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는 가장 현실적인 저항.

생상스 <죽음의 무도>가 전하는 유머의 역설

by 여자말러리안

유머는 무거운 공기를 가볍게 만들어준다.

우리는 종종 '잘 살아야 한다'라는 욕심에, 삶을 지나치게 진지하게만 대할 때가 있다.

그렇게 하루를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는 웃음을 잊고 살게 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매일같이 3시간 가까운 출퇴근길을 버티며 대중교통에 몸을 싣다 보면, 웃음은 삶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감정처럼 느껴지곤 한다. 그런데 불현듯 스마트폰 속 짧은 영상 하나에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올 때가 있다. 그 순간은 오히려 역설처럼 다가온다. 이렇게 소소한 장면 앞에서 웃고 있는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웃음 없이 살아왔는지를 새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국어책에도 늘 '풍자'가 등장하지 않았던가.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는 현실을 비틀어 웃음으로 풀어내는 방법.

어쩌면 조상들은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유머야 말로 가장 고요한 무기라는 것을. 그리고 바로 그 힘은, 음악 속에서도 모습을 드러낸다.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는 죽음이라는 가장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기묘하게도 웃음을 머금은 선율로 우리를 맞이한다. 마치 삶과 죽음이 서로를 비웃듯, 장송곡과 춤곡이 한 무대 위에서 교차한다. 죽음을 희화화하는 순간, 죽음을 초월하고 일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카미유 생상스(Camille Saint-Saëns)의 교향시 《죽음의 무도(Danse macabre)》는 바로 그 역설을 음악으로 구현한 작품이다. 자정의 종소리와 함께 해골들이 일어나 왈츠를 추고, 새벽의 닭 울음에 맞춰 다시 잠드는 한밤의 풍경을 생상스는 공포를 조롱으로, 비극을 춤으로 바꾸어 우리를 다시 아침으로 돌려보낸다.


1835년에 파리에서 태어나 1921년에 세상을 떠난 생상스는 낭만주의 시대 프랑스의 대표적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였다. 완벽한 절대음감과 폭넓은 재능으로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고, 10세에 살 플레이엘(Salle Pleyel)에서 모차르트 K.450, 베토벤 협주곡 3번을 연주하며 “프랑스의 모차르트”라 불렸다.

여담으로, 그의 또 다른 부캐는 ‘여행가’였습니다. 생상스는 유럽, 미주, 중남미까지 27개국에서 179회 이상의 연주 여행을 다녔고, 특히 북아프리카에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1873년 처음 알제리를 방문한 뒤, 매해 겨울이면 알제리·이집트·튀니지에서 시간을 보내며 현지의 선율과 정서를 작품 속에 담아냈죠.《알제리 모음곡(Op.60)》과 《아프리카(Op.89)》 같은 곡에는 이 체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그는 ‘Charles Sannois’라는 가명으로 현지에서의 기록을 남기기도 했는데, 이는 그의 음악이 풍경과 사람, 그리고 그곳의 소리에서 태어났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1888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는 알제리에서 산책과 독서, 음악 감상으로 자신을 회복했고, 결국 86세의 나이에도 알제리에서 겨울을 보내다 생을 마감했습니다. 19세기 프랑스에서 오리엔탈리즘이 유행하던 시기에, 생상스에게 알제리는 단순한 도피처가 아니라 사랑하는 제2의 고향이자, 창작의 실험실이자, 마음의 안식처였습니다. 그럼에도 《죽음의 무도》는 그의 이국주의적 색채와는 결이 조금 다릅니다. 이 작품의 뿌리는 중세 유럽의 죽음의 춤(Danse macabre)입니다. “죽음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하나의 움직임으로, 왕과 귀족, 농부와 아이가 함께 신분을 넘나들며 춤을 추며, 해골들의 행렬로 형상화됩니다.


생상스는 이 모티프를 1872년 앙리 카잘리스의 시에 붙인 가곡으로 먼저 만들고, 1874년에 관현악 교향시로 확장한다. 자정을 알리는 하프의 12타, 증 4도의 불길한 바이올린 스콜다투라(Scordatura), 해골의 뼈 소리를 그리는 실로폰, 새벽을 암시하는 오보에의 “닭 울음”, 그는 공포를 소리의 장치로 해체하고, 두려움을 왈츠의 익살로 전환합니다. 죽음을 우아한 춤으로 역설하는, 이 아이러니가 바로 오늘의 우리에게 위안을 건넵니다. 생상스의 음악은 죽음을 부정하지 말고, 대신 그 곁에서 춤을 추고 온몸으로 만끽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중세 14세기 중엽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1/3이 사망하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가 얼마나 흐릿한지를 체감하게 되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죽어가는 현실 속에서 탄생한 하나의 예술양식이자 집단적 정신사적 현상이 바로 ‘죽음의 춤(Danse macabre)’입니다. 교회 벽화나 시에서 자주 등장하며, 핵심 메시지는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것이지요. 1374년에는 ‘광란의 춤(Tanzwut)’이라는 사건이 실제로 발생합니다. 라인강과 모젤강 연안 도시에서 시작해 쾰른과 프랑스에까지 퍼져 수백 명이 미친 듯이 춤을 추었다고 전해집니다. 사람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살아 있음의 기쁨과 죽음의 불안을 춤으로 떨쳐내려 했던 것입니다. 이 춤의 특징은 왕, 귀족, 농부, 어린이 등 모든 계급의 해골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모습입니다. 현실에서는 결코 섞일 수 없는 존재들이 죽음 속에서는 동등하게 존재하는 것이지요. 도덕과 계급이라는 허상을 비틀고 해체하는 풍자이자 유머였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이어져 19세기 음악에서는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 리스트의 《죽음의 무도》로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흥미롭게도 생상스는 《죽음의 무도》를 작곡한 지 10년 뒤, 《동물의 사육제》의 〈화석〉에서 모차르트의 ‘작은 별’과 함께 《죽음의 무도》의 멜로디를 사용하며, 언젠가 자신의 음악도 화석처럼 잊히리라는 자조적 풍자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백승민, 「Gustav Mahler Symphony」>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는 기본적으로 왈츠의 리듬(3/4박자)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왈츠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우아한 무도회의 춤이 아니라, 무덤에서 깨어난 해골들의 춤입니다. 생상스는 죽음을 엄숙하고 위엄 있게 그리는 대신, 희화화된 춤으로 표현했습니다. 바이올린의 트레몰로, 극적인 강약 대비, 기괴하게 비틀린 리듬은 죽음을 익살스럽게 과장하며, 마치 청중에게 “죽음조차도 조롱할 수 있다”라고 속삭이는 듯합니다.


작품의 도입부는 인상적입니다. 하프가 정확히 12번 울려 퍼지며 자정을 알립니다. 이는 앙리 카잘리스의 시가 담고 있는 ‘한밤중의 종소리’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초자연적 세계가 열리고 죽음이 등장하는 순간을 음악적으로 표현한 장치입니다. 기계처럼 정확한 울림은 마치 괘종시계가 인류를 초월한 시간을 재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이어지는 첫 번째 주제는 스페인풍 리듬을 활용하여 악마들이 흥겹게 등장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두 번째 주제는 반음계적으로 하강하는 선율을 통해 밤의 고요와 죽음의 그림자를 그려냅니다. 서로 상반된 두 세계가 교차하며, 무덤 위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무도회의 장면을 만들어냅니다.


무엇보다 이 곡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솔로 바이올린의 스카르다투라(Scordatura) 기법입니다. 보통의 조율에서 벗어나 E현을 반음 내려 E♭으로 조율해, 증 4도의 불협화음을 연출합니다. 이 간격은 중세에서 ‘악마의 음정’으로 불렸던 만큼, 청중에게 오싹한 인상을 줍니다. 생상스는 이를 통해 오프닝부터 기묘하고 괴이한 색채를 만들어내며, 죽음이 등장하는 순간의 긴장감을 배가시킵니다. (흥미롭게도 이 기법은 훗날 말러의 교향곡 제4번 2악장에서도 다시 활용됩니다.)

또한 이 작품의 상징적 악기는 실로폰입니다. 당시 서커스나 거리 음악에 쓰이던 ‘천한 악기’로 여겨졌던 실로폰을, 생상스는 정규 오케스트라 편성에 과감히 끌어들입니다. 반복되는 두드림은 해골들이 뼈를 맞부딪히며 춤추는 듯한 “청각적 해부학 묘사”로 변모합니다. 앙리 카잘리스의 시에 등장하는 해골들의 움직임 “지그(Zig)”를 소리로 구현한 것이지요. 당시 청중에게는 다소 충격적이었지만, 이 실험 덕분에 실로폰은 이후 말러·스트라빈스키·푸치니 같은 작곡가들이 활용하는 당당한 오케스트라 악기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순간, 오보에가 닭 울음소리를 모사하며 무도회는 끝이 납니다. 광란의 밤이 지나고 새벽이 밝아오며, 다시 일상의 세계로 복귀하는 것이지요. 생상스는 죽음을 무겁게 끌어안기보다, 오히려 해학과 풍자의 대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웃음 속에서 청중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잠시나마 잊고, 삶으로 돌아갈 힘을 얻습니다.


죽음을 웃음으로 맞서는 인간의 지혜는 단지 음악사의 한 장면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에도 여전히 유효한 태도입니다. 예기치 못한 질병, 사회적 불안, 개인의 상실 같은 크고 작은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우리는 종종 무력해지죠. 하지만 생상스의 해골들이 춤추듯, 불안을 희화화하고 웃음으로 전환하는 순간, 우리는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두려움과 비극을 웃음으로 전환할 때, 삶은 다시 이어지며, 웃음은 단순한 위안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 일상으로 복귀하게 하는 힘을 가집니다.

오늘 하루도 바쁘게 지나면서, 당신은 혹시 웃음과 유머를 잃어버리진 않았나요?

생각보다 삶은, 아주 작은 웃음 하나에 달려 있을 때가 많습니다. 결국 우리를 다시 살아가게 하는 건, 그 작은 웃음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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