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은 지금 무엇을 듣고 있는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5번

by 여자말러리안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나의 첫 시작은 2악장이었다.

왈츠의 박자를 띄고 있지만,

이 곡을 들은 나의 소감은 명확했다

'이 음악엔 뭔가 숨겨진 게 있어'


그것은 외국 공포영화에 나오는 폐놀이공원의 회전목마 같다. 아이들의 웃음 대신 삐걱거리는 소리만 남은 채, 아무도 없는데도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회전목마.

아무도 없는데, 누군가 방금까지 타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왜 하필 왈츠였을까. 그것도 이렇게 불편한 왈츠여야 했을까. 삶의 고락을 담기 위해 왈츠와 랜들러 같은 춤곡을 사용했던 말러의 음악과 같은 맥락이었을까.

이 질문은 자연스럽게 그가 살았던 러시아, 그리고 이 음악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던 시대로 나를 데려갔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Dmitri Dmitriyevich Shostakovich, 1906–1975)

그는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도시는 한 세기를 건너오며 여러 이름을 가졌다. 페트로그라드(1914)였다가, 레닌그라드(1924)가 되었고, 1991년이 되어서야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본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도시의 이름이 바뀐 데에는 그만큼 혼란 속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치적 요충지였던 모스크바와 다르게,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오랫동안 지성인들과 예술인들이 모여들던 도시였다. 쇼스타코비치는 바로 이곳에서 태어났다.


러시아제국 국장 _나무위키
그 무렵 러시아

20세기 초 러시아 제국의 지식인 사회에는 여러 형태의 사회주의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
마르크스주의와 사회민주주의 등 기존의 질서와는 다른 세계를 상상하려는 움직임들이었다.

쇼스타코비치의 아버지도 이 흐름 속에 있었던 인물로 전해진다. 정교회 중심의 종교적 질서보다는
이성과 과학, 합리성을 신뢰하는 쪽에 가까웠고, 당대 지식인들 사이에서 공유되던 세속적 사고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사람이다. 어머니 소피야 바실리예브나 코코울리나는 시베리아 출신의 피아니스트였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적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 역시 그녀였고, 그는 다섯 살 무렵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다. 음악은 그에게 선택된 길이라기보다 이미 삶의 일부로 스며들어 있던 언어였을지도 모른다.

쇼스타코비치의 유년기는 러시아 역사상 가장 격동적 시기와 겹쳐있다. 그는 지식인 부모 밑에 태어나 비교적 안정된 환경에서 성장했지만 그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러시아 혁명은 로마노프 왕조로 대표되던 제정 러시아(차르체제)를 무너뜨렸고 이후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전혀 다른 세계가 열렸다. 2월 혁명으로 황제가 퇴위하고 임시정부가 들어섰지만, 그해 10월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가 정권을 전복하게 된다. 이후 러시아는 내전에 휩싸이게 되는데, 전쟁과 기근 또 혼란 속에서 수백만 명의 희생자를 남겼고 사회와 산업기반은 크게 흔들리게 되는데, 이 혼란 끝에 결국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즉 소련이 공식적으로 수립된다.

하지만 1924년 레닌이 사망하면서, 소비에트 정권 내부 권력구도는 급격히 재편된다. 이 과정에서 중심에 서게 된 인물이 바로 스탈린이다.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시빌리(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Джугашви́ли): 스탈린

1930년대에 이르러 소련은 사실상 스탈린 체제 아래 놓이게 된다. 이 시기는 대규모 숙청과 공포 정치로 특징지어진다. 정치적 반대자뿐 아니라 지식인과 예술가들 역시 언제든 표적이 될 수 있었다. 이념과 체제는 예술의 기준이 되었고, 음악과 문학은 검열과 재단의 대상이 되었다. 레닌 시기 비교적 유연했던 문화 정책과 달리, 스탈린 체제 아래에서 예술은 명확한 역할을 요구받는다. 모든 문화예술은 국가 이념을 선전하는 도구여야 했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그 유일한 공식 언어로 자리 잡는다. 이제 예술은 질문을 던지는 행위가 아니라, 정답을 말해야 하는 영역이 되었다.


1926년, 쇼스타코비치는 음악원을 졸업한다. 같은 해 5월, 교향곡 제1번이 니콜라이 말코의 지휘로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에서 초연되며 큰 성공을 거둔다. 이 작품은 곧 국경을 넘어 연주되었고, 브루노 발터와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이를 무대에 올리면서 그는 단숨에 주목받는 이름이 된다.‘소련이 낳은 천재’. 이 수식어는 찬사이자, 동시에 역할이었다. 소비에트 정부는 그를 새로운 체제가 낳은 문화적 성취의 상징으로 활용한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는 그 기대 속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혁명 10주년과 노동절을 기념해 발표한

교향곡 제2번 <10월>(1927)과 교향곡 제3번 <5월 1일>(1930)은 형식적으로는 국가가 요구한 메시지에 응답하고 있었지만, 그 음악의 언어는 여전히 낯설고 불안정했다. 익숙한 교향곡의 문법은 해체되고,

리듬은 비틀리며, 화성은 쉽게 정착하지 않는다. 충성의 외피 아래, 그는 여전히 실험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이 시기 쇼스타코비치는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그의 음악은 점점 더 당대의 기준에서 벗어난 방향으로 기울어간다. 1930년, 그는 니콜라이 고골의 풍자 소설을 바탕으로 오페라 <코>를 발표한다. 이 작품에는 혁명도, 노동자도, 밝은 미래를 약속하는 구호도 등장하지 않는다. 어떠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페라 <코>는 그렇게 무대에서 사라진다. 이후에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1934)>를 무대에 올리게 되지만, 이번에도 역시 여성억압, 관료의 부패와 같은 어두운 이면을 담고 있었고 어떠한 체제를 찬양하지 않는다. 음악은 노골적이고 격렬했으며, 불협화음과 과감한 오케스트레이션은 전위적이기까지 했다.

당대의 기준에서 볼 때 이 작품은 지나치게 솔직한 오페라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호평을 받게 되고,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반복 공연되며, 해외에서도 호평을 받는다. 쇼스타코비치는 다시 한번 성공한 작곡가의 자리에 오른 듯 보였다. 그러나 1936년, 이 오페라를 스탈린이 직접 관람하면서 상황은 급격히 바뀐다.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하면서 며칠 뒤 관영 신문 <프라우다>에 익명의 사설이 올라온다.


음악 대신 혼란이다.
(Muddle instead of Music)



프라우다 사설_ 나무위키

이 사설은 단순한 평론이 아니었다. <프라우다>는 개인의 의견을 싣는 신문이 아니라, 소련 공산당의 입장을 전달하는 기관지였다. 이곳에 실린 비판은 곧 체제의 판단으로 받아들여졌다.

사설은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과도한 불협화음과 표현, 기존의 예술과 다른 전통을 의도적으로 해체하였다는 혹평이 쓰였고 이는 단순한 미학적 평가가 아니라, ‘인민을 배반한 예술’이라는 정치적 판결이었다.

그 순간부터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더 이상 음악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쇼스타코비치는 순식간에 정치적 문제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고, 그의 예술 활동은 중단될 위기에 처한다.

그는 언제든 체포되어 떠날 수 있도록 현관 앞에 늘 짐가방을 준비해 두었다고 전해질 만큼, 자신이 숙청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불안 속에서 살아갔다. 실제로 그의 지인들 가운데 이미 숙청된 이들도 적지 않았으며, 그는 상시적인 공포 속에서 나날을 보냈다. 이 사건은 쇼스타코비치의 삶과 예술 세계에 깊은 상흔을 남긴다.

이후 그는 새로운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자신의 음악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를 먼저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당시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제4번을 스스로 철회시킬 정도로 불안과 압박 속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교향곡 제5번

하지만 1937년, 그는 약 네 달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교향곡 제5번을 완성한다.
부제는 <타당한 비판에 대한 소련 예술가의 응답>과 함께. 같은 해 11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과

예브게니 므라빈스키의 지휘로 이 교향곡은 초연된다.
외형적으로 이 작품은 스탈린 체제가 요구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요구한 조건을 충실히 따른다.
명확한 구조, 선명한 선율, 장엄한 결말.

다행히도 교향곡은 검열을 통과했고, 당과 대중의 환영을 받는다. 관객은 열광했고,
국가 언론은 “쇼스타코비치가 돌아왔다”라고 평했다. 그러나 이 음악을 둘러싼 해석은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다. 체제에 대한 찬양을 담고 그 감정을 청중에게 고스란히 전달하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 교향곡은 마치 입으로는 진실을 말하나, 얼굴에서는 미묘한 균열과 불안이 드러나는 사람처럼, 말하는 것과 느꼈지는 것 사이의 묘한 간극을 보인다.






스탈린은 정치적 선전을 위해 그 메시지를 통제하려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요구는 쇼스타코비치로 하여금 이전보다 더 복잡하고, 더 깊은 음악적 언어를 창조했다. 마치 마음대로 말할 수 없는 자리 나 격식을 차려야 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눈빛과 표정 같은 비언어적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하듯 말이다. 억압은 예술을 침묵시키기도 하지만, 때로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게 만드는 새로운 언어를 잉태한다. 교향곡 제5번은 바로 그 역설의 산물이다


쇼스타코비치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자신의 교향곡을 듣고 있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들은 지금 무엇을 듣고 있는가.

시대가 요구한 외피, 아니면 그의 예술적 의지인가.







추천 음반



keyword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