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즈의 마지막 아침은 유난히 고요했다. 피트니스에는 나 혼자였고, 기계들의 규칙적인 소리만이 새벽 공기를 채웠다. 복도 끝 식당에서는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그 소음마저도 오늘은 멀리서 들리는 파도 소리처럼 잔잔했다. 마지막 아침 식사를 놓치지 않으려는 승객들, 그 사이로 짐을 챙겨든 아이들, 커피잔을 들고 창가 자리를 지키는 여행자들까지 풍경은 어제와 같지만 마음속 온도는 이미 달라져 있었다. 매일 머물던 라운지도 오늘만큼은 유난히 비어 있었다. 그동안 익숙했던 직원들의 인사와 미소가 라운지를 채우는 전부였다. 그들은 이 계절 동안 카리비안을 끝없이 왕복한다고 했다. 떠나는 이들에게는 마지막 날이지만, 그들에게는 끝나지 않는 일상이라는 사실이 묘한 여운을 남겼다.
해가 막 떠오르고 있었다. 거대한 선박이 미끄러지듯 마이애미 항으로 들어오자, 도시의 실루엣이 천천히 빛을 머금었다. 나는 라운지 창가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커피향 뒤로 지난 3주간의 시간이 스쳐 지나갔다. 지중해의 햇빛과 대서양의 바람, 카리비해의 따뜻한 물결이 뒤섞여 하나의 긴 꿈처럼 느껴졌다. 눈부신 풍경과 낯선 도시들, 수많은 사람들과의 스침 속에서 예상치 못한 감정들이 솟구쳤고, 한꺼번에 몰아치는 도파민의 파도 속에서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조금은 선명해지는 듯했다. 은퇴 후의 삶에 대해 손끝에 닿을 듯한 힌트를 하나 얻은 느낌이었다.
미국에서의 17년은 어쩌면 이 여행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도착과 출발을 반복하며, 익숙함과 낯섦 사이에서 방향을 찾아왔던 긴 항해였다. 곧 독일로 향하게 된다. 새로운 땅에서 채워질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알 수 없지만, 이 변화의 시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조금씩 커지고 있다. 12월의 유럽은 어떤 온도와 풍경으로 나를 맞아줄까. 추위 속에서 오히려 따뜻함을 발견하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독일에 닿기 전, 한국에 들러 해야 할 마음의 정리도 있다. 2주 남짓한 짧은 시간이지만, 오랜 길 위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관계들을 다시 살피고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려 한다.
거대한 배가 항구에 닿을 때 특유의 미세한 진동이 커피잔을 흔들었다. 여행은 끝나가고 있지만, 떠나는 길목에서 오히려 새로운 항해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 마지막 아침의 고요함 속에서 나는 다음 여정을 향한 마음을 조용히 다잡았다.
—————————
PS. 생애 처음인 크루즈 여행기(잡글)를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저만의 Slowmad life를 경험하는 여행이었습니다. 새로이 펼쳐지는 독일에서의 여행기를 이어가길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