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8화
내가 적응력이 뛰어난 건지 감옥도 사람이 사는 곳인지 개구멍으로 들어오는 밥을 먹으면서 서글펐던 마음도 희미해졌고 낯설고 이상하게 보이던 여자들도 동생이 되고 언니가 되고 거기에 정도 들기 시작한다는 느낌까지 들 정도로 교도소에 일원이 되어가고 있었다.
가끔씩 교도관들과 농담도 했고, 유치한 3류 연애소설을 읽는 재미에 푹 빠져서 도서 대여날을 기다리기도 했다.
계절은 봄을 향해 달리고 있어서 가끔 작은 철창문을 넘어오는 바람에게서 단내가 나기도 했고, 봄비가 내린 후 흙냄새는 코를 자극하고 햇살도 자꾸만 착해져 가고 있었다.
그 무렵 판사들의 인사이동 기간이라 모든 재판이 중지되었다가 다시 재개가 되었고 가끔 변호사님이 접견을 오시면 합의문제로 의논하곤 했는데 피해자가 합의의사가 전혀 없는 것 같다고 하시면서 공탁금을 고민해 보자고 했다.
사실 합의의사가 전혀 없는데 공탁금을 건다고 찾아갈까 의문도 있다면서 시간이 더 있으니 신중하게 진행하자고 하는 상태로 나는 2심을 준비하고 있었다.
778번이 사라진 후 27번도 2심 재판에 온통 신경을 집중하다 보니 그 결벽증은 도를 넘어서고 호텔방도 아닌데 조금만 냄새가 나도 환기시킨다고 창문을 열어놓으니 가뜩이나 추운 방이 찬바람까지 씽씽 들어오니까 오들 오들 떨어야만 했다.
거기에 두 달 가까이 계속 자신의 억울함을 똑같이 이야기하니까 그 부분도 너무 짜증스럽고 같은 대답을 하면 다시 잘 생각해 보라고 하니 너무 스트레스였다.
" 저번에 내 항소이유서 봤지 어땠어 ? "
" 응 언니 잘 썼더라 "
" 2심에서 무죄 나오겠지 ? "
" 언니가 진짜 잘못이 없다는 걸 다시 확실하게 증명해 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 "
늘 같은 대화 속에 마음은 매일 잿빛 하늘처럼 우울하고 지쳐갈 때쯤 드디어 27번의 시선을 끌고 관심을 기울일만한 신입이 들어왔다.
같은 방은 아니었지만, 매일 운동시간에 27번은 그 여자에게 집중했고 그 여자의 모든 것에 흥미를 느끼는 듯했다.
27번이 관심을 갖는 여자는 밖에서 건설업을 했던 여자고 배임 횡령으로 들어왔는데, 성형을 많이 한 것인지 나이보다 어려 보이고 귀티가 났다.
눈썹 연장술을 했는지 긴 속눈썹이 길어서 꼭 마스카라를 한 것처럼 눈을 깜빡이면 사슴이 긴 속눈썹을 위아래로 꿈뻑꿈뻑하는 것 같이 보이는 여자였다. 그날도 운동을 마치고 들어왔는데 또 그 사슴눈썹을 닮은 여자이야기를 쏟아냈다.
" 나 아까 그 언니(769번) 랑 운동시간에 진지한 대화를 했는데 밖에 나가면 그 언니랑 같이 사업하기로 했어 "
" 언니는 건설 쪽 모르는데 어떻게 같이 사업을 해 "
" 나 밖에 있을 때 공인중개사 하는 친구 사무실에서 근무한 적 있어 아주 연관 없지는 않아 "
" 잘 되었네 그래 언니 나가면 사업도 하고 돈도 많이 벌고 잘 되면 좋겠다 "
자녀가 없어서 그런가 가끔은 27번이 세상을 참 단순하게 바라본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 말고 다른 쪽에 관심을 갖는 건 좋은데 감방에서 만난 인연을 왜 굳이 밖에 가서 또 인연을 끌고 갈 생각일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더구나 배임 횡령이라는데 신중히 생각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27번은 결혼을 안 해서 남편도 자식도 없고 가끔 접견 오던 친구가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접견도 안 오고 영치금도 넣어주지 않으니까 초조해하는 게 느껴지고 약간 히스테리를 부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나한테 전화번호를 주면서 접견 갈 때 내 접견인에게 그 번호로 전화를 해달라고 하면서 전화내용을 인터넷 편지로 알려달라는 부탁도 했다.
내 지인이 접견을 왔고 겨우 간신히 전화번호를 주면서 통화한 내용을 내일 접견 올 때 이야기해 달라고 했는데
그 사람이 곧 면회 간다고 했다길래 그대로 27번한테 이야기해 줬는데도 진짜 전한 거 맞느냐 왜 그런데 접견 안 오느냐 매일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 야 너 내 친구번호 전해준 거 맞는 거야 ? 지금쯤이면 접견 와야 하는데 왜 안 오는 거야 ? "
" 언니 난 분명히 전달했고 내 동생이 통화도 했대 그것도 교도관한테 들킬까 봐 간신히 전해줬어 언니 친구가 접견 안 오는 걸 나한테 따지면 내가 어떻게 알아 "
교도소는 접견할 때 휴대폰도 메모지도 갖고 올 수가 없어서 진짜 겨우 겨우 부탁을 했는데 모든 신경질을 나한테 부리니까 나중엔 진짜 화가 났고 짜증이 났다.
" 언니 영치금 때문에 그러는 거면 당분간 필요한 거 내가 사줄 거니까 마음을 편하게 가져 "
" 지금 영치금이 문제가 아니야 밖에 일도 궁금하고 그 친구한테 내 강아지를 맡겼는데 그것도 걱정이고 살던 원룸도 어찌 되는 건지 궁금한 게 많아서 그러지 "
" 누구든 접견 오면 내가 다시 부탁해 볼게 "
재판날은 다가오고 진짜 심난해 죽겠는데 27번은 나날이 짜증이고, 예민해지고 나는 관심도 없었는데 그 769번 이야기를 하루 종일 한다거나 쓸고 닦고 쓸고 닦고 너무 사람을 귀찮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접견은 안 오고 27번한테 편지가 왔다.
강아지는 잘 있고 밖에 사정이 안 좋아서 당분간 접견이 어렵다는 내용 같았다.
그날 이후 27번은 모든 감정을 나에게 쏟아버렸고, 나는 점점 말 수가 줄어들었다
무슨 말만 하면 왜 그렇게밖에 못하느냐
말에 성의가 없다 진심이 없다는 둥 진짜 사람을 돌게 만들고 있었다.
갇혀 산다는 것이 실감 났고, 모르는 사람과 같은 방에서 지내는 것이 얼마나 고난인지 알게 되고 밤에 차가운 담요위에 누우면 주책없는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적응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전혀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던 거다.
내가 너무 거절도 못하고 배려만 해주었나 밖이나 감옥이나 배려를 해주면 권리로 아는 건 매한 마찬가지고 조금 착하다 싶으면 찍어 누르려하고 또 냉정하게 하면 못된 사람 취급을 하고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는데 점점 갇혀 있는 생활이 너무 힘들고 마음에 터트리지 못하는 고름이 생기는 듯했다.
2심 재판결과보다는 하루빨리 27번에게서 벗어나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사회에서는 같은 사람과 매일 만나도 매일 이야기꽃이 피었지만, 감옥에선 매일 같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다는 게 마음에 남아있던 착한 꽃도 시들게 만들고 아예 착함을 스스로 자꾸 밀어내게 했다.
독해야 살고 냉정해야 나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곳이었다.
그때 그나마 위안은 밖에서는 그다지 친한편은 아니었던 오라버니가 매일 인터넷 편지를 보내왔는데 밖의 일상을 상세하게 편지에 써서 보내주었고, 그 오라버니 말투가 너무 재미있고 위트가 있어서 하루에도 몇번씩 그 편지를 읽으면서 위로를 받았다.
사회에서 나에게 도움받은 사람들은 다 떠나고 있었지만, 반대로 깊은 인연도 아니었던 사람들이 힘이 되어주고 있었다.
인생은 내일 일을 알 수가 없고, 인연은 언제 어디서 끝나고, 또 어딘가에서 새로운 인연이 시작되는가 싶은게 인생의 아이러니가 이런거구나 새삼 삶을 되짚어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인간의 마음은 열길 물속보다 알 수 없다는 걸 실감하고 있었다.
그날 밤 추적추적 봄비가 내렸고 창을 넘어오는 흙냄새가 좋아서 한참이나 쇠창살을 붙잡고 내리는 비를 보면서 부디 이 시간이 조금만 빨리 흘러내리기를 모든 순간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 9화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