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22세 전차병의 절망

"어쩌다 일본은 이토록 바보 같은 나라가 되었나"

by KOSAKA

표제사진 : 2차대전 말기 군복을 입은 시바료타로


1945년 8월 15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덴노(천황)의 항복 방송을 들으며 스물두 살의 육군 소위 후쿠다 데이이치(훗날의 시바 료타로)는 도치기현 사노시의 한 초등학교 교정에 서 있었다.


패전의 충격, 통곡, 혹은 안도감. 그 순간 일본 열도를 뒤덮었던 수많은 감정들 속에서, 젊은 청년 후쿠다의 머릿속을 강렬하게 지배한 것은 슬픔이나 분노라기보다는 하나의 거대하고 무거운 '의문'이었다.

어쩌다 일본은 이토록 바보 같은 나라가 되었는가? 옛날 일본인은 이보다는 훨씬 낫지 않았던가?


이 단순명료하면서도 뼈아픈 질문은, 훗날 일본의 국민 작가 '시바 료타로'를 탄생시킨 거대한 사상적 근원이 된다. 그가 평생을 바쳐 메이지 시대, 에도 시대, 그리고 전국 시대의 역사를 파헤치며 수많은 영웅호걸과 이름 없는 합리주의자들을 소설로 소환해 낸 이유는, 바로 이 22세 전차병 시절에 겪은 철저한 '절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철제 관(棺)에 탑승한 청춘: 비합리의 극치, 97식 중전차


오사카 외국어학교(현 오사카대학 외국어학부) 몽골어과를 졸업한 후쿠다 데이이치는 학도 출진으로 징집되어 만주에 배치되었다. 그곳에서 그가 맡은 보직은 전차병, 그것도 소대장으로서 전차를 지휘하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그가 탑승했던 일본 제국 육군의 주력 전차인 '97식 중전차(치하)'는 그 자체로 일본 군국주의의 무능과 비합리성을 상징하는 거대한 쇳덩어리였다.


당시 전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전차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소련의 T-34나 미국의 셔먼 전차는 두꺼운 장갑과 강력한 화력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군부는 '정신력'이라는 허상에 매몰되어 있었다. 그들이 만든 97식 전차는 장갑이 너무나 얇아 적의 중기관총에도 관통될 지경이었고, 주포는 보병을 지원하는 수준에 머물러 적 전차의 장갑을 뚫을 수 없었다.


만주 벌판에서 언제 쏟아져 내려올지 모르는 소련군의 압도적인 기갑사단과 맞서야 했던 후쿠다 데이이치에게, 이 얇은 철갑을 두른 전차는 사실상 '움직이는 관'이나 다름없었다.

물질의 열세를 정신력으로 극복하라.


군부의 이 오만하고 비과학적인 슬로건은, 최전선에서 목숨을 걸어야 하는 병사들에게는 끔찍한 사형 선고였다. 후쿠다는 이 시기, 데이터와 과학적 사실을 무시하고 오직 이념과 정신론만을 강요하는 국가 권력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무능해질 수 있는가를 뼛속 깊이 체감했다. 무기체계의 빈약함은 단순한 공업력의 차이가 아니라, 지도부의 '지적 태만'과 '합리성의 결여'에서 비롯된 것임을 그는 꿰뚫어 보았다.


"깔아뭉개고 가라" - 국가에 대한 마지막 환상이 깨진 날


전황이 극도로 악화되어 미군의 본토 상륙이 기정사실화되던 1945년 봄, 후쿠다가 속한 전차 연대는 본토 결전을 위해 일본 도치기현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미군이 상륙할 경우 전차를 몰고 돌진하여 옥쇄(玉碎)하는 것이었다. 이 본토 방어 준비 기간 동안, 젊은 장교 후쿠다의 인생관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은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어느 날, 그는 직속 상관인 대좌(대령)에게 작전 전개와 관련한 매우 현실적인 질문을 던졌다. 미군이 상륙하여 전투가 벌어지면 수많은 피난민들이 도로로 쏟아져 나올 텐데, 그 피난민들로 인해 전차의 기동이 막히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국가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군대라면, 당연히 피난민을 보호하거나 우회할 수 있는 작전 지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관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그의 귀를 의심케 했다.

깔아뭉개고 가라. (轢き殺してゆけ)


그 순간, 후쿠다 데이이치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무참히 깨어져 나갔다. 군대가 국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군대라는 조직 그 자체의 영속과 체제 유지를 위해 국민을 짓밟을 수 있다는 이 끔찍한 진실. 국가는 인민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인민을 제물로 삼아 폭주하는 거대한 괴물이 되어 있었다.


훗날 시바 료타로는 에세이에서 이 순간을 회고하며, 쇼와 시대의 일본 군벌을 가리켜 "마법의 지팡이를 휘두르며 나라를 파멸로 몰고 간 광신도들"이라고 혹평했다. '천황제'나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실체 없는 허상의 언어(주술)에 취해, 눈앞의 생명과 현실적인 지표들을 모조리 무시해버린 이들에 대한 깊은 혐오감이 그의 영혼에 각인된 것이다.


'합리적인 일본인'을 찾아 나선 긴 여정의 시작


패전 후, 잿더미가 된 조국을 바라보며 후쿠다 데이이치는 생각했다. '이 나라는 원래 이렇게 구제 불능의 바보 집단이었던가?'


그의 직관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분명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키고 근대 국가의 기틀을 다졌던 선조들, 혹은 에도 시대에 상업을 꽃피우고 실용적인 학문을 추구했던 이들에게는 무언가 '건강한 합리주의'가 있었을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쇼와 시대의 군국주의는 일본 역사의 긴 흐름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돌연변이'이자 '이단'이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이 끔찍한 패전의 잿더미 위에서도 앞으로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간절한 열망은 그를 도서관과 헌책방으로 이끌었다. 신문사 문화부 기자로 일하면서도 그는 트럭 단위로 옛 문헌과 사료들을 사들여 미친 듯이 탐독했다. 그는 쇼와 시대의 광기가 시작되기 이전, 즉 '가장 합리적이고 생동감 넘치던 시절의 일본'을 문학으로 복원해 내고자 했다.


그가 훗날 사카모토 료마, 오다 노부나가, 후쿠자와 유키치 등 이념이나 명분보다 '실용'과 '합리'를 중시했던 인물들을 소설의 주인공으로 편애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22세의 전차병이 그토록 혐오했던 '광신적인 쇼와 군벌'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영원한 '반(反) 군국주의자', 시바 료타로의 탄생


시바 료타로의 작품 세계를 흔히 '시바 사관(司馬史観)'이라고 부르며, 때로는 그가 메이지 시대를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묘사했다거나, 영웅주의에 치우쳐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핵심은, 시바 료타로 문학의 가장 깊은 밑바닥에는 '권력의 맹목성'과 '이념적 광기'에 대한 지독한 경계심이 깔려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평생 군복을 다시 입는 것을 상상조차 하기 싫어했으며, 어떤 형태의 전체주의나 광신적인 민족주의에 대해서도 극도의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그가 소설 속에서 그토록 경쾌하게 그려낸 수많은 영웅들의 활약상은, 역설적이게도 '두 번 다시 바보 같은 리더십 아래에서 개죽음을 당하지 않겠다'는 살아남은 자의 처절한 다짐이자 반성문이었다.


스물두 살, 얇은 장갑의 전차 안에서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와 국가의 배신을 동시에 겪어야 했던 청년 후쿠다 데이이치. 그가 절망 속에서 건져 올린 "어쩌다 우리는 이렇게 바보가 되었나"라는 뼈아픈 질문은, 소설가 '시바 료타로'라는 필명을 빌려 반세기가 넘도록 일본 열도에 던져진 가장 무겁고도 거대한 화두가 되었다. 패전의 폐허에서 그가 찾고자 했던 '건강하고 합리적인 인간상'에 대한 목마름, 그것이 바로 시바 문학을 관통하는 척추인 것이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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