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함과 안전이라는 이유로 자유를 포기할텐가
우리는 흔히 ‘안전한 사회’를 꿈꾼다. 혼란과 불안이 사라지고, 모두가 평등하고 안락하게 살아가는 세계. 학교 폭력이나 범죄 걱정이 없는 일상, 질병과 사고로부터 보호받는 시스템, 실패조차 최소화된 삶. 그 이상은 듣기만 해도 매혹적이다.
그러나 과연 그 꿈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우리는 정말 행복할까?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1932)와 기시 유스케의 『신세계에서』(2008)는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에서 쓰였지만, 바로 이 질문을 정면으로 묻는다.
두 작품은 겉보기에 평화롭고 안전한 사회가 어떻게 개인의 자유와 인간성을 갉아먹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헉슬리가 그려낸 세계는 철저히 인위적으로 설계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인간은 유전적으로 조작되고, 알파·베타·감마·델타·엡실론 등 계급별로 배치된다. 이후 조건화 교육을 받아 자신이 속한 위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길러진다.
불만이나 고통이 생기면 약물 ‘소마’를 복용하면 된다. ‘오늘의 근심은 내일로 미루라’는 식으로 불편한 감정을 즉각 지워버리는 것이다. 이 사회에서는 불행이란 존재하지 않지만, 동시에 ‘고민하는 자유’도 없다.
모두가 행복해 보이지만, 그 행복은 자율적인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시스템이 미리 설계해 놓은 길 위에서 주어진 것이다. 사고하고 저항할 수 있는 인간 본연의 가능성은 태초부터 봉쇄되어 있다.
헉슬리는 이를 통해, 고통이 없는 행복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인간다움의 상실을 의미한다는 날카로운 풍자를 남겼다.
반면, 기시 유스케의 『신세계에서』는 천 년 뒤 일본이라는 구체적 무대를 배경으로 한다. 인간은 초능력 ‘사이칸넨(정신력)’을 얻게 되었지만, 제어하지 못한 힘은 오히려 사회를 붕괴시킨다.
무분별한 살육과 전쟁 끝에, 인류는 살아남기 위해 폭력을 억누를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다. 유전자 개조와 기억 조작을 통해 불순종할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고, 필요하다면 이단자를 은밀하게 제거한다.
주인공 사키는 성장 과정에서 이러한 잔혹한 비밀을 하나씩 알게 된다. 겉으로는 평화롭고 목가적인 마을 같지만, 그 평화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희생 위에서만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사키는 체제의 부당함을 깨닫지만, 결국 성인이 된 그녀는 체제의 일부로서 살아가게 된다. ‘성장’이라는 개인의 여정이 곧 사회에 순응하는 길과 겹쳐지는 아이러니는 독자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다.
두 작품이 설정한 사회는 표면적으로는 대조적이다. 헉슬리의 세계는 쾌락과 소비로 길들여진 사회이고, 기시의 세계는 폭력 억제를 위해 유전적으로 개조된 사회다.
전자는 달콤한 쾌락으로, 후자는 냉혹한 규율로 인간을 통제한다. 그러나 공통점은 분명하다. 행복과 안전이라는 명분 아래, 자유와 개성은 사라진다. 이 사회에서는 ‘자기 자신으로 산다’는 말이 허망해진다.
헉슬리의 소설은 출간 당시에는 풍자와 우화로 읽혔다. 1930년대에 유전자 조작, 대량 소비, 약물 의존 사회는 황당한 상상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 모습은 전혀 낯설지 않다. 맞춤형 유전자 편집 기술, 끊임없는 자극과 보상을 제공하는 SNS, 항우울제·수면제·각성제에 의존하는 일상은 이미 현실이 되었다.
헉슬리의 시선은 예언에 가까웠다. 그는 ‘인류가 원하는 안전과 행복이 사실은 가장 무서운 감옥일 수 있다’는 통찰을 던진 것이다.
기시 유스케는 다른 전략을 취한다. 『신세계에서』는 성장소설의 형식을 빌려, 독자가 주인공 사키와 함께 의심하고 깨닫고 절망하도록 이끈다.
어린 시절 친구들이 이유 없이 사라지는 장면, 금지된 호기심을 품을 때마다 나타나는 두려움은 독자에게 낯선 긴장감을 준다.
사키가 사회의 비밀을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배신감은, 단순한 ‘디스토피아적 충격’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근본적 질문으로 확장된다.
더 무서운 점은, 모든 것을 알게 된 이후에도 사키는 결국 그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개인의 자유와 성장조차 체제 유지라는 벽에 부딪히는 모습은 일본 사회 특유의 집단주의적 맥락과도 맞물려 강한 울림을 준다.
두 작품을 나란히 읽을 때 흥미로운 차이와 공통점이 드러난다. 헉슬리는 서구 산업사회의 소비주의와 쾌락주의를 풍자하며, 기시는 일본적 집단주의와 생명윤리 문제를 파고든다.
하지만 결국 두 작가가 도달한 지점은 동일하다. 사회가 ‘안정’과 ‘행복’을 절대적 목표로 삼을 때, 그 대가로 무엇을 잃게 되는가? 그리고 그 상실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AI 알고리즘이 우리의 행동을 예측하고, 빅데이터가 감시 사회를 가능하게 만들며, 유전자 편집 기술이 인간 개조의 가능성을 열어가는 지금. 우리는 과연 어디까지 안전과 편리를 위해 자유를 양도할 수 있을까?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요구되는 희생은 어디까지 정당할 수 있을까?
『멋진 신세계』 속 사람들은 고통 없는 행복을 누리지만, 그 행복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신세계에서』의 인물들은 평화를 지키지만, 그 평화는 보이지 않는 희생을 전제로 한다. 두 작품이 보내는 경고는 결국 같다. “편안함과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자유를 포기하지 말라.”
헉슬리와 기시 유스케는 서로 다른 언어와 시대, 전혀 다른 문학적 전략을 사용했지만, 그들이 던진 질문은 오늘날 더욱 절실하다.
디스토피아는 먼 미래가 아니라, 이미 우리 곁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두 소설은 미래를 상상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정밀하게 비추는 거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