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봄을 꿈꾸는 나의 봄(3)

<거기, 있어줄래요?>

by 나의봄

시간이 흘러도 선명한 사람이 있다.

어떤 얼굴, 어떤 목소리, 어떤 느낌은
오히려 더 또렷하게 살아남아
기억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BK는 그런 아이였다.
벚꽃이 흩날리던 어느 봄날,
그 독해 시간,
그 아이와 처음 마주했다.


두꺼운 뿔테 안경과 곱슬머리.
그 조합은 제법 귀여워서
웃음이 나게 하는,
즐거운 학생이었다.


유창한 발음.
또렷한 목소리.
BK는 긴장감 가득한 고3 교실 안에
작은 활력과 미소를 불어넣곤 했다.


하지 갑작스럽게 정해진
BK의 진로는 미국 대학.


학기까지 마치지 못하고 떠났지만,
틈틈이 메시지와 전화로
자신의 일상을 전해오던,
살가운 아이였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의 손에서 자라
미국 대학까지 나아간 아이.


분명 넉넉하지 않았을 환경이었지만,
BK는 한 번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선생님, 여긴 진짜 추워요.
겨울에는 나가기도 힘들어요.”

미국에서 처음 맞은 겨울,
그 아이는 그렇게 말했다.


"꼭 한 번 와보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선생님, 어디 가버리면 안 돼요.
제가 연락 안 돼도... 꼭, 그 자리에 있어주세요.
언젠든 제가 찾아갈 수 있게요."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처음으로

내가 지식을 파는 강사가 아니라,
선생님으로, 스승으로, 어른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겠다 하는 확신 같은 걸 느꼈다.


그 후 몇 번의 계절이 돌고 돌아,
다시 봄이 되어
벚꽃이 흩날리던 어느 날,
한동안 뜸했던 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군대를 갔고,
첫 휴가를 나왔고,
이틀 후 복귀를 앞두고 있다며
오랜만에 얼굴을 뵙고 싶다고 했다.
월급도 넉넉히 모았다며
밥은 자기가 사야 한다고 했다.


하하호호 웃으며 우리는 그렇게
서둘러 약속을 잡았다.
25살과 19살에 만난
우리는 서로를
조금 더 자란 모습으로 기대했다.


그 때 나는 20대의 끝자락.
서른을 앞두고 있었다.


약속의 토요일.
오전 수업을 마치고
전화를 기다렸다.


하지만 BK는 오지 않았다.
문자에도, 전화에도

아무런 답이 없었다.


그럴 수 있다.
그럴 수 있지.
되뇌며 나는 조용히 집으로 향했다.


치기 어린 나이에
휴가를 맞아 친구들과
술 한 잔쯤 했을 거고,
잊혀질 약속엔 안 왔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나도

조용히 털어내고
주말을 보냈다.


그런데 문득 마음 한 켠에는
꽤심한 마음도 남았다.


그래서 주말 후 월요일 아침,
출근길.
쓸쓸한 마음에

나는 늘 가던 길을 두고
평소엔 가지 않던 그곳.

카페를 먼저 들렸다.


그날따라, 괜히 그쪽으로 발길이 향했다.

30살 전까지도 커피를 마시지 않았던지라,

그곳에 갈 이유가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너무 이상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예전에 함께 일했던 선생님을 만났다.
그 선생님은 나를 보자마자 말했다.

“BK 안타까워서... 어떡하니.”
나는 얼어붙었다.

"금요일에, 사고당했잖아. 자기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


나는 토요일 내내 그 아이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 아이는 이미 세상에 없었던 것이었다.

올 수 없는 아이를 기다렸던 시간이
그러면서 그 아이에게 계속해서 섭섭한 마음을 가졌던 순간이
갑자기 울컥 올라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허우적거려버렸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카페에서 무슨 말을 하고
그 선생님과 헤어졌는지,
어떻게 걸어 학원에 갔는지,
그날 수업을 어떻게 했는지,
사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고3, 1년도 안 되게 가르쳤던 짧은 인연.

우리는 그걸
스승과 제자라는 이름으로 놀리고 놀려
계속 이어왔는데...


그 아이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약속이
나와의 지키지 못한 만남이었다는 것이
참 아프고도 오래 남는다.


겨우 알아낸 국군 병원 장례식장으로 가는 발걸음은
세상 어떤 길보다 무거웠다.


두꺼운 검은 뿔테 안경,
곱슬머리의 어드름이 커못한 얼굴,
벚꽃이 흩날리던 그 봄
교실에서 귀엽게 웃던 그 얼굴이
이제는 영정 사진이 되어,
오는 조문객들을 맞이하였다.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 웃음이라
슬픔이 슬픔처럼 느껴지지 않던
그런 밤이었다.


십여 년이 흐른 지금,
나는 아직도, BK의 얼굴이
또렷하게 생각난다.


그건 우리가,
교실 안에서만 끝나지 않은,
교실 밖에서도 이어졌던
‘진짜 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날, 그 월요일.
나는 왜 그 카페에 갔을까.
평소엔 가지 않던,
내가 잘 돌아가지도 않던 곳인데,
그 때 우연히 마주친 선생님이 없었다면,

BK는 그냥
내 약속을 깨고 사라진 학생으로
기억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만남은, 마치 말하듯 했다.

“제가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게 아니에요.
기다리게 하려던 게 아니에요.”


BK와의 추억은 그렇게,
내 마음에 조용히 남았다.


아이와의 일을 겪으며 나는,
단순히 영어를 가르치는 강사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을 바라볼 줄 아는
‘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배움을 팔되,

더 큰 인생을 전하고 싶은 사람.

나는 BK를 통해 그렇게 성장했다.


아직도 그 앳된 얼굴이
가끔 그리울 때가 있다.
뭐가 그렇게 웃긴지 늘 웃음을 먼저 품고,

별 거 아닌 이야기도 재밌게 해내던 모습이
기억에 선하다.


하지만 반면 그 앳됨이,
이 세상에 남지 못한 그 계절이
아쉽고, 미안하기도 하다.


그래서 나에게
BK는 그냥 지나간 학생이 아니라,
오래도록 마음에 머무는 ‘하나의 봄’이다.


그 아이에게 고맙다고, 정말 고맙다고 그래서
꼭 말해주고 싶다.


“BK야, 너로 인해, 내가 교실 밖에서도
누군가의 인생 선배가 될 수 있고,
누군가의 의지가 될 수도 있으며,
언젠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조용히 떠올려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단 걸 알게 되었어.

그래서 더 열심히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고,
지금도 노력 중이야.

그리고... 정말, 미안하고 고마워. 편히 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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