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에게 필명(筆名)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히 본명을 숨기기 위한 가림막이 아니다. 필명은 작가가 세상에 내던지는 첫 번째 출사표이자, 자신이 앞으로 구축해 나갈 문학적 세계관을 압축해 놓은 한 줄의 선언문이다.
어떤 작가는 자신이 동경하는 사물의 이름을 따고, 어떤 작가는 도달하고자 하는 관념을 이름으로 삼는다. 그렇다면 일본 역사소설의 거대한 산맥,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라는 이름 안에는 과연 어떤 선언이 담겨 있을까.
그의 본명은 후쿠다 데이이치(福田定一)다. 오사카 출신의 평범한 청년이었던 그는 대학에서 몽골어를 전공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 전차병으로 징집되어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으며, 전후에는 산케이 신문의 문화부 기자로 일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후쿠다 데이이치'라는 이름의 신문기자가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스스로에게 부여한 이름이 바로 시바 료타로였다.
이 세 글자의 한자를 해체해 보면 그 뜻은 놀랍도록 명확하면서도, 동시에 깊은 역설을 품고 있다. '사마(司馬)'는 동양 최고의 역사서인 『사기(史記)』를 집필한 중국 한나라의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을 가리킨다. '료(遼)'는 '아득하다', '멀다'는 뜻이다. 그리고 '타로(太郎)'는 일본에서 장남이나 흔한 사내아이에게 붙이는, 한국으로 치면 '철수'나 '돌쇠'처럼 지극히 평범하고 서민적인 이름이다.
이름을 직역하자면 "사마천에 아득히 미치지 못하는 평범한 사내"가 된다.
바닥까지 자신을 낮춘 지독한 겸손
이 필명의 표면적인 온도는 철저한 '겸손'이다. 후쿠다 데이이치는 자신이 정통 역사학자가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먼지가 피어오르는 서고에서 고문서를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라, 당일의 마감을 쳐내야 하는 신문기자 출신이었다. 그가 쓰고자 하는 글 역시 엄밀한 사료 비판을 거친 역사 논문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상상력과 해석을 덧붙인 '대중 소설'이었다.
따라서 그는 동양 역사학의 절대적인 성류(聖流)이자 정점인 사마천의 이름을 빌려오되, 그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의미의 '료(遼)'를 덧붙임으로써 스스로의 위치를 한껏 낮추었다. 나아가 소설가나 지식인을 자처하는 대신, 저잣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촌스러운 이름인 '타로(太郎)'를 붙였다.
이는 "나는 그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꾼일 뿐입니다"라는 대중을 향한 친근한 인사말이자, 정통 역사학계의 엄숙주의를 향해 "이것은 어디까지나 소설이니 너무 핏대 세우지 마시라"고 미리 쳐두는 방어막이기도 했을 것이다.
특히 사마천이 누구인가. 그는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역사를 집필하던 중, 흉노에 항복한 이릉 장군을 변호하다가 한무제의 노여움을 사 궁형(宮刑, 생식기를 베어내는 형벌)이라는 치욕적인 형벌을 받았다. 사마천은 그 끔찍한 굴욕과 고통 속에서도 오직 『사기』를 완성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살아남아, 마침내 동양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불멸의 기록을 남겼다.
시바 료타로는 그 숭고한 집념 앞에서 감히 자신을 동급으로 놓을 수 없다는 처절한 자기 객관화를 필명에 담아낸 것이다.
겸손의 가면을 쓴, 서늘하고 거대한 야망
하지만 이 이름의 진짜 묘미는 그 지독한 겸손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뜨거운 야망'에 있다.
심리학적으로 누군가가 "나는 A에 미치지 못한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역설적으로 "나의 비교 대상이자 유일한 경쟁자는 오직 A뿐이다"라는 무서운 자의식의 발로이기도 하다. 시바 료타로는 소설가로 데뷔하면서 동시대의 걸출한 일본 문호들, 예컨대 나쓰메 소세키나 모리 오가이 같은 대문호들의 이름을 빌려오지 않았다. 일본 국내의 유명한 역사가를 동경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았다.
그의 시선은 일본 열도를 훌쩍 넘어, 2천 년 전 중국 대륙에서 동양 최고의 역사서를 집필한 사마천을 향해 곧장 쏘아지고 있었다. "사마천에 아득히 미치지 못한다"는 말은 곧, "내 문학의 척도와 지향점은 오로지 사마천의 『사기』에 있다"는 오만하리만치 거대한 선언이었던 셈이다.
사마천의 『사기』가 가진 가장 위대한 성취는 그것이 단순히 왕조의 흥망성쇠를 기록한 연대기가 아니라, '기전체(紀傳體)'라는 형식을 통해 역사를 움직인 '인간들의 이야기(열전, 列傳)'를 집대성했다는 데 있다. 사마천은 제왕과 장군뿐만 아니라, 자객, 유세객, 심지어 뒷골목의 협객들까지 역사의 무대 위로 소환하여 그들의 끓어오르는 욕망과 좌절, 비굴함과 숭고함을 치밀하게 묘사했다. 그에게 역사란 곧 인간 그 자체였다.
시바 료타로가 욕심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는 사마천이 춘추전국시대와 초한지의 영웅호걸들을 다루었듯, 자신 역시 일본의 가장 역동적인 시기였던 전국시대와 막부 말기(메이지 유신)를 무대로 '일본판 사기 열전(史記 列傳)'을 쓰고 싶었던 것이다.
왕이나 쇼군의 딱딱한 실록이 아니라, 혼돈의 시대를 온몸으로 부딪쳐 나갔던 인간들의 땀냄새 나는 이야기. 사이토 도산의 야심, 오다 노부나가의 혁명성, 사카모토 료마의 자유로움, 신센구미의 비장함까지. 시바 료타로는 사마천이 그러했듯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앞에서 발버둥 치는 개개인의 결단과 고뇌를 펜끝으로 부활시키고자 했다. 그에게 필명은 단순한 이름표가 아니라, 평생을 바쳐 이루어내야 할 거대한 문학적 프로젝트의 청사진이었다.
이름이 곧 운명이 된 사내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후쿠다 데이이치라는 본명을 기억하는 이는 이제 거의 없다. 그는 스스로 지어 올린 필명처럼, 평생에 걸쳐 방대한 사료를 수집하고 수백 권의 역사소설과 에세이를 쏟아내며 현대 일본인들의 역사 인식(이른바 '시바 사관')을 설계한 국민 작가가 되었다.
그가 정말로 사마천의 경지에 도달했는가에 대해서는 문학 평론가나 사학자들 사이에서 여전히 의견이 엇갈릴 수 있다. 누군가는 그의 소설이 역사적 사실을 지나치게 미화했다고 비판할 것이고, 누군가는 그가 창조해 낸 인물들의 매력에서 평생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 일본인들에게 시바 료타로의 작품들은 단순한 소설을 넘어, 자신들이 어떤 길을 걸어왔고 어떤 시대를 살아냈는지를 확인하는 거대한 거울이 되었다. 역사를 인간의 드라마로 치환하여 대중의 가슴에 아로새겼다는 점에서, 그는 이미 현대 일본의 사마천이나 다름없었다.
사마천을 동경했던 이 서늘한 야심가는 도대체 왜 그토록 역사 속 인간들의 이야기에 집착했을까. 단지 활자를 사랑하는 문학청년의 낭만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그의 기저에는 피비린내 나는 현실의 트라우마가 짙게 깔려 있었다.
젊은 시절, 그가 품었던 지독한 의문 하나. "어쩌다 우리 일본은 이토록 바보 같은 나라가 되어, 수많은 젊은이들을 의미 없는 전쟁터로 내몰아 죽게 만들었는가."
시바 료타로 문학의 진짜 시작점은 화려한 전국시대의 칼춤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진흙탕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22세 전차병 후쿠다 데이이치의 절망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역사의 광기와 인간의 어리석음을 뼈저리게 목도했던 한 청년이 어떻게 역사소설의 거장으로 각성하게 되었는지, 그 슬프고도 치열한 사연의 첫 페이지를 다음 화에서 열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