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톡"
이른 아침, 어디선가 띠별 운세 알림을 보내준다.
마치 누군가가 태어난 해의 동물 모양으로 오늘의 길흉화복을 정리해두기라도 한 듯, "토끼띠는 애정운 상승", "쥐띠는 건강 유의" 같은 문장이 큼지막하게 적힌다.
나의 오늘 운세는
'매사에 조심하라. 칼날 위에 선 것처럼 한 순간도 방심하지 말아야 한다.'였다.
신경을 안 쓰는 사람인데도, 무언가 찝찝함이 남는다.
어릴 땐 그게 재미였고, 청년기엔 시시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이상하게 그런 것들이 마음에 남는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걸 봤다는 사실보다도 누가 내게 말하듯 던진 말이 마음에 꽂힌다.
"올해는 삼재래. 몸 조심해."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무언가 조심스러워진다.
나는 내 삶을 주체적으로 살고 있다고 믿지만,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하루가 흔들리고, 며칠을 찝찝하게 보내기도 한다.
자기실현적 예언이라는 개념이 있다.
긍정적인 말을 들으면 기대감에 부풀어 더 적극적으로 살고, 그게 실제 좋은 결과로 이어지면, 그 말이 마치 예언처럼 느껴진다는 심리 효과.
하지만 그 원리가 성립하려면, 시작이 나여야 한다. 내가 내게 기대를 걸고, 내가 내 삶을 변화시켜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왜, 타인의 한마디가 나의 운명을 예약해 버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나는 종교가 없다.
아니,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해왔지만, 그렇게 말하는 나조차도 어쩔 수 없이 감정의 흔들림 속에서 종종 종교적 언어에 손을 뻗는다.
무속, 운세, 감, 기도. 다 거기서 거기다 싶다가도, 그날따라 기분이 쎄하면 침을 퉤퉤 뱉고, 두 손을 깍지 끼고 무언가로부터 나를 지켜달라고 조용히 빈다.
신은 없다고 말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누군가의 보호를 바란다.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신에게 기대어왔다. 무속이든 불교든, 기독교든 간에. 그 신들은 때로는 도깨비처럼 장난을 치기도 하고, 때로는 죄를 용서하는 구세주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그 신들은 모두 "기다리는 존재"였다. 우리가 비는 말을 들을 것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하는 존재. 바꾸어 말하면, 신은 언제나 감정의 언어로 호출되었다. 우리는 철학자가 되기 전에, 아이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신을 불렀다.
나는 그런 구조를 부정하고 싶었다. 인간은 생각할 수 있는 존재이고, 내 삶은 내가 결정한다는 것을 철학적으로 증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닫는다. 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아무리 이성적으로 삶을 살아도, 감정의 영역에서 인간은 늘 무언가에 기대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는 신의 형벌을 받는 인간의 이야기다. 바위가 굴러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다시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는, 신을 두려워하지도, 신의 존재를 반박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 형벌을 인식하고, 그 형벌 안에서 자신의 의미를 찾는다. 신을 이긴 게 아니라, 신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데 성공한 인간.
그런 시지프처럼 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자주 흔들린다. 조심하라는 말에 괜히 움츠러들고,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는 말에는 괜히 들뜨기도 한다.
무신론자의 삶은 완강한 논리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회의하고, 불안을 스스로 다독이는 방식으로 유지된다. 그래서 나는 가끔 기도처럼 혼잣말을 한다.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라는 말이 아니라, 나를 붙들어주는 문장을 만들기 위해서. 나는 누군가의 말이 아닌, 내가 만든 문장에 기대어 하루를 산다.
신을 찾지 않아도, 나의 마음은 여전히 무언가에게 안부를 묻고 있다.
이 글도 그런 기도 중 하나다. 신이 없다고 말하는 나조차도, 언젠가의 나를 구해줄 언어를 만들어야 하기에.
나는 오늘도 바위를 민다.
누군가의 말이 아닌, 내 결심으로 시작된 하루를 위해서. 신은 없지만, 나의 기도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