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는 끝이 아니라, 새로 쓰는 이야기의 시작이다. 젊은 날의 삶이 속도와 경쟁으로 점철된 문장이었다면, 은퇴 후의 삶은 쉼표와 여백이 있는 문장이 된다. 나도 그 문장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수많은 노트를 찢고 다시 쓰며 여기까지 왔다. 때론 두렵고, 때론 기대하며.
돌이켜보면 은퇴 준비는 단순히 돈을 모으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삶을 성찰하고, 앞으로의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지를 진지하게 마주하는 과정이었다. 경제적인 준비는 그 중 한 축이었고, 나머지는 마음의 준비, 몸의 준비, 관계의 재구성, 그리고 ‘나는 누구로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무엇을 위해 일할 것인가’보다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한다. 그리고 그 답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자연 속에서의 산책, 내가 아끼는 사람과 나누는 대화, 책 한 권을 깊이 있게 읽는 시간, 건강을 위해 준비하는 식사 한 끼, 그리고 새로 마주할 낯선 도시에서의 하룻밤.
나는 이제 ‘기록하는 삶’을 택했다. 이것은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나 자신을 확인하는 일이자, 나아갈 길에 등불을 켜는 일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나의 은퇴는 더 이상 ‘퇴장’이 아닌, ‘재배치’가 되었다. 나라는 인간의 존재 방식이 바뀌었을 뿐, 나는 여전히 세상과 관계를 맺고, 배우고, 나누며 살아가고 있다.
가끔은 “지금 내가 잘 살고 있는 걸까?”라는 의문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질문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한다. 지금 이 순간을 정직하게 살아내는 것이 곧 잘 사는 것이라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은퇴 후의 삶은 정답이 없는 문제지만, 각자가 써 내려갈 수 있는 하나의 서사다. 나의 서사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마침표는 아직 멀었다. 대신 쉼표를 찍으며, 한 문장 한 문장 다시 써 내려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