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 Void

비어 있음이 열어주는 또 다른 시작

by KOSAKA

우리는 종종 인생을 채우는 일에만 몰두한다. 책상 위에 쌓이는 책들, 이메일함에 끊임없이 들어오는 메시지, 나이와 함께 늘어나는 역할과 책임들.


그러나 이 모든 채움의 반대편에는 언제나 빈 공간, 즉 ‘Void’가 존재한다. 공허와 허무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단순히 ‘비어 있음’을 넘어, 인간의 삶에서 사유와 감각을 촉발하는 힘을 가진다.


젊은 시절에는 공허를 견디기 어렵다. 무엇인가로 끊임없이 채워야만 한다는 강박이 강하다. 시험 성적, 연애, 소비, 인간관계, 심지어는 잡다한 정보조차도 그 빈틈을 메우기 위한 도구가 된다.


그러나 나이를 거듭할수록 ‘채움’이 곧 ‘짐’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때부터 Void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와 해방의 조건으로 다가온다. 비워내야만 다시 시작할 수 있고, 공허를 직시해야만 삶의 본질을 붙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의 근원적 정서를 ‘불안’이라 말했다. 그 불안은 무언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붙잡을 수 없는 ‘텅 빔’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인간은 세계와 자신을 근본적으로 사유하게 된다. 불안과 공허가 없었다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묻지 않았을 것이다. Void는 비어 있음이지만 동시에 질문의 공간이며, 성찰의 무대다.


중년 이후의 Void는 다르게 다가온다. 어느 정도의 성취와 실패를 맛보고, 주변의 관계망도 정리될 즈음, 문득 커다란 빈 공간이 삶 앞에 펼쳐진다. 직업적 위치나 자녀 양육 같은 외부적 과제가 줄어들면서, 남은 시간과 에너지를 어디에 쓸 것인지 묻게 된다.


그 질문은 불안을 동반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연다. Void는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미완의 가능성을 담는 그릇이 된다.


예술가들이 작품을 만들 때, 가장 먼저 직면하는 것도 Void다. 빈 캔버스, 새하얀 종이, 소리가 없는 무대. 이 공허는 작가에게 두려움이자 도전이지만, 동시에 창조의 전제 조건이다.


삶도 이와 같지 않을까. 공허를 피하려 하지 않고 마주할 때, 우리는 비로소 무언가를 새롭게 창조할 수 있다.


Void는 우리에게 묻는다. 채움이 아닌 비움 속에서, 당신은 무엇을 발견할 것인가? 인생의 후반부는 이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채워 넣는 대신, 비워내며 가볍게 걷는 법을 배우는 것. 그 길 위에서 Void는 더 이상 허무가 아닌, 또 다른 시작의 이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