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덕체"가 아닌 "체덕지"인 이유
우리는 스스로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라고 배우지만, 사실 우리의 이성이 내리는 판단의 근거는 이성의 바깥에서 온다. 우리가 결정들을 내릴 때 사고의 흐름을 면밀하게 분석해보면, 중립적인 자세에서 하나씩 근거를 쌓아서 결론에 다다르는게 아니다. 매우 빠른 시간 동안 몇 가지 근거를 가지고 “이건 나쁜건가? 아님 좋은건가?”에 대한 막연한 감을 잡아 놓고, 그 것을 바탕으로 생각들을 얹어서 결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사고한다.
이는 우리의 먼 조상인 좌우 대칭 동물 (bilaterian) 의 생존 방식에 그 비밀이 있다. 지구의 탄생이 45억 년 전이고, 다세포 생물의 탄생은 10억 년 전이다. 처음 다세포 생물은 둥그렇게 생겼고 좌우 대칭성이 없었다. 좌우 대칭이 없다는 얘기는 앞 뒤가 없다는 얘기다. 앞 뒤가 없으니 의도를 가지고 움직일 필요가 없이 원시 바다에서 떠다니는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6억년 전에 좌우 대칭 동물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첫 좌우 대칭 동물은 원시 바다의 바닥을 기어 다니던 굼벵이 같은 벌레로 추정된다. 좌우가 있으니 앞 뒤가 있다. 앞 뒤가 있으니 먹을 것과 좋은 것을 앞에 배치하고, 배설물과 나쁜 것은 뒤로 배치한다. 정처없이 수 억년을 바다에 떠다니던 조상과 달리 앞으로 전진을 하면서 중요한 발전을 하는데, 바로 좋은 느낌이 들면 직진하고 나쁜 느낌이 들면 옆으로 방향을 튼다(steering)는 것이다. 이후 5억년 전에 등장한 척추 동물은 본인의 판단과 그 결과를 ‘학습’하기 시작했고, 2억 년 전에 등장한 포유류는 판단을 하기 전에 머리 속으로 판단과 결과를 예상 (simulation)을 하기 시작했다. 1500만 년 전에 등장한 영장류는 자신과 남을 분리하여 생각하기 시작하고, 10만 년 전에 인류가 드디어 언어를 통해 사고를 한다.
그러니 굼벵이의 후손인 우리는 언어로 사고하기 한참 전부터, 좋고 나쁨에 대한 판단부터 했던 것이다. 물건을 살 때, 이사를 결정할 때, 주식을 사고 팔지 결정할 때, 과연 본인이 철두철미하게 이성에 의해 합리적으로 판단하는지 잘 생각해보시라. 아마 알 수 없는 깊은 곳에서 좋은지 나쁜지에 대한 판단이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져 있고, 우리의 이성은 그 판단에 합리적인 근거를 대가며 그 판단이 맞는 이유를 설명을 하고 있을 거다. 다만 그 판단은 너무나 순식간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가 알아차리기 어렵다. 자연은 중요한 판단에서 실수를 하거나 늦게 답하는 생명체에게 죽음으로 답했기 때문에, 우리는 수억 년의 시간 동안 가능한 빠른 판단을 내리도록 훈련을 받아왔다. 또한 우리는 이 훈련을 언어가 등장하기 한참 전부터 받아왔기 때문에, 언어를 통한 사고로는 절대로 그 판단 과정을 추적할 수 없다.
고루한 과학 이야기 같지만, 이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엄청나게 중요하다. 지금도 우리 모두는 같은 방식으로 의사 결정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만날 때 첫 인상이 중요한 이유, 유튜브에서 섬네일이 중요한 이유, 병원에 들어서는 환자에게 데스크 직원의 첫 응대가 중요한 이유, 환자의 입장에서 처음 마주치는 의사의 눈 빛이 중요한 이유, 비용을 들여서라도 직원들의 사기를 긍정적으로 유지해야 하는 이유, 사업체의 외형을 키워 고객에게 긍정적인 첫 인상을 주기 위한 이유가 모두 여기에서 온다.
또한, ‘설득’이라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언어를 통한 설득은 생존을 위한 판단을 뛰어넘을 수 없다. 내 생각과 반대의 다른 이야기를 들으면 누구나 “내가 잘 못 생각했나?”라고 생각하기 전에, “내 생존을 위해 내가 내린 판단이 위협받는 상황이다!” 라는 본능적인 느낌이 먼저 든다. 그래서 어찌보면 타인의 생각을 바꾸는 방법은 타인의 생존에 유리한 동기를 제시하는 방법뿐이다. 남이 나와 다른 생각을 하고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싸울 이유가 없다. 애초에 나도 내 생각을 바꿀 수 없으며, 남의 생각은 말할 것도 없다.
좋은 판단을 하기 위해서, 그리고 남이 나에게 호의적인 판단을 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늘 좋은 컨디션을 유지해야 한다. 몸이 아프고 힘들면 부정적인 생각이 가득 차게 되고, 나쁜 판단에 내 이성을 더하여 의견을 굳히게 된다. 남도 나의 첫 인상에 이미 큰 결정을 마음속으로 하게 되고, 그 이후에는 내가 더 노력을 해도 그 결정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 중요한 순서대로라면 지덕체가 아니라, 체덕지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