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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4장: 실천의 기술

by DrLeeHC

제6-14장: 실천의 기술



6-14.1. 카바나 (Kavvanah): 의도의 힘



몸짓 너머의 마음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행동을 반복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침대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옷을 입고 밥을 먹습니다. 출근길에 버스를 타고 사무실에 앉아 일을 하고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 모든 행동은 우리 삶을 이루는 필수적인 동작들이지만, 우리는 대부분 기계처럼 반복할 뿐입니다. 손은 움직이지만 마음은 딴곳을 향하고, 입은 말을 하지만 영혼은 그 의미를 잊습니다. 카발라 사상가들은 이러한 공허한 반복이야말로 가장 큰 영적 위기라고 보았습니다. 아무리 거룩한 행위라 해도 그 안에 마음이 없다면 껍데기일 뿐이며, 조하르 (Zohar)는 이를 영혼 없는 시체에 비유했습니다.


카바나 (Kavvanah)는 바로 이 공허함을 채우는 지혜입니다. 히브리어로 방향이나 목표를 뜻하는 이 단어는, 우리가 무엇을 하든 그 행위의 중심에 온전한 의도와 집중을 두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단순히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을 통해 무엇을 이루려 하는지를 명확히 알고 온 마음을 그곳에 모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기도를 할 때도, 입으로 말만 중얼거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금 신 앞에 서 있음을 깨닫고 그 거룩한 만남에 마음을 온전히 집중하는 것입니다. 12세기의 위대한 사상가 마이모니데스는 기도하기 전에 마음이 산란하다면 먼저 고요함을 되찾아야 하며, 경건한 사람들은 기도 전후로 각각 한 시간씩 명상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고 전합니다.


카발라 전통에서 카바나는 단순한 집중을 넘어 훨씬 더 깊은 차원으로 발전했습니다. 13세기 프로방스 학파의 맹인 이삭 (Isaac the Blind, 1160-1235경)과 제로나 학파의 스승들은 기도의 각 단어와 글자 속에 숨겨진 신비적 의미를 명상하는 구체적인 기법을 발전시켰습니다. 이들은 기도문의 표면적 의미만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세피로트 (Sefirot)의 신성한 흐름과 우주적 구조를 관조했습니다. 이러한 깊은 명상적 카바나를 복수형인 카바노트 (Kavvanot)라 부르는데, 이는 기도의 각 순간마다 특정한 영적 작용을 일으키기 위한 정밀한 의도들을 가리킵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마음의 힘


16세기 사페드에서 이삭 루리아는 카바나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습니다. 루리아는 올바른 카바나를 가진 기도와 계명의 실천이 단순히 개인의 영적 성장에만 그치지 않고, 실제로 상위 세계들을 변화시키며 우주적 복원인 티쿤 (Tikkun)을 이룰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는 혁명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 의도가 물질 세계를 넘어 신성의 영역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니까요. 루리아 학파는 기도의 각 단어마다 어떤 세피로트를 명상해야 하는지, 어떤 신의 이름들을 조합해야 하는지를 상세히 규정한 방대한 카바노트 체계를 발전시켰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실천하는 사람에게 엄청난 책임감과 동시에 놀라운 힘을 부여합니다. 내가 아침에 빵 한 조각을 먹으면서 그것이 나를 살리는 신의 선물임을 진심으로 깨닫고 감사한다면, 그 단순한 식사는 거룩한 의식으로 변화합니다. 내가 길에서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도울 때, 그 행위를 통해 흩어진 신성의 불꽃인 니초초트 (Nitzotzot)를 구출한다는 의도를 품는다면, 나의 작은 선행은 우주적 복원 작업의 일부가 됩니다. 하시디즘의 창시자 바알 솀 토브 (Baal Shem Tov, 1700경-1760)는 이러한 카바나의 실천을 평범한 사람들도 일상에서 행할 수 있도록 단순화했습니다. 그는 모든 행위에서 신의 현존을 느끼고 신과 하나 됨을 의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카바나는 결국 우리의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열쇠입니다. 같은 행동이라도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와 결과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카발라 수행자들은 카바나를 가진 의식이 마치 손처럼 작용하여 상위 세계들을 실제로 움직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깊은 집중을 통해 마음은 단순한 생각의 영역을 넘어 실제로 영적 힘을 발휘하는 도구가 됩니다. 물 한 잔을 마시면서도 그것이 내게 생명을 준다는 사실을 온전히 자각하고 감사한다면, 그 순간은 깊은 기쁨과 심지어 거룩함으로 가득 찰 수 있습니다.


의도가 만드는 일상의 기적


카바나의 핵심은 거창한 의식이나 복잡한 명상 기법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깨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과거의 후회나 미래의 걱정에 사로잡혀 현재를 놓칩니다. 손으로 설거지를 하면서도 머릿속은 내일 있을 회의를 걱정하고, 가족과 함께 식탁에 앉아서도 마음은 스마트폰 화면을 헤맵니다. 카발라는 이러한 분산된 의식 상태를 클리포트 (Qliphoth), 즉 신성한 빛을 가로막는 껍데기에 비유합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하지 않을 때, 우리는 삶의 진정한 의미와 단절됩니다.


카바나를 실천한다는 것은 일상의 모든 순간에 방향을 설정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오늘 하루를 신과 함께 걷겠다는 의도를 세웁니다. 출근길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의도합니다. 일을 하면서 이 노동이 세상에 어떤 선한 영향을 미칠지를 생각합니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시간을 보내면서 함께함의 소중함을 마음에 새깁니다. 이렇게 하나하나의 행동에 의식적인 방향을 부여할 때, 우리의 삶은 단순한 반복의 연속에서 벗어나 의미로 가득 찬 여정이 됩니다.


고대 랍비들이 카바나 없는 기도를 영혼 없는 육체에 비유한 것은 단순한 과장이 아닙니다. 형태만 있고 생명이 없는 것, 움직임만 있고 의미가 없는 것은 진정한 존재가 아닙니다. 카발라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 진정으로 살아 있습니까? 당신의 행동 속에 당신의 영혼이 함께 있습니까? 카바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며, 매 순간 깨어나 온전히 존재하겠다는 결단입니다. 이러한 의도의 힘을 통해 우리는 평범한 일상을 거룩한 실천으로 변화시킬 수 있고, 흩어진 자신을 하나로 모을 수 있으며, 나아가 파괴된 세계를 조금씩 복원해 갈 수 있습니다.












6-14.2. 기도와 의례 속의 신비



카바나의 개념과 기도의 신비적 의미


카발라 전통에서 기도는 단순히 신에게 무언가를 요청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매일 아침 유대인들이 입술로 되뇌는 기도문은, 카발라 사상가들의 눈에는 우주를 변화시키는 신성한 도구였습니다. 12세기 철학자 마이모니데스는 기도할 때 사람이 모든 세속적 관심을 완전히 떨쳐내고 신의 현존 앞에 자신을 두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카발라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기도는 신과 인간 사이의 일방적 대화가 아니라, 위와 아래를 잇는 야곱의 사다리이며, 흩어진 신성의 불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티쿤의 실천입니다.


카바나는 기도에 담아야 하는 순수한 의도와 집중을 뜻합니다. 탈무드는 일찍이 카바나 없는 기도를 영혼 없는 육체에 비유했습니다. 입으로는 기도문을 읽지만 마음이 딴 곳에 가 있다면, 그 기도는 텅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16세기 사페드의 신비가 이삭 루리아는 카바나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했습니다. 그는 올바른 카바나가 상위 세계에 영향을 미쳐 우주적 복원인 티쿤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는 기도가 단순한 종교적 의무를 넘어, 세상을 고치는 실천적 힘을 지닌다는 깨달음입니다.


루리아 학파는 카바나를 더욱 정교한 명상 체계로 발전시켰습니다. 그들이 개발한 카바노트는 기도문의 각 단어, 특히 신의 이름이 등장하는 부분마다 특정한 세피로트를 명상하는 기법입니다. 예를 들어, 아미다 (Amidah)라 불리는 열여덟 개의 축복 기도를 읽을 때, 카발라 수행자는 첫 단어부터 신성한 이름들이 지닌 신비적 의미를 떠올립니다. 테트라그라마톤 (YHVH)의 네 글자는 각각 특정한 세피로트와 연결되어 있으며, 이 글자들을 명상하는 것은 위의 세계와 아래의 세계를 하나로 묶는 행위입니다. 18세기 예루살렘의 위대한 카발라 사상가 샬롬 샤라비 (Shalom Sharabi, 1702-1777)는 이 체계를 극도로 정교하게 발전시켜, 기도문의 핵심 단어마다 만다라처럼 복잡한 명상 도표를 만들었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모인 베트 엘 학당에서는 아침 기도만 네 시간씩 걸렸습니다.


그러나 모든 카발라 전통이 이처럼 복잡한 길을 걷지는 않았습니다. 18세기 하시디즘의 창시자 바알 솀 토브 (Baal Shem Tov, 1700-1760)는 평범한 사람들도 실천할 수 있는 간결한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기도문 자체를 만트라처럼 사용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매일 똑같은 기도를 수천 번 반복하다 보면, 그 말들이 사람의 일부가 되어 더 이상 의식적 노력 없이도 입 밖으로 흘러나옵니다. 이때 마음을 완전히 비우고 기도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면, 높은 영적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탈무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눈을 아래로 향하되, 마음은 위를 향해야 한다고. 13세기의 랍비 요나 게론디 (Jonah Gerondi, 1196-1263)는 이 말을 이렇게 풀이했습니다. 마음속으로 자신이 하늘에 서 있다고 상상하고, 모든 세속적 즐거움과 육체적 욕망을 떨쳐내야 한다고. 초기 현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진정한 카바나를 얻으려면 육체에서 영혼을 분리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일상의 의례가 신성한 통로가 되는 순간


카발라는 기도만이 아니라 일상의 모든 의례를 신비적 실천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아침에 기도용 숄 (tallit, 탈리트)을 두르는 단순한 행위조차, 카발라 수행자에게는 깊은 명상의 기회가 됩니다. 17세기 카발라 사상가 나탄 샤피라 (Nathan Shapira)가 만든 명상문은 지금도 많은 유대인들이 사용합니다. 이 세상에서 탈리트로 내 몸을 감싸듯이, 내 영혼이 내세의 에덴동산에서 아름다운 옷을 입을 자격을 얻게 하소서. 이 기도에는 성경의 여러 구절이 얽혀 있습니다. 신의 날개 그늘 아래 피신한다는 말, 생명의 샘이라는 표현, 그리고 무엇보다 신이 자신의 신부인 이스라엘과 맺는 혼인이라는 이미지가 담겨 있습니다. 카발라 사상가들은 이 모든 표현 속에서 세피로트의 결합, 신성한 남성성과 여성성의 합일을 읽어냈습니다.


카발라가 유대교 예배에 끼친 영향은 실로 깊고 넓습니다. 그들은 전통 기도문 자체를 바꾸지는 않았지만, 그 속에 무수한 신비적 의미를 새겨 넣었습니다. 그 결과 일반 신도들조차 알게 모르게 카발라적 세계관을 흡수하게 되었습니다. 카발라 사상가들은 예배자의 생각을 기도의 참된 의미로 이끌기 위해 각종 의례 전에 짧은 명상문을 만들어 넣었습니다. 이 명상문들은 대부분 명확하게 기도의 중심 목표를 밝힙니다. 거룩하신 분과 셰키나를 하나로 만들기 위함이라고. 셰키나는 신의 여성적 측면이자 이 세상에 깃든 신의 현존입니다. 카발라 전통은 우주의 조화가 깨진 것을 인간의 기도와 의례를 통해 회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로쉬 하샤나 (Rosh Hashanah, 유대 새해)에 양의 뿔나팔인 쇼파르 (shofar)를 부는 의례도 카발라적 해석을 얻었습니다. 쇼파르를 불기 전에 읽는 명상문은 이 소리가 하늘로 올라가 사탄을 혼란에 빠뜨린다고 설명합니다. 하늘의 법정에는 일종의 검사 역할을 하는 천사가 있는데, 쇼파르의 날카로운 소리가 그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어 신의 자비가 승리하도록 돕는다는 것입니다. 이 신비적 개념은 그날 낭송하는 성경 구절들의 머리글자에도 숨어 있습니다. 그 머리글자들을 이으면 크라 사탄, 곧 사탄을 파괴하라는 말이 됩니다. 이처럼 카발라는 겉으로 보기에 평범한 의례 하나하나에 우주적 드라마를 담아냈습니다.


주요 명절에 토라를 궤에서 꺼낼 때 열세 가지 신의 속성을 낭송하는 관습도 카발라의 영향입니다. 출애굽기 34장에 나오는 이 구절들은 원래 신의 자비를 강조하는 내용이지만, 카발라 사상가들은 여기서 세피로트의 구조를 읽어냈습니다. 각 속성은 특정한 세피라와 대응하며, 이 구절을 낭송하는 것은 위의 세계에서 빛의 흐름을 여는 행위가 됩니다. 카발라는 이렇게 전통적 예배를 신비적 의례로 재해석하면서도, 평범한 신도들이 여전히 자신들의 방식대로 기도할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신비적 의미를 알지 못해도 진심으로 기도하면 그 자체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의미를 아는 이들에게는 매 순간의 기도가 우주를 고치는 신성한 작업이 됩니다.


말과 침묵 사이에서 피어나는 기도


카발라 전통에서 가장 신비로운 가르침 중 하나는, 진정한 기도는 말과 침묵 사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조하르』는 기도가 위로 올라가는 과정을 긴 담론으로 풀어냅니다. 기도는 단순히 인간의 입에서 나와 하늘로 날아가는 소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네 세계를 관통하며 올라가는 영적 여행입니다. 아시야 (Asiyah)의 물질 세계에서 시작하여, 예치라 (Yetzirah)의 형성 세계를 거쳐, 브리아 (Beriah)의 창조 세계를 지나, 마침내 아칠루트 (Atzilut)의 유출 세계에 이릅니다. 이 여정의 각 단계에서 기도는 다른 형태를 취하며, 더 순수한 빛으로 변화합니다.


『조하르』는 또한 안타까운 현실도 지적합니다. 회당에서 기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텅 빈 채로 걸어 나온다고. 그들의 기도가 로봇처럼 기계적으로 낭송되어, 카바나라는 의식적 명상 상태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진실이 결여된 기도는, 모든 단어를 정확히 발음했다 해도 하늘에 닿지 못합니다. 탈무드의 현자 엘리에제르 (Eliezer)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를 고정된 틀로 만드는 사람의 기도는 진정한 기도가 아니라고. 또 다른 현자 시므온 벤 네타니엘 (Shimon ben Nethaniel)은 덧붙였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은 제대로 집중할 수 없으므로, 사흘이 지나 마음이 안정된 뒤에 기도해야 한다고.


그렇다면 완전한 카바나 상태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기도하는 사람이 자신의 육체를 완전히 잊고, 영혼만이 신 앞에 서 있는 상태입니다. 14세기 랍비 야콥 벤 아셰르 (Jacob ben Asher, 1270-1343)는 자신의 법전 『투르, Tur, 법전』에서 이 경지를 생생하게 묘사했습니다. 기도할 때 사람은 마음을 온전히 집중해야 합니다. 입술로 표현하는 말 하나하나에 온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신의 현존이 자기 앞에 있음을 늘 의식해야 하며, 이는 시편 16편 8절의 말처럼 내가 늘 신을 내 앞에 두었노라는 자세입니다. 사람은 집중을 일깨우고 모든 방해되는 생각을 몰아내어, 기도 속의 생각과 의도가 순수해지도록 해야 합니다. 거룩한 사람들과 선행의 사람들은 이런 방식으로 실천했습니다. 그들은 기도하며 명상하고 집중하여 마침내 육체를 벗어던지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면 초월적 영이 그들 안에서 강해져서, 거의 예언에 가까운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구절은 16세기 요셉 카로 (Joseph Caro, 1488-1575)의 『술한 아룩, Shulchan Arukh, 차려진 식탁』에 그대로 인용되었고, 바알 솀 토브의 가르침에서도 언급됩니다. 이는 기도를 명상 도구로 사용하는 전통이 바알 솀 토브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훨씬 오래된 뿌리를 지녔음을 보여줍니다. 다만 바알 솀 토브는 이 전통을 누구나 접근할 수 있도록 단순화했습니다. 복잡한 카발라 개념에 집중하는 대신, 기도문 자체를 만트라로 삼아 온 마음을 말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가장 위대한 카발라 사상가부터 가장 단순한 사람까지 모두가 같은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카발라 전통은 또한 개인적 기도의 힘을 강조합니다. 정해진 예배문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로 신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더욱 강력합니다. 이런 기도는 아직 아무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여는 것과 같습니다. 『샤아르 루아흐 하코데쉬, Shaar Ruach HaKodesh, 거룩한 영의 문』는 설명합니다. 정해진 기도문을 읽을 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그 길을 지나갔기에, 때로 고발자들이 그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마음속에서 처음으로 만들어 표현하는 개인적 기도는 새로운 길이므로, 어떤 고발자도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정해진 기도와 간구도 조심스럽게 행해야 하지만, 자신만의 기도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처럼 카발라는 전통적 형식과 개인적 자발성, 말과 침묵, 육체와 영혼 사이의 섬세한 균형을 추구합니다. 그 균형 속에서 기도는 단순한 종교 의례를 넘어, 우주를 변화시키고 영혼을 고양시키는 신성한 예술이 됩니다.










6-14.3. 일상을 성화하는 법



카발라는 일상의 평범한 순간들을 신성으로 채우는 구체적인 길을 제시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부터 밤에 잠자리에 드는 것까지,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행위가 우주를 복원하는 티쿤 올람 (Tikkun Olam)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지혜의 핵심은 거창한 영적 수행이 아니라, 오히려 먹고 마시고 일하고 쉬는 평범한 순간에 깃든 신성의 불꽃을 알아보는 데 있습니다.


이삭 루리아의 가르침에 따르면, 셰비라 (Shevirah), 즉 그릇들이 깨어지는 우주적 파국 이후 신성의 불꽃인 니초초트 (Nitzotzot)가 온 세상에 흩어졌습니다. 이 불꽃들은 우리가 먹는 음식 속에도,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속에도, 심지어 우리가 겪는 고통 속에도 갇혀 있습니다. 카발라는 우리의 일상 행위가 바로 이 흩어진 불꽃을 구해내는 작업이라고 가르칩니다. 식사를 할 때 음식 속에 갇힌 신성의 불꽃을 해방시킬 수 있고, 타인과 대화할 때 그 사람 안에 숨은 신성을 일깨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카발라가 제시하는 일상의 영성입니다.


깨어남과 잠듦 사이의 신성


하루의 시작과 끝은 카발라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아침에 눈을 뜬다는 것은 단순히 생물학적 각성이 아니라, 영혼이 신성의 근원으로부터 다시 한 번 육체로 내려오는 순간입니다. 카발라 전통에서는 잠이 죽음의 육십분의 일에 해당한다고 가르칩니다. 밤마다 우리의 영혼은 육체를 떠나 상위 세계로 올라가고, 아침이 되면 다시 돌아옵니다. 그래서 아침에 처음 하는 기도인 모데 아니 (Modeh Ani)는 단순한 감사가 아니라, 영혼이 다시 내 안으로 돌아왔음을 인식하는 영적 각성입니다.


이 순간에 카바나 (Kavvanah), 즉 집중된 의도를 담는다면, 침대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행위가 네샤마 (Neshamah), 즉 고등영혼을 깨우는 거룩한 의식이 됩니다. 발을 바닥에 내딛을 때, 우리는 말쿠트 (Malkhut), 즉 물질 세계 속에 신성의 임재인 셰키나 (Shekhinah)가 함께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임 비탈의 『에츠 하임, Etz Hayyim』은 이러한 아침의 각성을 네 세계가 다시 하나로 연결되는 순간으로 묘사합니다. 우리가 의도를 담아 일어날 때, 아시야 (Asiyah)의 물질 세계가 예치라 (Yetzirah)의 형성 세계, 브리아 (Beriah)의 창조 세계, 그리고 아칠루트 (Atzilut)의 유출 세계와 다시 이어집니다.


밤에 잠자리에 드는 것 역시 영적 수행입니다. 잠들기 전 쉐마 기도 (Shema)를 외우는 전통은 단순한 의례가 아니라, 영혼을 안전하게 상위 세계로 보내는 준비입니다. 이때 우리는 하루 동안 저지른 잘못을 돌아보고, 내일을 위해 자신을 정화합니다. 카발라 전통에서는 잠들기 전에 자신이 모든 사람을 용서했음을 선언하고, 모든 이에게서 용서를 구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클리포트 (Qliphoth), 즉 악의 껍데기가 우리 영혼에 달라붙지 못하게 막습니다. 잠은 작은 죽음이지만, 동시에 영혼이 신성의 근원에서 새로운 힘을 얻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먹고 마시는 행위 속의 신성


카발라는 음식을 먹는다는 일상적 행위를 우주적 차원의 영적 작업으로 승화시킵니다. 모든 음식 속에는 창조 초기에 흩어진 신성의 불꽃이 갇혀 있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그 불꽃을 해방시켜 신성한 근원으로 되돌려 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동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단순히 배를 채우는 행위로는 불꽃이 해방되지 않고, 오히려 클리포트를 강화시킬 수 있습니다. 음식을 성화하려면 카바나, 즉 거룩한 의도가 필요합니다.


식사 전 축복 기도 (브라카, Berakhah)는 이러한 의도를 담는 도구입니다. 축복을 외울 때 우리는 이 음식이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신성의 빛을 담은 그릇임을 인식합니다. 이 인식이 있을 때, 음식을 씹고 삼키는 물리적 행위가 영적 차원에서는 말쿠트의 빛을 예소드 (Yesod)를 거쳐 상위 세피로트로 올려 보내는 작업이 됩니다. 『조하르, Zohar』는 올바른 의도를 가지고 먹는 사람을 제이르 안핀 (Ze'ir Anpin)과 누크바 (Nukva)의 신성한 결합인 지북 (Zivug)을 일으키는 존재로 묘사합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먹을 때, 하늘과 땅이 하나로 연결되고, 세상에 새로운 생명력이 흘러듭니다.


하시디즘에서는 이 가르침을 더욱 확장하여, 음식의 맛 자체가 신성한 즐거움의 표현이라고 가르칩니다. 바알 솀 토브 (Baal Shem Tov, 1700경-1760)는 음식이 맛있다고 느끼는 순간, 우리가 그 안에 갇힌 신성의 불꽃과 접촉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음식을 먹으면서 진정으로 기쁨을 느끼는 것이 오히려 더 높은 영적 행위가 됩니다. 이것은 금욕주의와는 정반대의 길입니다. 카발라는 물질 세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 속에 숨은 신성을 발견하고 해방시키는 길을 제시합니다. 먹는 즐거움을 신을 향한 감사와 결합할 때, 우리의 육체적 쾌락이 영적 기쁨으로 변환됩니다.


일과 관계 속의 티쿤


일상의 노동 역시 카발라에서는 영적 실천의 장이 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네페쉬 (Nefesh), 즉 생명혼의 차원에서 물질 세계를 변화시키는 행위입니다. 장인이 나무를 깎고, 농부가 땅을 갈고, 교사가 학생을 가르치는 모든 순간에 티쿤, 즉 세계의 복원이 일어납니다. 중요한 것은 일의 종류가 아니라 그 일을 하는 의도입니다. 가장 평범한 일이라도 거룩한 의도를 담으면 우주를 고치는 작업이 되고, 가장 고상해 보이는 일이라도 이기심으로 하면 클리포트를 강화시킵니다.


카발라는 특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타인을 대할 때 우리는 그 사람 속에 신성의 불꽃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루리아 카발라에서는 모든 영혼이 원래 아담 카드몬 (Adam Kadmon), 즉 원형적 인간의 하나였다가 셰비라로 인해 흩어졌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근원적으로 나와 하나였던 존재입니다. 이 깨달음이 있을 때, 자비로운 말 한마디, 진심 어린 경청, 작은 친절이 모두 흩어진 영혼의 조각들을 다시 연결하는 티쿤이 됩니다.


하시디즘에서는 타인과의 만남 자체가 우연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오늘 내가 만난 사람은 내 영혼이 복원해야 할 특정한 불꽃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영적 과제입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화를 내거나 상처를 줄 때, 나는 그 안에 갇힌 불꽃을 더 깊은 곳에서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카발라가 제시하는 관계의 영성입니다. 사랑하기 쉬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시작일 뿐이고, 진정한 티쿤은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 속에서도 신성을 발견할 때 완성됩니다.


평범함 속의 거룩함


카발라의 가장 혁명적인 가르침은 거룩함이 비범한 곳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셰키나는 먼 하늘에만 있지 않고 내가 딛고 서 있는 이 땅에 함께합니다. 신비로운 명상이나 황홀한 체험이 아니더라도, 순수한 의도를 담아 하루를 사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세상을 고치는 일에 참여합니다. 미츠보트 (Mitzvot), 즉 계명 613가지는 이러한 일상의 성화를 위한 구체적인 안내입니다. 각 계명은 특정한 불꽃을 해방시키고, 특정한 세피로트를 활성화하며, 특정한 우주적 결합을 일으킵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카발라의 일상 영성은 새로운 의미를 지닙니다. 종교적 계율을 모두 지키지 않더라도, 카발라의 핵심 통찰을 일상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아침에 감사하며 일어나고, 음식을 먹을 때 그 안의 생명력을 느끼고, 타인을 대할 때 그 속의 신성을 존중하고, 일을 할 때 세상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는 의도를 담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 때, 평범한 하루가 거룩한 의식이 되고, 우리의 존재 자체가 흩어진 세계를 하나로 묶는 티쿤 올람의 실천이 됩니다. 카발라는 우리에게 특별한 곳으로 가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이 자리에서, 지금 이 순간에, 일상의 평범함 속에 숨은 거룩함을 발견하라고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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