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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병원

역지사지, 둥글게 사는 삶, 이해

by 디카이분의일

신발장을 정리했다. 한참 동안 주인의 선택을 받지 못한 갈색 구두가 먼지를 가득 안은 채 신발장 한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자주 신지 않아 새것과 다름없었다. 잘 닦아 다시 신어 볼 요량으로 서둘러 가방에 넣고 출근길을 재촉했다.

직장과 가까운 곳에 ‘구두병원’이라는 간판을 단 수선집이 있다. 그곳엔 60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주인이 있었는데, 특유의 입담과 친화력으로 직업적 고충과 에피소드를 재미있게 풀어놓곤 해서 자연스럽게 구두 고칠 일이 있으면 그곳을 자주 찾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수선집처럼 불에 그을려 광을 내는 요행을 쓰지 않았고 오롯이 구두약과 물만 사용해서 광을 내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다른 곳에 비해 수선 비가 저렴했던 것도 그 이유다.

출근길에 ‘구두병원’에 들러 먼지 가득한 갈색 구두를 맡겼다. 구두를 받아 든 주인은 “가죽에 흠이 생긴 곳에 색을 칠한 후 닦으면 좋겠다.”라고 해서, 그렇게 하라는 말과 함께 가느다란 붓에 염색약을 묻혀 칠하는 모습을 보면서, 잠시 뒤 찾으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왔다.

시간이 흘러 구두를 찾으러 갔다. 얼마나 잘 고쳐졌을까 하는 기대감을 안고 가게문을 열었다. 주인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구두를 꺼냈다. 눈앞에는 반짝반짝 광을 낸 갈색구두가 아니라 검은색 구두가 놓여 있었다. 분명히 모양과 크기는 똑같은데, 색깔만 검게 변해 있었다. “색깔이 왜 이렇죠?”라고 물었다. “염색약이 ,,. ,,. ”라며 주인은 말꼬리를 흐렸다. 화가 났지만 그동안 몇 번의 인연으로 안면도 튼 사이라 대 놓고 내색하기도 곤란했다. 화를 참고 “어쩔 수 없지요, 그냥 주십시오.”라는 짧은 말과 함께 비용을 지불하고 구두를 집어 들었다.

검게 변한 구두를 다시 보니 웃음이 났다. 갈색이 검은색으로 변했다는 것도 그렇고, 염색약을 잘 못 써서 안절부절못했을 주인의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그 자리에서 화내지 않은 나 자신도 물론 대견했다.

젊은 시절 이런 일들을 왜 둥글게 넘기지 못했을까? 상대를 쏘아 부치고, 양보와 이해 못 하는 팍팍한 세상을 살았을까? 과거를 복기해 보면 후회되는 일이 정말 많다. 나이 50 중반에 접어들며 삶과 세상을 조금씩 깨달아 가고 있는 것 같다. 둥글게 산다는 것은 비굴하게 산다는 것과는 다르다. 상대를 배려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생각이 구성원 모두에게 널리 퍼져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문제의 그 구두를 꺼내 신었다. 청명한 햇살에 비친 검정 구두가 어느 때 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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