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24년 크리스마스에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었다.
나의 크리스마스에도 감성이 필요했나 보다.
이런저런 방법론에 빠져 ’OO의 기술‘ 이란 제목을 가진 책들을 유심히 살피니 사랑을 기술로 표현한 책이 있어 신선했다. 그즈음 인간의 감정 중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머릿속에 빼곡했다.
알고 싶었다. 그 본질은 무엇이며, 기술로 본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사랑은 기본적으로 ‘주는 행위’로 표현되며, 생명력과 창조성을 나누는 행위이다.
또한 성숙한 사랑은 보호, 책임, 존경, 이해라는 키워드와 함께하며, 상대의 성장과 행복을 바라는 적극적 태도를 요구한다.
살면서 이것을 실천하고 싶은 대상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기회이자 경험인가.
그렇다면 오늘날 현대사회에서의 사랑은 그 본질을 잘 유지하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자본주의, 개인주의, 인간 소외, 사랑의 상품화로 마치 사랑도 상업적 교환이 가능한 것처럼 그 의미가 변질되어 가고 있다.
내 경험들 중에도 이게 맞나 하는 의문들이 여러가지이다.
지인 결혼식에서 누군가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신부 집은 좀 사는 거 알고 있었는데, 신랑 집은 좀 사나?” 피로연에서 많이 들릴 법한 얘기인가 싶다가도, 두 사람의 만남, 사랑, 앞으로의 앞날을 축하하는 말보다 앞서 들리는 이 질문에 혼자 뜨악했던 경험이 있다. ‘결혼은 사랑이 다가 아니다’라는 말이 이해는 되지만 그래도 사랑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저 질문은 아직도 내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사랑을 ‘잘’ 실천하는 방법은 위에서 정의한 바와 같이
주고받는 교환이 아닌 존재와 성장의 방식이어야 한다. 상대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인간으로서의 성장을 돕고, 이를 위해 개인의 훈련, 집중, 인내, 관심이 꼭 수반되어야 한다. 또한 스스로에 대한 겸손과 객관화를 통해 자아도취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명쾌했다.
한동안 나는 생각에 잠겼다.
과연 나는 위에서 말한 것들을 ‘잘’ 실천하고 있었을까?
곰곰이 지난 20대를 회상해 보며 나 스스로가 너무나 부족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 시절에 그들이 주었던 관심과 집중을 꽤나 당연히 여겼다. 수술받은 나를 안심시켜 주며 손을 꼭 잡고 집까지 데려다주던 세심함, 나를 위해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주던 정성, 중요한 날 나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한 노력. 그들의 예쁜 마음에 진정으로 깊고 깊은 고마움을 전했던가. 내가 상대를 위해 했던 노력만을 기억하며 그들의 집중, 인내, 관심을 쉽게 생각하지는 않았던가.
지금 돌이켜보면 너무 어리기도 했고, 인간으로써 성숙하게 정제되지 않아 내가 하는 사랑도 성숙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좋은 사람을 만나려면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나보다. 그리고 내가 나 스스로를 많이 사랑하고, 나의 존재와 성장을 스스로 인정하고 응원할 때, 그 힘에서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힘도 자연스레 만들어 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단순히 물질적인 것이 준비되어 '준비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쁜 일상에 치여 상대의 존재를 가벼이 여기지 않을 준비.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고, 기다려주고, 헌신할 수 있는 마음속 소중한 여유의 공간.
나에게 주는 관심, 존경, 응원을 알아보고 고마움을 전할 수 있는 더 따뜻한 마음.
이런 것들이 '진정한 준비'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의 30대의 연애는 그 모습이 좀 더 온전하고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