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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17장: 동양의 빛: 불교, 도교와의 조우

by DrLeeHC

제 7부: 보편적 지혜의 대화



제7-17장: 동양의 빛: 불교, 도교와의 조우




7-17.1. 아인 소프와 공성 (空性): 무한과 공



하나의 진실을 향한 두 갈래 길


카발라의 아인 소프와 불교의 공성은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 속에서 태어났지만, 놀랍도록 유사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마치 서로 다른 두 등산객이 산의 동쪽과 서쪽에서 출발하여 정상에서 만나듯이, 동서양의 현자들은 같은 진리에 도달했습니다.


첫째, 두 개념 모두 궁극의 실재는 인간의 언어와 개념으로 포착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아인 소프를 설명하려는 순간 이미 그것은 아인 소프가 아니며, 공성을 말로 규정하려는 순간 이미 그것은 공성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손으로 물을 움켜쥐려 하면 물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붙잡으려는 순간 놓치게 됩니다.


둘째, 두 개념 모두 부정의 언어를 통해 말할 수 없는 것을 암시합니다. 카발라는 무엇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아인 소프를 가리키고, 불교는 어떤 실체도 없다고 말함으로써 공성을 드러냅니다. 이것은 마치 어둠 속에서 손전등으로 비추지 않는 부분을 통해 그림자의 형태를 알아내는 것과 같습니다. 직접 말할 수 없으니,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는 것입니다.


셋째, 두 개념 모두 고정된 경계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무한한 가능성이 열린다고 말합니다. 아인 소프는 무한하기에 모든 창조가 가능하고, 공성은 실체가 없기에 모든 변화가 가능합니다. 만약 신이 하나의 고정된 모습을 가졌다면, 다양한 세상은 창조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모든 것에 변하지 않는 실체가 있다면, 씨앗이 나무로 자라는 것도,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넷째, 두 개념 모두 이 깨달음이 자비롭고 정의로운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카발라의 티쿤 올람과 불교의 보살도는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둘 다 깨달음이 나 홀로의 영적 만족에 그치지 않고, 고통받는 세상을 치유하는 구체적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신비적 체험과 사회적 책임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유사성은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인간이 궁극의 실재를 탐구할 때, 문화와 종교의 차이를 넘어 비슷한 통찰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산의 정상은 하나인데, 그곳에 이르는 길이 여러 갈래일 뿐입니다. 어떤 이는 가파른 바위길을 타고 오르고, 어떤 이는 완만한 숲길을 걸어 오르지만, 결국 도착하는 곳은 같은 정상입니다.


동서양의 신비주의 전통들은 모두 표면적인 차이 너머에 하나의 진실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기독교의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Meister Eckhart, 1260-1328)는 신을 무 (無)라고 불렀고, 이슬람의 수피 (Sufi) 신비가들은 신을 자아의 소멸 (fanā, 파나) 속에서 만난다고 가르쳤습니다. 힌두교의 아드바이타 베단타 (Advaita Vedanta)는 브라흐만 (Brahman)이 니르구나 (Nirguna), 즉 속성 없음이라고 말했습니다. 도교의 『도덕경, Tao Te Ching』은 도 (道)를 이름 붙일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라고 시작합니다.


이 모든 전통이 같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궁극의 실재는 우리의 개념과 언어를 넘어서 있으며, 그것을 체험하는 것이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의미라고 말입니다. 아인 소프와 공성이라는 두 이름은 같은 달을 가리키는 서로 다른 손가락과 같습니다. 히브리어와 산스크리트어라는 다른 언어로, 카발라와 불교라는 다른 전통 안에서, 하지만 같은 진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손가락에 집착하지 않고 그것이 가리키는 달을 바라본다면, 동서양의 지혜가 결국 하나로 만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법구경, Dhammapada』은 많은 길이 있지만 진리는 하나라고 말했고, 유대교의 탈무드 (Talmud)는 진리의 인장은 하나라고 가르쳤습니다. 아인 소프와 공성의 만남은 이 하나의 진리를 증언합니다.


이 깨달음은 오늘날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종교와 문화의 차이 때문에 갈등하고 다투는 세상에서, 서로 다른 전통들이 근본에서는 같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큰 치유가 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같은 진실을 다른 이름으로 부를 뿐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같은 정상을 향해 다른 길로 오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카발라를 공부하는 이는 불교에서 배울 것이 있고, 불교를 수행하는 이는 카발라에서 얻을 것이 있습니다. 한 전통의 언어가 막힐 때, 다른 전통의 언어가 길을 열어줄 수 있습니다. 아인 소프라는 말이 와닿지 않을 때 공성을 생각하면 이해가 깊어지고, 공성이 너무 추상적으로 느껴질 때 아인 소프를 떠올리면 구체성을 얻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이 두 지혜의 만남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의 전통 안에 갇혀 살 필요가 없습니다. 인터넷과 번역 기술 덕분에 우리는 인류 전체의 지혜 유산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중세 유럽의 카발라 사상가들은 불교를 알지 못했고, 고대 인도의 불교 철학자들은 카발라를 접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두 보물을 함께 품을 수 있는 축복받은 세대입니다.


이것은 종교적 혼합주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각 전통의 고유한 맥락과 실천을 존중하면서도, 그들이 가리키는 궁극의 진실이 하나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여전히 유대인으로서 아인 소프를 명상하고, 불교도는 여전히 불교도로서 공성을 수행합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서로가 적이 아니라 같은 산을 오르는 동반자임을 압니다.


한국의 불교 전통은 오랫동안 회통 (會通)의 정신을 강조해왔습니다. 원효 대사는 화쟁 (和諍) 사상을 통해 서로 다른 불교 학파들의 논쟁을 조화시켰고, 지눌 (知訥, Jinul, 1158-1210)은 돈오점수 (頓悟漸修)로 선종과 교종의 대립을 넘어섰습니다. 이 회통의 정신을 확장한다면, 불교와 카발라의 대화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진리는 하나이되 그 표현은 다양하다는 것, 이것이 바로 한국 불교가 오랫동안 지켜온 지혜입니다.


서양에서도 이러한 대화가 활발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20세기 후반부터 유대교 랍비들과 티베트 불교 스승들 사이의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1990년대 달라이 라마 (Dalai Lama, 1935-)와 유대교 랍비들의 만남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달라이 라마는 유대 민족이 2000년 넘게 디아스포라 (diaspora, 흩어짐) 속에서도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을 배우고 싶어 했고, 랍비들은 불교의 명상 전통에서 영적 깊이를 발견했습니다. 이 만남에서 양측은 서로의 전통이 놀랍도록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이러한 대화는 단지 학문적 호기심이 아니라 실존적 필요에서 비롯됩니다. 현대인들은 자신이 태어난 종교 전통만으로는 충분한 영적 자양분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구에서 태어난 많은 이들이 동양 종교에서 명상의 기법을 배우고, 동양에서 태어난 이들이 서구 신비주의에서 새로운 통찰을 얻습니다. 이것은 배신이 아니라 확장입니다. 자기 뿌리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뿌리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다른 나무들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현대 카발라 수행자들이 불교 명상을 배우고 있고, 많은 불교 수행자들이 카발라의 생명나무 명상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두 전통이 서로 모순되지 않으며, 오히려 서로를 비추어주는 거울이 됨을 발견합니다. 아인 소프를 명상하다가 막힐 때 공성의 관점이 돌파구를 제공하고, 공성을 관찰하다가 건조해질 때 아인 소프의 무한한 사랑이 온기를 더해줍니다.


이것은 앞으로 인류 영성의 중요한 방향이 될 것입니다. 배타적인 진리 주장에서 벗어나, 다양한 전통들이 서로 배우고 풍요로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종교 다원주의라고 부르든, 보편 영성이라고 부르든, 이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인 소프와 공성이 보여주듯이, 인류의 위대한 영적 전통들이 모두 같은 진실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인식이 차이를 무시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차이를 존중하면서도 그 너머의 일치를 보는 것입니다. 카발라는 유대교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고, 불교는 인도와 아시아의 맥락 속에서 그 깊이가 드러납니다. 이 특수성을 제거하고 추상적인 보편성만 남기면, 생명력 없는 껍데기만 남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깊이 있는 대화입니다. 피상적인 유사성만을 찾는 것이 아니라, 각 전통의 깊이를 존중하면서 그 깊이가 어디로 향하는지를 함께 탐구하는 것입니다. 아인 소프와 공성은 그러한 대화의 훌륭한 출발점입니다. 두 개념 모두 각자의 전통에서 가장 심오한 가르침에 속하며, 동시에 놀라운 유사성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 대화를 통해 우리는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카발라만 공부하는 사람은 자기 전통의 특정한 측면에만 익숙할 수 있지만, 불교와의 비교를 통해 자기 전통의 보편적 차원을 발견합니다. 불교만 수행하는 사람은 공성을 하나의 방식으로만 이해할 수 있지만, 카발라와의 대화를 통해 같은 진리의 다른 얼굴을 봅니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를 통해 더 풍요로워집니다.


마지막으로 이 대화는 단지 종교인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특정 종교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영적 갈증을 느낍니다. 이들에게 아인 소프와 공성의 만남은 중요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영성은 특정 종교의 전유물이 아니며, 궁극의 진리는 어떤 제도나 교리보다 크다는 것입니다. 유대교도가 아니어도 아인 소프의 무한함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고, 불교도가 아니어도 공성의 지혜에서 자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인 소프와 공성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진리는 열려 있으며, 어떤 이름이나 형태에도 갇히지 않는다고. 우리가 어떤 전통에 속하든, 어떤 언어를 쓰든, 궁극의 실재는 우리 모두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 부름에 응답하는 길은 여러 갈래이지만, 그 길들이 향하는 곳은 하나입니다. 동서양의 현자들이 수천 년에 걸쳐 발견한 이 진실을, 우리는 이제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시대가 받은 가장 큰 축복이 아닐까요.


무한과 공이 만나는 자리


아인 소프가 무한을 강조한다면, 공성은 공함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무한과 공허, 충만함과 비어있음은 정반대의 개념처럼 느껴집니다. 마치 가득 찬 컵과 텅 빈 컵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 둘은 실은 같은 진실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것입니다. 이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한쪽에서 보면 무한이고, 다른 쪽에서 보면 공입니다.


아인 소프의 무한함은 어떤 경계나 한계로도 규정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규정한다는 것은 곧 그것에 테두리를 치는 것입니다. 탁자는 의자가 아니고, 빨강은 파랑이 아니고, 사람은 동물이 아니라고 말할 때, 우리는 각각의 경계를 긋습니다. 하지만 아인 소프는 어떤 경계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곧 고정된 형태나 실체가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형태가 있다는 것은 이미 한계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완벽한 원도 원이라는 형태에 갇혀 있고, 아무리 큰 수도 더 큰 수가 있기에 무한이 아닙니다. 진정한 무한은 모든 형태를 넘어서 있습니다.


공성의 공함 역시 실체가 없다는 것을 넘어서,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려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컵이 비어 있기 때문에 물도 담을 수 있고 차도 담을 수 있습니다. 만약 컵이 이미 돌로 꽉 차 있다면 아무것도 담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존재가 고정된 실체로 꽉 차 있다면, 아무런 변화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씨앗이 싹을 틔울 수도 없고, 어린아이가 어른으로 자랄 수도 없고, 슬픈 사람이 기쁨을 되찾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공하기 때문에, 즉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변화하고 생성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반야심경, Prajñāpāramitāhṛdaya, 프라즈냐파라미타흐리다야』은 대승불교에서 가장 널리 암송되는 짧은 경전으로, 겨우 260여 자에 불과하지만 공성의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이 경전에서 말하는 공즉시색 색즉시공 (空卽是色 色卽是空)은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 들어본 구절입니다. 색 (色, rūpa)은 물질이나 형태를 뜻하고, 공 (空, śūnyatā)은 실체 없음을 뜻합니다. 공이 곧 색이고 색이 곧 공이라는 이 말은, 비어있음과 형태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파도와 바다의 관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파도를 보면 무언가 실체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기 높이 솟은 파도, 여기 부서지는 파도, 모두 각자의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파도는 물 그 자체가 아니라 물의 운동일 뿐입니다. 파도라는 고정된 실체는 없고, 단지 바닷물이 바람과 만나 일시적으로 만들어낸 형태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파도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닙니다. 파도는 분명히 일어나고 움직이고 부서집니다. 이것이 색즉시공입니다. 그리고 바닷물은 파도라는 형태로만 우리에게 보입니다. 바닷물 자체는 형태가 없지만, 파도가 되어야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공즉시색입니다.


이 깨달음은 공이 단순한 허무가 아니라 모든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무한한 잠재성임을 보여줍니다. 빈 종이 위에 무한한 그림을 그릴 수 있듯이, 공한 실재 속에서 무한한 현상이 펼쳐집니다. 이것은 마치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 자체는 아무 형상도 없이 텅 비어 있지만, 바로 그 비어있음 때문에 모든 것을 비출 수 있습니다.


카발라에서는 아인 소프를 세 단계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이 구분은 16세기 이후 루리아 카발라에서 특히 중요하게 다뤄졌습니다. 첫 번째는 아인 (Ayin)으로 절대적 무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존재 이전의 상태, 생각조차 미치지 못하는 근원입니다. 두 번째는 아인 소프로 무한을 뜻합니다. 이것은 끝없이 펼쳐지는 신성의 바다와 같습니다. 세 번째는 아인 소프 오르 (Ein Sof Or)로 무한한 빛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오르 (Or)는 히브리어로 빛을 뜻하는데, 이것은 아인 소프가 처음으로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지점입니다.


이 세 단계는 신성이 점차 드러나는 과정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여전히 인간의 인식을 넘어선 영역에 머물러 있습니다. 아인 소프 오르에서 비로소 첫 번째 세피라인 케테르 (Keter, 왕관)가 응축되어 나타나고, 여기서부터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창조가 시작됩니다. 하지만 아인, 아인 소프, 아인 소프 오르 자체는 창조 이전의 상태이며, 세피로트의 나무 바깥에 존재합니다.


이 구조는 불교에서 공성을 이해하는 방식과 유사합니다. 불교에서도 공성은 단순한 부재가 아니라 모든 존재의 본래 성품 (法性, dharmatā, 다르마타)이며, 이것이 드러날 때 진여 (眞如, tathatā, 타타타)라는 있는 그대로의 실재가 체험됩니다. 진여는 꾸밈없는 그대로의 진실을 뜻하는데, 우리의 망상과 분별이 사라진 자리에서 드러나는 본래의 모습입니다. 화엄종의 법장 (法藏, Fazang, 643-712)은 진여를 바다에 비유했습니다. 파도가 일렁이는 것은 바람 때문이지만, 바람이 멈추면 바다는 본래의 고요함으로 돌아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도 번뇌라는 바람이 일으키는 파도 때문에 흔들리지만, 그 바람이 멈추면 본래의 청정한 모습인 진여를 드러냅니다.


아인 소프가 세피로트 (Sefirot)로 발현되듯이, 공성은 연기 (緣起, pratītyasamutpāda, 프라티티야사무트파다)의 법칙으로 현상 세계에 나타납니다. 연기는 인연 따라 일어남을 뜻하는데, 이것은 모든 존재가 무수한 원인과 조건의 그물망 속에서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한다는 가르침입니다. 한 송이 꽃을 보더라도, 그 꽃은 씨앗과 흙과 물과 햇빛과 공기가 만나 피어난 것입니다. 거기에는 씨앗을 심은 사람의 손길, 비를 내린 구름, 햇빛을 발산한 태양, 그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합니다. 꽃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가 함께 만들어낸 합작품입니다.


두 개념 모두 궁극의 실재가 고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우리의 상식과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보통 무언가가 단단하고 고정되어 있어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모든 것이 고정되어 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버린 마음은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없고, 철근처럼 고정된 생각은 변화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아인 소프는 무한하기 때문에 열 개의 세피로트로, 네 개의 세계로, 무수한 영혼으로 펼쳐질 수 있습니다. 만약 신이 하나의 고정된 형태로 존재한다면, 다양한 창조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무한하기 때문에, 즉 어떤 형태에도 갇히지 않기 때문에, 신은 자신을 무한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공성 역시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하는 현상 세계가 가능합니다. 만약 모든 것에 고정된 실체가 있다면 변화도 불가능하고 창조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한국의 원효 (元曉, Wonhyo, 617-686) 대사는 『금강삼매경론, Geumgang Sammae Gyeong Ron』에서 공성을 설명하면서, 본성은 있음과 없음을 떠나 있어 홀로 청정하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공이 단순히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있다와 없다는 양극단을 모두 넘어선 진실임을 보여줍니다. 원효는 또한 마음의 근원은 깨뜨림이 없으면서도 깨뜨리지 않음이 없고, 세움이 없으면서도 세우지 않음이 없다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아인 소프가 모든 세피로트의 근원이면서도 어떤 세피로트에도 갇히지 않는 것과 같은 역설입니다.


무한과 공은 이렇게 같은 진실의 두 얼굴입니다. 하나는 긍정적 언어로, 다른 하나는 부정적 언어로 표현되었을 뿐, 두 개념 모두 경계 없는 열림을 가리킵니다. 동서양의 현자들은 각자의 언어로 같은 달을 가리켰고, 우리는 그 손가락들이 모두 한 곳을 향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카발라의 아인 소프 (Ein Sof)와 불교의 공성 (空性, śūnyatā, 슈냐타)은 언뜻 보기에 전혀 다른 세계에서 태어난 개념처럼 보입니다. 하나는 중세 유럽의 유대 공동체에서 은밀히 전해진 신비주의 지혜이고, 다른 하나는 2500년 전 인도에서 시작되어 아시아 전역으로 퍼진 불교 사상의 핵심입니다. 지리적으로도 멀고 시간적으로도 떨어져 있는 이 두 전통이 과연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그러나 이 두 개념을 깊이 들여다보면, 인간의 언어가 닿을 수 없는 궁극의 실재를 가리키려는 놀라운 유사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치 서로 다른 두 등산객이 각자 다른 길로 산을 오르다가 정상에서 만나듯이, 동서양의 현자들은 각기 다른 문화적 배경 속에서 출발했지만 비슷한 깨달음에 도달했습니다. 두 전통 모두 말로 포착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했고, 개념으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을 개념으로 전하려 했습니다. 이 역설적인 시도 속에서 동서양의 지혜가 만나게 됩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방식


카발라 사상가들은 신의 궁극적 본질을 아인 소프라고 불렀습니다. 이 히브리어 단어는 문자 그대로 끝이 없음, 즉 무한을 뜻합니다. 아인은 무를, 소프는 한계나 끝을 가리키므로, 아인 소프는 한계가 없는 무한자를 의미하게 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무한이라고 말할 때는 보통 끝없이 큰 것이나 엄청나게 많은 것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카발라의 무한은 그런 양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크다거나 작다거나 하는 모든 비교 자체를 넘어선 것을 가리킵니다.


12세기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역에서 활동한 맹인 랍비 이삭 (Isaac the Blind, 1160-1235)이 처음으로 신을 이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전해집니다. 그가 왜 맹인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어떤 전승에서는 그가 토라를 너무 깊이 연구한 나머지 육체의 눈을 잃었지만 대신 영적인 눈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신의 본질이 너무나 초월적이어서 어떤 속성으로도 규정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신을 전지하다거나 전능하다거나 자비롭다고 말하는 순간, 이미 신을 우리의 좁은 개념 안에 가두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부정의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아인 소프는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닙니다.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닙니다.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알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선하다거나 악하다거나 하는 모든 분별을 넘어서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색안경을 벗어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평소에 빨간 안경이나 파란 안경을 통해 세상을 보면서, 세상이 정말 빨갛거나 파랗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모든 색안경을 벗어던진 순간,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빛을 봅니다. 모든 규정을 거부하는 이 순수한 무한이 바로 신의 참된 얼굴입니다.


불교의 공성 또한 비슷한 방식으로 궁극의 실재를 가리킵니다. 산스크리트어 슈냐타 (śūnyatā, 순야타)는 비어 있음을 뜻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단순히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주의로 오해합니다. 하지만 공성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모든 존재에 고정된 실체나 자성 (svabhāva, 스바바바)이 없다는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자성이란 스스로 존재하는 독립적인 본질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탁자를 보면서 탁자라는 고정된 실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탁자를 자세히 관찰해보면, 그것은 나무와 못과 칠로 이루어져 있고, 나무는 다시 나무 세포로, 세포는 원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디를 찾아봐도 탁자 자체라는 영원불변한 실체는 없습니다. 탁자는 수많은 조건이 모여서 임시로 만들어진 것일 뿐입니다.


인도의 위대한 철학자 용수 (Nāgārjuna, 나가르주나, 150-250)는 대승불교를 확립한 인물로, 그의 『중론, Mūlamadhyamakakārikā』은 불교 철학의 정수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공성을 팔불중도 (八不中道)로 설명했습니다. 생기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으며 (不生不滅), 상주하지도 않고 단절하지도 않으며 (不常不斷),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으며 (不一不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 (不來不出)는 이 여덟 가지 부정은 카발라의 부정 신학과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용수는 이렇게 모든 양극단을 부정함으로써 중도 (中道)를 드러냈습니다. 중도란 가운데에 있는 어떤 지점이 아니라, 모든 극단적 견해에서 자유로운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는 보통 무언가가 생겨났다가 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아침에 떠오른 해가 저녁에 지고, 봄에 피어난 꽃이 가을에 시듭니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태양은 정말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지평선 너머로 이동한 것일 뿐이고, 꽃의 물질은 흙으로 돌아가 다시 다른 생명의 일부가 됩니다. 진정한 생성도 없고 진정한 소멸도 없습니다. 이것이 불생불멸의 의미입니다. 공성은 단순히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가 아니라, 모든 고정된 개념을 넘어선 진실의 본성을 가리킵니다.


두 전통 모두 궁극의 실재는 언어로 포착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아인 소프에 대해서는 침묵만이 가장 정직한 대답이며, 공성에 대해서도 어떤 설명도 그 진실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습니다. 『조하르, Zohar』는 아인 소프를 두고 생각도 파악할 수 없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불교의 『금강경, Vajracchedikā Prajñāpāramitā Sūtra』 역시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법은 진정한 법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침묵만으로는 가르침이 전해질 수 없기에, 두 전통은 부정의 언어라는 독특한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무엇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무엇인지를 암시하는 이 역설적 방식이야말로,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인간 지혜의 절정입니다. 마치 조각가가 돌을 깎아내어 형상을 드러내듯이, 현자들은 잘못된 이해들을 하나씩 깎아냄으로써 진실을 드러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우리의 고정된 사고방식을 깨뜨리려는 치밀한 전략입니다. 우리가 어떤 개념에 집착할 때마다, 그 개념을 부정함으로써 더 깊은 이해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무한과 공이 만나는 자리


아인 소프가 무한을 강조한다면, 공성은 공함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둘은 실은 같은 진실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것입니다. 아인 소프의 무한함은 어떤 경계나 한계로도 규정될 수 없다는 뜻이며, 이것은 곧 고정된 형태나 실체가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공성의 공함 역시 실체가 없다는 것을 넘어서,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려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반야심경, Prajñāpāramitāhṛdaya』에서 말하는 공즉시색 색즉시공 (空卽是色 色卽是空)은 공이 단순한 허무가 아니라 모든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무한한 잠재성임을 보여줍니다.


카발라에서는 아인 소프를 세 단계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아인 (Ayin)은 절대적 무를, 아인 소프는 무한을, 아인 소프 오르 (Ein Sof Or)는 무한한 빛을 가리킵니다. 이 세 단계는 신성이 점차 드러나는 과정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여전히 인간의 인식을 넘어선 영역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 구조는 불교에서 공성을 이해하는 방식과 유사합니다. 불교에서도 공성은 단순한 부재가 아니라 모든 존재의 본래 성품 (法性, dharmatā)이며, 이것이 드러날 때 진여 (眞如, tathatā)라는 있는 그대로의 실재가 체험됩니다. 아인 소프가 세피로트 (Sefirot)로 발현되듯이, 공성은 연기 (緣起, pratītyasamutpāda)의 법칙으로 현상 세계에 나타납니다.


두 개념 모두 궁극의 실재가 고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가르칩니다. 아인 소프는 무한하기 때문에 열 개의 세피로트로, 네 개의 세계로, 무수한 영혼으로 펼쳐질 수 있습니다. 공성 역시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하는 현상 세계가 가능합니다. 만약 모든 것에 고정된 실체가 있다면 변화도 불가능하고 창조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무한과 공은 이렇게 같은 진실의 두 얼굴입니다. 하나는 긍정적 언어로, 다른 하나는 부정적 언어로 표현되었을 뿐, 두 개념 모두 경계 없는 열림을 가리킵니다.


실천 속에서 만나는 지혜


아인 소프와 공성은 단지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는 실천적 지혜입니다. 책상 위의 이론으로만 머물러 있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 깨달음은 반드시 우리의 일상과 만나야 하고, 우리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카발라 수행자는 명상을 통해 자신의 제한된 자아를 넘어 아인 소프의 무한함과 하나 되려 합니다. 이것을 데베쿠트 (Devekut)라고 부르는데, 히브리어로 달라붙음이나 밀착을 뜻합니다. 마치 두 조각의 나무를 아교로 붙이면 경계가 사라지듯이, 개별적 영혼이 신과 하나가 되는 경험입니다. 18세기 동유럽에서 일어난 하시디즘 운동은 이 데베쿠트를 모든 수행의 중심에 놓았습니다. 하시딤 (경건한 자들)이라 불리는 이들은 춤추고 노래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일상의 모든 순간에 신과 하나 됨을 추구했습니다.


이 합일의 순간에 개별적 자아의 경계가 사라지고 무한한 신성과 하나가 됩니다. 이것은 마치 물방울이 바다로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물방울은 자신의 작은 형태를 잃지만, 동시에 광대한 바다 전체가 됩니다. 잃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자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좁은 틀을 넘어 더 큰 실재 속으로 확장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작은 그릇을 깨뜨림으로써, 그 안에 담을 수 없었던 무한한 빛을 담게 됩니다.


13세기 스페인의 신비가 아브라함 아불라피아는 매우 독특한 명상 기법을 개발했습니다. 그는 히브리 문자를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하고 치환하며 명상하는 체루프 (Tzeruf, 조합)라는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히브리어에서 각 문자는 숫자 값을 가지며 동시에 신성한 힘을 담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아불라피아는 이 문자들을 끊임없이 재조합하면서 명상하면, 일상적 의식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황홀경에 이른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마치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습니다. 만화경을 돌리면 색색의 조각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무늬를 만들어냅니다. 어떤 무늬도 고정되지 않고 계속 변화합니다. 이 변화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개별적인 조각들이 사라지고 변화 그 자체만 남습니다. 아불라피아의 수행자들은 히브리 문자의 끝없는 조합을 관조하면서, 모든 형태가 사라지고 순수한 의식만 남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그 순간 그들은 아인 소프의 무한함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불교 수행자는 공성을 관찰함으로써 자신과 세계에 대한 집착을 놓아냅니다. 이것을 공관 (空觀)이라고 부르는데, 모든 현상에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깊이 통찰하는 명상입니다. 예를 들어 위빠사나 (Vipassanā) 명상에서 수행자는 자신의 호흡과 감각을 세밀하게 관찰합니다.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몸의 감각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을 관찰합니다. 처음에는 나라는 관찰자와 관찰되는 대상이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수행이 깊어지면서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됩니다. 관찰자도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순간순간 변화하는 현상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내가 호흡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이라는 현상 자체가 일어나고 있을 뿐입니다. 이 통찰이 깊어지면 아공 (我空, ātma-śūnyatā, 아트마슈냐타)에 이르게 됩니다. 아공은 자아가 공하다는 뜻으로,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이 오온 (五蘊)의 임시적 조합일 뿐 고정된 실체가 아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오온은 색 (色, 물질), 수 (受, 느낌), 상 (想, 생각), 행 (行, 의지), 식 (識, 의식)의 다섯 가지 더미를 말합니다. 마치 다섯 가지 재료로 만든 요리와 같습니다. 요리를 보면 하나의 완성된 음식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러 재료의 조합일 뿐입니다. 요리 그 자체라는 실체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라는 존재도 다섯 가지 요소의 임시적 조합일 뿐, 영원불변한 자아는 없습니다.


아공을 넘어서면 법공 (法空, dharma-śūnyatā, 다르마슈냐타)에 이릅니다. 법공은 모든 현상이 공하다는 뜻입니다. 자아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존재가 고정된 실체 없이 연기의 그물망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깨달음입니다. 이 깨달음에 이르면 모든 집착과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집착은 무언가에 고정된 실체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생깁니다. 영원히 가질 수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집착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집착할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세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성을 허무주의로 오해하여,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거나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이해입니다. 용수는 공성을 잘못 이해한 사람은 독사를 잘못 잡아서 물린 것과 같다고 경고했습니다. 공성은 오히려 모든 것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에 변화할 수 있고, 변화할 수 있기 때문에 희망이 있습니다.


공성을 깨닫는다는 것은 모든 것이 상호의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의 진실을 체험하는 것이며, 이 체험 속에서 자비와 지혜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내가 따로 없고 남이 따로 없다면, 남을 해치는 것은 곧 나를 해치는 것이고, 남을 돕는 것은 곧 나를 돕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덕적 명령이 아니라 사실의 직접적 인식입니다. 티베트 불교의 위대한 스승 쫑카파 (Tsongkhapa, 1357-1419)는 공성을 깨닫지 못하면 참된 자비도 불가능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자타의 구분이 남아 있는 한, 자비는 언제나 조건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두 전통 모두 궁극의 실재를 체험하는 것이 삶의 변화로 이어진다고 가르칩니다. 머리로만 아는 지식은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가슴으로 체험하고 온몸으로 살아낼 때, 비로소 참된 지혜가 됩니다. 카발라에서 아인 소프를 깨닫는 것은 티쿤 올람 (Tikkun Olam), 즉 세상을 고치는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티쿤 올람은 원래 우주적 차원의 회복을 의미했지만, 오늘날에는 사회정의와 세상의 치유를 위한 실천적 행동을 가리키는 말로 널리 쓰입니다.


무한한 신성이 모든 존재 안에 깃들어 있다는 깨달음은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고 돌보는 책임으로 연결됩니다. 이삭 루리아의 가르침에 따르면, 창조 과정에서 그릇들이 깨지는 셰비라 (Shevirah)라는 우주적 재앙이 일어났고, 신성한 불꽃들이 세상 곳곳에 흩어졌습니다. 우리의 선한 행위는 이 흩어진 불꽃들을 모아 제자리로 돌려놓는 작업입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빵을 나누어주는 것, 정의롭지 못한 일에 맞서는 것, 상처받은 사람을 위로하는 것, 이 모든 행위가 우주를 치유하는 거룩한 실천입니다.


불교에서 공성을 깨닫는 것은 보살도 (菩薩道)의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보살 (菩薩, Bodhisattva, 보디사트바)은 깨달음을 구하는 존재를 뜻하는데, 자신의 해탈만을 추구하지 않고 모든 중생을 함께 구원하려는 서원을 세운 이를 말합니다. 대승불교의 『입보살행론, Bodhicaryāvatāra, 보디차리야바타라』에서 샨티데바 (Śāntideva, 산티데바, 685-763)는 자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모든 선근 (善根)을 중생을 위해 바치겠다는 서원을 노래합니다.


모든 존재가 실체 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통찰은 모든 중생을 구하려는 자비심으로 변화합니다. 공성을 깨달으면, 나와 남의 구분이 궁극적으로는 허구임을 압니다. 그러나 이것이 차별을 무시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고통받는 모든 존재가 나 자신과 다르지 않기에, 그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게 됩니다. 아인 소프와 공성은 이렇게 개인의 영적 깨달음을 넘어 세상을 치유하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한국 불교의 거목 성철 (性徹, Seongcheol, 1912-1993) 스님은 공성을 깨달은 이는 자연스럽게 자비로워진다고 가르쳤습니다. 억지로 착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보았기 때문에 자비가 저절로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마치 구름이 걷히면 태양이 저절로 빛을 발하듯이, 무명 (無明)의 구름이 걷히면 자비와 지혜의 빛이 저절로 드러납니다.












7-17.2. 세피로트와 만다라: 우주를 담은 기하학



원과 나무가 만나는 곳


카발라의 생명나무를 처음 보았을 때와 티벳 불교의 만다라를 처음 마주했을 때, 우리는 전혀 다른 두 세계를 경험한다고 느낍니다. 생명나무는 열 개의 세피로트가 수직으로 솟아 있고, 스물두 개의 경로가 그 사이를 가로지르며 올라가는 길을 보여줍니다. 반면 만다라는 중심에서 바깥으로 펼쳐지는 완벽한 원들이 사각형 안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위로 향하는 사다리이고, 다른 하나는 중심으로 모이는 소용돌이입니다. 그러나 이 두 상징 체계는 놀랍도록 같은 진실을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습니다. 둘 다 우주 전체의 구조를 하나의 기하학적 형태 안에 압축해 담았습니다.


만다라 (Mandala)라는 산스크리트어는 본질을 뜻하는 만달 (Mandal)과 소유를 뜻하는 라 (la)가 합쳐진 말입니다. 본질을 담고 있는 것, 우주의 정수를 그려낸 것이라는 뜻입니다. 티벳 불교에서 만다라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부처의 깨달음 경지를 시각화한 신성한 공간입니다. 승려들은 색색의 모래로 수주일에 걸쳐 정교한 만다라를 완성하고, 의식이 끝나면 그것을 한순간에 허물어버립니다. 무상 (無常)의 진리와 집착을 놓는 해탈의 가르침을 몸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다라의 기본 형태는 사각형 안에 원이 있고, 사각형의 네 변 중앙에 각각 문이 있습니다. 중심에는 대일여래 (大日如來) 또는 다른 본존 부처가 자리하고, 그 주위로 여러 부처와 보살이 우주의 질서에 따라 배치됩니다.


카발라의 세피로트 역시 우주의 정수를 담은 지도입니다. 무한한 아인 소프에서 흘러나온 신성의 빛이 열 개의 그릇 안에 담기면서 각기 다른 속성으로 드러납니다. 케테르 (Kether)의 왕관에서 시작하여 호크마 (Chokmah)와 비나 (Binah)의 지혜와 이해를 거쳐, 감정의 세피로트들을 지나 말쿠트 (Malkhut)의 왕국에 이릅니다. 생명나무는 수직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세피로트들의 관계를 살펴보면 원형의 흐름도 발견됩니다. 빛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인간의 영혼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갑니다. 이 순환 속에서 세피로트들은 서로를 비추며 하나의 살아있는 전체를 이룹니다.


만다라와 세피로트는 모두 중심에서 시작합니다. 만다라의 중심에는 깨달음을 이룬 부처가 앉아 있습니다. 세피로트의 중심에는 티페레트 (Tiferet)가 있습니다. 티페레트는 여섯 번째 세피라로, 아름다움과 조화를 뜻하며 생명나무의 심장입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신성의 빛과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인간의 갈망이 티페레트에서 만나 균형을 이룹니다. 만다라의 부처 역시 중심에서 모든 것을 통합하며, 사방으로 자비를 펼칩니다. 중심은 모든 것의 원천이면서 동시에 모든 것이 돌아가는 귀향지입니다.


수직과 원형이 말하는 우주


만다라는 평면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삼층의 우주를 담고 있습니다. 가장 바깥 원은 우리가 사는 세계, 욕망과 무지가 지배하는 곳입니다. 그 안쪽 원은 수행을 통해 정화된 세계입니다. 가장 안쪽은 완전한 깨달음의 영역입니다. 이 삼층 구조는 불교의 삼계 (三界)와 연결됩니다. 욕계 (欲界)는 감각적 욕망이 지배하는 세계이고, 색계 (色界)는 형태는 있지만 욕망을 벗어난 세계이며, 무색계 (無色界)는 형태마저 초월한 순수 의식의 세계입니다. 만다라를 바라보며 명상하는 수행자는 바깥에서 안쪽으로 여행하며, 동시에 자신의 의식을 정화해 갑니다.


카발라의 네 세계도 비슷한 구조를 보여줍니다. 아시야 (Asiyah)는 행위의 세계로, 우리가 사는 물질 세계입니다. 예치라 (Yetzirah)는 형성의 세계로, 감정과 상상력의 영역입니다. 브리아 (Beriah)는 창조의 세계로, 순수한 지성과 영혼의 자리입니다. 아칠루트 (Atzilut)는 유출의 세계로, 신성 그 자체의 영역입니다. 이 네 세계는 수직으로 배열되지만, 사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감싸며 동심원처럼 겹쳐져 있습니다. 가장 바깥이 아시야이고, 가장 안쪽이 아칠루트입니다. 만다라의 삼층 구조와 카발라의 네 세계는 같은 진실을 표현합니다. 우주는 밀도의 단계로 이루어져 있고, 인간의 영적 여정은 무거운 물질에서 순수한 빛으로 올라가는 여행입니다.


만다라에는 네 개의 문이 있습니다. 동쪽 문은 아침의 빛이 들어오는 곳이고, 남쪽 문은 한낮의 열기가, 서쪽 문은 저녁의 고요가, 북쪽 문은 밤의 깊이가 자리합니다. 네 방향은 우주의 완전함을 나타내며, 동시에 수행자가 어디에서든 중심으로 들어올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카발라의 생명나무에도 네 개의 주요 지점이 있습니다. 케테르는 위에, 말쿠트는 아래에, 호크마는 오른쪽에, 비나는 왼쪽에 자리합니다. 이 네 지점을 연결하면 십자가 형태가 나타납니다. 여기에 나머지 세피로트들이 더해지면서 복잡한 관계망이 형성됩니다. 만다라의 네 문과 세피로트의 네 모서리는 모두 우주가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불교의 우주론에서 중요한 상징은 수미산 (須彌山)입니다. 우주의 중심에 솟아 있는 거대한 산으로, 그 정상에는 제석천이 머물고, 중턱에는 사천왕이 사방을 지키며, 주위로는 아홉 개의 산과 여덟 개의 바다가 둘러싸고 있습니다. 만다라는 이 수미산 우주를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입니다. 중심의 부처는 수미산 정상에 해당하고, 동서남북의 문은 사천왕이 지키는 방향입니다. 카발라에는 직접적으로 수미산과 같은 우주산 개념은 없지만, 생명나무 자체가 하늘과 땅을 잇는 축입니다. 야곱의 사다리처럼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통로이며,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다리입니다. 만다라가 평면적 원형으로 우주를 표현한다면, 세피로트는 수직적 나무로 같은 진실을 말합니다.


빛의 흐름과 에너지의 순환


만다라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중심으로 들어가는 여정입니다. 명상자는 시각적으로 만다라의 바깥에서 시작하여 점차 안쪽으로 들어갑니다. 각 층을 지날 때마다 더 깊은 집중에 이르고, 더 미묘한 의식 상태를 경험합니다. 마침내 중심의 본존 부처에 도달하면, 명상자는 자신과 부처가 분리되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자신의 본성이 곧 부처의 본성이라는 통찰입니다. 이것이 만다라 명상의 핵심입니다. 바깥에서 안으로, 많음에서 하나로, 분별에서 합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카발라 명상도 비슷한 여정을 보여줍니다. 수행자는 말쿠트에서 시작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물질 세계가 출발점입니다. 여기서 예소드 (Yesod)를 거쳐 티페레트로 올라갑니다. 티페레트에 이르면 비로소 균형과 아름다움을 체험하며, 신성의 빛을 직접 느낍니다. 더 나아가 비나와 호크마로 올라가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지혜의 영역에 들어갑니다. 최종적으로 케테르에 이르면, 모든 분리가 사라지고 아인 소프와 하나 됩니다. 이것이 데베쿠트 (Devekut), 신과의 달라붙음입니다. 만다라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것과 세피로트를 올라가는 것은 표현만 다를 뿐 같은 경험입니다.


티벳 불교의 고차 수행에서는 신체 만다라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수행자는 자신의 몸을 만다라로 관상합니다. 몸의 중심 채널을 통해 에너지가 순환하고, 각 차크라에 부처들이 머문다고 명상합니다. 이렇게 하면 외부의 만다라와 내부의 몸이 하나가 됩니다. 카발라에서도 인간의 몸은 작은 우주입니다. 아담 카드몬 (Adam Kadmon), 원형적 인간의 몸에 세피로트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케테르는 머리 위 왕관에, 호크마와 비나는 좌우 뇌에, 티페레트는 심장에, 예소드는 생식기에, 말쿠트는 발에 해당합니다. 인간은 걸어 다니는 생명나무이며, 우리의 몸 자체가 신성의 지도입니다. 만다라와 세피로트는 모두 우주와 인간이 같은 구조를 지녔다고 가르칩니다.


만다라에서 중심 부처는 홀로 있지 않습니다. 주위에 네 방향의 부처들이 함께 있습니다. 동쪽에는 아촉불 (阿閦佛), 남쪽에는 보생불 (寶生佛), 서쪽에는 아미타불 (阿彌陀佛), 북쪽에는 불공성취불 (不空成就佛)이 자리합니다. 이 다섯 부처를 오방불 (五方佛)이라 부르며, 우리 마음의 다섯 번뇌가 정화되어 다섯 지혜로 변화한 모습입니다. 카발라의 세피로트도 하나가 아니라 열입니다. 각 세피라는 고유한 속성을 지니지만, 동시에 다른 세피로트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합니다. 헤세드 (Chesed)의 자비는 게부라 (Geburah)의 엄격함과 균형을 이루어야 하고, 이 둘이 티페레트에서 조화를 이룹니다. 만다라의 오방불과 세피로트의 열 권능은 우주가 단일한 원리로 환원되지 않으며, 다양성 속에서 조화를 이룬다는 같은 진실을 말합니다.


불교 우주론에서는 삼천대천세계 (三千大千世界)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하나의 수미산 세계가 천 개 모여 소천세계를 이루고, 소천세계가 천 개 모여 중천세계를 이루며, 중천세계가 천 개 모여 대천세계를 이룹니다. 이것이 비로자나불 (毘盧遮那佛) 한 분의 교화 영역입니다. 무한히 반복되는 이 구조는 프랙탈 기하학을 떠올리게 합니다. 작은 단위가 큰 단위를 이루고, 큰 단위는 더 큰 단위의 일부가 됩니다. 카발라에서도 각 세피라 안에 다시 열 개의 작은 세피로트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케테르 안에도 작은 케테르부터 작은 말쿠트까지 열 개가 있고, 호크마 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끝없이 반복되는 구조를 통해 우주의 무한함을 표현합니다. 만다라와 세피로트는 모두 부분이 전체를 담고, 전체가 부분 안에 있다는 홀로그램 같은 우주관을 보여줍니다.


깨어진 그릇과 어두운 만다라


만다라에는 항상 밝은 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부 호법 (護法) 만다라에서는 무서운 모습의 신들이 등장합니다. 마하칼라 (Mahakala)나 야마 (Yama) 같은 분노존 (忿怒尊)들입니다. 이들은 악을 파괴하고 수행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겉으로는 무섭지만, 실제로는 자비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부드러운 방법으로는 깨우칠 수 없는 완고한 무지를 깨뜨리기 위해 분노의 모습을 취합니다. 만다라는 우주가 빛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어둠도 깨달음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카발라에도 어둠의 나무가 있습니다. 클리포트 (Qliphoth), 껍데기들의 세계입니다. 셰비라트 하켈림 (Shevirat HaKelim), 그릇들의 파괴가 일어났을 때 깨진 그릇의 파편들이 신성한 불꽃을 가두어버렸습니다. 이 클리포트는 세피로트의 그림자입니다. 각 세피라에는 대응하는 클리파 (Qliphah)가 있습니다. 케테르의 그림자는 타우미엘 (Thaumiel), 쌍둥이 신들입니다. 헤세드의 그림자는 가아쉐클라 (Gha'agsheblah), 방해하는 자들입니다. 클리포트는 단순히 악이 아니라 불균형입니다. 자비만 있고 엄격함이 없으면, 자비는 타락하여 방종이 됩니다. 엄격함만 있고 자비가 없으면, 정의는 잔혹함으로 변합니다. 클리포트는 균형을 잃은 세피로트의 모습입니다.


만다라의 분노존과 카발라의 클리포트는 모두 어둠이 우주의 일부임을 인정합니다. 빛만 있다면 어둠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할 수 없고, 어둠이 없다면 빛도 의미를 잃습니다. 둘은 서로를 정의하며 존재합니다. 불교에서 번뇌 (煩惱)는 곧 보리 (菩提)라고 합니다. 번뇌가 정화되면 그 자리에서 깨달음으로 변합니다. 카발라에서도 클리포트 안에 갇힌 신성한 불꽃을 구해내는 것이 티쿤 (Tikkun), 복원의 작업입니다. 어둠을 부정하거나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숨은 빛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칼 융이 말한 그림자 통합과도 연결됩니다. 우리 안의 어두운 면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온전한 인간이 됩니다. 만다라와 세피로트는 모두 완전함이란 빛과 어둠을 모두 아우르는 것임을 가르칩니다.


티벳 불교의 찰 (Chöd) 수행은 이 진실을 극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수행자는 시체가 널린 무덤에 홀로 앉아 명상합니다. 자신의 몸을 상상 속에서 잘라 악령들에게 공양으로 바칩니다. 가장 두려운 것과 직접 대면함으로써 두려움 자체를 초월합니다. 카발라의 수행자도 클리포트의 영역을 여행합니다. 물론 위험한 길이기에 준비된 자만이 갈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아불라피아는 문자 조합 명상을 통해 의식의 모든 층위를 탐험했습니다. 밝은 세피로트뿐 아니라 어두운 클리포트까지 그의 명상 지도에 포함되었습니다. 어둠을 알아야 빛의 가치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다라와 세피로트는 둘 다 완전한 우주 지도이며, 완전한 지도는 빛과 어둠을 모두 포함해야 합니다.


하나이면서 다수인 진리


만다라를 보면 수많은 부처와 보살이 각자의 자리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들은 모두 하나의 진리를 표현하는 다양한 얼굴입니다. 대승불교에서 모든 부처는 법신 (法身) 차원에서 하나입니다. 비로자나불이든 아미타불이든, 그 본질은 공성 (空性)이며, 공성은 하나입니다. 다만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세피로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열 개의 세피로트는 각기 다른 속성을 지니지만, 모두 아인 소프에서 흘러나온 하나의 빛입니다. 케테르와 말쿠트는 위치가 정반대이지만, 케테르의 빛이 모든 세피로트를 관통하여 말쿠트에 이릅니다. 말쿠트는 케테르를 반영하며,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것을 드러냅니다.


만다라 명상의 깊은 단계에서 수행자는 모든 부처가 자신의 마음에서 나왔음을 깨닫습니다. 만다라는 외부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투사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만다라가 환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과 우주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깊은 진실입니다. 마음이 곧 우주이고, 우주가 곧 마음입니다. 카발라에서도 비슷한 통찰이 있습니다. 모세 코르도베로는 말했습니다. 신은 모든 실재이지만, 모든 실재가 신은 아닙니다. 이 역설적 문장은 범재신론을 표현합니다. 신은 우주 안에 내재하지만 우주로 환원되지 않으며, 우주는 신 안에 있지만 신을 다 담지 못합니다. 만다라와 세피로트는 모두 하나와 다수, 초월과 내재의 역설을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만다라를 그리는 과정 자체가 명상입니다. 승려들은 완벽한 집중 속에서 하나하나 모래알을 놓으며, 몇 주에 걸쳐 만다라를 완성합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의 마음은 점점 고요해지고, 만다라의 구조가 그들의 의식 구조가 됩니다. 완성 후에는 한순간에 쓸어버립니다. 무상의 진리를 체득하는 것입니다. 카발라의 명상도 비슷합니다. 아불라피아의 체루프 (Tzeruf), 문자 조합 명상에서 수행자는 히브리 문자들을 끊임없이 조합하고 해체합니다. 이 과정에서 의식의 고정된 패턴이 무너지고, 새로운 통찰이 열립니다. 루리아 카발라의 카바노트 (Kavvanot) 명상에서는 기도의 각 단어마다 특정 세피로트를 관상하며, 세피로트들의 결합과 분리를 명상합니다. 만다라를 그리고 지우는 것처럼, 세피로트를 세우고 해체하는 것입니다. 두 전통 모두 고정된 형태에 집착하지 않는 자유를 가르칩니다.


만다라와 세피로트는 지도일 뿐, 영토 자체는 아닙니다. 지도가 아무리 정교해도 실제로 그 땅을 걸어야 합니다. 불교의 선 (禪) 전통에서는 경전을 손가락에 비유합니다. 손가락은 달을 가리키지만, 손가락 자체가 달은 아닙니다. 달을 보았다면 손가락은 필요 없습니다. 카발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세피로트를 공부하고 명상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직접 체험해야 합니다. 이론적 지식을 넘어 데베쿠트, 신과의 직접적 합일에 이르러야 합니다. 하시디즘의 바알 솀 토브 (Baal Shem Tov, 1700경-1760)는 가장 단순한 사람도 순수한 마음으로 신과 하나 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복잡한 세피로트 이론을 몰라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과 기쁨으로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만다라의 원과 세피로트의 나무는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태어났지만, 같은 우주적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둘 다 무한한 것을 유한한 형태 안에 담으려는 시도입니다. 둘 다 인간이 우주를 이해하고, 더 나아가 우주와 하나 되는 길을 보여줍니다. 원형과 수직, 펼침과 올림, 중심과 정상이라는 다른 언어로 말하지만, 그 의미는 하나입니다. 우주는 신성의 자기 표현이며, 인간은 그 신성을 깨달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만다라를 관상하는 티벳 승려와 세피로트를 명상하는 카발라 수행자는 서로를 모를 수 있지만, 그들이 보는 진리는 같습니다.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은 하나이며, 경로는 여럿이지만 목적지는 같습니다. 이것이 만다라와 세피로트가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깊은 메시지입니다.











7-17.3. 티쿤과 보살도: 세계를 구하는 길



카발라의 티쿤 올람과 대승불교의 보살도는 인간에게 부여된 가장 숭고한 소명을 말합니다. 두 전통은 서로 다른 역사적 토양에서 자라났지만, 놀랍게도 세계를 구원하는 길에 대해 같은 핵심을 가리킵니다. 개인의 깨달음이나 구원을 넘어서서, 온 세상의 고통을 어루만지고 깨어진 것을 치유하는 일이 우리의 진정한 임무라고 두 전통은 가르칩니다.


흩어진 불꽃과 고통받는 중생


카발라는 우주가 창조 초기에 겪은 셰비라트 하켈림 (Shevirat HaKelim), 그릇의 파괴라는 비극적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아인 소프 (Ein Sof)의 무한한 빛이 너무 강렬하여 그것을 담으려던 그릇들이 견디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이때 신성한 불꽃인 니초초트 (Nitzotzot)가 세상 곳곳에 흩어져 클리포트 (Qliphoth), 즉 껍데기 안에 갇혔습니다. 이삭 루리아의 가르침에 따르면, 모든 존재 속에는 이 갇힌 불꽃이 숨어 있으며, 세상의 고통과 악은 바로 이 불꽃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한 데서 비롯됩니다.


대승불교는 다른 언어로 같은 진실을 말합니다. 온 세상에는 고통받는 중생들이 가득합니다. 그들은 무명 (無明)의 어둠 속에서 윤회의 수레바퀴에 묶여 끝없는 괴로움을 겪습니다. 보살 (菩薩, bodhisattva)은 자신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음에도, 한 중생도 남김없이 모두 구제될 때까지 열반에 들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운 존재입니다. 관세음보살의 천 개의 팔은 바로 이 무한한 자비의 실천을 상징합니다.


두 전통은 세계의 불완전함을 직시합니다. 카발라에서는 흩어진 신성의 불꽃이, 불교에서는 고통받는 무수한 중생이 우리 앞에 놓인 과제입니다. 개인의 영적 완성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온 우주가 함께 치유되고 해방되어야 합니다.


세계를 구하는 구체적 길


티쿤 올람 (Tikkun Olam), 세상의 복원은 카발라 사상의 윤리적 중심입니다. 하임 비탈은 『에츠 하임, Etz Hayyim』에서 인간의 모든 행위가 우주적 복원 작업에 참여한다고 기록했습니다. 타인에게 베푸는 작은 친절, 정직한 노동, 정의로운 판단과 같은 일상의 모든 미츠보트 (Mitzvot), 계명의 실천이 흩어진 불꽃을 해방시킵니다. 이때 행위 자체뿐만 아니라 그 행위에 담긴 순수한 의도인 카바나 (Kavvanah)가 결정적입니다. 의도가 깊을수록 더 많은 불꽃이 클리포트의 감옥에서 풀려나 본래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보살도 (菩薩道)는 육바라밀 (六波羅蜜)이라는 여섯 가지 완성의 길을 제시합니다. 보시 (布施)는 자신의 것을 나누는 것이고, 지계 (持戒)는 계율을 지키는 것이며, 인욕 (忍辱)은 모욕과 고난을 참는 것입니다. 정진 (精進)은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고, 선정 (禪定)은 마음을 고요히 집중하는 것이며, 반야 (般若)는 궁극적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이 여섯 가지는 단순히 개인의 수행이 아닙니다. 보살은 이 실천을 통해 중생을 고통에서 건져냅니다. 자신의 공덕을 중생에게 회향 (廻向)하여 그들이 깨달음에 이르도록 돕습니다.


두 전통의 실천은 놀랍도록 닮았습니다. 둘 다 일상의 행위를 우주적 구원의 도구로 변화시킵니다. 카발라의 미츠보트와 불교의 바라밀은 형식은 다르지만, 작은 행위 하나하나가 세계 전체를 치유한다는 같은 믿음을 담고 있습니다.


랍비 타르폰 (Rabbi Tarfon)의 말처럼, 우리는 이 일을 완성할 의무는 없지만, 그렇다고 손을 놓을 자유도 없습니다. 보살의 서원도 같은 정신입니다. 중생계가 다할 때까지, 번뇌가 다할 때까지, 불도가 완성될 때까지 쉬지 않고 나아갑니다.


인간의 우주적 책임


카발라는 인간을 신의 공동 창조자로 봅니다. 침춤 (Tzimtzum)으로 신이 자신을 수축시켜 창조의 공간을 만들었듯, 인간도 자신의 이기심을 줄여 타인을 위한 공간을 만듭니다. 셰비라로 깨진 세계를 복원하는 일은 신 혼자서는 완성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선택과 행위가 필수적입니다.

게르솜 숄렘은 이를 카발라의 가장 혁명적인 통찰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인간이 신과 함께 우주의 운명을 결정하는 능동적 존재가 된 것입니다.

대승불교도 인간을 수동적 존재로 보지 않습니다. 여래장 (如來藏) 사상에 따르면, 모든 중생은 이미 부처가 될 본성을 갖추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번뇌의 구름에 가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보살은 자신의 불성을 깨우칠 뿐 아니라, 다른 중생의 불성도 함께 일깨웁니다. 화엄경 (華嚴經)은 인드라망 (因陀羅網)의 비유를 제시합니다. 우주는 무수한 구슬로 이루어진 그물이며, 각 구슬은 다른 모든 구슬을 반영합니다. 한 존재의 깨달음은 온 우주에 울려 퍼집니다. 한 존재의 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전통은 개인과 우주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카발라의 아담 카드몬 (Adam Kadmon), 원형적 인간은 우주 전체의 청사진입니다. 인간의 영혼 구조는 세피로트 (Sefirot)의 구조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하임 비탈은 이를 인간은 작은 우주이며, 우주는 거대한 인간이라는 말로 요약했습니다. 불교도 소우주와 대우주의 상응을 말합니다. 인간의 몸은 지수화풍 (地水火風) 사대 (四大)로 이루어졌고, 이는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와 같습니다. 한 중생의 해탈은 우주적 사건입니다.


고통을 넘어 자비로


카발라와 불교는 세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고통을 직시하고, 그 안에서 신성과 불성을 발견합니다. 클리포트 안에 갇힌 신성한 불꽃처럼, 번뇌 속에도 깨달음의 씨앗이 숨어 있습니다. 티쿤과 보살도는 고통을 부정하거나 도망치는 길이 아닙니다. 고통 한가운데로 들어가 그것을 치유의 에너지로 변화시키는 길입니다.


티쿤 올람을 실천하는 사람은 세상의 불의와 고통 앞에서 좌절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 속에서도 복원해야 할 불꽃을 봅니다. 보살은 중생의 업장이 아무리 무겁더라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존재가 결국 부처가 될 것임을 압니다. 두 전통 모두 낙관과 비관을 넘어선 깊은 희망을 품습니다. 세계는 불완전하지만, 그 불완전함은 우리의 사명을 향한 부름입니다.


카발라의 헤세드 (Chesed, 자비)와 불교의 자비 (慈悲, metta-karuna)는 같은 마음입니다. 경계 없이 흘러넘치려는 사랑, 모든 존재를 품으려는 따뜻함입니다. 이 자비는 감상이나 동정이 아닙니다. 우주의 구조 자체에 새겨진 원리입니다. 신성은 자비로 세계를 창조했고, 불성은 자비 그 자체입니다. 티쿤과 보살도를 걷는 사람은 이 우주적 자비의 통로가 됩니다. 그의 손과 발, 말과 침묵이 모두 자비를 실어 나릅니다.


두 전통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명확합니다. 세계는 우리를 기다립니다. 흩어진 불꽃들이, 고통받는 중생들이 우리의 행동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이 일을 완성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시작하지 않을 자유는 없습니다. 작은 친절 하나, 정의로운 선택 하나가 우주를 조금씩 치유합니다. 카발라와 불교는 같은 진실을 다른 언어로 노래합니다. 세계를 구하는 길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 우리의 일상 속에 그 길이 펼쳐져 있습니다.










7-17.4. 음양오행과 세 기둥: 균형의 지혜



생명의 세 기둥이 노래하는 조화


카발라의 생명나무는 단순히 열 개의 세피로트를 나열한 것이 아닙니다. 이 세피로트들은 세 개의 수직선, 곧 세 기둥 위에 배열되어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자비의 기둥 (Pillar of Mercy)이 서 있고, 왼쪽에는 엄격함의 기둥 (Pillar of Severity)이 자리하며, 중앙에는 균형의 기둥 (Pillar of Balance)이 두 극단을 하나로 묶어냅니다. 자비의 기둥은 호크마, 헤세드, 네짜흐를 품고 있습니다. 이 기둥은 무한히 베풀고 확장하려는 신성의 사랑을 담고 있으며, 빛을 아낌없이 흘려보내려는 힘입니다. 반대편 엄격함의 기둥은 비나, 게부라, 호드를 관통합니다. 이 기둥은 그 흘러넘치는 사랑을 제한하고 형태를 부여하며 경계를 세우는 힘입니다. 만약 자비만 있고 엄격함이 없다면 우주는 무질서한 혼돈 속으로 녹아내릴 것이고, 엄격함만 있고 자비가 없다면 모든 생명은 얼어붙어 죽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운데 균형의 기둥이 필요합니다. 케테르, 티페레트, 예소드, 말쿠트를 잇는 이 중심축은 양 극단을 조화시키는 길입니다. 특히 티페레트는 생명나무의 심장으로서 자비와 엄격함이 만나 아름다움이 되는 지점입니다. 중세 카발라 사상가들은 창조가 신의 두 경향 사이의 섬세한 균형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생명을 주고 키우는 자비의 경향과, 형태를 규정하고 제한하는 엄격함의 경향이 서로 당기고 밀어내며 우주를 살아 있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마치 전지의 양극과 음극 사이에서 전류가 흐르듯, 이 두 기둥 사이에서 창조의 에너지가 흐릅니다.


동쪽에서 불어온 바람, 음양오행


이 지혜는 카발라만의 것이 아닙니다. 동쪽 땅에서도 비슷한 깨달음이 꽃피었습니다. 중국의 도교는 우주 만물이 음 (陰)과 양 (陽)이라는 두 기운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칩니다. 양은 밝고 따뜻하며 능동적이고 확장하는 힘입니다. 하늘, 태양, 남성, 움직임이 여기에 속합니다. 음은 어둡고 차가우며 수동적이고 수축하는 힘입니다. 땅, 달, 여성, 고요함이 이쪽입니다. 음과 양은 서로 반대이면서도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양이 극도에 이르면 음이 생겨나고, 음이 극도에 이르면 양이 태어납니다. 태극 (太極) 문양에서 검은색 안에 흰 점이 있고 흰색 안에 검은 점이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카발라의 자비의 기둥은 양의 원리를 닮았습니다. 확장하고 베풀며 생명을 키우는 힘입니다. 엄격함의 기둥은 음의 원리를 품습니다. 수축하고 제한하며 형태를 부여하는 힘입니다. 그리고 균형의 기둥은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는 중도 (中道)의 길입니다. 한의학에서 건강은 몸 안의 음양이 균형을 이룰 때 유지된다고 봅니다. 양이 지나치면 열이 나고, 음이 과하면 냉기가 돕니다. 치료는 부족한 쪽을 보하고 과한 쪽을 사하여 균형을 되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카발라가 말하는 티쿤의 원리와 같습니다.


음양이 변화하면서 다섯 가지 기운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오행 (五行), 곧 목 (木), 화 (火), 토 (土), 금 (金), 수 (水)입니다. 이 다섯은 단순히 나무, 불, 흙, 금속, 물이라는 물질이 아닙니다. 우주 만물이 겪는 다섯 가지 변화의 상태를 상징하는 기호입니다. 목은 봄처럼 생명이 움트며 자라나는 힘입니다. 화는 여름처럼 왕성하게 피어나는 힘입니다. 금은 가을처럼 수렴하고 정돈하는 힘입니다. 수는 겨울처럼 깊이 쉬며 축적하는 힘입니다. 토는 계절의 전환기마다 나타나는 중심의 힘으로, 변화를 조화롭게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오행은 서로를 낳고 서로를 제약합니다. 나무는 불을 낳고, 불은 재가 되어 흙을 낳고, 흙은 광물을 품어 쇠를 낳고, 쇠는 표면에 이슬을 맺어 물을 낳고, 물은 다시 나무를 키웁니다. 이것이 상생 (相生)입니다. 동시에 나무는 흙을 뚫고 자라며 흙을 극하고, 흙은 물을 막으며 물을 극하고, 물은 불을 끄며 불을 극하고, 불은 쇠를 녹이며 쇠를 극하고, 쇠는 나무를 베며 나무를 극합니다. 이것이 상극 (相剋)입니다. 낳는 관계와 제약하는 관계가 동시에 작용하며 균형을 이룹니다. 어느 한쪽이 지나치게 강해지면 다른 쪽이 이를 제어하고, 어느 한쪽이 약해지면 다른 쪽이 이를 도와줍니다.


양쪽 바퀴가 함께 구르는 수레


카발라의 세 기둥과 도교의 음양오행은 같은 진리를 다른 언어로 말합니다. 우주는 대립하는 힘들이 균형을 이루며 작동하는 체계라는 깨달음입니다. 자비와 엄격함, 양과 음, 확장과 수축, 이 모든 것은 서로 반대편에 서 있지만 동시에 서로를 완성시킵니다. 한쪽만으로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자비만 있다면 우주는 형태 없는 혼돈이 되고, 엄격함만 있다면 모든 것이 얼어붙어 생명이 끊어집니다. 양만 있다면 끝없이 팽창하다가 흩어지고, 음만 있다면 무한히 수축하다가 소멸합니다.


균형의 길은 어느 한쪽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양쪽 모두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적절한 때에 적절한 만큼씩 작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봄에는 목의 기운이 강해져야 만물이 싹트지만, 가을에는 금의 기운이 강해져야 열매를 맺고 씨앗을 저장할 수 있습니다. 낮에는 양의 기운으로 활동하고, 밤에는 음의 기운으로 쉬어야 합니다. 생명나무에서 헤세드는 사랑으로 품지만, 게부라는 때로 단호하게 경계를 세워야 합니다. 두 힘이 티페레트에서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진정한 아름다움이 드러납니다.


이 균형의 지혜는 우리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너무 관대하기만 해서는 자신을 잃고, 너무 엄격하기만 해서는 타인을 멀리합니다. 너무 많이 주기만 하면 고갈되고, 너무 많이 받기만 하려 하면 의존적이 됩니다. 적절히 주고 적절히 받으며, 때로는 베풀고 때로는 물러서며, 확장할 때와 수축할 때를 알아야 합니다. 카발라는 이것을 세 기둥의 조화라고 불렀고, 도교는 이것을 음양의 균형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름은 다르지만 가리키는 진리는 하나입니다. 우주는 조화로운 춤이며, 우리 또한 그 춤의 리듬을 따라 살아갈 때 진정한 평화를 찾습니다.










7-17.5. 침춤과 무위: 물러남의 역설



신이 자신을 숨김으로써 세상을 드러내고, 성인이 물러섬으로써 도를 이룬다. 카발라의 침춤 (Tzimtzum)과 도교의 무위 (無爲)는 서로 다른 문명의 산물이지만, 한 가지 놀라운 통찰을 공유합니다. 진정한 창조와 완성은 채움이 아니라 비움에서, 전진이 아니라 후퇴에서, 드러냄이 아니라 감춤에서 시작된다는 깨달음입니다.


신이 물러나 만든 공간


이삭 루리아가 16세기 사페드에서 제시한 침춤 개념은 카발라 역사상 가장 대담한 신학적 모험이었습니다. 그 이전까지 카발라 사상가들은 신성이 어떻게 세상으로 펼쳐지는가를 설명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들은 아인 소프에서 세피로트가 유출되는 과정을, 빛이 그릇 안으로 내려오는 움직임을 묘사했습니다. 그런데 루리아는 정반대의 질문을 던졌습니다. 신이 모든 곳에 가득하다면, 어떻게 신이 아닌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무한한 빛이 온 우주를 채우고 있다면, 세상이 설 자리는 어디에 있는가?


그의 답변은 역설이었습니다. 창조의 첫 움직임은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아인 소프는 자신을 수축시켜 공허한 공간을 만들었고, 그 비어 있는 영역 안에서 비로소 창조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신의 첫 행위는 계시가 아니라 은폐였고, 드러남이 아니라 물러남이었습니다. 게르솜 숄렘은 『유대 신비주의의 주요 경향』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우주의 존재는 신 안에서의 수축 과정을 통해 가능해진다. 무한한 존재인 아인 소프의 첫 행위는 밖으로 나가는 단계가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는 움직임이다. 자기 안으로 물러남이고, 자신에게로 침잠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 안으로 수축하는 것이다."


이 침춤은 단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창조의 모든 단계에서 반복되는 리듬이었습니다. 새로운 발현이 있기 전에는 언제나 수축이 먼저 일어났습니다. 신이 자신을 드러내려 할 때마다, 먼저 자신을 감추는 단계를 거쳤습니다. 빛이 흘러나가기 위해서는 먼저 빛이 물러나야 했고, 신성이 펼쳐지기 위해서는 먼저 신성이 접혀야 했습니다. 하임 비탈의 『에츠 하임』은 이 리듬을 우주적 호흡으로 묘사했습니다. 신이 숨을 들이쉴 때마다 세상은 존재의 공간을 얻었고, 신이 숨을 내쉴 때마다 세상은 신성의 생명력을 받았습니다.


침춤은 신 자신의 유배였습니다. 신은 세상을 위해 자신의 전체성에서 물러나 깊은 고독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자발적 축소가 없었다면, 무한한 빛 앞에서 그 어떤 피조물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신의 사랑은 자신을 감추는 겸손 속에서 드러났고, 신의 창조는 자신을 제한하는 자기희생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성인이 물러나 이룬 도


도교의 창시자로 알려진 노자 (老子, 기원전 6세기경)가 남긴 『도덕경』은 물러남의 지혜를 담은 5천 자의 시였습니다. 그가 제시한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태가 아니라, 억지로 하려는 마음을 내려놓는 자연스러움이었습니다. 도는 만물을 낳고 기르지만, 그것을 소유하려 하지 않습니다. 도는 만물에 생명을 주지만, 그 공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도는 만물의 어른이지만, 그것을 지배하려 하지 않습니다.


『도덕경』 37장은 말합니다. "도는 항상 하는 일이 없으면서도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다 (道常無爲而無不爲, 도상무위이무불위)." 이 역설적 표현은 무위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무위는 무능이 아니라 최고의 능력이고, 부재가 아니라 가장 깊은 현존이며, 포기가 아니라 진정한 성취입니다. 성인은 억지로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기에 오히려 세상을 변화시키고,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기에 오히려 빛나며, 다투지 않기에 오히려 이깁니다.


물은 무위의 가장 완벽한 스승입니다. 『도덕경』 8장은 말합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문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상선약수 수선리만물 이불쟁 처중인지소오 고기어도)." 물은 스스로를 낮추어 계곡으로 흐르지만, 그 부드러움으로 단단한 바위를 뚫습니다. 물은 형태를 고집하지 않고 그릇의 모양을 따르지만, 바로 그 유연함 때문에 어떤 장애물도 돌아갈 수 있습니다. 물은 자신을 주장하지 않지만, 모든 생명은 물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성인은 물처럼 삽니다. 『도덕경』 7장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하늘은 영원하고 땅은 오래간다. 하늘과 땅이 영원하고 오래갈 수 있는 까닭은 스스로를 위해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원히 살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자기 몸을 뒤로 하지만 오히려 앞서게 되고, 자기 몸을 밖에 두지만 오히려 보존된다.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를 이룰 수 있다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是以聖人 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非以其無私邪 故能成其私, 천장지구 천지소이능장차구자 이기불자생 고능장생 시이성인 후기신이신선 외기신이신존 비이기무사야 고능성기사)." 성인의 역설은 침춤의 역설과 같습니다. 물러남으로써 앞서고, 비움으로써 채우며, 자신을 버림으로써 자신을 완성합니다.


비움이 만드는 공간


침춤과 무위는 같은 진리를 서로 다른 언어로 노래합니다. 카발라는 신학의 언어로, 도교는 자연의 언어로, 한 가지 깊은 통찰에 도달합니다. 진정한 창조는 채움이 아니라 비움에서 시작된다는 깨달음입니다. 신이 공간을 만들기 위해 자신을 수축시켰듯이, 성인은 도를 이루기 위해 자신을 낮춥니다. 신이 세상에 자리를 주기 위해 물러났듯이, 성인은 만물에 공간을 주기 위해 뒤로 물러섭니다.


침춤이 만든 공허한 영역은 단순한 빈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창조의 가능성으로 충만한 공간이었습니다. 신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레쉬무 (Reshimu)라는 미세한 흔적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이 희미한 자취가 없었다면, 나중에 흘러 들어온 신성의 빛은 아무것도 붙잡을 곳이 없었을 것입니다. 무위가 만드는 비어 있음도 같습니다. 『도덕경』 11장은 말합니다.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통에 모이지만, 그 가운데 빈 공간이 있기에 수레가 쓸모 있다.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들지만, 그 안의 빈 공간이 있기에 그릇이 쓸모 있다. 문과 창을 내어 방을 만들지만, 그 안의 빈 공간이 있기에 방이 쓸모 있다. 그러므로 있는 것이 이로움을 만들지만, 없는 것이 쓸모를 만든다 (三十輻共一轂 當其無有車之用 埏埴以爲器 當其無有器之用 鑿戶牖以爲室 當其無有室之用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삼십복공일곡 당기무유거지용 선직이위기 당기무유기지용 착호유이위실 당기무유실지용 고유지이위이 무지이위용)."


바퀴통의 빈 공간, 그릇의 빈 속, 방의 빈 공간. 이 모든 비어 있음이 실제로는 가장 중요한 쓸모를 만듭니다. 마찬가지로 침춤이 만든 공허한 영역은 온 우주가 거할 수 있는 집이 되었고, 무위가 만든 비어 있는 마음은 도가 머물 수 있는 그릇이 되었습니다. 물러남은 소극적 회피가 아니라 적극적 창조였고, 비움은 결핍이 아니라 충만의 조건이었습니다.


물러남의 용기


침춤과 무위는 우리에게 물러남의 용기를 가르칩니다. 우리는 늘 채우려 하고, 드러내려 하고, 앞서려 합니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높이 오르고, 더 크게 빛나려는 욕망이 우리를 몰아갑니다. 그러나 침춤과 무위는 정반대의 길을 가리킵니다. 때로 가장 큰 사랑은 물러나는 것이고, 가장 깊은 지혜는 비우는 것이며, 가장 위대한 힘은 양보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자라도록 자신의 자리를 양보해야 합니다. 선생은 제자가 스스로 깨닫도록 한 발 뒤로 물러서야 합니다. 지도자는 백성이 자유롭게 살도록 자신의 뜻을 거두어야 합니다. 신이 세상을 위해 자신을 감추었듯이, 우리도 타인을 위해 우리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도덕경』 66장은 말합니다. "강과 바다가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스스로를 낮추기 때문이다 (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 以其善下之)."


침춤은 우리에게 신성한 자기제한을 가르칩니다. 신조차 자신을 제한했는데, 우리가 어찌 무한히 팽창하려 할 수 있겠습니까? 무위는 우리에게 억지로 하지 않는 지혜를 가르칩니다. 도조차 억지로 하지 않는데, 우리가 어찌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휘두르려 할 수 있겠습니까? 물러남은 패배가 아니라 성숙이고, 비움은 결핍이 아니라 준비이며, 침묵은 무능이 아니라 존중입니다.


침춤과 무위가 만나는 곳에서, 우리는 물러남의 역설을 깨닫습니다. 신이 자신을 감춤으로써 세상을 드러냈듯이, 우리도 우리 자신을 낮춤으로써 타인을 빛나게 할 수 있습니다. 성인이 뒤로 물러섬으로써 앞서게 되었듯이, 우리도 양보함으로써 진정한 성취를 얻을 수 있습니다. 비움이 채움의 시작이고, 물러남이 전진의 조건이며, 침묵이 가장 깊은 말이 된다는 진리. 그것이 바로 침춤과 무위가 우리에게 전하는 물러남의 역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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