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어떤 정치적 입장이나 진영을 위한 글이 아닙니다. 단지 감정과 삶, 그리고 정체성을 떳떳하게 되돌아보려는 개인의 기록입니다.
애국심을 논하지만, 강요하지 않습니다.
민족주의를 다루지만, 선을 긋지 않습니다.
나는 그저 내 감정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묻고 싶었습니다.
김치를 자랑스러워해야 한다는 말 앞에서, 나는 늘 멈칫했다.
그건 맛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누군가는 그것을
"세계가 부러워하는 우리의 자랑"이라며 말했고,
나는 도무지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았다.
어릴 적 학교에서 배운 김치는 공동체의 기호였다.
긍지로 삼으라고 배웠고, 감사하라고도 배웠다.
하지만 식탁 위의 김치는 종종 너무 맵거나 시었다.
입이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멀게 느껴졌다.
그럴듯한 말들이 오갈수록, 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고춧가루로 물든 김치에서 '민족의 얼'을 느끼라는 말은 혀끝이 아닌 머리끝을 맴돌았다.
그리고 그 어색함은, 내 잘못 같지 않았다.
뒤늦게서야 알게 되었다.
우리가 먹는 빨간 김치는 고작 백 년 남짓한 역사라는 것을.
우장춘 박사의 품종 개량 없이는 지금의 배추도, 고추도, 그 강렬한 붉은색도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고유한 유산'이라 부르기에는 그 탄생이 너무 근대적이고, 그 기원은 지나치게 외래적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김치를 두고 "중국이 베꼈다"며 분노한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김치, 정말 네 거냐고.
우리가 그것을 만든 건가, 아니면 그것이 우리를 만들었나.
나는 애국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중국이 김치를 자기네 것이라 우기고, 일본이 독도를 자기 땅이라 주장할 때면,
분노가 치밀고, 속이 뒤집힌다.
그 감정은 단순한 적대감이 아니라, 내가 이 사회에 연결되어 있다는 실감이기도 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한국인으로서 이 뻔뻔함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고민하게 된다.
이 나라에 속한 사람으로서, 단순한 감정 표출로 끝나지 않고, 내 방식대로 응답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더 묻게 된다.
'고유한 유산'이란 무엇인가.
그 말은 단지 방어적 구호인가, 아니면 내 삶과 맞닿은 어떤 실감인가.
다만 애국심을 고정된 형태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깃발을 흔들며 감탄을 외치는 대신, 그 감정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먼저 묻고 싶다.
애국은 명사가 아니라,
내 삶의 태도여야 한다고 믿는다.
불국사 석가탑을 처음 마주했을 때도 그랬다.
돌은 오래되었고, 아름다웠고, 정교했다.
하지만 울림은 없었다.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유산인지, 어떤 수학적 비례로 세워졌는지를 설명하는 안내문은 있었지만,
내가 왜 그 앞에서 감탄해야 하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기억에 남은 건 석탑이 아니라, 그 앞에서 감탄하는 표정을 애써 짓는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나는 아직도 생각한다.
울림은 지시받는 게 아니다.
어떤 날은, 말보다 오래 머무르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날은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바라볼 뿐이다.
감정은 때때로 설명보다 오래 머문다.
그때 문득, 윤동주가 떠올랐다.
모두가 위대한 시인이라 부르는 사람.
누구나 눈물 흘리며 읽는 '서시'의 주인공.
하지만 나는 윤동주 앞에서 무릎 꿇기보다,
한 발짝 물러나 이렇게 묻고 싶다.
그는 원래부터 숭고한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시대가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일까?
만약 그가 평화로운 시절에 태어났다면, 여전히 그렇게 맑고 고요한 시를 쓸 수 있었을까?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는 문장은, 죽음이 늘 곁에 있었기에 가능했던 말이 아니었을까?
윤동주는 위대했다.
하지만 그 위대함은 그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다.
시대가 준 고통과,
그 고통을 시로 바꾸기로 한 그의 결심이 함께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결심이야말로, 그의 고유한 선택이었다.
많은 이들이 같은 시대를 살았다.
어떤 이는 침묵했고,
어떤 이는 분노했고,
그 가운데 그는 시를 택했다.
그 작은 고집이 곧 그의 자유였고, 그 자유가 그의 고유함이었다.
오늘의 한국은 태극기로 김치를 감싸는 나라다.
음식조차 정체성의 방어선처럼 사용되는 시대다.
자주, 너무 자주 긍지를 말하고, 쉽게 '고유한 유산'을 주장한다.
모두가 감동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감동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믿는다.
대신, 조금 더 정직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조금 덜 부끄러운 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그것이 나의 애국이다.
김치 위에 태극기가 얹히는 순간,
그것은 더는 반찬이 아니라, 누군가의 감정을 증명하는 도구가 된다.
나는 그 도구에서 물러나, 그저 김치로 먹고 싶다.
맵고, 짜고, 어떤 날은 시고, 어떤 날은 유난히 맛있는
그냥 그런 김치.
나는 감동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감정이 내 안에서 천천히 자라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누가 만들어 놓은 자부심이 아니라, 내 삶의 무게로부터 길어 올린 감정.
나에게 애국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