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39도

2025년 5월 11일 일요일

by 곽예지나

am 6:09


어제의 바람과는 다르게 유림이는 아직도 열이 난다. 어제도 해열제를 먹고 나서 2시간 정도만 미열으로 떨어질까말까 하다가 다시 39도로 돌아갔다. 고열치고는 눈빛도 또렷하고 막 쳐지지 않아서 크게 마음 졸이지는 않았지만, 이틀 동안 먹은 게 별로 없으니 장기전으로 가면 체력이 떨어질 텐데. 오늘은 열의 기세가 좀 누그러지면 좋겠다.


남편이 어제 오전에 소아청소년과에 데리고 가긴 했지만, 해열제를 받기 위한 형식상의 방문이었다. 혹시 독감 검사를 할 수 있을까 기대해 봤으나 역시 시도할 엄두도 못 낸 것 같다. 의사 선생님께서 계속 고열에다가 오한이면 독감이니까 타미플루를 복용해야 한다고 하셨고, 유림이의 증상은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하지만 검사 없이 증상만으로 유림이에게 약을 먹일 수는 없다. 그냥 독한 감기일 수도 있고 코로나일 수도 있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5일 내내 유림이에게 타미플루를 먹일 자신도 없다. 유림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타미플루를 먹어봤던 게 린아랑 같이 A형 독감에 걸린 5살 때였다. 그때 똑같이 약을 먹은 린아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유림이는 그 주 내내 정말 난리가 났다. 안 그래도 이상한 애가 더 이상해졌다는 표현을 쓰면 유림이에게 너무 가혹하려나? 감각 추구가 더욱 심해지고, 하루 종일 짜증과 화를 내며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고, 요란하게 움직이다가 어디엔가 푹 처박히고 그랬었다.


자폐 아이들은 정상 발달 아이들보다 약물에 대한 반응이 더 예민한 것 같다. 개인의 이성으로 현재 자신의 상황을 납득할 논리적인 사고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러는 건지, 부모가 주는 정서적 안정감이 자신의 불안을 덮을 만큼의 신뢰를 주지 못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실제로 자폐의 뇌 신경체계에 더 혹독한 자극이 반영되는지? 구체적인 이유나 과학적 근거를 갖고 오라고 하면 그런 건 없다. 그저 엄마로서의 직감과 관찰의 누적, 문과 100% 적성자의 이과적 현상 해석일 뿐이니까.


열성 경련 이력이 있고 고난이도 간병 스킬이 필요한 대신 유림이는 평소 건강한 편이다. 한 2년 정도를 변비 때문에 쩔쩔매게 해서 그렇지 돌이 되기 전까지 열 한번 난 적 없고, 지금도 1년에 1~2번 아플까 말까 한 정도니까. 그래서 유림이 뇌의 최우선 목표는 자신의 건강 유지가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다. 또래들보다 키가 훨씬 크고, 상처도 빨리 아문다. 머리카락하고 손톱은 왜 이리 빨리 자라는지, 단백질을 먹으면 영양이 다 거기로만 가나? 그러니까 두뇌 성장으로 가야 할 영양분까지 싹 그러모아서 오로지 신체 컨디션의 유지로 사용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5시에 벌떡 일어나 화장실 갔다가 꽥꽥 소리를 지르던 유림이는 아빠 옆에 누워서 다시 잠이 들었다. 열이 나서 그런지 수시로 자다가 깬다. 푹 자고 열이 좀 더 내려서 밥을 잘 먹으면 좋겠는데. 원래 냉장고 문 열었다가 닫는 게 취미인 애가 근처에 얼씬도 안 하고 있다. 열 날 때는 안 먹는게 몸에 더 나은 걸 알고 있지만 뭔가 마음이 짠하다.


유림이랑 이틀 내내 같은 생활 리듬을 공유하고 있는 나는 아직까지는 그렇게 많이 피곤하지 않지만, 대신 정신력이 빠르게 소모되고 있다. 그래도 아직 주말이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어쨌든 감사할 일은 언제든지 있다. 가끔 눈앞이 캄캄하거나 뿌옇게 흐려져서 안 보일 때가 있을 뿐이지.


am 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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