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고문
기다림은
언제쯤 끝나냐고 묻는 질문이 아니라
끝이 있다는 전제부터 애써 믿어보는 행위
손에 쥔 것은 없고
증명할 것도 없는데
그래도 있을 것, 올 것, 도착할 것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오래된 기술
인내라는 이름의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으면
시간이 나를 지나는지
내가 시간을 견디는지
서로가 서로를 오해하기 시작한다
기다림은 곧 포기라고
움직이지 않는 사람에게 붙는 이름이라고
기다림은 현실을 버티기 위해
미래를 빌려오는 일이라고
누군가는 말을 해도
기다림이란
희망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희망에게 상처받는 일이다
희망고문이라는 단어가
잔인한 농담처럼 들리는 밤에도
이 기다림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단 하나
새벽 4시의 텅 빈 정류장
도착하지 않는 것들이
언젠가 도착할 수도 있다는
가혹한 확률 때문이다
기다림은
운명이 아니라 숙명이다.
그 빚을 갚기 위해
오늘도 나는 숨을 이어 붙이고
아물지 않는 마음을 접어
한 줌의 희망으로 만든다
기다린다는 것은
절망 속에서도
아직 아니다고 말해보는
가장 이성적인 자기기만이기에
내일이 나를 구원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오늘을 계속 소모하고
지친 몸을 일으켜
또 한 번 두드러지게 살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