 사이의 놀라운 평행선을 보여줍니다. 그는 자크 데리다 (Jacques Derrida, 1930-2004)의 해체 작업이 사실 셰비라트 하켈림 (Shevirat HaKelim)의 언어적이고 개념적인 재현이라고 주장합니다.


데리다의 핵심 개념인 차연 (différance)은 루리아 카발라의 침춤 (Tzimtzum)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합니다. 데리다는 이렇게 썼습니다.


"진리가 현존으로서 사라지는 것, 현존의 근원적 기원이 물러나는 것이 모든 진리의 현현 조건입니다. 비진리가 진리이고, 비현존이 현존입니다. 차연, 곧 근원적 현존의 사라짐은 동시에 진리의 가능성 조건이자 불가능성 조건입니다."


이는 침춤의 역설을 거의 그대로 반복합니다. 신이 물러남으로써 창조가 가능해지듯, 근원이 사라짐으로써 진리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셰비라트 하켈림’은 해체주의와 더욱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데리다는 에드몽 자베스 (Edmond Jabès)의 문장을 인용하며 "당신이 파열의 핵심임을 잊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십계명 석판이 깨진 사건은 무엇보다도 역사의 기원으로서 신 안의 파열을 표현한다고 덧붙입니다. 카발라 사상가들은 셰비라가 에덴 추방과 석판의 깨짐으로 상징된다고 보았으며, 이 사건들은 실제로 역사적 시작을 표시하는 순간들입니다.


셰비라가 내포하는 의미는 깊고도 급진적입니다. 모든 개념, 가치, 체계, 신념은 그것들이 담고 규정하려는 현상을 담기에 부적절한 그릇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견고해 보이는 사상 체계라도, 아무리 완벽해 보이는 이론이라도, 내재적 불안정성을 지니고 있으며, 언젠가는 깨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경험이나 텍스트나 세계에 부여하는 모든 해석과 구성에 결코 만족하지 말라는 경고와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해체 작업의 핵심입니다.


드롭은 셰비라의 세 단계가 해체적 사유의 구조를 정확히 드러낸다고 분석합니다.

첫째, 침춤은 모든 계시가 은폐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둘째, 셰비라는 모든 구조가 파열되고 수정되며 해체되고 초월에 열려 있음을 드러냅니다. 아무리 안전하고 완전해 보이는 것도 깨질 수 있습니다.

셋째, 티쿤 (Tikkun)은 진리가 절대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구성물임을 시사합니다. 이 세 순간이 함께 보편적 역사와 절대자에 대한 관점을 제시하는 동시에, 모든 절대적인 것을 해체하고 더 많은 해체를 위한 장을 엽니다.


그러나 루리아 카발라는 단순히 해체에 머물지 않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카발라와 데리다의 결정적 차이가 드러납니다. 데리다에게 해체는 끝없는 연기이며, 의미의 최종 도달은 불가능합니다. 모든 것은 차이와 흔적의 놀이 속에 떠돌 뿐이며, 이것은 종종 허무주의로 귀결됩니다. 만약 모든 것이 해체 가능하다면, 아무것도 진정한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됩니다.


카발라는 이 허무주의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셰비라 뒤에는 티쿤이 있습니다. 파괴는 영구적인 상태가 아니라 복원을 향한 과정의 일부입니다. 그릇들이 깨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이 파편들을 다시 모아 새로운 형태로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해체는 파괴가 아니라 재건을 위한 준비인 것입니다. 낡고 경직된 구조를 깨뜨림으로써, 우리는 더 풍요롭고 포용적인 새로운 구조를 세울 수 있습니다.


드롭은 클리포트 (Qliphoth)의 개념을 통해 이 차이를 더욱 분명히 합니다. 루리아 체계에서 클리포트, 곧 껍데기는 세피로트 에너지의 흐름을 막습니다. 이처럼 흐름이 막힘으로써 클리포트는 세상에 악의 근원이 됩니다. 따라서 악의 기원은 신성한 원형과 가치들의 해체가 아니라, 그것들이 폐쇄되고, 제한되고, 정체된 형태로 조기에 통합되는 것입니다. 하시딤은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혼란을 일으키는 사람에 대해, "그는 악한 클리포트의 영향 아래 있으며, 이 껍질이 그의 지적이고 영적이고 감정적 에너지를 묶고 제약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해체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이해를 제공합니다. 해체는 지성을 묶어놓은 것을 풀고, 다른 방식으로는 배제될 것들에 지성을 열어주는 방법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데리다는 해체가 곧 윤리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경직된 구조를 깨뜨림으로써, 우리는 소외되고 주변화된 목소리들에게 공간을 만들어줍니다. 차이와 타자를 인정하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해체는 셰비라일 뿐 아니라 티쿤의 추출 (birur) 단계와도 연결됩니다. 클리포트에 갇힌 불꽃들을 해방시키는 작업인 것입니다.


드롭이 제시하는 또 다른 핵심 개념은 대립의 일치 (coincidentia oppositorum)입니다. 카발라, 특히 하바드 (Chabad) 하시디즘은 신이 모든 대립의 합일이라고 가르칩니다. 아인 소프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비존재이고, 현존이면서 동시에 부재이며, 무한이면서 동시에 유한입니다. 신 안에서는 모든 모순이 하나로 통합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변증법적 종합이 아닙니다. 대립들이 더 높은 차원에서 용해되는 것이 아니라, 대립 자체가 진리의 본질적 구조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을 이해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꿉니다. 서양 철학은 전통적으로 모순율을 받아들였지만, 카발라는 가장 깊은 차원에서 이 법칙이 초월된다고 말합니다. 신은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실재하면서 동시에 환영입니다. 이것은 논리적 오류가 아니라 실재의 본성을 드러냅니다. 드롭은 이것이 현실을 무한히 해석 가능한 텍스트로 보는 관점과 연결된다고 봅니다. 토라는 단 하나의 확정된 의미를 지니지 않습니다. 오히려 토라는 신성한 이름들로 이루어진 살아있는 유기체이며, 매 세대마다 새롭게 해석되어야 합니다. 같은 구절이 일흔 가지 얼굴을 지닙니다. 이것은 모든 해석이 동등하게 타당하다는 상대주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실재 자체가 다층적이고 역동적이며, 하나의 관점으로는 결코 다 파악될 수 없다는 겸허한 인정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사유 방식에 대한 급진적인 도전입니다. 드롭은 인류가 일차원적 사고에서 이차원적, 나아가 다차원적 사고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철학, 신학, 심리학의 모든 체계는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며, 셰비라, 곧 파괴와 수정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지적 겸손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소유할 수 없고, 단지 진리를 향해 나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상대주의나 회의주의로 귀결되지 않는 이유는 티쿤의 가능성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해가 불완전하고 우리의 구조가 깨지기 쉽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계속 이해하고 구조를 세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과정이 세상을 복원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완벽한 체계를 세우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끊임없이 깨지고 다시 세우는 과정 그 자체가 티쿤입니다.


이것은 실천적 함의를 지닙니다. 사회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우리는 완벽한 사회를 건설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어떤 체계도 언젠가는 경직되고 억압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투쟁을 포기할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더 겸손하게, 더 개방적으로 투쟁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구조도 해체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주변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티쿤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 과제이지만, 그렇기에 영원히 의미 있는 과제인 것입니다.


카발라가 포스트모던 철학과 만나는 이 지점은 놀랍도록 생산적입니다. 16세기 사페드의 신비가와 20세기 파리의 철학자가 같은 통찰에 도달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인간 사유는 깊은 곳에서 보편적 패턴을 따릅니다. 셰비라트 하켈림은 단순히 유대 신비주의의 교리가 아니라 존재의 구조에 대한 깊은 통찰입니다. 모든 것은 깨지지만, 모든 것은 다시 세워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루리아와 데리다가 함께 가르치는 지혜입니다.


다양한 관점


심리학적으로 셰비라트 하켈림은 개인의 성장 과정을 설명합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이상적 자아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경험은 이 이미지를 산산이 깨뜨립니다. 우리는 실패하고, 상처받고, 환멸을 느낍니다. 우리 안의 그릇들이 깨집니다. 그러나 바로 이 과정을 통해 진정한 성숙이 가능해집니다. 깨진 조각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맞추면서, 우리는 이전보다 더 깊고 진실한 자아를 형성합니다.


칼 융의 개성화 과정도 유사한 패턴을 따릅니다. 자아는 그림자와 만나면서 일시적으로 붕괴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이 붕괴는 더 온전한 자기 (Self)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 단계입니다. 셰비라는 심리적 성장에 필요한 위기이며, 티쿤은 통합과 치유의 과정입니다.

생태적 관점에서 셰비라트 하켈림은 오늘날의 환경 위기를 이해하는 틀을 제공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말 그대로 깨져 있습니다. 기후 변화, 종의 멸종, 생태계 파괴는 모두 근본적 불균형의 징후입니다. 인간의 탐욕과 무절제가 세상의 그릇들을 깨뜨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이것을 고칠 책임과 능력을 지닙니다. 티쿤 올람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구체적 행동 지침이 됩니다.


사회적 차원에서 셰비라는 불의와 억압의 구조를 설명합니다. 깨진 그릇의 파편들이 사회적 불평등, 인종주의, 성차별을 만들어냅니다. 신성한 불꽃들이 억압의 껍데기 안에 갇혀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신성한 불꽃을 지니지만, 어떤 이들은 이 불꽃을 표현할 기회를 박탈당합니다. 정의를 위한 투쟁은 이 불꽃들을 해방시키는 티쿤의 과정입니다.


셰비라트 하켈림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낙관주의를 선사합니다. 세상은 깨져 있지만, 그것이 세상의 최종 상태는 아닙니다. 파괴는 영구적이지 않고, 복원이 가능합니다. 더 나아가 복원된 세상은 원래의 완벽한 상태보다 더 풍요로울 수 있습니다. 일본의 킨츠기 (kintsugi) 기법처럼, 깨진 도자기를 금으로 이어 붙이면 원래보다 더 아름다운 작품이 탄생합니다.


그릇들이 깨진 것은 재앙이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었습니다. 완벽하지만 정적인 세계 대신, 불완전하지만 역동적이고 자유로운 세계가 생겨났습니다. 신과 인간이 함께 창조하는 세계,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세계가 가능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셰비라트 하켈림의 궁극적 의미입니다. 파괴는 끝이 아니라 진정한 시작이며, 우리는 모두 이 새로운 시작의 일부입니다.











3-9.3. 티쿤 올람 (Tikkun Olam): 세계의 회복과 인간의 소명



우주적 파국 이후, 인간에게 주어진 사명


셰비라트 하켈림이라는 우주적 재앙이 일어났을 때, 대부분의 신성한 빛은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일부 빛의 불꽃들은 깨어진 그릇의 파편 사이에 갇혀버렸습니다. 이 불꽃들을 루리아는 니초초트 (Nitzotzot)라고 불렀습니다. 신성한 불꽃들은 어둠의 영역 안에 포로로 잡혀있게 되었고, 악의 근원인 클리포트 (Qliphoth)라는 껍데기들이 이 불꽃들을 에워싸 그 힘으로 자신들을 키웠습니다. 만약 이 불꽃들이 없었다면 클리포트는 존재할 수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악은 선의 조각을 먹이 삼아 살아가는 기생체였습니다.


루리아 카발라는 이 불꽃들을 제자리로 되돌리는 작업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부여된 가장 본질적인 소명이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바로 티쿤 (Tikkun)입니다. 히브리어로 티쿤은 회복, 수선, 치유를 뜻하는 말입니다. 올람 (Olam)은 세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티쿤 올람은 세계의 회복을 뜻합니다. 이 개념은 단순히 사회를 개선하자는 도덕적 구호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우주 자체를 근본적으로 치유하는 거대한 작업이었으며, 신성 자체를 완전하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루리아의 가르침에 따르면, 최초의 인간 아담은 모든 인간 영혼의 집합체였습니다. 그의 영혼은 신성의 모든 차원을 담고 있었으며, 그는 흩어진 불꽃들을 해방시켜 우주적 회복을 완성할 사명을 지니고 태어났습니다. 창조가 거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을 때 아담이 창조되었고, 그가 명상적 수행을 통해 티쿤을 완성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본래의 조화로운 상태로 돌아갈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담이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다시 한 번 그릇들이 깨어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의 영혼은 산산조각 났고, 수많은 영혼 불꽃들로 흩어졌습니다. 인류는 아담의 실패로 인해 원래보다 훨씬 더 어려운 과제를 떠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이 거대한 회복의 작업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루리아는 인간의 모든 종교적 행위가 곧 티쿤 올람의 실천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토라를 공부하는 것, 기도를 올리는 것, 613개의 계명인 미츠보트 (Mitzvot)를 지키는 것, 이 모든 것이 흩어진 불꽃을 구출하는 도구였습니다. 평범한 일상의 윤리적 선택들조차 우주적 의미를 지녔습니다. 가난한 이웃에게 빵 한 조각을 나누는 행위, 거짓말 대신 진실을 말하는 선택, 화를 참고 용서를 베푸는 순간들, 이 모든 것이 어둠에 갇힌 신성의 불꽃을 해방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카바나: 행위에 깃든 의도의 힘


하지만 루리아는 단순히 행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강조했습니다. 행위 뒤에 깃든 의도가 있어야 했습니다. 이것을 카바나 (Kavvanah)라고 부릅니다. 카바나는 집중, 의도, 마음의 방향을 뜻합니다. 기도를 할 때, 계명을 실천할 때, 우리는 단지 습관적으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가 위로는 신성의 세계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명상적으로 의식해야 했습니다. 하임 비탈은 루리아의 가르침을 기록하면서 각각의 기도문마다, 각각의 계명마다 어떤 세피로트들과 연결되는지, 어떤 신성한 결합을 이루어내는지를 상세히 설명했습니다.


예를 들어 아침 기도를 올릴 때,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말이 단순히 공중으로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쿠트 (Malkhut)에서 시작하여 예소드 (Yesod)를 거쳐 티페레트 (Tiferet)로 상승한다고 명상했습니다. 이 상승하는 기도가 상위 세피로트들 사이에 결합을 일으키고, 그 결합으로부터 새로운 빛이 태어나 아래로 흘러내립니다. 이 빛이 클리포트의 껍데기를 약화시키고, 그 안에 갇혀있던 불꽃 하나가 자유를 얻습니다. 이것이 카바나를 동반한 기도의 우주적 작용이었습니다.


루리아의 제자들은 카바노트 (Kavvanot, 카바나의 복수형)라는 구체적인 명상 기법들을 발전시켰습니다. 이 기법들은 매우 복잡했고, 오직 깊은 수련을 쌓은 이들만이 온전히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도 카바나의 본질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지금 하는 이 작은 행위가 단지 나만의 일이 아니라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이었습니다. 빵을 먹을 때조차 그 빵 속에 갇혀있을지 모르는 신성의 불꽃을 생각하며, 감사의 축복을 올림으로써 그 불꽃을 해방시킵니다.


공동체적 책임과 메시아적 희망


티쿤 올람은 개인의 영적 여정만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집단적 사명이었습니다. 루리아가 활동했던 16세기 사페드는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모여든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조국을 잃고 세계 곳곳으로 흩어진 자신들의 처지를 셰비라와 연결지어 이해했습니다. 유대 민족의 유랑은 단순한 역사적 비극이 아니라 우주적 드라마의 일부였습니다. 신성 자체가 유배되어 있고, 셰키나 (Shekhinah)라 불리는 신의 여성적 측면이 자신의 백성과 함께 유랑하고 있다고 카발라 사상가들은 믿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티쿤 올람은 강력한 희망의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어둠 속에 있지만, 우리가 계명을 지키고 선행을 쌓을 때마다 구원이 한 걸음씩 가까워집니다. 모든 유대인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면, 흩어진 불꽃들이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고, 깨어진 그릇들이 다시 온전해지며, 셰키나가 신에게 돌아가고, 마침내 메시아가 도래하여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리마노프의 하시딤 랍비 메나헴 멘델 (Menachem Mendel of Rimanov)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불꽃들을 모으는 작업이 거의 완성에 가까워지면, 신 자신이 남아있는 불꽃들을 직접 수거하여 최종적 구원을 앞당길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 가르침은 유대교 전통을 더욱 깊은 헌신으로 실천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루리아 카발라의 우주론은 매우 급진적이고 심지어 이단적으로 들릴 수 있는 개념들을 담고 있었지만, 그 실천적 메시지는 극도로 정통적이었습니다. 티쿤 올람을 믿는 사람은 전통적인 율법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행위 하나하나가 우주적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철저하게 종교적 의무를 수행했습니다. 모든 유대인은 선과 악의 전쟁에서 싸우는 병사가 되었고, 그의 무기는 기도와 계명이었습니다.


현대적 의미: 깨어진 세계를 치유하는 손길


오늘날 ‘티쿤 올람 (Tikkun Olam)’이라는 말은 그 본래의 심오한 신비적 의미를 넘어, 우리 시대의 언어로 새롭게 번역되고 있습니다. 현대 유대교 공동체를 비롯한 많은 영적 전통에서 티쿤 올람은 사회 정의를 위한 행동, 기후 위기에 맞서는 환경 보호 운동,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돕는 일, 그리고 온갖 형태의 구조적 불의에 맞서 싸우는 모든 윤리적 실천을 포괄하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루리아가 상상했던 우주적이고 신성한 드라마와는 다른 차원의 적용일 수 있지만, 그 핵심 정신, 즉 "세계는 불완전하며, 우리에게는 그것을 치유할 책임이 있다"는 믿음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이삭 루리아가 살았던 16세기나 24시간 뉴스와 소셜 미디어의 파편적인 소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사는 21세기나, 세상은 여전히 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전쟁의 참상과 깊어지는 기아, 좁혀지지 않는 불평등과 가속화되는 환경 파괴의 소식을 접합니다. 우리 사회 내부에서는 이념적 미움과 세대 간의 분열이 깊어지고, 개인의 삶은 전례 없는 불안과 고독감에 시달립니다. 루리아는 이 모든 고통과 혼돈이 태초에 일어난 우주적 파국, 즉 셰비라트 하켈림의 결과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의 진단에서 멈추지 않고, 동시에 우리 각자의 손에 위대한 희망의 열쇠를 쥐여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비극적 드라마의 무력한 피해자가 아니라, 세상을 치유할 힘을 부여받은 능동적인 치유자라는 것입니다.


이 관점은 우리의 일상을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가 매일 내리는 사소한 선택들, 무심코 건네는 작은 친절의 손길들, 부당함 앞에서 침묵하지 않으려는 작은 용기들이 모두 세상을 본래의 조화로운 상태로 되돌리는 거룩한 티쿤 올람의 일부가 됩니다.


우리는 21세기의 합리적 사고방식으로 ‘클리포트 (Klippot)’라는 어둠의 껍데기를 문자 그대로 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세상 곳곳에 갇혀있는 선 (善)의 불꽃들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그 불꽃은 억압받는 이의 눈빛 속에서 정의를 갈망하며 타오르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인간 존엄성의 희망 속에서 빛나며, 거대한 무관심의 어둠을 밝히려는 작은 촛불들의 연대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당신이 지친 동료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줄 때, 당신은 ‘무관심’이라는 클리포트를 깨고 ‘공감’이라는 신성의 불꽃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당신이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고 지역의 환경 운동에 동참할 때, 당신은 ‘파괴’라는 클리포트에 갇힌 ‘생명’의 불꽃을 구해내는 것입니다.


당신이 사회적 약자를 향한 혐오 발언에 동조하지 않고 다른 목소리를 낼 때, 당신은 ‘미움’이라는 클리포트를 부수고 ‘사랑’과 ‘연결’의 불꽃을 되살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분야에서 정직하게 땀 흘리고, 다음 세대를 위해 더 나은 무언가를 창조하려는 모든 예술가, 과학자, 장인의 노력은 ‘무의미’라는 클리포트 속에 갇힌 ‘창조성’의 불꽃을 세상에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고통받는 존재에게 손을 내밀고, 불의한 구조를 바꾸기 위해 목소리를 내며, 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무언가를 만들어낼 때, 우리는 가장 실제적인 의미에서 티쿤 올람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 루리아가 가르쳤듯이, 이것은 단지 도덕적으로 ‘좋은 일’을 하는 차원을 넘어섭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 신의 창조 동역자가 되어, 상처 입은 우주 자체를 치유하고 완성해나가는 가장 거룩하고 의미 있는 작업입니다. 우리의 삶은 더 이상 고립된 개인의 생존기가 아니라, 깨어진 세계를 향한 신의 사랑을 전하는 우리의 손길을 통해 완성되어 가는 위대한 회복의 서사입니다.









3-9.4. 파르추핌: 재구성된 신성의 얼굴들


그릇들이 산산이 부서진 뒤, 세계는 혼돈의 어둠 속에 잠겼습니다. 신성한 불꽃들은 클리포트 (Qliphoth) 라는 껍데기에 갇혀 흩어졌고,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루리아 카발라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셰비라트 하켈림 (Shevirat HaKelim) 이라는 파국 이후, 신은 파괴된 세피로트 (Sefirot) 들을 재구성하여 전혀 새로운 형태로 회복시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파르추핌 (Partzufim) 입니다. 파르추프 (Partzuf) 는 히브리어로 얼굴이나 인격체를 뜻하며, 세피로트들이 하나로 결합하여 완전한 영적 인격을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루리아는 세피로트가 단순히 추상적인 속성의 나열이 아니라, 살아 숨쉬고 서로 관계 맺는 인격적 존재들로 재탄생했다고 가르쳤습니다.


하임 비탈이 기록한 루리아의 가르침에 따르면, 셰비라 이전의 세피로트들은 각각 독립된 점으로 존재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연결되지 못했고, 그래서 아인 소프 (Ein Sof) 의 강렬한 빛을 견디지 못하고 깨졌습니다. 그러나 티쿤 (Tikkun) 의 과정에서 신은 이 파편들을 다시 모아, 이번에는 서로 연결되고 옷 입혀지는 새로운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열 개의 세피로트는 다섯 개의 주요 파르추핌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이들은 아티크 요민 (Atik Yomin), 아리크 안핀 (Arikh Anpin), 아바 (Abba) 와 이마 (Ima), 제이르 안핀 (Ze'ir Anpin), 그리고 누크바 (Nukva) 입니다. 각 파르추프는 여러 세피로트를 자신 안에 포함하면서도, 독자적인 인격과 역할을 지닙니다. 마치 인간의 몸이 여러 장기로 이루어져 있지만 하나의 인격체로 살아가듯이, 파르추핌은 세피로트들을 통합하여 하나의 살아있는 얼굴이 됩니다.


긴 얼굴과 작은 얼굴: 인내와 조급함의 대비


파르추핌 가운데 가장 중요한 두 인격은 아리크 안핀과 제이르 안핀입니다. 아리크 안핀은 긴 얼굴을 뜻하며, 케테르 (Kether) 의 파르추프입니다. 『조하르, Zohar』는 이를 무한한 인내를 지닌 신의 얼굴로 묘사합니다. 히브리 성경에서 신을 가리켜 에레크 아파임 (Erech Apaim), 즉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라고 부르는데, 아리크 안핀은 바로 이 속성을 구현합니다. 아리크 안핀의 긴 얼굴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피조물을 무한히 기다리고 품어주는 신성의 자비를 나타냅니다. 『조하르』의 이드라 라바 (Idra Rabba) 부분은 아리크 안핀의 수염 열세 가락 하나하나가 자비의 통로라고 가르칩니다. 각각의 수염은 신의 무한한 빛을 조절하여 하위 세계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반면 제이르 안핀은 작은 얼굴을 뜻하며, 헤세드 (Chesed) 에서 예소드 (Yesod) 까지 여섯 개의 세피로트로 이루어진 파르추프입니다. 제이르 안핀은 창조의 중심이자, 우리가 성경에서 만나는 인격적인 신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제이르 안핀은 아리크 안핀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급한 얼굴입니다. 작은 얼굴이라는 이름이 암시하듯, 제이르 안핀은 피조물의 죄와 불의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응합니다. 심판과 자비, 확장과 제한이라는 대립된 힘들이 제이르 안핀 안에서 끊임없이 충돌하고 조화를 이룹니다. 루리아의 체계에서 제이르 안핀은 아들의 역할을 맡습니다. 그는 상위 파르추핌인 아바와 이마로부터 빛을 받아, 이를 하위의 누크바에게 전달하는 중개자입니다.


아리크 안핀과 제이르 안핀의 관계는 마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같습니다. 아리크 안핀은 제이르 안핀을 자신 안에 감싸 안으며, 제이르 안핀이 세계를 다스릴 힘을 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아리크 안핀의 무한한 인내는 제이르 안핀의 조급한 심판을 완화시킵니다. 하임 비탈의 『에츠 하임 (Etz Hayyim)』은 이 두 얼굴이 서로 옷 입듯이 겹쳐 있다고 설명합니다. 제이르 안핀의 머리 부분이 아리크 안핀의 가슴 안에 자리하여, 상위의 자비가 항상 하위의 심판을 감싸고 있습니다. 이는 우주에 질서와 동시에 자비가 공존할 수 있는 비밀입니다.


아바와 이마, 그리고 성스러운 결합


카발라의 신성한 세계에서 아바 (Abba)와 이마 (Ima)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아바는 '아버지'를, 이마는 '어머니'를 뜻합니다. 이 둘은 신성한 지혜인 호크마 (Chokmah)와 신성한 이해인 비나 (Binah)가 인격처럼 나타난 거룩한 얼굴, 즉 파르추프 (Partzuf)입니다. 이 신성한 아버지는 순수한 지혜의 씨앗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성한 어머니는 그 씨앗을 자신의 자궁과 같은 이해 속에서 받아들여, 구체적인 형태를 갖춘 존재로 키워냅니다. 이들은 마치 부모가 제이르 안핀 (Zeir Anpin)과 누크바 (Nukva)라는 다음 세대의 파르추핌을 낳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루리아 카발라는 이 창조적인 과정을 지북 (Zivug)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이는 '성스러운 결합'을 의미합니다. 아바와 이마가 이 영적인 결합을 이룰 때, 위로부터 아래로 흐르는 빛이 생겨납니다. 이 빛을 오르 야샤르 (Or Yashar) 또는 '곧은 빛'이라고 부릅니다. 동시에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빛도 있습니다. 이 빛은 오르 호제르 (Or Chozer) 즉 '반사되는 빛'입니다. 이 두 가지 빛이 만나 새로운 생명의 빛을 낳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빛이 아들딸 격인 제이르 안핀과 누크바에게 흘러들어가, 그들에게 거룩한 생명력을 불어넣습니다.


신성한 어머니인 이마의 내부에는 또 다른 중요한 구조가 숨어 있습니다. 이 구조는 예쉬수트 (YESHSUT)라고 불립니다. 이 이름은 이스라엘 사바와 트부나 (Israel Saba and Tevunah)라는 두 개념을 합친 말이며, 어머니인 비나의 하위 영역을 가리킵니다.

예쉬수트는 신성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합하여 만든 빛을 아들인 제이르 안핀에게 전달하는 매우 중요한 통로입니다. 루리아의 가르침에 따르면, 예쉬수트는 하위 세계의 부름에 응답하는 특별한 영역입니다. 아버지 아바와 어머니 이마는 항상 완전한 결합 상태에 있습니다. 반면 예쉬수트는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인간의 염원을 받아들여 움직입니다. 인간의 간절한 기도와 선한 행위가 바로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물'이라는 뜻의 마인 누크빈 (Mayin Nukvin)입니다. 예쉬수트는 이 마인 누크빈을 받아들여 더 높은 곳으로 상승합니다. 이렇게 상승하면 지혜의 빛을 직접 받아, 그 풍성한 빛을 제이르 안핀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인간의 영적인 행위가 신성한 상위 세계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는 카발라의 핵심 가르침을 명료하게 보여줍니다.


신성한 아버지 아바와 어머니 이마의 결합은 우주의 모든 창조적 힘이 흘러나오는 근원입니다. 그들의 결합이 없다면, 제이르 안핀과 누크바 또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신성한 빛이 우리의 하위 세계로 흐를 수 있는 길도 완전히 막히게 됩니다. 위대한 책 『조하르, Zohar』는 이 두 존재의 결합을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랑의 행위로 아름답게 묘사합니다. 아바와 이마는 단 한 순간도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이 영원한 결합이 바로 모든 창조 세계의 생명력을 쉬지 않고 유지시킵니다. 이것은 단순한 신화적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는 신성한 세계 안에서 '지혜'와 '이해'가 어떻게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지를 보여주는 깊은 상징입니다. 이 둘의 상호작용을 통해 우주의 모든 새로운 통찰과 생명력이 끊임없이 탄생합니다.


누크바: 여성적 신성과 셰키나


누크바는 여성을 뜻하며, 말쿠트 (Malkhut)의 파르추프입니다. 누크바는 제이르 안핀의 짝이자, 상위 세계에서 흘러내린 모든 빛을 받아 우리가 사는 물질 세계에 전달하는 최종 통로입니다. 루리아 카발라에서 누크바는 딸의 역할을 맡습니다. 그녀는 제이르 안핀으로부터 태어났으며, 성장하여 그의 배필이 됩니다. 누크바의 상태는 우리 세계의 상태를 직접 반영합니다. 셰비라 이후 누크바는 제이르 안핀과 분리되어 추방당했고, 이 분리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고통과 불완전함의 근원입니다.


누크바는 카발라에서 셰키나 (Shekhinah), 즉 신의 임재와 동일시됩니다. 셰키나는 신성의 여성적 측면이며, 우주 안에 깃든 신의 현존입니다. 중세 카발라 사상가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유배와 고난을 셰키나의 추방으로 해석했습니다. 신의 남성적 측면인 제이르 안핀과 여성적 측면인 누크바가 분리됨으로써, 신성 자체가 분열을 경험하고 있다는 대담한 주장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회복인 티쿤 올람 (Tikkun Olam) 은 단순히 물질 세계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신성 내부의 분열을 치유하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누크바가 제이르 안핀과 결합할 때, 세상에 축복이 흘러듭니다. 이 결합은 안식일마다 일어나는 성스러운 사건입니다. 카발라 전통에서 안식일 저녁은 제이르 안핀과 누크바의 결합을 축하하는 시간입니다. 하임 비탈의 기록에 따르면, 인간의 선한 행위와 기도는 이 결합을 촉진하고 강화시킵니다. 특히 남편과 아내의 사랑 역시 위의 결합을 반영하고 강화하는 신성한 행위로 여겨집니다. 누크바는 가장 낮은 파르추프이지만, 동시에 모든 상위 파르추핌의 빛을 담아내는 가장 중요한 그릇입니다. 그녀 없이는 신성한 빛이 우리 세계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얼굴들이 전하는 희망


파르추핌 개념은 루리아 카발라의 혁명적 통찰입니다. 세피로트라는 정적이고 추상적인 구조를 살아있는 인격체로 전환함으로써, 루리아는 신과 세계의 관계를 역동적이고 친밀한 드라마로 재해석했습니다. 파르추핌은 서로 사랑하고, 결합하고, 낳고, 때로는 분리되어 고통받습니다. 이들의 관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인간의 행위에 따라 변화합니다. 우리의 기도와 계명 준수, 선한 행동 하나하나가 상위 파르추핌의 결합을 강화하고, 빛의 흐름을 증가시킵니다. 반대로 우리의 죄와 악행은 파르추핌 사이의 거리를 멀어지게 하고, 빛의 흐름을 막습니다.


파르추핌 개념이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희망입니다. 셰비라트 하켈림이라는 파국적 사건 이후에도, 신은 포기하지 않고 세계를 재구성했습니다. 파편들을 모아 새로운 형태를 만들고, 더 견고하고 아름다운 구조를 세웠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과 파괴, 실패와 좌절은 끝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더 높은 차원의 티쿤을 위한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루리아가 가르친 것처럼, 파괴된 그릇의 파편 안에는 여전히 신성한 불꽃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의 과업은 그 불꽃을 찾아내어, 새로운 빛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입니다.


파르추핌은 단순한 신학적 개념을 넘어, 관계의 신비를 드러냅니다. 아리크 안핀과 제이르 안핀의 관계는 무한한 자비와 제한된 심판 사이의 대화입니다. 아바와 이마의 결합은 지혜와 이해가 만나 새로운 생명을 낳는 창조의 비밀입니다. 제이르 안핀과 누크바의 사랑은 남성성과 여성성, 하늘과 땅이 하나 되는 완전한 결합의 이상입니다. 이 모든 관계는 우리 안에서도, 우리 사이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파르추핌의 드라마는 우리 각자의 내면에서 펼쳐지는 영혼의 드라마이며, 우리가 타인과 맺는 관계 속에서 구현되는 신성의 춤입니다. 루리아가 우리에게 보여준 이 살아있는 얼굴들을 통해, 우리는 신이 멀리 있는 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고통과 기쁨을 함께하는 친밀한 현존임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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