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팠다.
아니
지금도 아프다.
어디가 다친 것도 아니고
눈에 띄게 아픈 것도 아니다.
배가 아플뿐이다.
배가 아파 먹지도 못했을 뿐이다.
이젠 먹는다.
예전처럼 먹을 수는 없지만
아직도 먹으면 배가 아프지만
그래도 먹을 수 있다.
배를 움켜잡고
허리가 꼬부랑 새우등이 된 채
누워있다.
감기 걸려 아픈 아이가
엄마 약이랑 물을 가져다 준다.
미안한 마음도
아픔에 밀려 눈물만 흐른다.
먹지 않아도 구토가 나오고
먹지 않아도 설사가 나온다.
이런 아픔
실로 오랜만이다.
한동안 오래
아팠던 적이 있다.
먹기만 하면 토하던
그 옛날이 있었다.
큰 병원 다 다녀도
병명조차 나오지 않던 시절
그 어떤 검사로도 병명을 알 수 없던
아픔의 시절이 있었다.
좋다는 곳 다 다니고
고쳐준다는 곳 찾아다녔던
그 옛날 고통의 시절이 있었다.
이젠 나았다고
이만하면 다행이라고
신나하며 살아간다.
이런 필이에게
실로 오랜만에 아픔이 찾아온다.
이번 아픔은
단순한 장염이 아니다.
아니
단순한 장염이더라도
필이에게는 단순한 장염이 아니다.
그 옛날의 아픔을
기억하게 해주는 아픔이다.
그 옛날의 고통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다시 되새기게 해주는 아픔이다.
그렇기에 눈물난다.
바람이 많이 불었다.
어젯밤
바람 소리가 이중구조 샤시문을 뚫고
아파트 안을 침범한다.
마음마저 얼어버릴 듯
춥다.
계속해서 울려대는
재난 경보
가까운 어딘가에 산불이 났단다.
대피 명령이다.
작년 이맘 때가 생각난다.
그을음이 하늘을 유영하듯 날아다니고
매캐한 냄새는 마스크를 뚫고
코를 찌르던 그때가.
마음이 잔뜩 움츠려든다.
춥던 마음이
이젠 무서움에 떤다.
밤이 어떻게 지났나.
새벽에 깨어나
어둠이 싫다는 듯 불을 다 켜버린다.
어둠은 물러난다.
아침이다.
일하러 가야 한다.
가장으로 살아가는 삶에
아프다고 쉬는 건 허락되지 않는다.
몸을 일으킨다.
아파트를 나선다.
출근길 눈부신 그야말로 눈부신
햇살이 따라온다.
해를 따라 가는 길
해가 따라 오는 길
필이는 눈물을 터트린다.
살아있음에 감사하다.
오늘 하루가 주어졌음에 감사하다.
아직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너무도 감사하다.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있다는 것
일하러 갈 수 있는 건강이 주어졌다는 것
모든 것이 감사하다.
이만큼만 아픈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 옛날에 비하면
그 옛날 그 고통에 비하면
지금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두 다리로 걸어다닐 수 있다는 것
두 눈으로 하늘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
햇살 가득 느낄 수 있다는 것
이 모든 것에 감사하다.
드라마 모래시계였던가?
사형장을 향해 가던 사형수가
작은 창으로 보인 하늘을 보고
느꼈을 자유, 갈망한 그 자유를
오늘 아침 필이는 느낀다.
난 자유하지 않은가.
자유다.
자유다.
이 얼마나 감사한가.
이렇게나 실컷 하늘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겐 자유가 있다는 이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가.
이번 아픔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낮아지고 낮아지고 더 낮아지는 나를
작고작고작은 존재인 나를
비워야 함을
버려야 함을
놓아야 함을
다시 깨닫는 나를
실컷 아프고 났더니
한 뼘 더 크려나 보다.
모든 것이 감사하다는 것을!
감사가 온몸을 적셔주는 이 축복을
누리며 오늘도 살아간다.
나는 살아있다.
필이는 살아있다.
이 사실만으로도 감사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오필리아처럼~
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