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18일 수요일
am 5:53
일기를 쓸 때 제일 먼저 날짜를 쓰고, 그다음에 한 줄 띄워 일기를 쓰기 시작한 시간을 적는다. 그런데 오늘은 아무 생각 없이 1.이라고 먼저 적었다. 무슨 소리냐면, 학교에서 알림장을 써 줄 때 맨 위에 날짜를 적고 그 아래부터 1. 어쩌고 저쩌고 2. 저쩌고 어쩌고... 의 내용을 적는다. 그리고 방금 전에 일기를 쓰는 자아와 알림장을 쓰는 자아가 잠시 혼란을 일으킨 것이다. 화면에 떠 있는 1.이라는 숫자를 보고 ‘응? 내가 지금 뭘 쓴 거지?’ 하고 잠에서 덜 깬 정신으로 생각하다가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습관이라는 건 참 무서운 거다.
어제 수업이 끝나고 교원을 대상으로 한 성인지 감수성 연수가 있었다. 해마다 듣는 연수인데 솔직히 말해서 좀 껄끄럽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안 껄끄러운데, 같이 연수를 듣는 남자선생님들이 껄끄러우실 것 같아서 그게 껄끄럽다. 지금까지 진행되었던 연수 내용을 돌이켜 봤을 때 대부분의 경우 남자 가해자-여성 피해자의 사례를 설명할 때가 많은데, 내 성별 자체가 문제라고 논하는 자리에 있는 게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닐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작 이런 연수를 필수로 들어야 하는 당사자들은 이 자리에 없다는 게 가장 문제다! 올해는 과연 어떨지? 약간 경계하는 마음으로 연수에 참석했다.
당연히 강의식 연수로 진행될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소그룹으로 모여 역할극을 꾸미는 식으로 연수가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직접 연기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다들 약간 난색을 표했으나, 역시 다년간 역할극을 진행해 본 경험이 많은 선생님들이라서 모든 조들이 아주 멋지게 해냈다. 역할극의 주제는 “교직 생활동안 내가 직접 경험했거나 목격했던 성 관련 문제들”이었다. 그런데 발표하는 내용이 충격적이어서 충격인 게 아니라, 모든 사안이 너무 익숙하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예를 들어서 우리 조의 경우 8명 중에서 무려 7명이 학교 회식 자리에서 관리자의 불쾌한 신체 접촉을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 술에 얼큰하게 취해서 손을 잡거나, 어깨동무를 하거나, 허벅지 안 쪽을 쓰다듬는 식이다. 노래방에서 부루스를 추는 것 정도는 취중의 여흥에 속할 정도랄까? 나의 경우에도 위에서 서술한 그 모든 것을 경험했다. 하지만 한 번도 그 나쁜 손을 뿌리치거나, 화를 낼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그냥 마음속으로 ‘할아버지다, 이 사람은 그냥 할아버지다.’라고 주문을 외웠다. 내가 20대 초반이었던 때의 일이니 실제 할아버지 뻘이기도 했다.
참 웃긴 건, 다음날이 되어 맨 정신으로 만나면 그 관리자는 항상 정자세로 깍듯하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곤 했다. 마치 어제의 일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는 것처럼. 그걸로 자신의 부끄러움도 지울 수 있는 것처럼. 하지만 다음에 술을 마시면 어김없이 100%의 확률로 진상(이라는 표현은 너무 마일드하다고 생각되지만)이 되었다.
다행인 점은, 선생님들의 경험담이 대부분 과거의 일이라는 것이다. 요즘에는 회식 문화 자체가 많이 사라졌고(코로나19에게 유일하게 감사한 점), 혹시나 그런 자리가 있더라도 과거처럼 지나치게 술을 권하거나, 2차 3차까지 가는 것을 강요하는 일은 없다. 내 경험도 20여년 전에 있었던 일이고, 10년차까지도 살짝 애매한 상황이 있긴 했지만 최근에는 전무하다. 세상은 좀 더 좋은 쪽으로 발전하는 것이겠지? 그렇게 믿고 싶다.
+ 주제와 살짝 어긋난 곁다리
역할극에서 회식하는 모습을 연출할 때, “자, 시작!” 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다른 선생님들은 모두 젓가락질을 하더라. 나는 컵을 잡고 입에 들이붓는 연기를 했는데...
am 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