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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5장: 명상과 예언: 아브라함 아불라피아

by DrLeeHC

제6-15장: 명상과 예언: 아브라함 아불라피아



6-15.1. 예언적 카발라의 탄생



13세기 스페인의 사라고사에서 한 청년이 세상에 눈을 떴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브라함 아불라피아였습니다. 그는 카발라의 역사에 전혀 새로운 물결을 일으킬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당시까지 카발라는 세피로트의 구조와 우주의 신비를 탐구하는 학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불라피아는 전혀 다른 질문을 던졌습니다. 지식으로 신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직접 신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예언자들이 누렸던 그 황홀한 체험을, 우리도 다시 맛볼 수 있지 않을까? 이 대담한 질문이 예언적 카발라를 낳았고, 이는 카발라 전통에 완전히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아불라피아의 삶은 처음부터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열여덟 살에 아버지를 여읜 그는 곧바로 방랑의 길에 올랐습니다. 1260년, 스무 살의 청년은 전설 속의 삼바티온 강과 잃어버린 열 지파를 찾겠다는 꿈을 안고 이스라엘 땅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십자군 전쟁의 상처가 아직 채 아물지 않은 그곳에서, 그는 아코 (Akko) 이상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황폐한 땅은 그의 낭만적 모험을 거부했습니다. 그는 다시 유럽으로 돌아왔고,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거치며 철학과 신비주의를 배웠습니다. 이 긴 방랑 속에서 그는 단순한 학자가 아니라, 예언자를 꿈꾸는 신비가로 변모해갔습니다.


1270년대 초반, 아불라피아는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정착하여 본격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제시한 방법은 기존 카발라와 전혀 달랐습니다. 세피로트의 신학적 구조를 명상하는 대신, 그는 히브리 문자 자체를 명상의 도구로 삼았습니다. 알레프, 베트, 기멜로 시작하는 스물두 개의 히브리 문자를 끊임없이 조합하고 해체하며, 의식을 변화된 상태로 이끄는 것입니다. 이 기법을 체루프 오티요트 (Tzeruf Otiyyot), 즉 문자의 조합이라 불렀습니다. 마치 만화경이 조각난 유리들을 돌려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내듯, 문자들을 순환시키며 의식의 벽을 허물고 신성과 직접 대면하려 했습니다.


아불라피아는 자신의 방법이 단순한 지적 유희가 아니라 실제로 예언적 의식에 도달하는 기술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모세 마이모니데스의 철학을 받아들여, 예언이란 인간의 지성이 능동 지성 (Active Intellect)과 결합할 때 일어난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마이모니데스가 예언을 먼 과거의 일로 여긴 반면, 아불라피아는 올바른 수행을 통해 누구나 그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실제로 자신이 체험한 환상과 계시를 생생하게 기록했습니다. 문자들이 춤추고, 빛이 쏟아지며, 자아의 경계가 사라지는 그 순간을 그는 예언이라 불렀습니다.


히타보데두트 (Hitbodedut)라는 고독한 집중의 수행이 그의 명상법의 핵심이었습니다. 이 말은 원래 홀로 떨어져 있음을 뜻했지만, 아불라피아에게는 외적 고독을 넘어 내적 집중의 기술을 의미했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조용한 방에 홀로 앉아, 신의 이름들을 반복하며 문자를 조합하고, 호흡을 조절하며 머리를 움직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특히 테트라그라마톤 (Tetragrammaton), 즉 네 글자 신의 이름 YHVH를 명상의 중심에 두었습니다. 이 네 글자를 수없이 다양하게 치환하고 결합하며, 그 안에 담긴 우주의 비밀을 직접 체험하려 했습니다. 그의 명상법은 단순히 사색이 아니라, 몸과 호흡과 소리를 모두 동원하는 총체적 수행이었습니다.


1280년, 아불라피아는 자신의 확신을 극단까지 밀고 나갔습니다. 그는 로마로 가서 교황 니콜라스 3세를 만나 유대교로 개종시키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대담무쌍한 시도는 당연히 재앙을 불러왔습니다. 교황은 그를 즉시 화형에 처하라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기적처럼, 아불라피아가 로마에 도착한 바로 그날인 8월 22일, 교황이 갑작스러운 뇌졸중으로 쓰러졌습니다. 아불라피아는 한 달간 투옥되었다가 풀려났지만, 이 사건은 그를 유대 공동체에서도 더욱 위험한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바르셀로나의 저명한 랍비 슬로모 벤 아드레트 (Shelomoh ben Avraham Adret)는 아불라피아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그의 가르침이 공동체에 퍼지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결국 아불라피아는 스페인을 떠나 시칠리아의 메시나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1281년부터 1291년까지 약 10년간 머물며, 스스로를 예언자이자 메시아의 선구자로 제시했습니다. 제자들이 모여들었고, 그의 가르침은 조용히 퍼져나갔습니다. 하지만 팔레르모의 유대 공동체는 그를 격렬히 비난했고, 아불라피아는 다시 떠돌이 신세가 되었습니다. 1285년에서 1288년 사이, 그는 몰타 근처의 작은 섬 코미노에서 자신의 저서 『오트의 책, Sefer haOt』을 완성했습니다. 1291년, 그는 마지막 저작 『아름다운 말씀들, Imrei Shefer』을 남겼고, 그 이후 모든 흔적이 사라졌습니다. 아마도 그 작은 섬 어딘가에서 홀로 생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아불라피아의 삶은 비극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는 생전에 공동체로부터 배척당했고, 스페인에서는 그의 책들이 거의 읽히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중동과 이스라엘에서는 달랐습니다. 그의 저서들은 은밀히 필사되어 전해졌고, 아이작 벤 사무엘 오브 에이커 (Isaac ben Samuel of Acre, 1250-1340), 예후다 알보티니 (Yehudah Albotini), 그리고 하임 비탈과 같은 후대 카발리스트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16세기 사페드의 카발리스트들인 모세 코르도베로와 하임 비탈은 아불라피아의 명상 기법을 자신들의 신비주의에 통합했습니다. 18세기 하시디즘의 창시자 바알 쉠 토브 (Baal Shem Tov, 1700경-1760)의 가르침에서도 아불라피아의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데베쿠트 (Devekut), 즉 신과의 달라붙음을 강조한 하시디즘의 영성은 아불라피아가 추구했던 직접적 합일의 체험과 깊이 닿아 있습니다.


아불라피아가 세상에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카발라가 단순히 알아야 할 교리가 아니라 직접 체험해야 할 길이라는 통찰입니다. 그는 세피로트의 신학적 체계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려 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우주의 구조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이 신성과 하나 되는 순간을 맛보는 것이었습니다. 문자와 숨결과 침묵을 통해, 그는 잃어버린 예언의 문을 다시 열려 했습니다. 비록 그의 삶은 고독했지만, 그가 닦아놓은 길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걸을 수 있는 길로 남아 있습니다.









6-15.2. 문자 조합 명상: 체루프 오티요트



아불라피아가 개발한 문자 조합 명상, 체루프 오티요트 (Tzeruf Otiyyot)는 언어를 통해 신성에 직접 닿으려는 대담한 시도였습니다. 히브리 문자들을 끊임없이 조합하고 치환하면서 의식을 변화시키는 이 수행법은, 카발라 역사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체계적인 명상 기법 가운데 하나로 자리합니다. 체루프 (Tzeruf)라는 말 자체가 조합, 뒤섞임, 정제라는 여러 의미를 담고 있듯이, 이 수행은 문자를 조합하고 순열을 만들어 내면서 동시에 수행자의 의식을 정화하고 변화시킵니다.


아불라피아는 히브리 문자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창조의 원리 자체를 담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우주가 신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면, 그 말씀을 이루는 문자 하나하나가 창조의 힘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는 『세페르 예치라, Sefer Yetzirah』의 가르침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발전시켜, 22개의 히브리 문자와 10개의 세피로트가 우주를 만들어낸 32가지 지혜의 길이라는 사상을 명상 수행으로 구체화했습니다. 문자를 조합하는 사람은 우주를 창조한 그 힘을 자신의 의식 안에서 다시 작동시키는 것이며, 이를 통해 신의 창조 행위에 동참합니다. 시편 18장 31절의 "신의 길은 완전하고, 신의 말씀은 체루파 (tzerufah, 정제되었다)"라는 구절을 아불라피아는 문자의 조합과 순열을 통해 영적 완성에 이르는 길을 가리키는 예언으로 읽었습니다.


문자 조합의 구체적 실천


체루프 오티요트는 단순히 머릿속으로 문자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세 단계를 거쳐 온몸으로 실천하는 명상입니다. 첫 단계는 문자를 종이에 써서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신의 이름, 특히 네 글자로 된 테트라그라마톤 (YHVH)의 문자들을 다양한 순서로 배열하여 적고, 이를 집중해서 응시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그 문자들을 소리 내어 발음하는 것입니다. 히브리 문자는 자음이므로, 다섯 가지 모음 (홀람, 카메츠, 체레, 히렉, 슈렉)을 차례로 결합하여 모든 가능한 소리 조합을 만들어냅니다. 세 번째 단계는 머릿속으로 문자를 떠올리며 순수하게 정신적으로 조합하는 것입니다. 이 세 단계는 감각에서 상상으로, 다시 순수한 지성으로 올라가는 의식의 상승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아불라피아는 문자 조합과 함께 호흡법과 신체 동작을 결합했습니다. 각 모음을 발음할 때마다 특정한 방식으로 숨을 쉬고, 모음의 형태에 따라 머리를 움직입니다. 호흡 사이의 간격도 정해져 있어서, 문자 사이에는 몇 번의 호흡을, 줄 사이에는 더 많은 호흡을 두어야 합니다. 이러한 정밀한 기법은 의식을 일상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게 만듭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문자 조합과 소리의 흐름은 마음을 이완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도로 각성시키며, 단조로운 반복이 역설적으로 의식을 흥분시킵니다. 아불라피아는 이를 음악에 비유했습니다. 음악가가 악기의 현을 하나씩 튕기며 다양한 소리를 조합해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내듯이, 문자 명상을 하는 사람은 신성한 문자들을 조합하며 영혼의 깊은 조화를 경험합니다.


의식의 해체와 재구성


체루프 오티요트의 진정한 목적은 단순히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 수행은 일상적 언어가 갖는 고정된 의미의 틀을 무너뜨리고, 의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평소 단어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분류하며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러나 체루프를 통해 단어를 해체하여 문자들의 순수한 흐름으로 되돌리면, 고정된 의미의 감옥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문자는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한한 의미의 가능성으로 열립니다. 아불라피아는 이 과정을 통해 수행자가 언어 이전의 순수한 창조의 영역에 닿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문자 조합이 깊어지면, 수행자는 일곱 개의 영적 궁전, 헤이칼로트 (Heikhalot)를 차례로 통과하는 체험을 합니다. 각 단계마다 의식은 더 정제되고 확장되며, 마침내 일곱 번째 궁전에서 세켈 하포엘 (Sechel HaPoel), 곧 능동 지성과 하나가 됩니다. 이는 마이모니데스에게서 빌려온 신플라톤주의적 개념이지만, 아불라피아는 이를 단순한 철학적 사유가 아니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예언적 의식 상태로 변형시켰습니다. 문자들의 조합은 사다리가 되어, 수행자를 하늘과 땅 사이에 걸친 야콥의 사다리처럼 신성한 영역으로 인도합니다. 자아는 점차 녹아내리고, 신의 목소리가 내면에서 직접 말하기 시작합니다.


아불라피아는 자신의 체험을 『세페르 하오트, Sefer HaOt』, 곧 표징의 서에 기록했습니다. 이 책은 단순한 이론서가 아니라 신비 체험의 살아있는 증언입니다. 때로 페이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자들의 흐름으로 채워지는데, 이는 암호도 횡설수설도 아닙니다. 이는 창조가 개념으로 굳어지기 이전의 날것 그대로의 신성한 언어이며, 우주의 DNA와도 같은 근원적 패턴입니다. 문자 조합을 통해 수행자는 자신의 가장 깊은 본성을 알게 되며, 동시에 우주 전체의 비밀이 펼쳐지는 것을 목격합니다.


현대적 울림


아불라피아의 문자 조합 명상은 현대의 여러 영적 수행과 놀라운 유사성을 보입니다. 만트라를 반복하는 동양의 명상, 호흡과 소리를 결합하는 수피즘의 지크르, 언어를 해체하여 새로운 의식 상태에 이르는 현대 심리학의 기법들이 모두 체루프의 원리와 만납니다. 문자를 조합하고 변형하는 행위는 마치 컴퓨터 프로그래밍처럼 의식의 기본 코드를 재배열하는 작업이며, 이를 통해 새로운 현실을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아불라피아가 13세기에 고안한 이 수행법은 여전히 살아있는 지혜로서, 언어와 의식, 신성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깊은 통찰을 선사합니다.










6-15.3. 신의 이름들과 히타보데두트



신의 이름들이 품은 우주


아불라피아의 명상 체계에서 신의 이름들은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각각의 이름은 신성이 세계에 드러나는 특정한 통로이자, 우주를 구성하는 실재의 층위입니다. 신의 이름을 명상한다는 것은 그 이름이 담고 있는 영적 에너지와 직접 접촉하는 행위입니다. 아불라피아는 제자들에게 네 가지 주요한 신의 이름을 명상의 중심으로 삼도록 가르쳤습니다.


테트라그라마톤 (Tetragrammaton, YHVH)은 네 개의 히브리 문자로 이루어진 가장 거룩한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너무나 신성하여 함부로 발음할 수 없었고, 기도할 때조차 아도나이 (Adonai, 주님)로 대신 읽었습니다. 아불라피아는 이 네 글자가 우주 전체의 구조를 담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케테르 (Keter, 왕관)에서 말쿠트 (Malkhut, 왕국)까지 이르는 열 개의 세피로트 (Sefirot)가 모두 이 네 글자 안에 압축되어 있으며, 글자들의 조합과 순서는 신성한 힘이 흐르는 방식을 드러냅니다. 명상자는 이 네 글자를 여러 방식으로 조합하며 묵상함으로써, 신성의 빛이 세계로 흘러내리는 과정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아도나이는 인간이 신에게 다가가는 첫 번째 문입니다. 이 이름은 말쿠트와 연결되어 있어, 우리가 사는 물질 세계와 가장 가까운 신성의 얼굴입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모든 신성한 흐름이 아도나이라는 저장고에 모이며, 이를 통해 온 세상이 양육됩니다. 아불라피아는 제자들에게 아도나이를 명상의 시작점으로 삼도록 가르쳤습니다. 테트라그라마톤에 직접 도달하는 길은 없으며, 반드시 아도나이를 거쳐야만 신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이름을 통해 명상자는 신성한 임재가 자신의 일상에 깃들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엘로힘 (Elohim)은 신을 뜻하는 복수형 이름이며, 비나 (Binah, 이해)와 연결됩니다.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에서 이 이름이 사용되는데, 카발라에서는 엘로힘이 신의 창조 능력과 심판의 속성을 나타낸다고 가르칩니다. 아불라피아는 이 이름이 32가지 지혜의 길을 담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명상자가 이 이름을 깊이 묵상하면, 우주가 어떻게 무에서 유로 창조되었는지를 통찰하게 됩니다. 에헤예 (Ehyeh)는 나는 있다를 뜻하며, 케테르와 연결되는 이름입니다. 출애굽기에서 신이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할 때 사용한 이름으로, 존재 그 자체의 신비를 담고 있습니다. 모든 흐름이 이 이름에서 시작하여 아도나이로 전달됩니다. 이 이름을 명상하는 것은 존재의 근원 자체와 만나는 경험입니다.


히타보데두트, 내면의 고립


히타보데두트 (Hitbodedut)는 카발라 명상 전통에서 가장 핵심적인 용어이지만, 그 의미는 단순한 번역으로는 담아낼 수 없습니다. 히브리어 어근 바다드 (Badad)는 고립되다, 홀로 있다를 뜻합니다. 겉으로 보면 히타보데두트는 물리적 고독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많은 명상자들이 숲 속이나 동굴, 조용한 방에서 홀로 명상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아불라피아와 카발라 전통에서 히타보데두트가 의미하는 것은 훨씬 더 깊습니다.


히타보데두트의 진정한 의미는 의식의 고립, 즉 자아의 가장 본질적인 핵심을 모든 생각과 감각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내면의 작업입니다. 하임 비탈은 자주 이러한 정신적 고립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는 명상자가 자신의 본질을 생각으로부터 철저하게 격리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영혼을 육체로부터 분리하여, 더 이상 자신의 물리적 존재와 아무런 관계를 느끼지 않는 상태에 이르러야 합니다. 영혼이 이렇게 고립되면, 비탈의 말처럼 물리적인 것으로부터 더 많이 분리될수록 더 큰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이 정신적 고립의 상태는 예언적 경험에 매우 중요합니다. 중세 유대 철학자 레비 벤 게르숀 (Levi ben Gershon, 1288-1344)은 예언적 계시를 얻기 위해서는 의식을 상상력으로부터 고립시켜야 하며, 이 둘을 다른 지각적 정신 능력들로부터도 분리시켜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아불라피아의 동시대인이었던 이삭 오브 아코 (Isaac of Acco)도 같은 정의를 사용했습니다. 예언을 추구하는 이들에 대해 말하면서, 그는 히타보데두트의 조건을 충족시키면 감각들이 무효화되고, 영혼의 사고 과정이 모든 지각으로부터 분리되며, 영혼이 초월적인 영적 본질로 입혀진다고 썼습니다.


아브라함 마이모니데스는 이를 더욱 명확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는 히타보데두트에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외적 히타보데두트는 물리적 고립에 불과하며, 이것은 명상을 하고자 할 때 일반적으로 바람직합니다. 반면 내적 히타보데두트는 영혼을 지각 능력으로부터 고립시키는 것입니다. 마음이 이렇게 완전히 잠잠해지면, 비로소 영적 영역을 지각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히타보데두트라는 단어는 주로 영혼이나 자아를 모든 외부 및 내부 자극으로부터 고립시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를 성취하기 위해 사용되는 모든 방법과 수행도 히타보데두트라고 불립니다.


이름과 고립이 만나는 자리


아불라피아의 명상 체계에서 신의 이름들과 히타보데두트는 하나로 결합됩니다. 명상자는 먼저 물리적으로 고립된 공간에서 자리를 잡습니다. 그런 다음 호흡을 고르게 하고 마음을 가라앉히며, 점차 내적 고립의 상태로 들어갑니다. 모든 일상적 생각과 감정, 육체적 감각이 멀어지면, 명상자는 선택한 신의 이름을 마음속에 떠올립니다. 처음에는 그 이름의 문자들을 하나씩 천천히 발음하며 묵상합니다. 이름의 각 문자가 품고 있는 수치 값과 그것이 연결된 세피로트를 떠올립니다.


명상이 깊어지면, 명상자는 그 이름의 문자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하기 시작합니다. 체루프 (Tzeruf) 기법을 통해 문자들을 바꾸고 뒤섞으며, 새로운 조합들이 만들어내는 소리와 의미를 관조합니다. 이 과정에서 일상적인 언어의 의미는 해체되고, 순수한 소리와 형태의 영역으로 들어갑니다. 명상자의 의식은 점점 더 깊은 고립 상태로 침잠하며, 신의 이름이 품고 있는 영적 에너지와 직접 접촉하게 됩니다. 그 이름이 세계에 드러내는 특정한 신성의 얼굴이 명상자의 의식 안에서 빛을 발합니다.


아불라피아는 제자들에게 이 명상을 수행할 때, 자신이 신의 이름과 하나가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명상자는 더 이상 이름을 바라보는 관찰자가 아니라, 이름 그 자체가 됩니다. 자아의 경계가 사라지고, 신성의 빛이 영혼 안에서 직접 빛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언적 의식의 문턱입니다. 이 상태에 이르면, 명상자는 신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경험하며, 숨겨진 지혜들이 마음속에 흘러들어 옵니다. 이것이 히타보데두트와 신의 이름들이 만나 이루어내는 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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