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봄을 꿈꾸는 나의 봄(5)

<하얀 진달래>

by 나의봄

하얀 진달래를 보면 새언니가 생각난다.

언니는 내가 중3이 되던 봄, 우리 집으로 시집왔다.

결혼식 날도 예뻤지만,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처음 인사하러 집에 왔던 날,
나부끼던 한복보다 언니의 얼굴이 더 예뻐,

그날 언니가 걷기만 해도 골목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한 명뿐인 오빠와 11살 차이라

외동처럼 자라 외로울 때가 많았다.
늦둥이이자 막둥이,

남들이 봤을 때 무한한 사랑만 받았을 것 같지만

부모님이 너무 바빠 할머니 손에 자라게 되어

나는 항상 애정 과잉과 애정 결핍 사이 어딘가를 헤맸다.


언니는 그런 나에게
한순간 균형점이 된 존재였다.


언니가 우리와 함께 살면서,
우리 가족은 처음으로 함께 여행도 떠났고,
귀여운 조카들이 차례대로 태어나며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사춘기 시절 여러 고민이 있어도

언니와 대화를 나누면

설령 고민이 해결되지 않는다 해도

마음이 단단해졌고, 이상하게 자신이 생겼다.


그런데 내가 학원에서 한창 바쁘던 어느 날,
언니가 아프기 시작했다.
기침을 할 때마다

엄마는 언니에게서 항아리 소리 난다며

병원 가보라 성화였고, 언니는 늘 괜찮다며 웃었다.


젊고 건강하다는 그 자신감이
오히려 언니를 좀먹고 있었는데도,

우리는 어떤 의심도 하지 않았다.

동네 병원에서는 늘 감기 진단뿐이었고,
한 주가 지날수록 받아오는 약만 늘어갔다.

언니는 본인이 체력 관리를 못해서 그렇다며
더 열심히 운동했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두 시간 자유수영,
그런데도 여전히 이어지는 콜록콜록 기침.


언니가 그렇게 기침을 해대도 그때 그 소리는

내 손끝의 작은 상처만큼도
무겁게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몰랐다.
그 깊은 병이, 우리를 그렇게 덮칠 줄은.

봄이 되어도 언니의 기침은 멈추지 않았고,
어느 날인가 침대에서 도통 일어나지 못하는 언니에게

나는 드디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많이 아파?”


“고모, 나 등에 빨대가 꽂힌 것 같아.
뭔가 계속 빠져나가는 기분인데, 모르겠어서 무서워.

자꾸 일어서려 해도 너무 지치고 힘들어.”


같이 살아온 10여 년 동안 그런 모습,

그런 말은 처음이라 너무 무서웠다.

우리는 그제야 병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조금 더 큰 병원을 찾았다.


몇 가지 검사 후 의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조금 더 큰 병원으로 가라는 진료 의뢰서를 써줬다,
그 종이 한 장이 어찌나 무거워 보이던지

언니는 자꾸 가던 길을 멈추고 눈물을 훔쳤다.


대학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고,
결국 언니는 폐암 3기 B 판정을 받았다.

모양이 나빠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말에
모두가 절망했고, 서로를 향한 원망도 시작되었다.


누구 하나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는

가족들 사이에서

나는 조심스레 학원에 연락해 상황을 전했다.


"상황은 알겠는데 이렇게 수업에 갑자기 빠지면 누가 들어가라는 거야?

그럴 거면 아예 한 달 쉬면서 생각해 보던지."


차가운 부원장의 말은 그건 네 사정이고

학원에 민폐 끼칠 거면

나가라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오늘 쉴 거면 차라리 한 달을 쉬어라.
좋게 말할 수도 없는 사실상 퇴사 통보 같았다.


나 또한 그동안 내가 빠지면

누군가가 전적으로 나를 대신하여
그 부담을 떠안는 걸 알기에,
아파도 내색 못하고 꾹 참고 수업을 해 왔었다.

어쩌다가 정말 아파 식은땀이 흐를 땐

원장이 마지못해


“그래, 아픈 걸 어쩌겠어. 집에 가서 쉬어”


그렇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 말 뒤에 숨은 힐난의 눈초리들과,
조퇴를 허락받고도 눈치를 봐야 했던

서러웠던 기억들은
아프더라도 차라리

교실에서 꾹 참아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래도 원장님 가족이냐는 말까지 들으며

청춘을 바쳤는데,

오늘 하루의 공백조차 감당하지 않고

손해 보지 않고 싶어 하는

부원장의 이기적인 말투에.

나는 학원을 향한 모든 애정이

깡그리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통화 후 굳어진 내 얼굴을 보며,

더 서러웠을 언니가 눈물을 닦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출근해. 고모가 있는다고 해서,

갑자기 좋아질 것도 아니고,

내 몸 내가 알아서 싸울 테니

고모는 고모 일 열심히 해!"


언니의 단호한 말투에 길을 나서 지하철로 향하던 중

다시 학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래서 오늘 오는 거야, 안 오는 거야?

한 달 쉬는 거야?"


가겠다고 말하고 지하철을 탔는데

갑자기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그리고 내가 뭘 위해서 그렇게까지 열심히 일했는지

허무함과 배신감도 들었다.


지하철 의자 옆 기둥에 기대 서 있는데

갑자기 숨이 막혀왔고

얼굴에서 식은땀이 막 흘러내렸다.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다음 역에서 내렸다.

역 벤치에 앉아 숨을 몰아쉬자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말을 걸었다.


“괜찮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서러워야 할 사람은 언니인데,

마음이 여물지 못한 나는

세상의 모든 슬픔이 나에게로 향하는 것 같았다.


결국 학원에 출근하자마자 사직서를 내고,
학원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꼭 이번 일 때문만은 아니었다.


수업과 일에서는 누구보다 열심히 했고,

그렇게 인정을 받았지만,

20대 중후반의 어린 나이는

30대-40대 강사들에게 항상 눈치의 대상이었다.

열심히 하면 열심히 해서,

그렇다고 뒤로 빠지면 뒤로 빠져서,

일을 잘해 28살 교수부장까지도 올라갔지만,

결국 아무 일도 안 하는 한 30대 후반 남 선생님과

내 월급 차이는 겨우 5만 원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못 참고

원장실에 찾아가

왜 내가 시간표부터 교재선정까지 모든 일을 하는데,

월급 차이가 겨우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지 물었더니

그 당시 원장은 너무 당당하게 "걔는 가장이잖아"

그렇게 이야기를 했었다.


언니의 일이 도화선이 되긴 했지만

지난 몇 개월동안의 쌓여온 일이

아무 미련 없이 떠날 결정을 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다시 언니 이야기로 돌아오면

나의 사랑하는 언니는 그 후 꼭 1년을 병과 다투다가
2015년 4월의 어느 봄날,
하늘로 떠났다.


꺼억꺼억 내몰아 쉬는 그 숨소리에는
두고 가는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과

세상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어,

듣는 모두가 숨죽여 울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러 내가 언니 나이가 되고 보니,

너무도 죽기 아쉬웠을 나이.

얼마나 서럽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더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다.


언니가 투병 생활을 하며 하늘로 가기 얼마 전,
이미 위험한 상태에 놓여

병원에서 연명치료를 할 것인지 물었던 적이 있다.

우리는 당연히 동의했고, 기도에 삽관을 하며,

이제 남은 것은 의식 회복이란 말에

모두가 열심히 언니가 의식을 회복하길 기도했다.


하얀 진달래는 그 후 기적처럼 의식을 되찾은 언니가
병원을 산책하다 찍은 마지막 사진이었다.


그리고 언니는 그날
다시 그런 위험한 일이 생기면 연명치료 하지 말고
그냥 고이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너무 아팠다는 말과 함께.

그리고 우리는 그 뜻을 존중하였다.


언니가 아프기 시작한 봄부터 다음 해 봄까지,
생각지도 못한 이별들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돌이켜, 그 시절을 생각해 보면

내가 더 현명하게 더 잘 대처할 수 있는 일들이

분명 있었지만,
그땐 나는 지난가는 바람도 서럽기만 한

작고 시린 마음의 못난이라 보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


아픈 언니를 좀 더 안아주며 위로를 해 줄 수 있었던 밤,
불안해하는 조카들을 더 안심시키고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하루,
부모님께 더 믿음을 주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더 큰 마음으로 배려해 줄 수 있었던 기회가.

분명히 있었지만 당시 마음이 모나 동글지 못한 나는,

여기저기 상처만 주고 다녔었다.


하지만 그 부족하고 나약했던 선택들로 인해
그 후 여러 번 시행착오를 겪으며

결국 더 단단해질 수 있었다.

그래서 후회는 남지만,

고통과 이별이 가득했던 그 봄날들이.
원망스럽거나 미련이 남진 않는다.

이제는 그마저도 나를 한 뼘 더 자라게 한

쓸쓸한 봄이었음을 배웠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