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람 곁에 머문다는 것, 혹은 어떤 대상에 마음을 얹어둔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그것은 한겨울 아랫목 같은 따스함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살을 파고드는 서늘한 슬픔의 뿌리가 되기도 한다. 마음을 내어주고, 그 빈자리에 상대를 들이고, 끝내는 그 무게 때문에 앓는 과정. 어쩌면 산다는 것은 불가항력적으로 무언가에 정(情)을 붙이고, 그 흔적을 훈장처럼 혹은 흉터처럼 지니게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오래전 읽었던 어느 작가의 수필 한 대목이 잊히지 않는다. 시골집의 고요를 깨트리며 잠결에 발가락을 물고 달아난 지네 한 마리. 본능적인 혐오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문밖으로 내던지려던 찰나, 그는 멈칫했다. 문득 두꺼비를 자식처럼 거두어 기르던 어느 화가의 이야기가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징그러움이라는 감각 너머에 생명이라는 무게가 있음을 자각한 순간이었을까.
그는 지네를 죽이는 대신 빈 커피 병에 담았다. 그 투명하고 좁은 유리 감옥이 지네의 세상이 되었다. 그는 며칠간 풀잎을 뜯어 넣어주고, 지렁이와 이름 모를 벌레들을 잡아다 넣어주었다. 수십 개의 다리가 꿈틀거리는 그 기괴한 생명체를 들여다보며 밥을 챙기는 일. 아내는 질색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작가는 그 짧고 기묘한 동거를 통해 마음의 지평이 허물어지는 경험을 했다.
“지네하고도 정이 드는데, 세상 무엇과 인들 정들이며 살지 못할까.”
그 문장을 읽어 내려가던 날, 나는 책장을 덮고 한참이나 허공을 응시했다. 그것은 단순한 에피소드가 아니었다. 관계의 비루함과 존귀함을 동시에 꿰뚫는 서늘한 통찰이었다. 혐오스럽던 대상조차 시간을 담보로 시선이 머물면, 그곳에 보이지 않는 끈이 생긴다. 하물며 사람임에랴.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물음표가 남았다. 우리는 정말 모든 것과 정을 나눌 수 있는가. 혹은 나누어야만 하는가.
인간의 마음이란 참으로 얄궂은 탄성을 지녔다. 처음 마주했을 때의 그 낯설고 거칠던 표면도, 시간이란 물결에 씻기다 보면 둥글어진다. 그것은 의지적인 노력이라기보다, 어쩔 수 없이 스며드는 빗물에 가깝다. ‘정’이라는 끈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가늘어 보이지만, 실상 그 무엇보다 질기고 억세다.
사회라는 정글에 갓 발을 들였던 첫 직장 시절이 떠오른다. 모든 것이 서툴고 버거웠던 날들이었다. 사무실의 공기는 언제나 건조했고, 선배들의 등은 높고 단단한 벽처럼 느껴졌다. 누구 하나 살가운 눈길을 주지 않는 삭막한 공간에서 나는 자주 길을 잃었다. 퇴근 후 텅 빈 사무실에 홀로 남아 모니터 불빛을 마주하고 있을 때면, 입안에서 쓴 내가 났다.
‘이런 곳, 이런 사람들과는 죽어도 정들지 않을 거야. 그저 견디는 거야. 월급만큼만 버티자.’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마음의 빗장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사무적인 미소라는 가면 뒤에 숨었다. 그러나 사람의 다짐이란 것이 얼마나 허술한 모래성 같은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계절이 몇 번 바뀌고, 창밖의 풍경이 변하는 동안 내 마음의 풍경도 달라져 있었다. 매일 아침 마주치는 경비원의 투박한 인사, 믹스 커피가 돌아가는 자판기의 윙윙거리는 소음, 야근을 마치고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동료와 나눠 마시던 캔맥주의 차가운 감촉. 그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것들이 어느새 내 살갗에 스며들어 있었다. 무심하게 툭 던지는 선배의 한마디에 담긴 걱정을 읽어내게 되었고, 동료의 낡은 구두 뒤축을 보며 짠한 연민을 느끼게 되었다.
익숙해진다는 것. 그것은 정의 가장 소박하고도 강력한 침투 방식이다. 미워하던 마음도, 경계하던 눈빛도 함께 흘려보낸 시간 앞에서는 무장해제된다. 불편했던 관계가 어느 순간 편안한 낡은 옷처럼 몸에 감길 때,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내 안의 모난 부분과 상대의 뾰족한 부분이 서로 부딪치며 닳아, 마침내 서로를 위한 홈을 만들어냈음을.
이러한 경험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이제는 누군가를 쉽게 미워하거나 재단하지 않으려 애쓴다. 지금 당장 불편하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이면에 내가 모르는 시절과 사연이 있음을 짐작해 보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다가가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낯선 타인 속에서 나를 닮은 그림자를 발견하곤 한다. 그것이 정의 힘이고, 관계의 신비다.
우리는 너무나 빠르고 날카로운 세상에 살고 있다. 낯선 생각, 다른 문화, 처음 보는 이방인을 향해 혐오와 배척의 화살을 쏘아대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판단은 빠를수록 유능하다 칭송받고, 이해는 느릴수록 미련하다 손가락질받는다. 허나 진정한 이해는 결코 속도전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콩나물 시루에 물을 주듯,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젖어 드는 과정이다. 유리병 속의 지네조차 애틋해질 수 있다면, 말과 눈빛을 나눌 수 있는 사람 사이에 흐르는 정은 얼마나 깊고 아득한 우물인가.
정은 단순한 감정의 찌꺼기가 아니다. 그것은 삶을 대하는 태도이자, 세상을 견디게 하는 면역 체계다. 우리네 인생은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하는 관계의 그물망이다. 처음엔 서걱거리는 모래알 같아도, 함께 비를 맞고 바람을 견디다 보면 어느새 단단한 흙이 되어 서로의 뿌리를 지탱해 준다. 그 흙들이 모여 관계라는 숲을 이루고, 그 숲이 모여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풍경을 완성한다.
물론, 정이 깊어진다는 것이 마냥 축복만은 아님을 안다. 뿌리가 깊을수록 뽑혀 나갈 때의 고통은 크다. 정 떼는 일이 살점 떼는 일처럼 아픈 까닭이다. 때로는 그 끈끈함이 집착이 되어 서로를 옥죄기도 하고, 끊어내야 할 때를 놓쳐 썩어들어가기도 한다. 모든 관계에서 정이 건강하게 자라는 것은 아니기에, 정은 양날의 검처럼 우리를 위협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 없는 삶을 상상하면 입안이 바싹 마른다. 물기 하나 없는 사막처럼 삭막하고 메마른 삶. 상처받지 않기 위해 아무것에도 정을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살아있으나 죽은 것과 진배없지 않을까. 우리는 본질적으로 서로에게 연결되기를 갈망하는 존재다. 매일 스치는 거리의 풍경, 손때 묻은 찻잔 하나, 그리고 곁에 있는 사람의 숨소리에 기꺼이 마음을 내어주는 것. 그 연결감이 우리를 살게 한다.
그러니 나는 기꺼이 정을 들이며 살아가려 한다. 비록 그 끝이 아릿한 통증으로 남을지라도, 차가운 유리병 속에 풀잎을 넣어주던 그 마음을 잃지 않으려 한다. 사람 냄새나는 둔탁하고도 묵직한 그 정(情)이야말로, 차가운 우주 속에 내동댕이쳐진 우리가 서로를 확인하는 유일한 온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