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흐른다. 파도에 대적하느라 지친 것인지, 바이올린의 절규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 작은 섬을 어떻게 알고 오셨습니까?"
"제 버킷리스트가 우리나라의 섬을 모두 가보는 것입니다. 이곳은 두 번째 온 것이고요! 이 섬에 사는 상괭이를 관찰하는 TV 프로그램을 보고 알게 됐죠. 상괭이라는 이름을 가진 녀석을 TV에서 보고 난 뒤 그 여운이 오랫동안 가시질 않더군요! 나도 저 녀석들처럼 늘 웃으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녀석들이 보고 싶어 왔었죠! 여러 곳의 섬을 가봤지만, 이곳처럼 호젓하고 예쁜 섬은 보지 못했어요. 괴테는 시칠리아가 모든 섬의 어머니라고 말했지만, 저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제가 시칠리아를 가보지 못해서가 아니고, 괴테가 이곳에 와보지 않고 한 말이기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재밌군요! 이곳이 아름답기는 하죠. 특히 산책 코스의 돌 덤불은 신비롭기만 하니까요! 그런데 상괭이 녀석들을 보는 시각이 저와는 사뭇 다르군요! 전 놈들을 볼 때마다 아이러니를 느낍니다. 새끼가 그물에 걸려 죽어도 죽은 새끼 옆에서 웃고 있거든요. 이율배반적이지 않습니까?"
"그렇군요! 모든 사람의 생각이 같을 수는 없겠죠…. “
"암튼 여성분 혼자 여행 다니는 건 쉽지는 않을 텐데 대단하군요!"
"말씀처럼 애로사항이 많습니다. 특히 타인들의 시선이 너무 부담스럽고요! 또한, 안전도 신경 써야 하고…. 해서 나름 철저하게 대비를 하고 다닙니다. 제 차에 가스총도 있습니다."
선영이 엄지와 검지로 총 모양을 만들어 쏘는 흉내를 내는데, 웃음 띤 얼굴이 행복해 보였다. 상괭이로부터 이혼의 상처를 위로받았던 섬 생연도, 또 한 번 다녀와야겠다는 고매한 결정이 행동으로 귀결되기까지는 많은 이유가 끼어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독하기에 길에서 위로를 받으려는 발버둥이기도 했지만, 거기에 상괭이 녀석들이 보고픈 것도 끼워 넣었고, 봄바람에 등을 떠밀린 탓이기도 했다. 무서워서, 시간이 없어서, 시선이 두려워서 등등…….
여행을 선뜻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소멸시키는 방법으로 여성을 벗고, 여자의 삶이 아닌 사람의 삶을 살아가니 그 무엇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사랑도 한낱 슬그머니 다가왔다가 어물쩍 사라지는 화무십일홍 같은 것이라며 외면했기에 사랑이란 쓸데없음이 선영 가슴에 개입할 수 없었다.
"그러시군요. 멋있게 사십니다…. “
"그런데 선생님, 제가 마음 놓고 여행 다닐 수 있는 가장 큰 백이 뭔지 아세요?"
"글쎄요…. 아! 무술을 하셨군요?. 남자 몇은 가볍게 제압할 수 있는, "
"어머! 어디를 봐서 제가 무술 한 여자로 보이세요? 이렇게 약골인데, "
미상불. 선영의 몸은 간드러진 파도에도 쉬 떠밀려 갈 것처럼 여리여리했다.
"그게 아니고 나이와 이 얼굴이 무기입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여자를 누가 뭘 어쩌겠어요? 그렇더군요! 이만큼 살다 보니 삶에 내성이 생긴 건지, 어떤 경천동지 할 일도 무념해지고 두려움이 없어지네요. 얼굴이 두꺼워졌다고 할까요? 암튼 여자보다 사람으로 거듭나고 보니 이렇게 사방팔방 돌아다닐 수 있게 되더군요."
"재밌는 분이십니다. 아름다운 분이 여자를 벗어던졌다니 보는 남자는 아쉽기만 합니다."
남자가 호탕하게 웃으며 농담을 건넨다. 오랜 시간 두 사람은 바다를 향해 앉아 있었다. 눅눅한 바람이 불어온다. 파랬던 바다도 검게 변해갔다.
"선생님, 오늘 대화도 즐거웠고 커피도 맛있었습니다. 저도 선생님처럼 이 섬에서 좋은 추억 가슴에 담았습니다. 좋은 작품 쓰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선생님, 너무 슬퍼 보여요! 추억은 그만 낚으시고 현재를 즐겨보세요! 그러다 보면 즐거움이 행복을 끌고 와 선생님 앞에 내동댕이칠 거예요. 혹시 모르니까 저 파도 거품 속을 잘 들여다보시고요. 아프로디테 같은 여신이 나올지도 모르니까, "
저만치 비구름이 몰려오는 게 소나기가 한소끔 내릴 것 같다. 선영이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차에 올라 창밖으로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참 아름다운 남자야! 저 남자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잠깐의 만남에도 강한 여운을 남기는 사람일까?
순식간에 들이닥친 소나기가 자동차 와이퍼를 방정맞게 한다.….
4
영민이 창가에 서서 바다를 바라본다. 작은 창문틀 안엔 별이 있고 늦은 노을도 남아있었으며, 듬성듬성 까만 물빛은 잔잔하게 움직이고 있다. 마치 벽에 걸린 고흐의 그림 같았다. 명화를 바라보는 영민의 눈은 형형했다. 상념에 젖어 공허함이 느껴진다. 밤이 깊어지자 바다는 온통 달빛 윤슬로 덮였다. 아내와 왔던 그 어느 날도 이랬다. 아내의 어깨를 감싼 빨간 숄이 잘 어울려 카메라 앞에 세웠던 그날이 생각났다.
영민은 윤슬을 바라보며 황홀해서 하던 그날의 아내를 부스럭거리며 꺼내 본다. 첫사랑으로 다가와 기억 제일 안쪽을 차지하고 있는 아내와의 추억이 쓰나미처럼 밀려온다. 주섬주섬 옷을 걸친 영민이 밤바다로 나선다. 썰물을 따라가지 못한 놈들을 제물로 취하려 함이다. 밤새도록 창문을 비집고 들어오는 달빛과 파도 소리, 게다가 아내의 환영까지 잠을 방해할 것 같기 때문이다.
역시 쉽사리 잠들지 못하고 하루의 끝자락에 눈을 붙였다. 두통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나 창문을 열었을 때는 하루가 한낮으로 치닫고 있었다. 영민은 혼미한 정신으로 주방으로 가 수도꼭지를 입에 물고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빈약한 주량을 넘긴 소주병들이 방바닥에 뒹굴고 있다. 그 모습이 평소보다 숙취 감을 더 느끼게 한 이유였고, 두통을 불러온 것일 거다. 아내의 콩나물국이 간절한 영민은 배를 부여잡고 라면 봉지를 부스럭거린다…. 바쁘게 젓가락을 놀리던 영민이 돌연 창문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아내의 술국에는 턱도 없이 모자라는 얼큰함이지만, 고춧가루를 듬뿍 넣은 라면에 만족하는 자신을 보며 점점 홀아비 모양이 갖추어져 가는 자신에게 비애를 느낀 헛웃음이다. 뱃속의 위안을 느낀 영민은 섬 산으로 향했다….
심장을 뚫고 나올 것 같은 들숨 날숨을 제압하며 자학하듯 산을 기어오른다. 다리는 너슬너슬한 풀 한 포기의 방해에도 멈칫거렸다.
"영민 씨! 조금만 더 힘을 내, 거의 다 올라왔어." 아내의 다그치는 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왔다.
"더 못 가겠어, 죽을 것 같아!"
"죽지 않아, 참아야 해!"
예전 아내의 손에 이끌려 올랐던 섬 산, 지금 아내의 잔소리와 핀잔은 없지만, 오장육부가 밖으로 쏟아지고 숨이 멎을 것 같지만 영민은 정상을 향한 쉼을 거부했다. 흐드러진 개망초가 영민 옆에서 팔랑거린다. 이름에 개 자가 들어가도 절대 천박하지 않은 꽃, 아내와 그랬던 것처럼 산 정상 개망초밭에 누웠다.
"난 너에게 부끄럽다. 화려한 날 부귀영화도 같이 누렸을 테고, 때론 모진 비바람에도 서로 의지하고 견뎠을 테고, 그러다 갈 때 되면 홀연히 같이 떠나는 너희에게, "
영민이 개망초 한 잎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린다. 산 아래 펼쳐진 바다를 내려다보며 아내 생각에 미소가 흘러나오는 영민이다. 그늘을 만들어 준 동백꽃 모갱이가 톡 부러져 영민 앞에 떨어졌다.
"여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 바로 이 동백이야! 늙어 추해진 모습 보여주기 싫음에 가장 아름다울 때 떠나는 동백, 이 모습을 나도 닮고 싶어."
떨어진 동백꽃을 손에 든 영민은 그날의 아내를 본다. 하지만 아내의 실체가 없는 명징한 현실에 허망함을 느끼는 영민이다. 자신의 말처럼 아름다울 때 떠나버린 아내. 동백의 낙화 앞에서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달밤 늑대의 하울링처럼 괴성을 지르며 찾아왔다. 외로움이 가져온 슬픔이 켜켜이 목구멍을 타고 나온다. 영민의 울음이 산자락 바람 소리마저 집어삼켰다. 태양이 높아지자 윤슬이 더욱 광활해졌다. 산에서 내려가는 영민의 걸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가슴속 시끄러움을 덜어낸 탓이리라. 속에 있는 괴물 같은 것, 가끔 광풍을 몰고 오는 그것들을 덜어내고 나니 속이 편해진 터였다.
제안의 슬픔을 떨쳐 버린 영민은 더 슬픔의 노예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언제 또 왈칵 흔들어 놓을는지,
"세상에 비극만 존재하지는 않아! 내 삶의 한 단면일 뿐이고 극복하고 있으니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거야!"
산에서 내려오니 바다가 초경을 한다….
5.
선영의 카페 앞에는 이리저리 흩날리는 꽃 보라가 는개비에 흠뻑 젖어 있다. 꽃을 뿌린 게 바람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 파리에게 자리를 내어줘야 함에도 가지를 붙잡고 있는 미련이 꽃을 추하게 만든다는 걸 보여주려는 교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꽃은 이파리로부터 버림받았지만, 다음 해를 위해 기꺼이 이파리의 양분이 되어 줄 것이고, 그리하면 가지는 또 꽃을 부른다는 자연의 섭리를 사람의 삶에 말하고자 했을 터이다. 이름다움도 추함도 영원할 수 없는 것. 아름다움에 자만하지 말고 추함을 부끄러워 말라는 목련의 가르침일 것이다.
선영이 바람을 데려와 꽃을 떨쳐내는 목련을 바라본다. 단아한 꽃을 추한 모습으로 만들어 버리고 떨어뜨려야 하는 나무도 슬펐음인지 부르르 떤다. 지고이네르바이즌이 카페 안을 가득 메웠다. 멍하니 꽃에 시선을 뺏겼던 선영은 계산대로 성큼성큼 걸어가 냉큼 사라사테를 쫓아냈다. 청명한 가을날 오전의 청승에 은근 짜증이 일었던 게다.
찻잔을 씻으며 선영이 픽 웃음 짓는다. 일주일 전 생연도에서 만났던 남자와 절규하는 지고 이네르바이즌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심술궂은 사월이 다시 계절을 흔들어댄다. 그 바람에 남아있던 목련 꽃마저 카페 유리창에 와글와글 다가와 부딪혀 내린다. 그때 테이블 위 핸드폰이 방정맞게 떨었다. 핸드폰을 들여다본 선영은 길게 한숨을 뱉었다. 세월 안쪽에서 한 사람의 얼굴이 자박자박 걸어 나왔기 때문이었다. 심연에 허우적거리던 추억이 수면 위로 떠 오른다. 설거지하다 말고 바깥을 보며 선영은 나직이 조근거렸다….
"김영민, 김영민 그 사람도 지고이네르바이즌을 무척 좋아했지, 목련도…."
이것들, 지고이네르바이젠, 목련, 그리고 그 사람 영민, 들리고 보이고 떠오르는 것들이 뭉텅이로 선영의 가슴을 흔들어대며 어쩔 줄 모르게 한다. 결국, 선영은 어쩔 수 없이 빛바랜 사진 속 영민과 눈을 맞춘다. 그때 나이 곱절의 세월이 흘렀어도 기억 안쪽에 남아있는 사람. 심장에 문신처럼 새겨진 사람,
계절 바람이 고양이처럼 어슬렁거리는 날이면 더 그 이름에 몸서리친다….
선영은 인터넷 문학 모임에 김영민이라는 사람의 가입 알림을 확인하곤 이내 도리질 첬다. 쏟아져 나오는 기억을 떨쳐 버리려는 것이었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선영은 빈 커피잔을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다른 이름이어야 한다는 걸 법으로 정한다면 어떨까, 쓸데없는 생각도 쓸 데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제 글에 피드백 주셔서 감사합니다. 쓸모없는 글만 쓰는 데 공감하고 읽어주시니 보람을 느끼는군요!"
목련도 가고 장미도 떠나고 계절의 풍요를 누리던 국화가 의기양양하게 왔다가 속절없이 이렇게 가는 건 간밤에 내린 무서리를 맞은 얼얼함 때문이리라. 선영이 창가에 서서 시들어가는 거리의 가을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낙엽들에 일장춘몽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살아서 고귀하면 무엇하나. 부귀영화도 덧없다. 언젠가 해골이 되어 먼지가 되리니, "
햄릿이 해골을 들고 중얼거렸던 것을 떠올리던 순간이었다.
김영민, 목련꽃 계절에 문학회에 가입하여 서리 내리는 계절이 올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포스팅하는 사람. 선영은 그의 에세이를 매일 정독했고 항상 댓글로 감사함을 표했다. 하루 중 제일 즐거운 시간이 그의 글을 읽을 때였다. 글에서 느껴지는 그 사람의 사는 모습이 자신과 닮은 꼴이었고, 지향하는 인생의 가치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댓글에 대한 감사함의 댓글을 본 선영은 아침의 고독에서 벗어나 흥얼거리며 청소기전원을 켰다. 기분이 한결 활기를 띤다. 밀대 걸레질을 하다 말고 사뿐사뿐 스텝을 밟는다.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누구나 빈손으로 와 소설 같은 한 편의 이야기......."
선영이 노래에 맞춰 사뿐사뿐 라인댄스를 춘다.
"그래, 운명을 위하여. 내 운명은 내가 만들어가는 거 야…. 과거에 발목 잡힌 미래는 희망이 없어."
출입문에 매달린 풍경이 앙증맞은 소리를 낸다. 선영은 웃으며 손님을 맞았다.
"피드백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문자를 시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통화하며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나 지금 강릉 여행 중인데 오지 않을래요?"
그 말이 통화 중 얼떨결에 나온 것 같다고 느낀 건 "오지 않을래요?"라는 말에 머쓱함이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뒤에 말을 하지 못하고 침묵하고 있었기에 그 말이 진심일까 허언일까 헷갈리기만 했다. 침묵을 틈타 선영은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이혼하고 우울하게 지내던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