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오마이뉴스 ‘책동네‘ 코너에도 게재되었습니다
오랜만에 볼만한 제이 호러(J-Horor) 작품을 만났다. 아니 그 호러 전통 위에서 진화한 새로운 형태의 호러, 어쩌면 '제이 호러 2.0'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책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는 일본 작가 세스지(背筋)의 데뷔작이다. 여기서부터 흥미롭다. 세스지는 본명이 아니라 '등골'을 뜻하는 단어에서 따온 필명이다. 공포물이 독자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든다는 점을 의식한, 장르에 꼭 맞는 이름이다. 작가 스스로가 독자에게 어떤 경험을 주고자 하는지, 필명만으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작품은 2023년 1월 창작 사이트 '가쿠요무'에서 연재를 시작했고, 몇 달 만에 1400만 회가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단행본으로 출간된 뒤에는 아마존 재팬 SF·호러·판타지 부문 1위를 차지했고, 초판 30만 부가 판매되며 일본 출판계의 화제를 모았다.
형식은 허구를 사실처럼 꾸며내는 모큐멘터리다. 첫 장은 "정보가 있으신 분은 제보 바랍니다"라는 공지로 시작된다. 잡지 기사, 인터뷰 녹취록, 인터넷 게시판 글, 스트리머의 체험담 같은 매체 파편이 이어지며 이야기가 구성된다. 실제 존재할 법한 기록이 연속적으로 등장하면서 독자는 사건의 추적자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무대는 긴키 지방의 특정 지역이다. 지명은 '●●●●●'로 처리되어 독자가 아는 동네와 겹쳐 상상 되도록 유도한다. 공포는 먼 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곁의 일상으로 스며든다. 사건은 소녀의 실종, 학교 수련회에서의 집단 발작, 인터넷 방송 중의 이상 현상, 아파트 단지의 기묘한 놀이 등으로 이어진다. 처음에는 무관해 보이던 사건들이 결국 한 장소에 모인다.
편집자 오자와가 취재 중 실종되는 대목은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독자는 이야기의 관찰자가 아니라 직접 말려든 당사자가 된 듯한 불안을 체험한다. 책장을 덮고 나서도 "정말 소설일 뿐일까"라는 의문이 남는다.
이 소설이 일본에서 폭발적 인기를 얻은 이유는 일상성과 현실감을 철저히 활용했기 때문이다. 괴물이나 초자연적 존재 대신, 누구나 아는 공간과 기록물에서 이야기를 전개했다. 그래서 독자에게 주는 두려움은 훨씬 직접적이고 설득력이 강하다. 리뷰에는 "너무 현실적이어서 더 무섭다"는 반응이 잇따랐다.
이 작품은 이 같은 원작의 인기에 힘입어 빠른 속도로 OSMU(One Source Multi Use, 하나의 콘텐츠를 다양한 플랫폼으로 활용하는 것)의 정석을 걷고 있다. 보통 일본에서 한 소설이 만화화·영화화까지 이어지려면 최소 몇 년 이상의 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많다. 독자 반응을 지켜보고 출판계와 제작사가 협의하며 각색 작업이 진행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출간 후 불과 1년 남짓한 시점에 이미 만화 단행본 2권이 발간되었고, 지난 8일에는 영화까지 개봉했다.
이 흐름은 단순한 인기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첫째, 모큐멘터리 형식이 가진 현실성과 체험성이 활자를 넘어 영상 매체로 옮기기에 적합했다는 점이다. 독자가 "실제 사건이 아닐까" 착각할 정도의 서사가 곧바로 만화적 이미지와 영화적 장치로 전환되며, 오히려 공포가 더 강화될 수 있었다. 둘째, 출판·영상 업계의 빠른 반응 속도가 보여주는 건 일본 내 호러 장르 시장의 경쟁력이다. 2000년대 <링>이나 <주온> 같은 호러 붐 이후 잠시 주춤했던 흐름이, 세스지 같은 신예를 통해 다시 활력을 찾고 있다는 증거다.
즉, 이 작품의 만화화와 영화화는 "인기 있는 작품이어서 2차 매체로 확장됐다"는 단순한 차원을 넘는다. 공포라는 장르가 일본 사회에서 다시 대중성과 문화적 영향력을 회복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곧바로 인기를 끌었다. 번역 출간 직후 온라인 서점 상위권에 올랐고, SNS에서는 "일본에서 건너온 새로운 공포 체험"이라는 입소문이 퍼졌다. 그 배경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 한국 독자에게 일본의 지역성과 생활 풍경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중적 감각을 제공한다. 긴키 지방이라는 구체적 무대는 친근함과 미스터리를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둘째, 최근 한국 독서 시장에서도 체험형 호러 콘텐츠의 수요가 높아졌다. 드라마, 영화, 유튜브에서 괴담 형식이 유행하는 상황과 이 작품의 형식이 잘 맞아 떨어졌다. 셋째, 인터넷과 SNS를 통한 입소문이 한일 양국에서 동시에 확산되었다. "읽다 검색해봤다"는 반응은 양쪽 독자에게서 똑같이 나타났다.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의 성공 이후 작가는 연이어 신작을 발표했다. <입에 대한 앙케트>에서는 인간의 감각과 언어가 교차하는 지점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일상적 사물에 기묘한 균열을 만들어냈다. <더럽혀진 성지 순례에 대하여>는 종교적 공간이라는 집단적 신념의 무대를 오염시키며, 성스러움이 어떻게 불안과 공포로 전도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두 작품 모두 전작과 마찬가지로 모큐멘터리 형식을 응용해 허구를 사실처럼 제시했고, 다시 독자들을 깊은 몰입 속으로 끌어들였다.
세스지는 이제 단발적인 히트 작가가 아니라, 일본 호러 문학의 새로운 흐름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그의 필명이 '등골'을 뜻하는 것처럼, 작품들은 독자의 일상을 서늘하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이러한 공포물이 한일 양국에서 동시에 인기를 얻는 현상은 단순한 장르 유행을 넘어, 불확실한 사회와 미래에 대한 감각을 공유하는 징후로 읽을 수 있다. 불안이 일상에 스며드는 시대, 세스지의 공포는 단순한 오락을 넘어 지금 우리의 감각을 반영하는 문화적 지표가 되고 있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 '책동네' 코너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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