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봄을 꿈꾸는 나의 봄(4)

<우연히, 운명처럼, 그렇게 봄>

by 나의봄

문턱은 없지만 좁은 세상.

내가 일하는 학원가.

언제든 드나들 수 있지만,

분명한 벽이 존재하는 그 세계에서 나는 꿋꿋이 살아남았다.


어느덧, 나는 지역 내에서 서로 추천할 수 있는 그런 선생님이 되었다.

그런 나를 예쁘게 본 원장님은 어린 나이에 외고 입시팀장을 맡겼고,

이후 교수부장이라는 책임감 있는 자리도 내게 안겼다.

이제는 학원 안에서도 누군가를 이끄는 위치가 되었다.


제2캠퍼스로 발령받은 날.

설렘도 있었지만 그보다 앞선 건 낯선 환경에 대한 부담,

나보다 나이 많은 선생님들과의 협업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 모든 걱정들이 천천히 마음속을 잠식해,

매일 긴장감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던 때였다.


WJ는 그 낯설고 새로운 캠퍼스에서 가장 먼저 말을 걸어온 아이였다.

WJ가 복사를 부탁하러 교무실에 들어섰을 때

나는 본원 부원장님의 격앙된 전화에 조용히 작아지고 있었다.

억울한 누명으로 혼나고 있던지라 눈물이 났다.

몰래 눈물을 훔쳐내려는 찰나,

부스럭 소리에 고개를 들자 WJ와 눈이 마주쳤다.


당황한 나, 놀란 아이.


"왜?"


조심스럽게 묻자, WJ는 손사래를 치며 황급히 나갔다.


잠시 후, 문틈 사이로 얼굴만 내민 채 말했다.


"남자친구예요? 전화로 싸우셨어요?"


나는 부원장님께 혼났다는 부끄러운 말은 할 수가 없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헤어지재요? 이렇게 우는데도요?"


고1 남학생이 그렇게 화를 낼 줄 몰랐다.

정의감에 불타는 눈빛이,

순간 너무도 든든한 ‘내 편’처럼 느껴져

차마, 그런 게 아니야 변명도 하지 못했다.


며칠 후,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WJ가 다시 말을 걸었다.


"선생님, 저희 과학선생님이요… 진짜 좋아요."


"아, 그래?"


무심히 대답하는 나에게 WJ는 장난기 섞인 말투로 이어 말했다.


"그래서 선생님 전화번호 드렸어요.

그 나쁜 새끼는 잊으시고요.

카톡 프로필 좀 바꾸세요. 예쁜 걸로요."


고1 남학생의 눈에 그날 내가 얼마나 청승맞게 울고 있었던 걸까.

얼마나 버림받은 여자처럼 보였으면 저런 이야기를 할까.

부끄러움에 자리를 피하며 WJ의 장난이라 치부했다.


하지만,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과학 선생님이

내 번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결국 나는, WJ의 말대로 프로필 사진을 바꿨다.

별 기대는 안 했지만 역시나 그해 여름이 그렇게 지나갔다.


그리고 쏟아지던 입시, 시험 대비, 바쁜 하루들로

과학 선생님 일도, WJ의 장난도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노란 은행잎이 하나 둘 물들어가는 것 같더니

어느덧 길가에 낙엽이 수북이 쌓여갈 때였다.

과학 선생님 일은 이제 해프닝도 아니고 잊어버린 일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정해진 운명은 때때로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다시 돌고 돌아 우연처럼 찾아오는 건가 보다.


그리고 그 우연은 어느 날, 한 어머니의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선생님, 아시면 좋은 과학 선생님 좀 추천해 주세요."


나는 자연스럽게 WJ가 칭찬하던 과학 선생님을 떠올렸다.

지난 초여름부터 한여름까지 WJ 입에서 흘러나오던 과학선생님 찬양을 떠올리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추천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안녕하세요, WJ 과학선생님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진작 연락드렸어야 하는데, 학생도 소개해주시고,

이것저것 고마운 것들이 많아 식사 한 끼 대접하고 싶습니다.”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사실 워낙 선생님이 좋다고 하니

호기심도 생겼다.

몇 차례의 고민 끝에 잡은 약속의 날이 다가왔다.

신경 안 쓴다고는 했지만

평소보다 화장을 정성스레 하고 짧은 치마를 골라 오랜만에 멋을 냈다,


장소가 뷔페라 약간 망설임이 있긴 했지만,

그래, 같은 업종에 일하는 누군가를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생각하며 약속장소로 향했다.


하지만 만남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부담도 커졌다.

소개팅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처음 보는 남녀가 마주 앉아 식사하는 것이

그리 편한 자리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러 생각에 발걸음이 느려진 나는 약속시간에 늦었고

도착해 보니 문 앞에 팔짱 낀 그가 서 있었다.

약간 성이 난 듯한 얼굴.


나는 늦어서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우아하게, 정중하게 식사를 시작했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두서없이 담긴 음식을 먹고,

다시 가지러 가느라 일어서는 일은

좀 뭔가 어색했지만,

그래도 최대한 욕은 먹지 않게끔

신경 써서 예쁘게 먹으려 애썼다.


이런저런 대화들이 오가던 중,

나는 그의 접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우리가 만난 곳은 프리미엄 초밥 뷔페인데

그의 접시 위에 초밥이 하나도 없었다.


"초밥 안 드세요?"


그는 대답했다.


"아니요. 즐겨하진 않지만 먹습니다.

근데 요즘엔, 후쿠시마 사고 있잖습니까.

아직은 위험하죠."


"근데 초밥 뷔페는 왜 오자고 하신 거예요?"


"음, 고민을 해 봤는데요.

뭘 좋아하실지 모르겠는데 여기는 뷔페니까,

뭐 하나라도 좋아하시겠지 싶어서요"


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 와르르 무너졌다.

그의 감정 없는 말에 내 웃음도,

기대했던 설렘도 사라졌다.

진짜 그는 나에게 감사 식사 대접을 하러 온 것이었다.

나는 대체 뭐를 기대한 걸까.

식사대접이 목적이라면, 그럼 나도,

진심으로 식사를 해야지.

정신이 번뜩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모든 걸 내려놓고

원래의 성격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음식도 엄청 많이 쌓아오고

그의 이야기는 듣는 둥 마는 둥, 먹기만 했다.

간간히 학원 생활에서 맘에 안 드는 점들도 흉보면서.


그런데 운명은 어떻게든 돌고 돌아

제자리를 찾는 걸까?

내겐 현실만 보여 마음을 내려놨던 그 순간이,

그에게는 작은 불씨가 되어 현실을 넘어서

사랑으로 가는 길이 되었다.


겁저가 총기 넘치는 눈으로

뷔페 메뉴를 정복하며 재잘대던 내 모습.

그는 그 모습에 마음을 열었고

그 마음엔 사랑이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내숭 없이 이 얘기 저 얘기하며

먹는 모습이 귀였었다고 했다.


그래서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그는,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그리고 한 달 동안,

그는 퇴근 시간에 맞춰 나를 데리러 와주었다.


같이 집으로 향하며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떤 이야기는 서로의 과거였고,

또 어떤 이야기는 서로의 미래였다.


그리고 한 달째 되는 날,

그는 나의 남자친구가 되었다.


찬 바람이 볼을 간지럽히던 어느 초겨울

빼꼼히 얼굴을 내민 달빛 아래,

그는 파란 수국을 들고 내게 사랑을 고백했다.


들키고 싶지 않던 눈물.

그 눈물이 우연의 씨앗이 되어

그 초겨울,

나의 마음에는 봄보다

더 따뜻한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 인생 최고의 봄이 선물처럼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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